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8일 이인호 선생 초청간담회 내용

by KG posted May 03, 2005



<기조발언 요약>

인간은 경험의 포로다. 삶의 과정에서 보고 느낀 것을 가지고 현실에서 반응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경험세계는 물리적 제약을 받게 마련이고 때문에 자신만의 경험이 전부인 것처럼 착각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지식인은 책과 교육을 통해 자기경험세계를 초월하는 능력을 기른 사람들, 인류보편의 것들을 찾아가고 나와 남이 다른 것을 알아가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의 벽을 넘어 동서고금의 진리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저는 1936년생이다. 30대의 여러분들과 경험세계가 완전히 틀린데 뭔가 공통된 것을 찾으려면 결국 교육을 통해서 찾아야 한다.

한국전쟁 이후에 미국 유학을 했는데, 부러웠던 것이 소위 Western Civilization 이라고 하는, 공통된 전통을 전수해가는 모습이었다. 특히 대학교육을 통해서 대단히 적극적인데, 대학을 졸업하면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최근 사상가들까지 서양전통에 기초한  공통의 언어가 생긴다. 보수적이라는 부정적 시각도 있지만, 여러 가지 논쟁을 공부하면서 기본적인 사고방식을 기른다. 최근에는 제3세계, 동양의 전통까지도 다양하게 기초를 다지는 공부를 한다. 좌우로 갈라지고 지향도 다양하지만 지식인층이 사회통합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은 전통적 기초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역사교육인데, 미국 명문대의 역사교육은 전통적으로 강하다. 변호사 중 60%의 학부 전공이 역사학이라고 한다. 러시아 역시 마찬가지인데, 어려서부터 역사교육을 많이 시킨다. 사회주의 시절에도 그랬고 90년대 소련 해체 이후에 진행된 논쟁과 반격을 봐도 상당히 수준이 높은데, 역사에 대한 기초가 튼튼하다는 반증일 것이다.

개항과 식민치하 _ 지적 전통의 말살

불행하게도 우리나라 역사교육은 엉망진창이다. 전통을 전수하는 제도가 망가졌고 자기 역사에 대한 이해의 기초가 없다. 사실 우리나라는 19세기 말 강요된 개항의 희생물이었다. 일본이 명치유신 이후 계획적인 개항을 진행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기록에 보면 한국이 일본에 편입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이 당시 서양국가들의 보편적 판단이었다.

그리고 일제치하에서 지식인세계는 한마디로 말살되었다. 망명을 해서 독립운동을 하거나  아니면 땅에 묻혀야되는 상황이었다. 사실 일본이 근대화세력이고 근대화가 필요한데 거기에 가담하면 도덕적으로는 파탄이다. 또 도덕적 기반을 지키면 이 땅에서 설 자리가 없었다. 결국 도덕적 명분과 근대화가 갈등을 일으키면서 냉소적으로 비탄에 빠졌다. 때문에 신지식인들은 일정하게 일본과 타협하면서 공부할 기회를 얻은 사람들이었고,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지적인 전통은 완전히 끊어졌다. 새로운 것은 일본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었고 전통이 새롭게 이어지지 못했다. 축적되고 쌓이지 못한 채 단절되었던 것이다.

친일파 문제만 해도 그렇다. 이화여대 총장을 지냈던 김활란 씨의 경우를 보자. 그 모친이 노예로 팔려간 사람이었는데 외국인 선교사에게 신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결국 김활란 씨에게는 기독교와 여성교육이 뿌리이지 가문과 명예가 아니었다. 일제치하에서 타협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결국 김활란 자신은 친일파가 되더라도 학교를 지키고 여성교육을 택했던 것이다.

