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성공한 헌정사, 87체제의 소멸 그리고 백년대계를 위하여
단절과 비약의 현대사
한민족의 현대사는 ‘단절’로 시작됐다. 짧게는 경술국치에서 35년, 길게는 갑오경장에서 반세기, 한민족은 사상 최초로 모국을 상실했으나 20세기 전반 민족 소멸의 위기를 헤치며 살아남았다. 전혀 예상치 않았고 아무 대비도 없었던 식민지의 경험은 민족사에 단절이란 고통스런 상흔으로 남았다. 상고사는 신화나 세속신앙으로 격하되었으며 대륙을 경영한 집단의 기억은 삭제되고 대신 그 터에 9백여 회의 피침(被侵)이란 자학(自虐)사관이 자리 잡았다. 이에 따라 반만년 문명의 자부심은 유실되고 한민족의 자화상은 ‘한(恨) 많은 아리랑 겨레’로 둔갑하여 버렸다.
해방은 또 다른 ‘단절’의 연속이었다. 일제의 패망을 한 주 앞두고 무임승차한 소련군의 진주는 새로운 비극의 씨앗이었으며, 다수의 독립전쟁 주도 세력은 통일된 정치세력을 형성하지 못하고 해방정국에서 지리멸렬 끝에 하나의 모국 재건에 실패했다. 이념에 경도된 김일성 세력은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상잔의 내전을 감행하여 수백만의 희생은 물론 한반도 전역이 잿더미가 되었다. 김일성이 스탈린과 마오쩌둥을 설득해 저지른 6.25 남북전쟁은 반세기 분단체제를 굳히는데 주된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반세기 역사는 ‘비약’을 거듭했다. 대한민국은 생존을 위해 한미동맹을 성립-존속시켰으며, 그 터전 위에 경제건설에 매진하여 상전벽해(桑田碧海)의 발전을 이루었다. 아울러 반공독재에서 개발독재를 거치며 87체제의 성립에 이르기까지 민주주의의 압축성장 또한 이루었다. 이에 반해 북한은 수령독재라는 전체주의 병영국가로 변질하여 민족의 절반을 우민화하고 종국에는 수백만의 아사라는 역사의 범죄를 저질렀다. 북한 오늘에 이르러 세계의 지탄 속에 오직 정권의 존립만을 다투는 처지가 되었다.
오늘에 이르러 한민족은 또다시 단절과 비약의 갈림길에 섰다. 남북의 체제경쟁이 막을 내린 지 10여 년이 지나감에도 여전히 한반도문제는 당사자들의 손을 떠나 있다. 욱일승천의 중국을 견제하는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의 하위 프로그램으로서 그리고 아시아의 맹주로 등장하려는 중국의 양보할 수 없는 뒷마당이 되어, 한민족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쟁패의 장으로 전변할 위기에 직면해 있다. 그런데도 대한민국은 리더십의 공백으로 내홍에 휩싸여 곧 닥쳐올 북한의 급변을 대비하기는커녕 알지도 못하고 있으니, 실로 한 세기 만에 다시 찾아온 이 고비를 어떻게 넘어서는가 여부에 따라 향후 민족의 운명이 좌우될 것이다.
자학사관을 넘어서서, 대한민국 헌정사의 재해석
대한민국의 건국에서 비롯한 헌정사는 어느덧 반세기를 넘어섰다. 현대사 서술에서 밝혔듯이 ‘단절’에서 ‘비약’으로 수직상승한 역사는 그 자체로 경이로운 기적이며 오늘에 와서 세계가 인정하는 공지의 사실이다. 그런데도 우리 공동체 내부에서 이에 관해 부단하고 과도한 반론이 한 흐름을 이루고 있음을 우리는 심각히 우려한다. 잘못된 건국과 굴종의 세월이란 해석 그리고 ‘스스로의 선택’이 아닌 ‘20세기 후반의 세계 흐름에 잘 편승한 결과’라는 인식이 그것이다. 지난 역사에서 보듯이 근거가 미약한 자학사관은 공동체의 정신적 해체를 불러오는 독이었다. 또한 현실에서는 극단적인 폐쇄성이나 균형을 상실한 사대주의(事大主義)로 기울게 하였다.
이에 KoreaGlobe는 자학사관을 남김없이 해체해 공동체의 후환을 없애고 나아가 대한민국 헌정사에 관한 불편부당(不偏不黨)한 서술의 전형을 마련할 것이다.
