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성공한 헌정사, 통합의 헌정사 그리고 한국의 미래

by 希言 posted Oct 04, 2004
Ⅱ. 성공한 헌정사, 통합의 헌정사 그리고 한국의 미래


1. 더 나은 미래를 위한, 대한민국 헌정사의 재해석과 계승

한민족의 현대사는 탈 식민 이후에도 순탄치 못했다. 주어진 해방 그리고 분단은 이념전쟁과 내전의 소용돌이로 민족을 밀어 넣었다. 또한 35년의 역사적 단절과 착취에 의한 성장잠재력의 고갈로 말미암아 온전히 자력에 의한 국가 건설과 부일세력을 배제한 헌정 수립은 처음부터 벽에 부닥쳤다. 대한민국의 건국과 존속은 한미동맹의 틀을 벗어날 수 없었으며, 반공을 국시로 한 헌정체제의 수립은 불가피한 현실이었다.

그런데도 대한민국은 지난 반세기 동안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여 보릿고개를 전설로 만들고 21세기 디지털 국가로 우뚝 섰으며 명실상부한 Pan-Korea의 모국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 대한민국은 ‘잃어버린 7년’이 거론될 정도로 지체에 머물러 있다. 한편으론 여전히 북한문제로 안보불안은 물론 국가의 미래 설계가 안개 속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에 더해 철 지난 이념논란과 평지돌출의 정통성 시비까지 다시 불붙고 있다.

이는 곧 통일국가의 수립을 여태 이루지 못한 대한민국의 숙명에서 기인한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오늘 벌어지는 지체와 착시에 한시도 머무를 여유가 없다. 이것이 곧 대한민국 헌정사를 ‘성공한 헌정사’로 재해석하고 아울러 그 동안 국가주도세력에서 배제된 다양한 헌정사의 흐름까지 포괄한 ‘통합의 헌정사’로 격상하여, 반세기 전과 달리 통일국가의 새로운 헌정질서의 근간을 미리 준비하고자 하는 우리들의 충정이다.

2. ‘성공한 헌정사’, 국가와 시장과 민주주의의 존속과 발전

한국 현대사가 직면했던 역사적 과제는 ‘근대의 형성과 극복’이라는 세계사적 과제, 그 자체였다. 쇄국과 개항, 식민말살과 역사의 단절, 독립전쟁과 계급투쟁, 주어진 해방과 분단, 이념전쟁과 내전, 분단체제의 고착화와 체제경쟁, 경제개발과 민주주의의 확대, 세계화와 디지털시대의 도래, 통일한국 수립의 과제로 이어지는 ‘시대의 도전’은 민족공동체와 대한민국이 감당할 수 없는 무게였다. 하지만 우리는 끝내 한 세기의 도전에 맞서 기적과도 같이 생존했으며 끈질긴 생명력과 창의적인 문제해결능력으로 여기 이 자리에 이르게 되었다.

대한민국은 20세기 전반에 소멸의 위기까지 몰린 민족공동체의 극심한 공황상태를 극복하고 안정적인 근대 민족독립국가의 수립과 유지 존속에 성공했다. 특히 20세기 후반에 반세기에 걸쳐 냉전의 화약고로 공동체의 기운을 소진하면서 이룬 성과이기에 그 결실은 더욱 눈부시다. 안팎의 분열과 침투를 견디지 못하고 국가 형성에 실패한 민족 집단이나 여전히 안정의 통합력을 갖추지 못한 많은 국가들에 비추어보면 대한민국의 근대사적 성취는 또 다른 ‘한강의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더해 대한민국은 잿더미 위에서 시장경제를 이루었고 개발도상국의 교과서로 자리 잡았으며 나아가 디지털 국가로 앞서가고 있다. 민주주의의 측면에서도 반공독재와 개발독재의 시대를 넘어 절차적 민주주의의 완성에 이어 시민사회의 성숙과 여론정치 및 디지털 민주주의의 발아에 이르기까지 시장경제의 압축성장에 못잖은 급속한 발전을 거듭 하고 있다. 아울러 한국문화가 문화적 독창성을 유지하면서도 세계 문화와의 소통 능력을 획득했다는 점은 미래로 나아가는 공동체의 대단히 소중한 자산이다.

이처럼 대한민국은 불과 반세기 만에 국가와 시장 그리고 민주주의의 모든 측면에서 유지와 존속 그리고 발전에 성공했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의 헌정사는 ‘성공한 헌정사’이며 국민들은 물론 Pan-Korea의 모국으로서 자부심의 원천이 되어야 할 것이다.