사상문제도 그렇다. 일제치하에서 들어온 것이 맑시즘과 기독교였다. 맑시즘은 계급해방과 민족해방을 동시에 실현할 수 있다는 호소력이 있었다. 기독교는 인간평등과 사랑을 가르쳤다. 당연히 일제는 사회주의를 탄압했지만 그럴수록 더욱 생존력있게 퍼져 나갔다. 문제는 바깥 세상에 대한 정보를 가질 수가 없었다는데 있다. 사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유럽의 지식인들도 상당히 흥분했지만 1920년대 말 러시아의 실상을 보면서 환멸을 느끼게 된다. 혁명의 부작용이 드러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 지식인들은 실상은 보지 못하고  이상만을 가지고 평가를 했으며, 심정적으로 사회주의에 경도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해방을 맞았다. 저는 해방 후 한반도의 분단은 불가항력이었다고 판단한다. 미국과 소련은 각자의 전략 속에서 결코 타협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당시만 해도 미국은 한반도를 몰랐을 뿐만 아니라, 패전국 일본의 식민지를 접수한다는 정도였다. 그러나 소련은 19세기 초부터 외교부에 동양연구 전문가를 두고 전략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북한에 진주한 러시아는 일사분란하게 친일파청산과 토지개혁을 진행할 수 있었다. 반면에 미국은 준비도 없었고, 사회적 혼란 속에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훈련받은 사람들을 이용했는데, 그 사람들이 바로 일제에 복무했던 친일파였던 것이다. 당연히 남한에서 친일파 청산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한다. 당시 저는 어린 학생이었기 때문에 전쟁기간 동안 서울에 있었는데 그 참혹함은 말로 할 수 없었다. 특히 어느 쪽 군대가 주둔하느냐에 따라서 상대에게 부역한 사람들을 색출하고 처벌하는 악순환의 계속이었다. 양쪽 공히 그랬다. 그리고 휴전이 되니까 처음부터 반공에 앞장섰던 사람들을 제외하고 모호한 상황에서 당했던 사람들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저 목숨을 부지할 뿐 무슨 문제를 제기하거나 주장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해방과 6.25 _ 강요된 양심과 학문사상

결국 개항 이후 우리사회에는 양심의 자유도, 학문의 자유도, 사상의 자유도 없는 상황이 계속되었으며, 이데올로기에 대한 논의와 이해도 없는 상황에서 특히 남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반공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우리나라의 역사교육은, 냉정하게 바라보면서 평가를 한다거나 방향을 잡는 게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한국전쟁의 악몽이 너무 심해서 우리 자신을 수호하는 것이 중요하고 경제복원이 우선이었다. 남한의 경우 미국의 원조는 하늘에서 내려 준 축복이었고 미국에 대해서 감사하는 게 당연했다. 그런 상황에서 억울하게 공산주의자로 몰렸던 사람들은 말도 못하고 상처가 몇 배나 깊어졌던 것이다. 교육도 마찬가지였다. 힘으로 밀어부처서 반공교육을 하고 교조적으로 가르쳤다. 박정희시대에는 반공적 민족주의자를 양성하는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한마디로 1970년대 우리 교육은 혁명 전 러시아 상황과 같았다. 체제수호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던 것이다.



군사독재 하에서 제대로 된 학문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사회과학의 한쪽은 어용학문이 되어버리고 역사학은 실증사학이라는 현실과 동떨어진 고리타분한 것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나머지 한쪽은 지하에 숨어서 반체제적인 입장에서 사물을 보았다. 학계가 양분되고 역사학이 정치도구화되어 버렸다. 우리 사회가 통합이 되려면 공유하는 역사에 대한 기억이 있어야 하는데, 통합의 기반이 거기서부터 무너졌던 것이다.

민주주의와 자유의 문제도 그렇다. 사실 민주주의는 우리의 전통이 아니고, 해방 이후에 수입되어서 훈련되고 실행된 것이다. 거기에 일본 군국주의를 모델로 한 유신체제가 들어서고 그 반작용으로 민주화가 진전된 것도 사실이다. 그런 가운데 정권과 대립하면서 감정적 반작용으로 불합리하게 움직였던 면도 있다. 당시 교육도 양분되었고 반정부투쟁이 호소력을 갖는 시대였다.