돌이켜보면 독립전쟁세력의 통일을 끝끝내 좌절시켰고 패망과 탈 식민 이후까지 내다본 일제의 한반도정책은 가슴 서늘하도록 탁월했으며 과연 반세기 동안 한반도 침략을 준비한 세력다운 백년대계였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를 넘어서는 백년대계가 없이 독립전쟁을 치렀다. 물론 우리에게도 건준과 여운형이란 일제 총독부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국내의 항일세력과 걸출한 지도자가 있었다. 그러나 백년대계의 부재로 독립전쟁의 주도 세력은 극좌와 극우의 폐해를 넘어서지 못했고 국내파와 해외파의 융합을 이루지 못하여 통일정치세력의 형성에 실패하여 하나의 모국을 건설할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를 미․소의 분할정책으로 쉽게 결론 내리는 발상은 해방정국으로 모인 백년의 흐름을 보지 못하는 단견이자 몰 주체의 편의적이다.
이미 대세가 기울고 단독정부를 수립하게 된 마당에 스탈린주의 세력의 발호를 막기 위해 반공을 국시로 한 헌정체제의 수립은 불가피한 현실이었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 정권은 권력 독점과 반공세력의 구축을 위해 적잖은 부일세력을 동원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친일파의 나라’라는 발상이 나올 수 있지만, 이를 건국의 정통성과 결부함은 지극히 단선적인 역사인식이다. 우선 여운형 계열의 제거를 위시한 잇따른 내파(內破)와 함께 김구 계열의 지사적 선택을 모두 이승만 계열의 공작으로 보는 극도의 단순함이나 그 하수인에 불과한 부일세력의 존재를 정통성의 상징으로 평가함은 지나친 자학이다. 실제 1공화국의 주요 설계자들은 조봉암과 이범석 등 좌․우를 망라한 독립전쟁세력이었지 부일세력들이 아니었다. 부일세력은 오로지 권력의 독점을 위해 동원된 주구들이었을 뿐이다. 또한 그 대미를 장식한 것은 김일성이었다. 외세의 지시가 아니라 망설이는 외세를 끌어들여 내전을 일으킨 그의 도발 덕분에 다수의 잔존 독립전쟁세력마저 제거되어 이승만 정권이 더욱 공고화되고 부일세력이 장기간 한국사회에서 정치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환경이 제공되었다.
이승만은 미국의 주구이기는커녕 사사건건 미국과 맞서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려 한 사람이었으며, 그 틈새에서 미국의 불만을 토양으로 박정희 군부정치세력은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한 박정희조차 경제개발계획에서부터 핵개발까지 자주의 이름으로 미국과 충돌을 거듭한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애치슨라인을 무효화하고 미국을 설득하여 한미동맹의 틀을 영속화한 것은 이승만이었으며 그 터전 위에 사회주의 계획경제 방식까지 원용하여 개발독재를 강행한 것은 박정희였다. 이 대목에서 대한민국이 ‘미국의 식민지내지 종복(從僕)의 나라’라는 맹목적인 주장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우리 헌정사는 조선조 초기처럼 사대의 명분 아래 물밑으론 끝없이 미국과 충돌하며 국가이익을 추구해왔다. 즉 ‘스스로의 선택’으로 일구어온 주인이 뚜렷한 헌정사다.
그 격동의 세월에도 대한민국은 괄목의 발전을 거듭했다. 건국과 국가수호의 공로에도 왕국을 꿈꾸었던 이승만을 국민들은 용납하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은 ‘선 경제건설, 후 민족통일’의 노선을 견지하며 북한의 전체주의 지배와는 다른 권위주의 통치로 대표적인 빈국을 한 세대 만에 중진개도국의 반열로 끌어올린 20세기의 경제기적을 창출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 태동한 대도시 시민계층의 민주화 열망으로 스스로 시대를 마감하게 되었다.
성공한 헌정사의 도도한 흐름은 80년에 들어 전두환 정권의 등장으로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다. 전두환 정권은 시대를 거꾸로 되돌린 헌정사의 사생아에 다름 아니다. 당시 이미 중화학공업으로 인프라를 갖춘 한국 자본주의는 다가올 90년대를 맞이할 구조조정을 준비할 시점이었다. 아울러 개발독재 시대에 미루어온 절차적 민주주의의 회복을 통해 중산층을 중심으로 하는 시민사회의 형성을 본격화할 때였다. 그러나 결정적 시기의 7년 공백은 한국사회의 역사적 지체라는 결정적인 악폐를 끼쳤으며, 제반 분야의 미성숙은 물론 그 뒤를 이은 87체제가 6월 시민항쟁의 폭발하는 민주주의의 기운을 제대로 시스템화 하지 못하고 낙후한 정치와 뒤늦은 이념운동의 만개로 인하여 추후 ‘잃어버린 10년’을 야기하게 된 근본원인이 되었다.