3. ‘통합의 헌정사’를 위하여

헌정사의 주체는 헌정사의 정통성을 체현한 세력을 의미한다. 헌정사의 정통성은 대한민국이 대내외에서 직면한 시대적 과제를 국가의 존립과 번영의 관점에서 헌법질서를 유지하면서도 사회 전반의 통합을 이루는 과정에서 실현된다. 그러므로 헌정사의 주체를 집권세력으로 한정하거나 헌법질서를 뛰어넘어 고려하는 시도 모두 바람직하지 않다. 헌정사의 주체는 주류와는 달리 오늘의 ‘성공한 헌정사’를 이룬 모든 세력에게 그 공이 돌아가야 합당하다. 당연히 시대적 과제에 대해 하나의 지향을 가진 다른 세력이나 다른 지향을 가진 하나의 세력 모두를 포괄해야 한다.

이를 위하여 대한민국의 건국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배제된 몽양 여운형과 백범 김구로 대표되는 ‘통일민족주의’ 세력은 물론 농지개혁으로 개발시대의 길을 연 죽산 조봉암의 진보당 또한 헌정사의 주체로 복권되어야 하며, 그래야만 비로소 개발세대와 민주화세대의 화해와 통합이 역사적으로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우리 사회가 직면한 모든 갈등을 푸는 열쇠를 찾는 지혜뿐만 아니라 통일국가 수립의 길을 닦는 여정의 출발에도 ‘통합의 헌정사’를 새로이 세우려는 합의가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4. 8냉전질서의 해소와 87체제 등장

전두환 정권의 붕괴를 이끌어낸 87체제는 낡은 권위(중심)의 해체로부터 출발했다. 이 체제는 1987년 이전의 권위주의적 지배 질서를 대체하는 과정에서 태동되었다. 그러나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반권위주의였고, 해체적이었을 뿐 국가전략의 대안을 내놓지 못했던 것이 이 체제의 한계였다. 하지만 이런 한계 속에서도 절차적 민주주의의 확대, 남북관계의 진전, 세계화의 수용 등은 이전 질서에서는 볼 수 없는 차이점이었다.

87체제의 형성 배경은 냉전질서의 해체였다. 소비에트연방공화국의 위상 약화,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영향력 확대로 나타난 냉전질서의 해소는 이 체제 형성의 세계사적 배경이 되었다. 냉전질서 해체라는 세계사적 흐름에 조응해서 87체제가 태동되었지만 한국사회 내부의 동인도 무시할 수는 없다.

유신체제와 5공화국은 거치면서 경제적 성장에 비해 지체되는 사회구조의 답답함에 대한 시민들의 폭발이 민주화의 요구로 터져 나왔다. 즉, 국가주도 System의 일방주의에 대한 시민사회 저항의 결과가 바로 87체제이다. 1948년 대한민국 건국부터 전두환 정권까지 우리사회가 국가로서 System을 가지고 운영될 수 있었던 것은 분단체제라는 냉전질서와 그 질서에 기생하여 구축된 권위주의의 뒷받침이 컸다. 그러나 냉전체제의 붕괴조짐이 한국사회에도 영향을 준 것이다.

87체제는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이유인즉, 세계사적 흐름이 체제 성립의 강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대안 없는 해체적의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새로운 국가전략의 청사진을 제시하지 못함으로써 국가 리더십을 형성할 수 없었다. 더구나 일부 정치그룹(NL)이 지향했던 국가모델이 북한식 모델이었기 때문에 보다 발전적인 국가전략과 리더십을 형성하는데 장애로 작용했다.

그러나 많은 한계를 지녔던 87체제였지만, 한국사회는 1987년을 기점으로 질적으로 다른 변화의 길을 걷게 된다. 비록 5공 정권이라는 반동기가 이었지만, 경제개발과 안보(반공)와 성장으로 상징되는 국가목표가 뚜렷했던 박정희 정권의 몰락과 함께 민주주의가 서서히 또는 급속히 진행되어 갔다. 민주화의 지평이 넓어졌음에도 대한민국은 국가목표를 새롭게 설정하는데 실패하게 된다. 민주화의 반동기에 등장한 5공화국과 6공화국은 국가목표를 설정하는데 실패한 정권들이었다. 국가목표를 설정하지 못했다는 것은 나라를 이끌어 갈 주체세력을 양성하여 세대교체를 하는데 실패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5. 민주화운동세력에 대한 평가

87체제는 새로운 정치주체를 한국사회 전면에 내세우게 된다. 한국경제의 압축성장 모델을 벤치마킹한 것처럼 민주화운동세력은 실체가 없던 반독재저항세력에서 실체를 갖춘 사회정치세력으로 압축성장을 하였다. 새롭게 정치의 주체로 등장한 민주화운동세력과 이념세대는 국가목표의 설정할 능력을 갖추지 못하였다. 따라서 민주화운동세력이 정권의 주체로서 참여했던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를 볼 때 87체제의 특징은 System이 아니라 Regime이라고 볼 수 있다.

