안녕하십니까.
총무 永樂입니다.
나라가 내우외환에 처해 있습니다.
안으로는 위도와 새만금으로 얼룩진 전북에서부터
참여정부의 기치가 통째로 허물어져 가고 있고,
밖으로는 서울이 손 놓고 있는 사이
베이징과 워싱턴의 손바닥 위에서 평양의 운명이 거래되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린 나라의 정치를 고뇌하게 됩니다.
어떻게 해야 오늘의 난국을 뚫고 나아가
장래 이 나라를 반석에 올려놓을 것인가 잠을 설치게 됩니다.
편가르기로 개혁혐오감을 더해가는 뺄셈의 정치가 아닌,
좌우를 망라해 국론을 주도하는 통합의 정치를 갈망합니다.
평양의 안위를 민족의 안위보다 우선시하는 공멸의 핵게임이 아닌,
비핵개방의 연착륙을 유도해 우리가 한반도문제를 주도하는
'통일의 현실주의 정치'를 갈망합니다.
하여 그 일환으로 헌정사기행을 떠납니다.
격동의 현대사, 그 굴곡의 틈새에서 '통합의 민족주의' 노선으로
현실 정치를 주도하여 헌정사의 사표로 우뚝 솟은 세 분의 선열을
추념하며, 오늘 정치적 현실의 타개를 위한 지혜와 장래의 통일
민족주의 정치세력의 발아를 위한, 작은 발걸음을 하고자 합니다.
해방한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을 불령선인 1호 몽양 여운형,
이승만을 궁지로 몬 평화통일의 대통령 후보 죽산 조봉암,
그리고 박정희의 천적이었던 재야 대통령 장준하...
힘든 고비마다 님들의 생존을 꿈꾸기도 하거니와
오히려 님들을 이어 양김씨 이후 정치공황에 빠진 한국 헌정사의
새로운 장을 열기 위해 미력을 다하겠다는 각오로,
헌정사기행에 함께 하기를 당부 드립니다.
작년 1차 헌정사기행처럼 8월29일 국치일에 즈음한
8월24일(일) 당일 일정으로 떠납니다.
추모가 아닌 계승과 설계를 모색하는 자리입니다.
작년에 한 번 다녀갔다고 그걸로 끝이라 생각지 마시길 바랍니다.
민족문제연구소 청년회(cafe.daum.net/coreapeninsula)와
코리아 비전포럼 일굼(www.ilgum.net)이 공동주최합니다.
많은 성원과 적극적인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만반의 준비를 위해 미리 신청하시길 기대하겠습니다.
자료집>
http://www.gslove.or.kr/bbs/view.php?id=freeboard&page=4&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5
출처-> http://coree.pe.kr
참고 글>
배반의 역사를 찾아서 / 조 민 (통일연구원)
전쟁과 혁명, 그리고 이념 투쟁의 광란의 시대로 점철되었던 20세기는 역사의 지평 저 너머로 사라졌다. 그와 함께 '그땅, 그날'을 향한 꿈도 신념도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린 지금, 우리는 무뇌(無腦)의 회색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21세기 한민족의 민족시간은 아직도 20세기의 시각에 멈춰있다. 민족분단, 증오와 대결, 불화와 균열, 그리고 배반의 역사에 짓눌린 분노가 사그라들지 않는 한, 이 '비극적 소극'(笑劇 tragic farce)의 시대는 막을 내리지 않을 것이다.
한국현대사는 광복세력의 좌절 속에 건국세력의 승리로 시작되었다. 민중민주 세력의 배제와 억압 속에 근대화 세력의 축배소리가 드높았다. 반외세 통일지향적 민족주의의 패퇴 속에 외세의존적 반민족적 세력이 활개쳤다. 말하자면 광복, 민중민주, 통일지향적 민족주의세력의 수난과 외면 속에 건국과 근대화 세력의 역할과 의의는 크게 부각되어왔다.
몽양 여운형(1886.4.22∼1947.7.19 경기도 양평)은 일제 식민지 말기 칠흑과 같은 어둠의 시대에 해방의 빛을 가리키면서 건국을 준비했다. 그러나 해방과 동시에 조직한 건국준비위원회는 해방공간의 혼돈 속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했고, 미군정은 그의 건국 의지를 외면했다.
그후 몽양은 미국과 소련의 조종에 의해 남북한에서 각각 두 개의 분단국가가 수립되어 가는 역류에 맞서 최초의 좌우합작을 시도했다. 김규식과 좌우합작위원회를 구성하고, 남북한을 수차례 왕래하면서 김일성과 남북협상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미·소 대결의 각축장이자 아시아 냉전의 초점이었던 한반도에서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은 당시 국제정세의 객체에 불과한 약소 민족 지도자의 신념과 역량을 초월하는 문제였다.
