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와 통일한국의 미래

by 유동걸 posted Jan 03, 2003
최근의 국제정세를 보면서 더 근본적인 철학적 문제제기를 던지고자 저희 모임에서 발표했던 글을 올립니다.


21세기와 통일 한국의 미래

                                                                                          유동걸

서쪽에서 부는 바람 쉼 없구나, 거칠다
여린 동쪽에서 꿈틀꿈틀 움찔움찔 동이 튼다
찢기고 상처받은 남의 사람들, 빛을 발하는가?
문득, 찬바람 부는 북녘의 사람들 그립구나(경계에 서서)


여는 글

시대를 담을 그릇이 없어졌다. 시간과 공간이 사라지고 있다. 전지구적 세계화 속에서, 국경이 무너지고 경계가 사라져가는 지금-여기에 기존의 시공간이 해체되고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딱히 주체랄 것도 없는 무궁한 생명의 움직임이 공간을 뛰어넘고 시간을 초월하여 만남과 사라짐의 과정을 반복한다. 바야흐로 무(無)시-공간 즉 혼돈(chaos)의 시대다.
유교적 권위주의와 배낭여행적 자유가 공존하는 지구촌 동서남북의 동시대적 비동시성, 친일.독재와 반미.자주가 어우러리는 동시대적 차별성이 자연스럽게 섞여가고 이제 농촌-도시 이분화를 넘어서 고착된 경계를 넘나드는 탈주와 유목의 신인간적 생활양태가 그리 낯설지 않다.
'나도 모르는 내가?'라는 카피가 자연스럽게 대중의 정체성에 스며드는 시대에 '나-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새삼스럽다. 하긴 언제 제대로 된 '나-자아-공동체적-우주적 자아'의 실현을 제대로 경험해본 바가 있었는지 자문해본다. 왠지 스산하다.
그러면서 '뉴-밀레니엄'으로 호들갑을 떨면서 다가온 '21세기는 정녕 시작된 것일까'하고 물어본다. 이미 와서일까? 아마 새 하늘과 새땅을 찾는 이들조차 이미-아직의 긴장 속에서 시작된 21세기의 새로운 의미를 찾지는 않는 듯하다. 그런데 왜 21세기인가?


몸말 - 21세기를 여는 화두 몇 가지

숨을 고르고 살인적 속도로 급변하는/혹은 변하지 않는 이 세상을 잠시 돌아보자. 21세기는 새로운가? 그러고 보니 새로움이 넘쳐나는 시대인 듯도 하다. 새정치, 새물결, 신기술, 신세대, 신인류, 신자유주의....... 온갖 새로움이 대중들을 주눅들게 하면서 '자기 안의 타자'로 만들어버리는 숱한 현상을 목격한다. 그런데 21세기가 새롭다는 말은 적당히 진실이지만 그 새로움은 정의인가? 자유인가? 행복인가?
지구를 바꾸어놓은 그 새로움의 흐름 속에서 몇 가지 주목할만한 현상들은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하지만 그 새로움은 '해 아래 새것이 없다'는 성경의 말씀처럼 그다지 새롭지 않을지도 모른다. 해묵은 새로움 혹은 새로운-옛 것? 온고지신(溫故知新)이니 법고창신(法古創新)이니 호들갑 떨지말고 조용히 가자...


