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나] 분단 극복의 법적 과제 : 독일의 경험을 중심으로

by KG posted May 25, 2006


발표 : Dr. Otto Depenheuer(독일 쾰른대학 교수, 법학)
사회 : 윤여진(코리아글로브 운영위원, 언론인권센터 사무처장)
토론 : 윤현식(민주노동당 법무부장, 건국대 법대 강사)       
        강성룡(코리아글로브 집행위원장)
일시 : 2006년 5월 19일(금) 오전 10시장소 : 프레스센터 19층 목련실
주최 : 코리아글로브 · 함께하는시민행동
후원 : 주한 콘라드아데나워재단


[편집자 주] 코리아글로브는 독일 쾰른대학 법대 교수인 오토 데펜호이어 법학박사를 모시고 독일의 통일과정과 이후 16년 동안 진행된 통합의 경험을 나눌 수 있는 자리를 만들었다.

남북교류와 경제협력이 활발해지면서 한반도에서도 통일방안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물론 북핵을 포함한 북한문제의 해결이 눈앞의 과제이지만 다양한 가능성에 대한 모색과 검토는 제도로서의 통일을 포함해 진정한 민족통합을 앞당기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이다.

사전발표와 토론과정에서 데펜호이어 교수는 어떤 시나리오도 현실로 닥친 독일의 통일을 맞추지 못했다면서, 한반도에서의 통일 역시 준비되지 못한 가운데 불쑥 실현될 수 있음을 누누이 강조했다. 또 법적, 경제적, 정신적 통일 가운데 가장 쉬운 것이 법적인 문제이고 가 장 어려운 것이 경제적인 통일이라고 설명하면서 정신적 통일은 세대를 뛰어넘는 긴 장정이라고 말했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1990년 10월 3일 통일독일이 탄생할 때까지 11개월 동안의 숱한 고비를 비교적 자세히 술회한 데펜호이어 교수는 당시 전격적으로 단행되었던 화폐와 경제통합이야말로 상황을 돌이킬 수 없도록 쐐기를 박는 행동이었다고 평가했다. 동구권의 붕괴라는 급격한 국제정치 상황에서 통일을 향한 과감한 결단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준비되지 못한 통일이었지만 1990년 당시의 판단과 노력은 역사적으로 정당한 것이었다고 평가했다.

한반도 통일과 관련해서 데펜호이어 교수는 통일이 되었을 때 오히려 북한의 주민들이 더욱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다면서, 사회주의 경제가 붕괴했을 때 아무런 훈련도 받지 못한 주민들이 갑자기 실업상태에 빠지는 상황이 오히려 위험요인이 될 수 있다면서 철저하고 장기적인 준비과정을 주문했다.

오찬과 더불어 3시간 동안 진행된 이날 세미나에서 데펜호이어 교수는 16년전 독일의 통일이 준비되고 예상되지 못했음을 계속 강조했다. 그러나 11개월 동안 빠르게 진행된 통일과정을 살펴보면 오히려 서독의 정치, 경제, 사회 각 분야에 걸쳐 오랫동안 축적된 논의와 준비가 긴박한 상황에서 빠른 판단과 흔들림없는 추진력의 토대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어느 날 부지불식간에 찾아올 한반도에서의 통일을 다시 되돌릴 수 없도록, 또 불안과 혼란을 잠재우고 진정한 통합으로 순항할 수 있도록 순발력있게 이끌어갈 실력과 준비가 어느 정도 되어있는지 우리 스스로 되물어야 하지 않을까.

이날 세미나는 주한 콘라드아데나워재단의 후원으로 함께하는 시민행동과 함께 주최했다.




[발제 요지]

개인적으로 한국은 물론, 독일의 통일과정에서도 기여한 바가 없다. 솔직히 그렇다. 독일에서의 통일은 어느날 갑자기 닥쳐왔다. 독일통일을 위한 시나리오는 많았지만 최소한 독일에서는 현실로 다가온 통일을 맞추지 못했다. 한국에서도 많은 시나리오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시 맞추지는 못할 것이다.