이와 관련해, 민주화의 상징어였던 양 김씨의 명암은 매우 컸다. 그들의 탁월한 기여에도 그들의 집요한 권력욕은 5공의 유산을 청산하기는커녕 그에 더해 정치지체와 한국사회의 정치적 분열을 야기했다. 결국 그로 인해 자신들의 집권기에 이르러서는 정치실패로 공동체에 큰 부채를 남기게 되었다. 70년대 재야 민주화운동 또한 양 김씨를 견제하고 새로운 국가시스템을 도모하기는커녕 그들에게 흡인되어 결국에는 이념세대에게 정국의 주도권을 넘기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선배들을 대신해 한국사회의 시스템을 새로이 짤 안목도 통합의 능력도 없었다. 오늘 한국사회의 불행은 결국 ‘전두환의 반란’에서 태동한 ‘역사적 지체’가 양 김씨와 뒤이은 이념세대에 와서도 해소되지 않고, 아직도 이를 넘어설 청사진과 리더십을 지닌 집단을 양성하지 못한 탓이 크다.
87년 이후 한국사회의 주도권은 서서히 산업화세대로부터 이탈한다. 노태우 정부는 북방정책이란 공로에도 그 과도기를 넘어설 수 없었다. 뒤이은 양 김씨의 정부는 단임의 기간에 국가사회의 시스템을 뒤바꾸려는 과도한 조급증으로 ‘개혁 피로증’을 낳으며 디지털시대에 걸맞은 국가모델을 만드는 데 실패했다. 준비되지 않은 세계화의 도입은 환란으로 이어져 미국식 시스템을 강제 이식했으나 알레르기 반응의 해소책은 여태 부재하며, 연이은 북핵 위기에 현금 지원으로 남북관계를 풀려 한 햇볕정책의 연속은 애초부터 본질적인 긴장 해소와 교류협력의 진전에 이를 수 없었다. 이에 더해 세계화시대의 경제 전략을 찾지 못하고 중국시장과 내수부양에 치중한 결과 오늘에 이르러 제조업의 공동화와 성장잠재력의 지속적 하락이라는 암초에 걸리고 말았다.
우리는 대한민국, 지난 반세기 동안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여 보릿고개를 전설로 만들고 21세기 디지털 국가로 우뚝 선 명실상부한 Pan-Korea의 모국에 깊은 자부심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 대한민국은 ‘잃어버린 10년’의 지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한반도문제의 국제화’와 ‘저성장의 도래’ 앞에서 좌절하고 있는 와중에, 가중되는 내홍에 휩싸여 ‘인재와 자산의 탈출’(Exodus)을 속수무책으로 방치하고 있다. 더 이상 공동체가 ‘대한민국의 위기’를 인내할 여력도 없으며 그를 넘어설 시간마저도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다. 이에 우리는 오늘 거듭 되는 불필요한 논란에 종지부를 찍고 대한민국 헌정사가 중국에서 베트남까지 세계가 모방한 ‘성공한 헌정사’였음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건국이 ‘스스로 선택한 역사’였음을 부정하지 않고 ▲희대의 전체주의 국가 북한을 수렴해야 할 ‘체제의 정당성’ ▲극한의 상황에서 보인 ‘체제의 생존력’ ▲체제 구성원의 자발적 헌신으로 이루어낸 ‘체제의 경쟁력’ ▲허다한 체제위기를 극복하고 국가실패의 위험성까지 스스로 치유한 ‘체제의 수렴력’에 이르기까지 네 요소를 모두 통틀어 ‘성공한 헌정사’를 부정할 논거는 없다. 이는 향후에도 다른 근거와 새로운 배경으로 재생산될 자학사관의 출현에 미리 쐐기를 박기 위해서도 불가결한 예방책이다. 또한 공동체의 역사인식이자 ‘합의’와 ‘상식’으로 격상시켜, 그 자부심을 근간으로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국가사회의 통합을 이루고 대한민국의 제2의 도약을 이루는 헌신의 동기를 제공해야 할 것이다.