하나. 민중에서 생명으로

한국의 노동자정치 시대가 열려간다. 반가운 일이다. 그래 한국사회 많이 변했다. 한나라-민주에 이어 제 3당의 자리를 보란듯이 차지하면서 대통령 후보 초청 토론에 당당히 나와 노동자 정치의 현재와 희망을 이야기하는 모습은 볼수록 신선하다. 아니 그것은 너무 늦게 온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 한반도에 민중의 역사가 꽃피우고자 한 것이 언제인가? 고작 이제 노동자 정치의 새싹이 돋아났을 뿐인데 너무 호들갑을 떨지는 말자. 다만 조용 그리고 힘차게 그들-우리의 출발을 지켜보고 동참할 일이다.
올해의 대선을 지켜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아쉬움이 있을 것이다. 소위 개혁세력으로 인식되는 노무현과 권영길 진영의 분열에 대한 우려이다. 하지만 양자는 분명히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며 권영길의 민노당 또한 사회당과는 많은 차별성을 지닌다.
민노당을 보자. 노동자 정치 속에서 농민과 도시빈민은 어떻게 자리매김하는가. 농경에서 산업사회로 옮아가면서 농업노동자(?)는 그 힘을 잃어가고 공장-사무 노동자가 노동자의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것인가? 농민은 단지 제도의 희생물이면서 적당한 이슈가 터질 때 분노의 목소리를 표출하는 노동세계의 주변인일 뿐인가?
한 가지 떨떠름한 사실이 있다면 아직 노동계급의 가지는 당파성의 한계에 대한 논의조차 시작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아니 그것은 시기상조이고 노동자에 대한 음해의 연장선상으로 이해될 법도 하다. 적 앞에서 분열을 조장하고 보이지 않는 손들에 의한 또 다른 조작이라고 강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노동 계급의 성장과 단결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많은 틈이 있고 갈라짐이 있고 나누어짐이 있다.
민중을 개념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민중이란 종개념에서 생명이라는 유개념으로 보자는 논의가 있었다. 노동자, 블루 칼라. 화이트 칼라, 서민, 대중, 농민, 백성, 도시빈민...... 이 모두를 아우르는 새로운 개념의 창출없이 노동의 통일은 쉽지 않다. 거기에다 인간주의로 인해 고통받는 자연, 풀.벌레 나무와 능금꽃, 라일락 향기에서 저 새만금 갯벌을 기어다니는 꽃게들까지를 아우르는 고통받는 중생에 대한 포용없이는 노동자 계급의 당파성도 몰락한 현실사회주의의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다. 물론 서구사회의 좌파가 갖는 한계와 브라질의 룰라가 이끄는 새로운 사회주의 등 역사적 배경과 상황에 따라 명멸하는 사회주의-노동정치는 끝없이 반복되겠지만 그 차별지로 인한 갈등, 대립, 투쟁, 파업과 삭발 등은 쉬이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생명의 담지자로서의 민중? 그게 뭐지? 그것!


하나. 돈에서 밥으로

제조업 생산으로 인한 자본의 이동이 90%를 차지하고 나머지 10%는 금융자본이 차지하고 있었다. 25년 전의 이야기다. 지금은 투기적인 금융자본이 세계 자본이동의 90%를 넘게 차지한다. '머니이즈갇(money is god)'!이라고 신해철이 노래한지도 꽤 오래 전의 일인데 우린 그걸 물신(物神)자본주의 더 솔직하게는 돈-신자본주의라고 불러도 무방하리라. 돌고 돌아야 할 돈이 돌지 않고 소수에게 쌓이면서(지구촌 350 여명의 부자가 지구 재산의 절반 정도를 가지고 있다!) 세상은 고여가고 썩어간다.
돈의 부동성이(마치 모모에서 시간을 잡아먹는 회색인간처럼) 세상을 잡아먹을 때 돈을 살릴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은 어디에서 오는가? 밥이다. '밥 한그릇으로 만고의 진리를 안다'는 동학의 사상 속에서 '밥이 하늘님'이다. '예수는 밥'이다 등등의 사상이 나온다.
독점할 수 없는 밥, 순환하지 않을 수 없는 밥(차별화와 변비로 밥도 많이 굳어있기는 하다)의 원리만이 이 세상을 살리는 구원의 알멩이다. 밥이 저쪽에 있지(향벽설위) 않고 내 앞에-안에 있다는 최시형의 향아설위는 그동안 서구역사-문명이 길러온 거짓된 이분법(악마 diabolish)를 몰아내는 하나의 거룩한 상징(symbolish)이다.
독서는 글의 밥이고, 토론은 말씀의 밥이고 역사는 시간의 밥이다. 정치는 힘의 밥이고, 경제는 돈의 밥이다. 사회는 사람사이의 밥이고 문화는 정신의 밥이로구나. 공간은 시간의 밥이고 확장-흐름은 시간의 밥이다. 허허 이러니 세상에 밥 아닌 것이 없구나
밥에 대한 깨달음으로 자본주의는 극복될 수 있다. 밥 안에 노동도 있고 계급을 뛰어넘는 생명정치도 있다. 바야흐로 자본-노동에서 밥-살림으로의 후천개벽이 필요한 것이다.