어느덧 16년 전의 일이지만 독일의 통일 모습을 보면서, 또 이후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많은 한국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낙관론에 제동이 걸렸을 것이다.

독일에 있어서 통일은 어려운 것이었고 현재도 그렇다. 그러나 1989년의 상황은 다른 것을 선택할 수 있었던 상황이 아니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그때의 선택이 올바른 것은 맞다. 그리고 한국 역시 어려움에 직면할 것이다.

독일통일을 위한 시나리오는 많았지만
최소한 독일에서는 현실로 다가온 통일을 맞추지 못했다.


미래의 어느날, 통일이 오면 법적, 경제적, 정신적 측면의 3가지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중에 법적인 문제가 오히려 제일 간단한 문제다. 경제적인 문제는 국민들이 가장 많이 체감하는 문제이고, 정신적 문화적인 문제를 느끼고 해결해 가는 데는 아마도 한 세대 이상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분단된 국가에서의 차이. 남북은 독일에서의 경우보다 오히려 클 것이다. 반세기 이상 분단되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커질 것이다. 특히 북한 사람들은 정치적, 일반적으로 그 수준을 가늠하기가 어렵다. 때문에 오히려 남한보다 북한 사람들이 더 커다란 혼란을 겪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한반도통일에 있어서 큰 과제가 될 것이다.

경제적인 문제는 통일이 눈앞에 다가 왔음에도 서독으로서는 동독의 경제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동독의 경제가 동구권에서는 상위 수준이라고 알려졌는데, 사실은 동독의 선전에 착각했던 것이다. 실제로 동독의 경제상황은 최악이었고 경쟁력 역시 전무한 상태였다. 결국 경제개혁이 필요했고 엄청난 돈이 들어갔다. 남북의 통일과정에서 북한경제와 관련, 동독처럼 큰 돈이 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1989년 전환기에 서독은 준비가 없었다. 소련 고르바초프 개혁개방 노선의 영향을 받았지만 소련이 해체될 것이라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 동독 역시 마찬가지다. 정치적으로 소련에서 동독의 체제를 보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독일의 통일은 가능했다. 하지만 북한은 다르다. 이미 소련이 무너졌고 중국의 경제적 지원은 있겠지만 어느정도의 자립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동독의 경우와는 다른 상황이다.  

당시 동독의 주민들은 소련과 동독지도자들이 체제를 지탱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시민의 시위가 이어졌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위대에 대한 발포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1989년 11월 9일 시위는 정점에 달했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직접 TV를 통해 보셨겠지만 정말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리고 10일 정도는 소강상태가 있었다. 독일의 지도자들은 이 갑작스런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노력했고 헬무트 콜 수상은 10개 조항을 발표한다. 국가연합 단계를 거쳐 10년 정도 후에 완전한 통일을 이루겠다는 내용이었다.

실제로 눈앞에 닥친 문제는 동독주민들이 물밀듯이 서독으로 밀려들어오는 것이었다. 이미 동독주민들은 서독의 TV를 시청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독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서독으로 가면 잘 살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국경을 넘었던 것이다.

하루에 수천, 수만 명의 이탈행렬이 이어졌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하나의 컨셉을 만들어서 동독에 남아있어도 먹고사는 문제와 자유가 가능하다는 확신을 만들어주는 것이 필요했다.

결국 1989년 12월 콜 수상이 통일방안을 언급하면서 독일통일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당시 독일을 둘러싸고 있는 소련 고르바초프의 추진력에 대한 의문과 더불어 2차대전 전승국 사이에 입장차이가 있었다. 동독 지역에서 어떤 쿠데타나 정치적인 격변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시간적이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공로로 인정받는 일들이 행정부를 통해 진행되었다. 1990년 1~2월에는 국제법상의 협상이 진행되었다. 10월 3일 통일이 될 때까지 화폐와 경제 사회적 조약들이 체결되었다. 고속영사기를 돌리듯이 국제정치도 빠르게 돌아갔다.  