87체제의 등장과 소멸
87체제는 80년대 이후 한 세대에 걸쳐 나타난 헌정사의 과도기적 현상이다. 이 체제는 ‘전두환의 반란’에서 비롯한 좌절감으로 시효가 만료된 국가사회주의와 주체사상 류의 이념을 적극 수용한 한국판 근본주의 세력인 이념세대가 동세대인 민주화세대를 정서적으로 지배하고 나아가 정치지체의 틈새를 뚫고 한국사회의 시스템까지 장악하게 된 일련의 과정을 의미함이다. 2002년 월드컵과 여중생 사망사건을 거치며 환란 이후 한국사회의 좌절감이 극적으로 탈미 민족정서로 전환하는 시점에 그 흐름을 타고 노무현 정부는 출범했으며 87체제의 주도세력인 이념세대 역시 한국사회의 이면에서 전면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전망(Vision)이 없고 과거에 매달린 정치세력에게 기회는 오지 않는다. 오늘 대한민국은 여야를 막론한 정치 리더십의 공황에 절망하고 있으며, 이는 곧 87체제의 시효가 만료되었음을 의미한다.
한국의 87체제가 한 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그 빛을 잃어가는 이유는 다름 아닌 시대착오적인 그 근본주의 성향 탓이다. 이미 옆 나라에서 문화혁명의 오류를 자인하고 개혁개방으로 나아가던 시점에 87체제의 주도세력인 이념세대는 사멸한 국가사회주의와 주체사상의 세례를 받고 혁명을 꿈꾸었으며 같은 시대를 살았음에도 민주화세대는 이념세대의 치열함과 헌신을 목도하며 무한한 부채의식으로 그들의 ‘낡은 이념’을 관용하고 주도를 인정했다.
민주화세대는 환란을 거치며 디지털문명을 선도하고 사회 제반 분야에서 산업화시대의 낡은 시스템을 대체하여 한국사회의 신진대사에 큰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고용과 주택 및 교육’이란 ‘개발시대의 안정성’에서 멀어져 한국사회의 장래에 관해 좌절할 때, 한때 그들을 선도했던 이념세대는 한국사회의 체제(Regime)를 대표하면서도 ‘개발시대의 안정성’을 복구할 어떠한 대책도 없이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는 20여 년 전의 이념논쟁으로 국가사회를 끌어가는 것을 보고 급기야는 등을 돌리게 된다. 결국 동시대인인 민주화세대의 마음을 잃으면서까지 아직도 ‘변하지 않는 피해의식’과 ‘과도한 공격성’ 그리고 ‘외눈박이 역사인식’으로 ‘과거의 기억’에 완고하게 매달리는 근본주의 집단에게 미래는 없는 셈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심각한 병폐는 ‘전망의 부재’와 ‘한미한 실력’이다. 그 어떤 병폐도 시대의 물결에 휩쓸려가겠지만 그들이 국가사회의 시스템을 장악하고 있는 시점에서 안목과 실력의 부재는 정치는 물론 국가의 실패까지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권이든 시민사회든 실질적으로 국정에 개입하기 시작한 김영삼 정부 이래 지난 10여 년 동안 그들은 국가사회의 장래에 관해 전략과 목표를 제출하기는커녕 제반 분야에서 유사한 시행착오를 반복해왔다. ‘동북아 중심국가’에서 ‘동북아 물류금융중심’으로 다시 ‘2만 달러 시대’로, 매년 바뀌는 국가목표는 모두를 지치게 하고 주변국의 조소를 자아내었으며, 청사진도 기약도 없는 로드맵과 NATO 정부에 민심은 싸늘하게 굳어있다.
우리는 당연히 오늘 보수라 칭해지는 산업화세력의 역사적 공로는 인정하지만 그 리더십은 기대하지 않는다. 70년대의 사고로 21세기를 헤쳐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마찬가지로 80년대의 이념 역시 더는 논란의 대상은 아니다. 그럼에도 작금 벌어지는 해방정국의 재연은 그 개연성을 인정하지만, 실효성과 가치는 없다. 이 쟁투가 더 이상 대한민국을 만신창이로 만들기 이전에 우리는 이를 마감할 동시대인의 책무가 있다. 이에 백년결사 [KoreaGlobe]는 87체제의 소멸을 엄숙히 선언하면서, 나라의 장래를 염려하는 모든 이들과 연대하여 국가와 민족의 백년대계를 준비하고 그를 짊어질 ‘Pan-Korea의 미래집단’을 구성하기 위해 신명을 다 바칠 것을 다짐한다.