강단에 오래 있다보니, 학생운동을 쭉 지켜봤다. 그런데 악법과 싸우다 보니 법을 안 지키게되고 인격적으로 순수한 이상주의자가 범죄자가 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고민스러운 것이 전제질서를 타도해야 새질서가 생기는데, 전제를 타도하기 위해서는 혁명세력을 강화해야 한다. 물론 전제체제를 유지하려는 사람은 반혁명분자다. 그러니까 독재정부가 일을 잘하면 반혁명, 못하면 혁명세력에게는 좋지만 민중은 굶는 엄청난 모순이 발생하게 된다. 도덕적으로 직면하게 되는 현실이다. 결국은 독재자가 나쁜 짓을 많이 할수록 혁명세력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러시아도 그렇고 우리도 그런 고민을 했다. 과연 독재정권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 악인가. 전두환 정권에 복무한 김재익, 함병춘 씨의 경우가 그런 경우다. 우리나라가 우리 국민이 더 잘되기 위해서 고민하다가 참여했던 경우다. 너무 단순화해서 구분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역사청산 _ 선악의 잣대로는 불가능

결론적으로 우리 사회가 통합을 이루려면, 역사의 응어리를 풀어야 된다. 그런 점에서 이제는 못했던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점이 좋다. 그런데 지금은 피억압자의 목소리가 너무 크다. 양쪽이 함께 자신들의 사정을 얘기할 수 있어야 하고 들어야 한다. 때문에 선악으로 말하지 말아야 한다. 특히 우리 민족의 처지가 일제치하 이후 전쟁과 독재정권을 거치면서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물론 사람들의 역량에 따라 조금씩 차이도 있겠지만, 그런 사실 인식의 기초위에서 역사청산도 해야 한다. 때문에 역사는 청산되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읽는 것이다.

지난 연말에 친일청산 관련 토론을 하면서, 어떤 발언자가 청산할 친일파가 150만명이라고 주장했는데 깜짝 놀랐다. 그렇다면 해방 직후 1천만 인구 중에 성인 남자 모두가 친일파가 된다는 얘기다. 그래서야 어떻게 민족화합을 이룰 수 있을지 걱정이다. 고민에 고민을 하면서 평가를 해야지 감정적으로 일도양단 식으로 하는 것은 자학일 뿐이다. 좋아할 사람은 일본밖에 없다.

우리가 과거청산을 얘기하면서 일본과 독일의 예를 들지만, 사실 프랑스의 역사청산에 대해서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2차대전이 끝나고 사르트르와 까뮈의 유명한 논쟁이 있듯이, 나찌에 부역한 사람을 처벌하는데 있어서 그 사람의 인격과 판단을 염두에 두고 어떻게 하는 것이 프랑스를 위해서 바람직한 것인가에 대한 높은 차원의 논쟁이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요즘에 역사바로세우기를 하는데, 저는 역사뒤집기가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갖는다. 부분을 소급해서 전체를 매도해서는 절대로 안된다. 어느 나라에도 그런 역사는 없었다. 또 이쪽이 마음에 안드니까 저쪽이 좋을 것이다라는 식으로 봐서도 안된다. 사실 박정희는 민족교육을 한다는 핑계로 세계문화사에 대한 교육까지 말살했다. 우리의 역사라는 것이 다른 나라도 모두 겪었던 과정이고 인류공통의 길이라는 감각이 없고, 우리만 피해자라는 환상을 갖게 했다. 자업자득으로 예전의 잘못을 다시 뒤집고 뒤집으면서 이중삼중의 피해를 보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국민을 통합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바로 읽는 것이 중요하다.

요즘 협상과 타협에 대한 관심이 높은데, 한일관계, 냉전의 문제 그리고 다른 민족과의 관계에 있어서 과거 양육강식이 아니라 협상으로서의 역사를 새롭게 써야 한다. 그런 면에서 각국의 진보적이고 양심적 지식인들의 힘을 모을 필요가 있다. 유라시아, 동북아에서 서로 공생발전하는 협상을 위해서는 공동의 역사교과서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질의응답>

김광하 :
중국과 러시아의 시장이 거의 동시에 열렸고 10여년이 지났다. 중국은 순발력 있게 시장경제가 정착되는데 러시아는 뭔가 늦는 것 같다.