정치적으로 현재의 상황을 돌이킬 수 없도록 쐐기를 박는 행동이 필요했다.
화폐와 경제통합이 그것이었다.


내부적으로는 동독의 탈출러시에 대해서 동독인들에게 전망을 제시함으로써 진정시켰다. 당시로써는 국경폐쇄라는 카드도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서독에서는 동독인들의 시위 구호에 귀를 기울였다. 구호는 ‘서독의 마르크가 우리에게 오지 않으면, 우리가 서독으로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동독의 경제개혁을 압박하는 구호였다.

경제적 통일에 있어서 엄청난 비용이 들었다. 사실 콜 수상은 동독의 경제 수준이 높기 때문에 통일비용을 쌈짓돈 수준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이 아니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현재의 상황을 돌이킬 수 없도록 쐐기를 박는 행동이 필요했다. 화폐와 경제통합이 그것이었다.

동독에서도 마르크화를 쓰고 있었는데 서독 마르크화와 1:1 교환을 선택한 것이었다. 서독에게 엄청난 경제적 부담을 줄 수 있는 획기적이지만 당시로서는 최선의 조치였다. 만약 교환비율에 차이가 있었다면 통일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결국 동독의 임금과 보험 등 모든 비용을 서독이 부담하므로써 동독의 경제는 완전히 붕괴했다. 동독의 자산과 부채, 손실을 서독이 떠맡았다. 물론 서독 납세자에게 부담은 돌아갔다. 그리고 동독경제 청산을 위한 신탁청을 만들었다. 파산절차를 밟는 일과 회생의 가능성이 있는 곳은 현대화와 민영화의 업무를 추진했다.

경제통합은 근본적인 문제였다. 하지만 화폐와 경제, 사회통합이야말로 통일을 향한 유일한 선택이었다. 받아들여야만 하는 문제였다.

오늘 평양이 무너진다면 독일의 경험이 도움이 될 것이다. 역시 어렵지만 더 굳건한 해결방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독일보다 좋은 방안으로는 예를 들면 장기적인 남북협력을 통해 북한경제를 정상화하는 일이 중요하다. 북한 주민들의 삶의 질을 올리는 일이 필요하다.

다음으로 헌법적 측면에서 얘기하면, 통일헌법에 대한 사전준비는 불가능했다. 독일의 경우에 동독이 붕괴한 후 서독의 기본법에 편입되었다. 1990년 8월 23일 동독인민회의에서 결정하고 10월 3일 발효되었다. 하루아침에 동독지역에 서독의 법질서가 도입된 것이다. 하나의 충격이었다. 그러나 이 역시 사회주의 동독에 법질서를 도입한 최선의 조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물론 편입방식말고 또다른 대안도 가능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제헌의회를 소집하고 국민투표를 거치는 방식이 그것이다. 하지만 당시로서는 시간이 없었다. 만약 한국에서 통일헌법을 만들기 위한 논의가 진행된다면 엄청나게 많은 시간을 요구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1990년 10월 통일헌법이 발효된 11개월 동안의 업적이었다. 그리고 16년이 지난 오늘까지 통일의 결과는 고민꺼리를 가지고 있는게 사실이다. 한국에서도 통일을 희망한다면 마음의 준비만큼이나 댓가도 준비해야 할 것이다.

장기적인 남북협력을 통해 북한경제를 정상화하는 일이 중요하다.
북한 주민들의 삶의 질을 올리는 일이 필요하다.


사실 마음속의 통일이 중요하다. 적대관계 속에 있었던 사람들의 만남이라면 더욱 그렇다. 시간이 필요하고 집단적 경험이 중요하다. 그리고 신세대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독일은 상당한 진전이 있었다. 아직까지도 동독출신의 노인들은 구동독을 그리워하는 경향이 있지만 마음속의 통일은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

법적인 측면에서, 법치국가와 사회주의 국가의 통일을 생각해보자. 만약 1990년 당시 동독에서 발포나 사유재산 몰수가 있었다면 나중에 처벌의 문제를 생각할 수 있다. 나중에 상황이 바뀌어서 발포자를 인권의 이름으로 처벌한다면 명령을 내린 지도층만 살아남는 정치적으로 아이러니가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시스템과 체제가 부당하다면 소시민의 처벌은 안된다. 남아프리카나 아르헨티나의 진실위원회의 경험에서 보듯이 본질적 체제의 부당함을 개인의 잘못으로 호도해서는 안된다. 보복의 안순환을 밟아서는 안된다. 물론 피해자는 명예회복과 보상조치가 있어야 한다.