단절과 비약의 현대사
한민족의 현대사는 ‘단절’로 시작됐다. 짧게는 경술국치에서 35년, 길게는 갑오경장에서 반세기, 한민족은 사상 최초로 모국을 상실했으나 20세기 전반 민족 소멸의 위기를 헤치며 살아남았다. 전혀 예상치 않았고 아무 대비도 없었던 식민지의 경험은 민족사에 단절이란 고통스런 상흔으로 남았다. 상고사는 신화나 세속신앙으로 격하되었으며 대륙을 경영한 집단의 기억은 삭제되고 대신 그 터에 9백여 회의 피침(被侵)이란 자학(自虐)사관이 자리 잡았다. 이에 따라 반만년 문명의 자부심은 유실되고 한민족의 자화상은 ‘한(恨) 많은 아리랑 겨레’로 둔갑하여 버렸다.
해방은 또 다른 ‘단절’의 연속이었다. 일제의 패망을 한 주 앞두고 무임승차한 소련군의 진주는 새로운 비극의 씨앗이었으며, 다수의 독립전쟁 주도 세력은 통일된 정치세력을 형성하지 못하고 해방정국에서 지리멸렬 끝에 하나의 모국 재건에 실패했다. 이념에 경도된 김일성 세력은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상잔의 내전을 감행하여 수백만의 희생은 물론 한반도 전역이 잿더미가 되었다. 김일성이 스탈린과 마오쩌둥을 설득해 저지른 6.25 남북전쟁은 반세기 분단체제를 굳히는데 주된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반세기 역사는 ‘비약’을 거듭했다. 대한민국은 생존을 위해 한미동맹을 성립-존속시켰으며, 그 터전 위에 경제건설에 매진하여 상전벽해(桑田碧海)의 발전을 이루었다. 아울러 반공독재에서 개발독재를 거치며 87체제의 성립에 이르기까지 민주주의의 압축성장 또한 이루었다. 이에 반해 북한은 수령독재라는 전체주의 병영국가로 변질하여 민족의 절반을 우민화하고 종국에는 수백만의 아사라는 역사의 범죄를 저질렀다. 북한 오늘에 이르러 세계의 지탄 속에 오직 정권의 존립만을 다투는 처지가 되었다.
오늘에 이르러 한민족은 또다시 단절과 비약의 갈림길에 섰다. 남북의 체제경쟁이 막을 내린 지 10여 년이 지나감에도 여전히 한반도문제는 당사자들의 손을 떠나 있다. 욱일승천의 중국을 견제하는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의 하위 프로그램으로서 그리고 아시아의 맹주로 등장하려는 중국의 양보할 수 없는 뒷마당이 되어, 한민족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쟁패의 장으로 전변할 위기에 직면해 있다. 그런데도 대한민국은 리더십의 공백으로 내홍에 휩싸여 곧 닥쳐올 북한의 급변을 대비하기는커녕 알지도 못하고 있으니, 실로 한 세기 만에 다시 찾아온 이 고비를 어떻게 넘어서는가 여부에 따라 향후 민족의 운명이 좌우될 것이다.
자학사관을 넘어서서, 대한민국 헌정사의 재해석
대한민국의 건국에서 비롯한 헌정사는 어느덧 반세기를 넘어섰다. 현대사 서술에서 밝혔듯이 ‘단절’에서 ‘비약’으로 수직상승한 역사는 그 자체로 경이로운 기적이며 오늘에 와서 세계가 인정하는 공지의 사실이다. 그런데도 우리 공동체 내부에서 이에 관해 부단하고 과도한 반론이 한 흐름을 이루고 있음을 우리는 심각히 우려한다. 잘못된 건국과 굴종의 세월이란 해석 그리고 ‘스스로의 선택’이 아닌 ‘20세기 후반의 세계 흐름에 잘 편승한 결과’라는 인식이 그것이다. 지난 역사에서 보듯이 근거가 미약한 자학사관은 공동체의 정신적 해체를 불러오는 독이었다. 또한 현실에서는 극단적인 폐쇄성이나 균형을 상실한 사대주의(事大主義)로 기울게 하였다.
이에 KoreaGlobe는 자학사관을 남김없이 해체해 공동체의 후환을 없애고 나아가 대한민국 헌정사에 관한 불편부당(不偏不黨)한 서술의 전형을 마련할 것이다.