이인호 :
러시아의 사회주의 체제는 70년 동안 지속되었고 국가에서 생계를 보장하는 체제였다. 반면 중국은 1949년에 공산정권이 수립되었으니까 러시아에 비하면 사회주의적 전통이 짧다. 또  워낙 인구가 많고 정부의 영향이 전혀 미치지 않는 곳도 많았다. 그래서 중국은 자활력이 있었고 지금 시장경제로 눈부시게 발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중국에 비해 지금은 러시아가 뭔가 늦는 것 같고, 경제적 위기도 겪었지만 그래도 지난 10년 동안의 시장경제 전환과정에서 유혈사태가 없었다는 점만 봐도 대단하게 느껴진다. 전환기 개혁에 대한 착시현상 등이 있었지만 신흥개발 세력의 힘 또한 만만치 않다.

최배근 :
요즘 교육개혁이 우리 사회의 화두인데 올바른 교육개혁을 위한 제안을 하신다면?

이인호 :
민영화가 관건이다. 이제 더 이상 교육문제를 교육부가 주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교육이나 학생들을 상대로 한 이권 시장이 너무 거대해서 쉽지 않다. 결국 민간이 가지고 있는 역량이 교육에 자유롭게 들어오게 해야 한다. 꼭 기여입학제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결국 조기유학 등을 이유로 외국으로 나가는 돈을 국내에 머물도록 해서 교육의 질을 높이는 일을 해야 한다. 기여입학 허용하고 장학제도을 확대하는 방향이 맞는 것 같다.



이왕재 :
사회적으로 양극화와 불필요한 갈등이 계속되는 가운데 통합을 위한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오늘 말씀해 주신 역사적 인식의 기초를 공유하자는 말씀에 동의하면서, 현안과 관련해서 좀 더 구체적인 통합의 방법을 제시한다면?

이인호 :
어디서부터 뭘 해야 할지 갑갑한 게 사실이지만, 우선은 계급투쟁적 시각은 버려야 될 것 같다. 富나 교육의 기회가 세습된다는 시각은 자폐적 사고일 뿐이다. 강남으로 상징되는 교육열은 전통적인 계급 인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역사적 특성과 압축성장 과정에서 발생한 교육열을 막을 도덕적 명분도 없는 것 아닌가.

또, 사실 이상으로 갈등을 조장해서는 안된다. 양극화를 부추기는 언론 보도 역시 문제가 많다. 정부의 정책을 보는 태도에서 색안경을 벗어버려야 한다. 정부는 국민수준의 반영이다. 사실 국가는 사회복지의 하한선을 구축하고 그 하한선을 지속적으로 업그레이드시키는 것이 임무다. 아무리 못나고 없어도 굶지 않고 교육시키고,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을 구축하는 것이 기본 임무다. 그리고 그 하한선의 수준을 계속 높여가야 한다. 대신에 상한선은 터줘야 한다. 부자의 상한은 없어야 된다. 돈을 많이 버는 대신에 세금을 많이 내게 하면 된다.

1990년대 말 IMF 시절, 우리 사회는 위기감이 공유되면서 살아남기 위해 뭐든지 하려는 의지가 있었다. 만약에 당시 우리 지도층이 급증한 실업자를 나머지 일하는 사람들이 먹여 살릴 각오를 하고 세금 많이 내라고 했다면, 또 단호하게 구조조정하고 경제의 체질을 바꿨다면 지금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런데 장기적인 대비가 없이 일처리를 하면서, 능력있는 사람은 모두 외국으로 나가버렸다. 심정적으로는 좋지만 새로운 공생의 원칙을 만들지 못하고 말았다. 한마디로 복지 부분에는 경쟁 논리를, 경쟁 분야에는 복지 논리를 제시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외국과 경쟁도 안되고 우리끼리는 화합도 안되고, 억울하다는 사람만 늘게 된 결과를 낳았다.