그런 문제들은 독일에서는 이미 마감되었다. 현재 독일경제의 어려움은 있지만 정신적으로 사회적으로 어려움은 이미 해소되었다. 그리고 경제적인 어려움의 문제는 솔직히 통일과정에서의 문제라기 보다는 세계화의 문제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토론 요지]

윤현식(민노당 정책위원) : 발제문과 같이 독일의 경우 기본법 23조와 146조를 통해 통일의 충격이 완화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는 다르다. 한국의 헌법에서는 3조 영토규정과 4조 평화통일 조문이 충돌한다. 한반도 통일에서 독일과 같을 가능성은 어렵다.

다른 질문은 통일과정에서 동독 관료들에 대한 지위나 처우의 문제다. 사회주의하에서의 관료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한국의 경우에는 반국가단체의 구성원이기 때문에 처벌해야 한다.

데펜호이어 : 동독이 관료는 공산주의자였다. 공산주의가 역사에 대한 하나의 신념이지만 다원주의와 자유를 부정하고 공산당독재를 펼쳤다.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공무원은 개인의 신념과 무관하게 국민의 결정사항을 대행하는데 복무하는 사람들이다.

통일 후 동독 출신 관료들은 실업자가 되었다. 퇴직 후 연금생활을 했는데 어느 국가도 전문가들을 다 쫒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때문에 고위직은 어렵더라도 중간직의 전문가들은 조사와 검토를 걸쳐 통합차원에서 수용되었다. 북한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만약 북한이 핵무기를 가졌다면 통일과정에서 그 분야 전문가가 모두 없어진다고 생각해보자. 고위급은 어렵더라도 실무전문가들은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고위직은 어렵더라도 중간직의 전문가들은
조사와 검토를 걸쳐 통합차원에서 수용되어야


다음으로 헌법 조항의 불일치를 말하면, 제국주의적 조항이라고 본다. 만약 중국 헌법에 한반도를 자신의 영토라는 조항이 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또 한국의 헌법에 의해 통일이되면 처벌을 받게 되어있는 북한의 지도자들은 통일을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그들에게 통일은 곧 처벌이 될 것이다. 통일 논의의 활성화, 조력은 불가능할 것이다. 결국 정치적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통로를 열어줘야 한다.

개인적으로 공산주의는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동독의 사보스키에서 보듯이 공산치하에서는 올바른 일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개인보다 체제의 부당성에 더 방점을 찍고 싶다. 북한의 서민들, 일반병사들과 우리의 차이는 우연히 북한에서 태어났다는 것일 뿐이다. 때문에 그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독일 역시 새로운 헌법에 대한 논의가 가능했을 것이라는 이론이 있는데, 대통령제나 의원내각제 등 권력구조의 선택 등 다양한 논의가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것은 그 법적 효능이 입증되었다면, 결국 타이밍이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강성룡(코리아글로브 집행위원장) : 우선 통합의 문제인데, 하나는 경제적 통합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 통합의 문제다. 통일과정에서 동독과 서독의 마르크화의 교환비율을 1:1로 했는데, 이후 막대한 통일비용이 투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6년이 지난 지금에도 동독주민의 GDP 수준이 서독주민의 60%이고 막대한 정부보조금을 제외하면 절반수준이라고 한다.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였음에도 격차가 여전하다.