돌이켜보면 독립전쟁세력의 통일을 끝끝내 좌절시켰고 패망과 탈 식민 이후까지 내다본 일제의 한반도정책은 가슴 서늘하도록 탁월했으며 과연 반세기 동안 한반도 침략을 준비한 세력다운 백년대계였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를 넘어서는 백년대계가 없이 독립전쟁을 치렀다. 물론 우리에게도 건준과 여운형이란 일제 총독부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국내의 항일세력과 걸출한 지도자가 있었다. 그러나 백년대계의 부재로 독립전쟁의 주도 세력은 극좌와 극우의 폐해를 넘어서지 못했고 국내파와 해외파의 융합을 이루지 못하여 통일정치세력의 형성에 실패하여 하나의 모국을 건설할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를 미․소의 분할정책으로 쉽게 결론 내리는 발상은 해방정국으로 모인 백년의 흐름을 보지 못하는 단견이자 몰 주체의 편의적이다.
이미 대세가 기울고 단독정부를 수립하게 된 마당에 스탈린주의 세력의 발호를 막기 위해 반공을 국시로 한 헌정체제의 수립은 불가피한 현실이었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 정권은 권력 독점과 반공세력의 구축을 위해 적잖은 부일세력을 동원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친일파의 나라’라는 발상이 나올 수 있지만, 이를 건국의 정통성과 결부함은 지극히 단선적인 역사인식이다. 우선 여운형 계열의 제거를 위시한 잇따른 내파(內破)와 함께 김구 계열의 지사적 선택을 모두 이승만 계열의 공작으로 보는 극도의 단순함이나 그 하수인에 불과한 부일세력의 존재를 정통성의 상징으로 평가함은 지나친 자학이다. 실제 1공화국의 주요 설계자들은 조봉암과 이범석 등 좌․우를 망라한 독립전쟁세력이었지 부일세력들이 아니었다. 부일세력은 오로지 권력의 독점을 위해 동원된 주구들이었을 뿐이다. 또한 그 대미를 장식한 것은 김일성이었다. 외세의 지시가 아니라 망설이는 외세를 끌어들여 내전을 일으킨 그의 도발 덕분에 다수의 잔존 독립전쟁세력마저 제거되어 이승만 정권이 더욱 공고화되고 부일세력이 장기간 한국사회에서 정치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환경이 제공되었다.
이승만은 미국의 주구이기는커녕 사사건건 미국과 맞서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려 한 사람이었으며, 그 틈새에서 미국의 불만을 토양으로 박정희 군부정치세력은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한 박정희조차 경제개발계획에서부터 핵개발까지 자주의 이름으로 미국과 충돌을 거듭한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애치슨라인을 무효화하고 미국을 설득하여 한미동맹의 틀을 영속화한 것은 이승만이었으며 그 터전 위에 사회주의 계획경제 방식까지 원용하여 개발독재를 강행한 것은 박정희였다. 이 대목에서 대한민국이 ‘미국의 식민지내지 종복(從僕)의 나라’라는 맹목적인 주장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우리 헌정사는 조선조 초기처럼 사대의 명분 아래 물밑으론 끝없이 미국과 충돌하며 국가이익을 추구해왔다. 즉 ‘스스로의 선택’으로 일구어온 주인이 뚜렷한 헌정사다.
그 격동의 세월에도 대한민국은 괄목의 발전을 거듭했다. 건국과 국가수호의 공로에도 왕국을 꿈꾸었던 이승만을 국민들은 용납하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은 ‘선 경제건설, 후 민족통일’의 노선을 견지하며 북한의 전체주의 지배와는 다른 권위주의 통치로 대표적인 빈국을 한 세대 만에 중진개도국의 반열로 끌어올린 20세기의 경제기적을 창출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 태동한 대도시 시민계층의 민주화 열망으로 스스로 시대를 마감하게 되었다.
성공한 헌정사의 도도한 흐름은 80년에 들어 전두환 정권의 등장으로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다. 전두환 정권은 시대를 거꾸로 되돌린 헌정사의 사생아에 다름 아니다. 당시 이미 중화학공업으로 인프라를 갖춘 한국 자본주의는 다가올 90년대를 맞이할 구조조정을 준비할 시점이었다. 아울러 개발독재 시대에 미루어온 절차적 민주주의의 회복을 통해 중산층을 중심으로 하는 시민사회의 형성을 본격화할 때였다. 그러나 결정적 시기의 7년 공백은 한국사회의 역사적 지체라는 결정적인 악폐를 끼쳤으며, 제반 분야의 미성숙은 물론 그 뒤를 이은 87체제가 6월 시민항쟁의 폭발하는 민주주의의 기운을 제대로 시스템화 하지 못하고 낙후한 정치와 뒤늦은 이념운동의 만개로 인하여 추후 ‘잃어버린 10년’을 야기하게 된 근본원인이 되었다.