죽산 조봉암(1899.9.25∼1959.7.31 경기도 강화)은 민족과 혁신정치의 이상에 그의 전생을 바쳤다. 항일(抗日)은 한때 그를 사회주의자로 만들었으나, 일찍이 강대국 소련의 독단과 전횡은 그에게 이데올로기에 앞서는 민족의 존재 가치를 일깨웠다.
해방공간에서 죽산은 민족혁명가에서 단정참여를 통한 '정치적 현실'의 길을 택했다. 그는 극우와 극좌를 배제한 중간파세력이 중심이 되는 타협노선의 중도파 기치를 내걸었고, 토지개혁을 추진하여 건국의 초석을 다졌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모든 이념적 논쟁이 종식되고 중도파의 입지가 원천적으로 봉쇄당한 가운데, 죽산의 반독재투쟁과 대중적 지지는 이승만 정권의 기반을 위협하였다.
죽산은 혁신정치의 이념과 진보당 결성으로 '피해대중'의 열망을 담아내고자 했으며, 그의 '평화통일론'은 북진통일의 허구를 꿰뚫고 강고한 냉전체제의 한 축을 흔들었다. 그러나 아직 새벽이 밝아오지 않았던가? 그의 중도파적 정치노선과 남북한 평화통일론은 냉전체제의 짙은 암운이 거두어질 때를 기다려야만 했다.
장준하(1918.8.27∼1975.8.17 평북 의주)는 한국현대사에서 반독재 민주주의, '반(反)유신' 투쟁의 한가운데 우뚝 서있는 자유민주주의의 신봉자였다. 해방과 건국과정에서 그는 우익민족주의의 길을 걸었다. 일제 말기 중원에서의 학병을 탈출한 마지막 세대의 저항적 민족주의자였던 그의 역정에 따른 자연스런 정치노선이었다.
그러나 장준하는 근대화 논리에 함몰되었던 소박한 반공주의·반북주의로부터 통일민족주의자로 되살아나면서 민주와 함께 질식당했던 민족 통일의 열정에 불을 지폈다. 그는 또한 통일의 주체로서 '민중'을 발견했다. 평화적 민족통일운동의 선구로서 큰 족적을 남겼다.
과거를 잊는 것은 배반을 의미한다. 외세와 결탁한 권력정치의 무대에서 이긴 승자의 기록만이 역사라면 우리에게 어떤 미래가 있는가?
이제 우리는 세 분의 영령(英靈) 앞에 감히 선다. 누가 이 배반의 역사를 바로잡겠는가!
총무 永樂입니다.
나라가 내우외환에 처해 있습니다.
안으로는 위도와 새만금으로 얼룩진 전북에서부터
참여정부의 기치가 통째로 허물어져 가고 있고,
밖으로는 서울이 손 놓고 있는 사이
베이징과 워싱턴의 손바닥 위에서 평양의 운명이 거래되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린 나라의 정치를 고뇌하게 됩니다.
어떻게 해야 오늘의 난국을 뚫고 나아가
장래 이 나라를 반석에 올려놓을 것인가 잠을 설치게 됩니다.
편가르기로 개혁혐오감을 더해가는 뺄셈의 정치가 아닌,
좌우를 망라해 국론을 주도하는 통합의 정치를 갈망합니다.
평양의 안위를 민족의 안위보다 우선시하는 공멸의 핵게임이 아닌,
비핵개방의 연착륙을 유도해 우리가 한반도문제를 주도하는
'통일의 현실주의 정치'를 갈망합니다.
하여 그 일환으로 헌정사기행을 떠납니다.
격동의 현대사, 그 굴곡의 틈새에서 '통합의 민족주의' 노선으로
현실 정치를 주도하여 헌정사의 사표로 우뚝 솟은 세 분의 선열을
추념하며, 오늘 정치적 현실의 타개를 위한 지혜와 장래의 통일
민족주의 정치세력의 발아를 위한, 작은 발걸음을 하고자 합니다.
해방한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을 불령선인 1호 몽양 여운형,
이승만을 궁지로 몬 평화통일의 대통령 후보 죽산 조봉암,
그리고 박정희의 천적이었던 재야 대통령 장준하...
힘든 고비마다 님들의 생존을 꿈꾸기도 하거니와
오히려 님들을 이어 양김씨 이후 정치공황에 빠진 한국 헌정사의
새로운 장을 열기 위해 미력을 다하겠다는 각오로,
헌정사기행에 함께 하기를 당부 드립니다.
작년 1차 헌정사기행처럼 8월29일 국치일에 즈음한
8월24일(일) 당일 일정으로 떠납니다.
추모가 아닌 계승과 설계를 모색하는 자리입니다.
작년에 한 번 다녀갔다고 그걸로 끝이라 생각지 마시길 바랍니다.
민족문제연구소 청년회(cafe.daum.net/coreapeninsula)와
코리아 비전포럼 일굼(www.ilgum.net)이 공동주최합니다.