하나. 혁명에서 개벽으로

제대로 된 혁명의 역사를 가지고 있지 못한 나라는 불행하다.
르네상스로 시작된 산업혁명, 종교개혁, 시민혁명, 과학기술혁명에 이르기까지 서구 근대사는 혁명과 전복의 역사였고 많은 피를 흘렸고 죽임이 있었다.
왕정을 몰아내고 공화정을 수립하면서 계급적 차별성이 시작되었고 자본가를 몰아내려는 노동적 차별성이 그 뒤를 이었다. 아직은 현실사회주의 조차 돈과 욕망의 시대를 넘어서지 못했지만 혁명은 계속될 것이다.
4.19와 5.18을 지나 87년 시민혁명과 6.15 정상회담은 한반도내의 작은 역사적 혁명이라 할 수 있다. 그 작은 혁명의 연장선상에서 대선을 통한 정치개혁과 반미가 넘실댄다. 그 속에서 역사의 새로운 주체로 떠오른 네티즌은 노동자도 농민도 여성도 자연도 아니다(이면서 그렇다) 이 기우뚱한 균형의 낯선 주체들이 삶(문화와 정치와 경제 등)의 전면에 떠오른다. 플래시로, 글로, 음악으로 율려의 문화를 탄생시키면서 떠오른다. 촛불은 광화문 네거리에서만 타오르는 것은 아닌 것이다.
개벽을 이야기하는 것이 뜬 구름을 잡는 것인가 싶은 사람도 있겠다. 다는 아니지만 우리의 시야와 안목은 항상 민중과 역사와 현실의 단위를 뛰어넘지 못했다. 나에게는 구체적 실천이 남에게는 관념의 유희로 인식되는 시대이니만큼 문명과 개벽과 초월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만큼 오해의 소지와 구체화의 한계를 갖는 것도 사실이다. 쥬라기 공원이라는 말이 공룡의 실체를 현실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면 혹은 가상 세계에서나마 실체화되는 것처럼 문명과 개벽과 초월은 분명 어떤 세계에서는 구체로 존재할지도 모른다. 우리 역사 속에서는 동학을 통해 작으나마 그 비밀이 피어났었다.
같은 혁명을 꿈꾸지만 엔엘과 피디로 다시 주체로 갈라져온 우리 혁명 운동사에도 분열과 갈등이 있었다. 다시 여성과 환경과 평화 운동 등 새로운 영역이 열리면서 운동의 시공성은 넓혀나가지만 아직까지는 차별지를 벗어나고 있지 못한 상황이다.(여성과 남성을 아우르는 새존재에 대한 통찰과 자각 없이 여성주의 운동은 그 한계를 쉬이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환경과 평화 또한 마차가지로.....)
개벽은 일체의 분별지를 뛰어넘되 개인적 초월과 명상에 빠지지 않고 내면적 자아의 우주화와 신음하며 고통받는 우주적 중생사회의 현실화가 동시적으로 진행되는 문명적 변화가 수반되어야 한다. 역사의 순환.반복 혹은 나선형적 수렴확산 과정에서 진행될 21세기적 변화는 가부장제의 몰락과 화석연료 사용의 고갈 속에서 평등사회 실현과 태양에너지 시대로의 전이가 나타날 것이다.
아직은 개벽의 때라기보다는 이제 군데군데 (혁명과 역사와 기술과 물신으로 형성된) 근대의 균열이 발생하며 조짐과 예감이 느껴지는 정도의 단계라고 생각되지만 어쩌면 그 시기는 생각보다 앞당겨질 수도 있겠다. 여중생 두 명의 영혼이 한 네티즌의 잊을 통해 수만, 수십만의 탈주하는 주체들을 광화문-워싱턴으로 불러내는 나비효과의 세계가 우리 앞에 자연스럽게 펼쳐지는 광경을 보면, 민중을 의식화해서 계급혁명의 주체로 성장시킨 뒤 자본가들을 몰아내는 사회로의 이행을 주장하는 운동은 맑스 이후 사회주의권이 끝없이 만들어낸 하나의 가상연극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신인가 악마인가, 통합인가 배제인가? 나는 그것에 대해서는 모른다. 그러나 이 원초적 질문에 대해서 나는 아는 것이 하나 있다. 둘이서 투쟁하는 것은 언제나 연극이다/미셀 세르)