또 사회적으로도 'Wessi'와 ‘Ossi'로 상징되는 동서독간의 갈등이 존재하고 있다. 경제-사회적 통합의 과정에서 정책적 오류는 없었는지. 이 문제에 대한 평가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효과적인 대책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데펜호이어 : 사실 오씨 베씨라는 말들이 많이 사라지고 있다. 이런 표현들이 사라지는 것 자체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의 통일이 어느 정도 진행되고 있는지 지표 같은 역할을 한다. 제가 보기에는 많이 사라졌다.

여전히 안고 있는 경제적 격차를 얘기하는데, 만약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가 왔을 때 그 원인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세계화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새로운 차원의 도전과 과제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경제정책이라면 두가지 전략이 있는데, 하나는 시장에 맡기는 것이고 두 번째는 사회적 보장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가 보통 좌파적 논리인데, 그것은 사실상 회생능력이 없는 기업을 인위적으로 생존시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실업문제 때문이다. 바로 거기에 비용이 들어가는 것이다.

동독시절에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것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의 미래는

경제적으로 어려우니까 통일당시 교환비율을 다르게 했다면 경제적으로는 구동독인들에게는 잔인했겠지만 지금과 같은 경제적 부담은 없었을 것이다. 쉽게 말해서 수익성없는 기업을 유지하거나 실업사태를 그냥 나뒀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구동독인들이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서 더 열심히 일하고 적응했을지도 모르다.

그러나 정책에서는 어떤 것에 더 중점을 두느냐가 중요하다. 만약 대처리즘과 같은 방식을 썼다면 더 많은 실업의 문제가 발생했을 것이다. 수백 만 명 규모였을 것이다. 그들은 구동독시절에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것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다.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되었을 때 무엇을 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잠재적인 위험요인이었다.

그러나 당시 독일의 선택은 다른 것이었다. 어쩌면 실수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사람들에게 쇼크를 주지않기 위한 선택이고 노력이었다고 평가한다. 최선은 아닐지라도 최악의 선택도 아니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저임금을 무기로 새롭게 도전하는 국가들이 쫓아오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울 수 있다. 그 때 정부가 시장의 원칙에 따를 것인가. 아니면 적극적인 역할을 찾을 것인가에 고민할 것이다. 독일의 경험이 좋은 예가 되었으면 한다.

플로어 : 남북통일을 구상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문제 중에 하나가 과거 북쪽에 가지고 있었던 재산권을 어떻게 처리하는가의 문제다. 법적, 정치경제적인 차이를 해결하는 문제는 지속적으로 진행해야 하지만, 재산권의 문제는 다르다.

데펜호이어 : 독일의 경우는 더욱 복잡했다. 세 가지 문제가 얽혀 있었는데, 먼저 나찌가 몰수했던 유대인의 재산문제, 다시 소련연방이 몰수했던 재산문제, 그리고 동독정권이 들어서면서 몰수했던 재산의 문제가 그것이다.

일단은 구 동독에서 몰수했던 문제를 중심으로 말씀드리겠다. 이 문제를 풀어가는 원칙은 반환이었다. 돌려줄 수 있는 것은 돌려주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반환이 어려우면 보상을 하는 것이었다. 물론 원칙은 그렇지만 개별적인 사안사안으로 들어가면 얘기는 무척 복잡해지고 어렵다. 예를 들어 현재 경작되고 있는 농지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있어서는 반환이 아니라 보상을 원칙으로 삼았다. 독일통일과정에서 새롭게 부상한 비즈니스가 있다면 바로 그 재산권을 찾아주는 비즈니스였다.

통일 이후 구동독이라는 하나의 경제단위를 한꺼번에 인수해서 그것을 기업적인 원칙 하에서 이윤을 낼 수 있도록 운영하도록 권한을 준 것이 신탁청이었다. 구동독의 경제활동에 대해서 신탁청에 의해서 재건작업이 진행되었다. 먼저 기업에 대한 선별작업을 통해 파산 또는 투자를 통한 정상화가 그것이다. 가장 큰 원칙은 구동독인들이 실업자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참석회원 : 윤여진, 강성룡, 진월, 이왕재, 임윤옥, 이재원, 이주원, 김석규, 김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