이와 관련해, 민주화의 상징어였던 양 김씨의 명암은 매우 컸다. 그들의 탁월한 기여에도 그들의 집요한 권력욕은 5공의 유산을 청산하기는커녕 그에 더해 정치지체와 한국사회의 정치적 분열을 야기했다. 결국 그로 인해 자신들의 집권기에 이르러서는 정치실패로 공동체에 큰 부채를 남기게 되었다. 70년대 재야 민주화운동 또한 양 김씨를 견제하고 새로운 국가시스템을 도모하기는커녕 그들에게 흡인되어 결국에는 이념세대에게 정국의 주도권을 넘기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선배들을 대신해 한국사회의 시스템을 새로이 짤 안목도 통합의 능력도 없었다. 오늘 한국사회의 불행은 결국 ‘전두환의 반란’에서 태동한 ‘역사적 지체’가 양 김씨와 뒤이은 이념세대에 와서도 해소되지 않고, 아직도 이를 넘어설 청사진과 리더십을 지닌 집단을 양성하지 못한 탓이 크다.
87년 이후 한국사회의 주도권은 서서히 산업화세대로부터 이탈한다. 노태우 정부는 북방정책이란 공로에도 그 과도기를 넘어설 수 없었다. 뒤이은 양 김씨의 정부는 단임의 기간에 국가사회의 시스템을 뒤바꾸려는 과도한 조급증으로 ‘개혁 피로증’을 낳으며 디지털시대에 걸맞은 국가모델을 만드는 데 실패했다. 준비되지 않은 세계화의 도입은 환란으로 이어져 미국식 시스템을 강제 이식했으나 알레르기 반응의 해소책은 여태 부재하며, 연이은 북핵 위기에 현금 지원으로 남북관계를 풀려 한 햇볕정책의 연속은 애초부터 본질적인 긴장 해소와 교류협력의 진전에 이를 수 없었다. 이에 더해 세계화시대의 경제 전략을 찾지 못하고 중국시장과 내수부양에 치중한 결과 오늘에 이르러 제조업의 공동화와 성장잠재력의 지속적 하락이라는 암초에 걸리고 말았다.
우리는 대한민국, 지난 반세기 동안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여 보릿고개를 전설로 만들고 21세기 디지털 국가로 우뚝 선 명실상부한 Pan-Korea의 모국에 깊은 자부심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 대한민국은 ‘잃어버린 10년’의 지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한반도문제의 국제화’와 ‘저성장의 도래’ 앞에서 좌절하고 있는 와중에, 가중되는 내홍에 휩싸여 ‘인재와 자산의 탈출’(Exodus)을 속수무책으로 방치하고 있다. 더 이상 공동체가 ‘대한민국의 위기’를 인내할 여력도 없으며 그를 넘어설 시간마저도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다. 이에 우리는 오늘 거듭 되는 불필요한 논란에 종지부를 찍고 대한민국 헌정사가 중국에서 베트남까지 세계가 모방한 ‘성공한 헌정사’였음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건국이 ‘스스로 선택한 역사’였음을 부정하지 않고 ▲희대의 전체주의 국가 북한을 수렴해야 할 ‘체제의 정당성’ ▲극한의 상황에서 보인 ‘체제의 생존력’ ▲체제 구성원의 자발적 헌신으로 이루어낸 ‘체제의 경쟁력’ ▲허다한 체제위기를 극복하고 국가실패의 위험성까지 스스로 치유한 ‘체제의 수렴력’에 이르기까지 네 요소를 모두 통틀어 ‘성공한 헌정사’를 부정할 논거는 없다. 이는 향후에도 다른 근거와 새로운 배경으로 재생산될 자학사관의 출현에 미리 쐐기를 박기 위해서도 불가결한 예방책이다. 또한 공동체의 역사인식이자 ‘합의’와 ‘상식’으로 격상시켜, 그 자부심을 근간으로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국가사회의 통합을 이루고 대한민국의 제2의 도약을 이루는 헌신의 동기를 제공해야 할 것이다.