하나. 탈역사, 탈현대에서 신문명과 통일 시대로

그렇다고 역사가 죽은 것은 아니다. 현대가 물러간 것은 아니다. 성급한 역사의 몰락이나 탈근대의 실현을 이야기하는 것은 섣부르다.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을 영원한 자본주의의 승리로 해석하는 몰역사적 사상이나 포스트모던의 유행을 탈근대의 완성처럼 사기치는 복고주의자들의 말에는 함정이 있다.
세계화(는 신식민주의의 결정판이다! S. 지젝)와 신자유주의 담론의 재생산을 통한 권력-자본 연합체의 달콤한 속삭임은 새로운 문명의 충돌을 가로막고 냉전적 사고의 확대재생산을 통해 비인간적 흡수통일론을 생산해내거나 통일 그 자체의 걸림돌로 작용할 뿐이다.
역사와 현대를 망각하거나 외면하는 것이 새길을 가는 태도는 아니다.
개벽과 통일의 길을 걷는 것은 역사가 가두어놓은 굴레와 현대가 빚어낸 비극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가로질러 가는 것이다. 사이렌의 황홀한 음악을 들으면서 끌려가지 않고, 몸부림치고, 황홀해하면서 제 갈길을 가는 21세기형 오디세이의 여정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아웃사이더의 반란과 경계인의 열정이 바로 그것이다.
푸꼬의 말대로 20세기가 들뢰즈의 시대였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20세기와 함께 자살로 생을 마감한 그의 몸으로 글쓰기는 21세기 인간형의 불행한 아버지/안티오이디프스 징후로 남을 것이다. 그의 철학은 나누고 쪼개고 고정시키고 밀폐시키는 문화나 제도의 폭력에 대한 저항으로 요약된다. 그의 대안은 끝없이 탈주하고 분열하는 유목민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여기서 유목민이란 조직.코드.회로 등 다양한 통제와 구속의 덫들에서 벗어남으로서 기계의 지배 영토를 넘어서는 해방된 영혼들을 말한다. 사위가 벽으로 갇힌 방안에 정착하는 대신에 오늘은 이 하늘이 별 아래에서 이슬을 맞고 내일은 저 땅의 꽃바람 속에 삶을 실어보내는.....(좀머씨, 해방을 꿈꾸는 영혼/이왕주)
21세기 유목민의 삶은 이미 시작되었다. 미국에 대항하는 유럽통합의 문화.생활은 사람들을 길 위의 존재로 만들어내고 있다. 이른 바 피디에이(PDA)로 살아가는 모바일시대인 것이다.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라는 말은 농담이 아니다. 움직이는 것이 사랑 뿐이랴! 숱하게 섹스와 사랑의 경계를 넘나드는 현대인은 사랑만 움직이며 살아가지는 않는다. 움직이는 은행, 움직이는 학교, 찾아가는 전교조는 전지구적 세계화와 강화되는 지역화를 가로지르는 지역-지구화(golocalizition)의 한 양태이다. 이른 바 '부엌에서 세계가 보이고', '먼지가 우주로 화하는' 화엄의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하나. 정체성과 공동체