김석규 :
한반도 문제를 풀어가는데 있어서 외교적 역량의 한계가 보인다. 외교관료 뿐 아니라, 국민 전체도 마찬가지다. 여중생사건이 터지면 反美바람이 불다가, 동북공정이 터지면 反中, 그리고 독도문제가 터지면 反日바람이 거세게 불다가 사라져 버린다. 특히 중요한 것은 우리가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라 외파에 따라서 흔들린다는데 있다. 안에서는 이념적으로 대립하고 밖으로는 흔들리는 상황이 문제다.

이인호 :
중요한 지적이다. 표류하는 대한민국 호에서 내부적으로는 싸우는 격이다.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어느 나라건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 하지 않는 나라는 없다. 그것이 기초 상식이다. 또 자주외교, 자주국방은 무언의 원칙이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에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 외교적으로 상대를 위하는 척, 안 그런 척 하는 것이다. 외교라는 것은 공통 이익의 장을 넓히는 것으로 서로 설득하고 좋은 의미에서 서로 이용하는 것이다.

중국에 대한 태도도 마찬가지다. 한반도는 전통적으로 중국의 그늘 밑에 있었기 때문에 중국을 위험시하는 의식구조가 작다. 하지만 냉정히 따져보면 사실 일제치하에서 보다 더 나쁜 과거가 중국의 속국 시절이었다. 중국인의 오만불손, 한민족에 대한 경멸은 일본 이상이다. 결국 조용히 미국을 이용해야 한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내색하지 않으면서 주변국의 역관계를 잘 활용해야 하는데 뭔가 이해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 같아 걱정이다.

핀란드 대사를 하면서 개인적으로 상당히 많은 교훈을 얻었다. 특히 우리나라는 핀란드에게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구 510만 명 정도로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자기절제가 강한 현실주의 국가다. 19세기까지는 스웨덴에 속했는데, 이후에 러시아의 속국이 되었다.핀란드는 러시아를 외형적 방어책으로 이용하면서 안에서는 민족주의적 문화적 독립을 키웠다. 핀란드어의 공용어 사용을 인정받았고, 대외적으로는 러시아의 일부로서 러시아 총독이 지배하지만, 내정에서는 스스로의 자치를 인정받았다. 교육도 마찬가지였다. 1917년 러시아 혁명기에 독립을 선포했는데, 그 전에 이미 사회, 제도적으로 자치와 독립의 기반을 갖추고 있었다. 정치적 리더십이 모범적이고 특히 국민들의 정치지도자에 대한 신뢰가 강하다.

핀란드는 러시아를 엄청나게 미워하지만 물리적인 국력에서 차이가 나니까 그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 잘 구슬려서 공존하는 원칙을 철저히 지켰다. 1995년 EU에 가입했고, 그다음에 NATO에 가입하려고 했다가 유보했다. 지금까지도 마찬가지다. 핀란드까지 NATO에 가입하면 러시아가 위협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만약의 피해를 사전에 막기 위해 가입하지 않고 있다.

일본이 미국을 대하는 모습도 마찬가지다. 일본 사람들도 미국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미국을 이용해서 경제도 부흥시키고 외교적 힘도 얻고 있다. 그런 점에서는 러시아 치하의 폴란드와 대조적이다. 폴란드는 한때 러시아보다 강국이었기 때문에 국민들이 불끈하는 바람에 아무런 실력이나 준비도 없이 러시아에 대항했다가 그나마 남아있는 저력도 완전히 소진해버린 경우다.


참석회원 : 강성룡, 김경아, 김광하, 김남이, 김석규, 김윤, 김태희, 김현인, 박소희, 박종철, 박현선, 손종도, 윤여진, 이왕재, 이주원, 이호준, 정낙근, 정창수, 조민, 최배근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