민주화운동세력에 대한 평가도 1987년을 전후로 달라진다. 87체제 이전의 민주화운동세력은 국가운영의 주체가 아니었던 반독재저항세력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국가운영에 대한 책임을 질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이 체제의 성립과 동시에 민주화운동세력은 국가운영의 주체로서 국회에 대거 진출하게 된다. 이때부터 국가에 대한 공과 중심의 책임이 민주화운동세력 평가의 잣대가 되었다. 헌신적인 도덕성을 바탕으로 주류정치로 진입한 민주화운동세력은 안타깝게도 국가전략의 청사진을 내놓지 못했다. 새로운 국가발전모델을 내놓지 못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역사적 사명을 소진한 산업화 세력들과 개혁이라는 미명아래 헤게모니 싸움에만 전력투구했기 때문이다.

이제 87체제를 넘어 새로운 민주주의 체제를 모색해야 한다. 87체제 아래서는 다양한 사회갈등을 조정하기가 힘들다. 20세기의 담론인 ‘외세와 자본’을 넘어 21세기 동아시아 문명의 화두인 ‘동아시아의 공존공영’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세계화의 도전에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민주주의 System이 요구되고 있다.

6. 한민족의 디이스포라와 한국의 미래

이제 대한민국은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서 단일민족국가의 틀을 벗어야 할 때가 되었다. 더 이상 폐쇄된 틀인 단일민족국가로는 동아시아에서 ‘평화의 생존’을 보장받을 수 없게 되었다. 사회주의 이념을 버린 중국은 패권적 중화주의를 국가의 정체성으로 내세우고, 보통국가의 지향을 넘어 동아시아 군비경쟁에 불을 붙이는 일본의 군사대국화는 동아시아 갈등의 전주곡이다. 이런 현실에서 역내 약소국인 대한민국마저 폐쇄적-저항적 민족주의를 국가의 이념적 정체성으로 내세운다면 우리의 미래는 암울할 따름이다.

대한민국이 역내 강대국들을 안심시키면서 사필귀정(事必歸正)의 통일국가 수립을 이루려면 새로운 상상력이 동원되어야 한다. 이 새로운 상상력은 우리가 그동안 믿어왔던 국가와 민족정체성을 수정 또는 버리는 어려운 작업이 될 것이다. 현재 우리에게 국가와 민족은 동일시되었지만 미래의 통일국가는 국가와 민족이 동일하지 않을(단일민족국가의 틀을 벗어난) 가능성이 커진다. 또한 동북3성에 거주하는 조선족과 직접적인 교류를 통해 상상 속의 영토였던 만주가 직접 다가옴으로써 공동체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할 것이다.

유태공동체에서 보았듯이 더 이상 국가라는 틀에 갇혀 있을 필요는 없다. 한국인들이 꼭 대한민국의 영토에서만 살 필요는 없다. 한국인들은 세계를 무대로 뛰어야 한다. 물론 여기서 유념할 것은 대한민국 영토에 거주하는 우리의 시각으로 700만 해외동포에게 민족정체성을 강요할 수는 없다. 이미 세계시민이 되어 있는 그리고 거주하는 국가의 구성원이 되어 있는 그들에게 정체성을 강요하게 되면 세계를 무대로 뛰어야 할 한민족공동체에 수갑을 채우는 꼴이 된다.

한민족공동체가 자민족 중심주의가 아닌 홍익인간의 포용력을 보여주려면 세계를 내 집같이 여기되 내 집인 한국의 영토도 세계인들에게 개방해야 한다. 그래서 한반도를 교류와 문화의 중심 국가로 성숙시켜야 한다. 한민족공동체는 700만 재외동포는 물론 역사와 인종, 문호가 다른 세계인들조차 포용할 수 있는 홍익인간을 통일한국의 좌표로 삼아야 한다.

세계인이 보는 대한민국은 분단국가이자 비극의 근-현대사를 지닌 국가일 뿐이다. 성장일변도의 국가전략으로 치닫는 결과 20세기 세계에 내놓을 만한 문화를 창조하거나 전통문화를 리모델링하지 못했다. 이는 분단국가의 문화적 수준이기도 했다. 그러나 분단 극복은 곧 새로운 문화 창조로 이어져 세계인들에게 대한민국의 이미지를 새롭게 보여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