87체제의 등장과 소멸
87체제는 80년대 이후 한 세대에 걸쳐 나타난 헌정사의 과도기적 현상이다. 이 체제는 ‘전두환의 반란’에서 비롯한 좌절감으로 시효가 만료된 국가사회주의와 주체사상 류의 이념을 적극 수용한 한국판 근본주의 세력인 이념세대가 동세대인 민주화세대를 정서적으로 지배하고 나아가 정치지체의 틈새를 뚫고 한국사회의 시스템까지 장악하게 된 일련의 과정을 의미함이다. 2002년 월드컵과 여중생 사망사건을 거치며 환란 이후 한국사회의 좌절감이 극적으로 탈미 민족정서로 전환하는 시점에 그 흐름을 타고 노무현 정부는 출범했으며 87체제의 주도세력인 이념세대 역시 한국사회의 이면에서 전면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전망(Vision)이 없고 과거에 매달린 정치세력에게 기회는 오지 않는다. 오늘 대한민국은 여야를 막론한 정치 리더십의 공황에 절망하고 있으며, 이는 곧 87체제의 시효가 만료되었음을 의미한다.
한국의 87체제가 한 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그 빛을 잃어가는 이유는 다름 아닌 시대착오적인 그 근본주의 성향 탓이다. 이미 옆 나라에서 문화혁명의 오류를 자인하고 개혁개방으로 나아가던 시점에 87체제의 주도세력인 이념세대는 사멸한 국가사회주의와 주체사상의 세례를 받고 혁명을 꿈꾸었으며 같은 시대를 살았음에도 민주화세대는 이념세대의 치열함과 헌신을 목도하며 무한한 부채의식으로 그들의 ‘낡은 이념’을 관용하고 주도를 인정했다.
민주화세대는 환란을 거치며 디지털문명을 선도하고 사회 제반 분야에서 산업화시대의 낡은 시스템을 대체하여 한국사회의 신진대사에 큰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고용과 주택 및 교육’이란 ‘개발시대의 안정성’에서 멀어져 한국사회의 장래에 관해 좌절할 때, 한때 그들을 선도했던 이념세대는 한국사회의 체제(Regime)를 대표하면서도 ‘개발시대의 안정성’을 복구할 어떠한 대책도 없이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는 20여 년 전의 이념논쟁으로 국가사회를 끌어가는 것을 보고 급기야는 등을 돌리게 된다. 결국 동시대인인 민주화세대의 마음을 잃으면서까지 아직도 ‘변하지 않는 피해의식’과 ‘과도한 공격성’ 그리고 ‘외눈박이 역사인식’으로 ‘과거의 기억’에 완고하게 매달리는 근본주의 집단에게 미래는 없는 셈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심각한 병폐는 ‘전망의 부재’와 ‘한미한 실력’이다. 그 어떤 병폐도 시대의 물결에 휩쓸려가겠지만 그들이 국가사회의 시스템을 장악하고 있는 시점에서 안목과 실력의 부재는 정치는 물론 국가의 실패까지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권이든 시민사회든 실질적으로 국정에 개입하기 시작한 김영삼 정부 이래 지난 10여 년 동안 그들은 국가사회의 장래에 관해 전략과 목표를 제출하기는커녕 제반 분야에서 유사한 시행착오를 반복해왔다. ‘동북아 중심국가’에서 ‘동북아 물류금융중심’으로 다시 ‘2만 달러 시대’로, 매년 바뀌는 국가목표는 모두를 지치게 하고 주변국의 조소를 자아내었으며, 청사진도 기약도 없는 로드맵과 NATO 정부에 민심은 싸늘하게 굳어있다.
우리는 당연히 오늘 보수라 칭해지는 산업화세력의 역사적 공로는 인정하지만 그 리더십은 기대하지 않는다. 70년대의 사고로 21세기를 헤쳐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마찬가지로 80년대의 이념 역시 더는 논란의 대상은 아니다. 그럼에도 작금 벌어지는 해방정국의 재연은 그 개연성을 인정하지만, 실효성과 가치는 없다. 이 쟁투가 더 이상 대한민국을 만신창이로 만들기 이전에 우리는 이를 마감할 동시대인의 책무가 있다. 이에 백년결사 [KoreaGlobe]는 87체제의 소멸을 엄숙히 선언하면서, 나라의 장래를 염려하는 모든 이들과 연대하여 국가와 민족의 백년대계를 준비하고 그를 짊어질 ‘Pan-Korea의 미래집단’을 구성하기 위해 신명을 다 바칠 것을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