많은 성원과 적극적인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만반의 준비를 위해 미리 신청하시길 기대하겠습니다.
자료집>
http://www.gslove.or.kr/bbs/view.php?id=freeboard&page=4&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5
출처-> http://coree.pe.kr
참고 글>
배반의 역사를 찾아서 / 조 민 (통일연구원)
전쟁과 혁명, 그리고 이념 투쟁의 광란의 시대로 점철되었던 20세기는 역사의 지평 저 너머로 사라졌다. 그와 함께 '그땅, 그날'을 향한 꿈도 신념도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린 지금, 우리는 무뇌(無腦)의 회색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21세기 한민족의 민족시간은 아직도 20세기의 시각에 멈춰있다. 민족분단, 증오와 대결, 불화와 균열, 그리고 배반의 역사에 짓눌린 분노가 사그라들지 않는 한, 이 '비극적 소극'(笑劇 tragic farce)의 시대는 막을 내리지 않을 것이다.
한국현대사는 광복세력의 좌절 속에 건국세력의 승리로 시작되었다. 민중민주 세력의 배제와 억압 속에 근대화 세력의 축배소리가 드높았다. 반외세 통일지향적 민족주의의 패퇴 속에 외세의존적 반민족적 세력이 활개쳤다. 말하자면 광복, 민중민주, 통일지향적 민족주의세력의 수난과 외면 속에 건국과 근대화 세력의 역할과 의의는 크게 부각되어왔다.
몽양 여운형(1886.4.22∼1947.7.19 경기도 양평)은 일제 식민지 말기 칠흑과 같은 어둠의 시대에 해방의 빛을 가리키면서 건국을 준비했다. 그러나 해방과 동시에 조직한 건국준비위원회는 해방공간의 혼돈 속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했고, 미군정은 그의 건국 의지를 외면했다.
그후 몽양은 미국과 소련의 조종에 의해 남북한에서 각각 두 개의 분단국가가 수립되어 가는 역류에 맞서 최초의 좌우합작을 시도했다. 김규식과 좌우합작위원회를 구성하고, 남북한을 수차례 왕래하면서 김일성과 남북협상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미·소 대결의 각축장이자 아시아 냉전의 초점이었던 한반도에서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은 당시 국제정세의 객체에 불과한 약소 민족 지도자의 신념과 역량을 초월하는 문제였다.
죽산 조봉암(1899.9.25∼1959.7.31 경기도 강화)은 민족과 혁신정치의 이상에 그의 전생을 바쳤다. 항일(抗日)은 한때 그를 사회주의자로 만들었으나, 일찍이 강대국 소련의 독단과 전횡은 그에게 이데올로기에 앞서는 민족의 존재 가치를 일깨웠다.
해방공간에서 죽산은 민족혁명가에서 단정참여를 통한 '정치적 현실'의 길을 택했다. 그는 극우와 극좌를 배제한 중간파세력이 중심이 되는 타협노선의 중도파 기치를 내걸었고, 토지개혁을 추진하여 건국의 초석을 다졌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모든 이념적 논쟁이 종식되고 중도파의 입지가 원천적으로 봉쇄당한 가운데, 죽산의 반독재투쟁과 대중적 지지는 이승만 정권의 기반을 위협하였다.
죽산은 혁신정치의 이념과 진보당 결성으로 '피해대중'의 열망을 담아내고자 했으며, 그의 '평화통일론'은 북진통일의 허구를 꿰뚫고 강고한 냉전체제의 한 축을 흔들었다. 그러나 아직 새벽이 밝아오지 않았던가? 그의 중도파적 정치노선과 남북한 평화통일론은 냉전체제의 짙은 암운이 거두어질 때를 기다려야만 했다.
장준하(1918.8.27∼1975.8.17 평북 의주)는 한국현대사에서 반독재 민주주의, '반(反)유신' 투쟁의 한가운데 우뚝 서있는 자유민주주의의 신봉자였다. 해방과 건국과정에서 그는 우익민족주의의 길을 걸었다. 일제 말기 중원에서의 학병을 탈출한 마지막 세대의 저항적 민족주의자였던 그의 역정에 따른 자연스런 정치노선이었다.
그러나 장준하는 근대화 논리에 함몰되었던 소박한 반공주의·반북주의로부터 통일민족주의자로 되살아나면서 민주와 함께 질식당했던 민족 통일의 열정에 불을 지폈다. 그는 또한 통일의 주체로서 '민중'을 발견했다. 평화적 민족통일운동의 선구로서 큰 족적을 남겼다.
과거를 잊는 것은 배반을 의미한다. 외세와 결탁한 권력정치의 무대에서 이긴 승자의 기록만이 역사라면 우리에게 어떤 미래가 있는가?
이제 우리는 세 분의 영령(英靈) 앞에 감히 선다. 누가 이 배반의 역사를 바로잡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