흔들리는 삶 앞에서 자아찾기는 계속되는가, 되어야 하는가?
근대서구문명이 빚어낸 타자화의 틀(타인의 방, 자유로부터의 도피, 자기 땅에 유배당한 자들-식민과 종속의 길을 걸어온 우리에게 둘러 씌워진 덫) 안에서 살아온 우리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 가운데 하나가 자아(自我)라는 개념과 공동체(共同體)라는 허구이다.
근대 심리학 개념은 현대인에게 자아와 정체(正體)성 찾기를 끝없이 강요한다.
21세기가 들뢰즈의 말대로 탈주-유목의 시대라면 탈주하는 유목 생활 속에서 자아란 무엇인가를 되물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사랑처럼 자아도 움직이는 거라면, 끝없이 꿈틀꿈틀 오물조물 꼼지락꼼지락 변화하면서 움직이는 거라면 이제 정체성을 찾기보다는 동체성(動體性)을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닌지. 아니 자아 자체가 분열-탈주하는 탈아(脫我-奪我)의 단계라면 이제 자아라는 개념 자체를 폐기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그리하여 자아 정체성을 버리고 탈아(脫我) 동체성(動體性)을 찾는, 아니 자아정체성과 탈아동체성 사이의 역동적 긴장 그 자체를 새롭게 생성해내야 하는 것은 아닌지....
공동체를 허구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공산주의가 빚어낸 획일주의와 전통적으로 우리가 그려온 공동체를 구별 못해서는 아니다. 공동의 문제는 같음과 다름 혹은 차이의 철학-정치학을 넘어서지 않고서는 쉽게 말할 수 없는 개념이다. 서로가 다 다른 주체이면서 공동체가 가능한가? 내 옆에 있는 아내나 친구 혹은 이웃, 아니 내 안에 있는 낯선 나(타자)조차 인정하려들지 않으면서 하나로 같아지는 공동체가 가능한 것인가? 다름 속에 같음이 있고 같음 속에 다름이 있다고 원효는 말한다. 이질과 동화의 차이를 뛰어넘는 원융무애의 경지에서나 가능한 - (세계에서는 자아도 버리고 탈아도 넘어서 무아에 이르는 개체가 있을 것이며 그 개체안에 신령한 우주 하느님이 또아리를 틀고서 체천의 우주적 싸움을 실천해나가고 있을 것이다만......) 공동체를 우리 대중들이 쉽게 이야기하는 것은 저 편에 있는 하늘나라를 가지고 사기치는 종교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갑자기 광장에서 최인훈이 기독교와 공산주의를 비교한 것이 떠오르는군) 그리하여 나는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굳어버린 공동체(共同體)라는 개념을 버리고 공통체(共通體)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쓰고 싶다. 서로 이바지하면서, 자기이면서, 아니면서, 지키면서 때로 동同하고 통通하면서 다른 생체(生體)들과 이합집산하는 연합체로 말이다.

어떤 개체나 집단의 정체성과 공동체성도 그 개념과 실체라는 허상에 매달리는 한 당분간 쉽게 찾아지지 않을 것이다.(형상은 형상이 아니다. 파이프는 파이프가 아니다!) 혼돈으로부터 싹트는 새로운 미로의 길에서 사람들의 꿈틀거림은 탈주하는 민중-생명체들의 동태적-역학적 고민과 노력 속에서 만들어질 것이므로.....


하나. 원자 대 네트워크에서 모바일로

북한 핵이 세계를 시끄럽게 만든다. 핵(核)이 무엇인가? 원자의 중심 아닌가
그/녀들의 연쇄 충돌이 지구를 몇 번 부수고도 남는 가공할 위력의 힘으로 재생된다. 2002 대선에도 적지 않을 영향을 끼칠 북의 핵은 21세기의 생존을 가늠하는 중요한 잣대이다. 그리고 그 이면에 서족(西族)의 추장국인 미국이 있다. 미국이야말로 핵의 원조이고 거두이다. 남근의 표상이고 권력의 핵이다. 그게 핵의 정체다.
그런 미국을 흔드는 사건이 동족(東族) 한국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제 그 조짐은 미국 워싱턴을 거쳐 시엔엔 비비시 알카이다를 넘어서 지구촌 곳곳으로 스며들 것이다. 인터넷 혹은 네트워크의 힘이다.
21세기는 핵 대 네트워크, 서족의 핵 대 동족의 네트워크 싸움이 될 것이다. 이 개벽적인 문명 변화의 첨병이 소위 네티즌이다. 그들은 민중인가? 80년대의 반미 전사와 다른 윤민석 신해철 윤도현은 21세기의 새로운 전사이다. 네트워크로 율려로 무장한 그들은 남근적 핵무기로 무장한 미국 제국주의와 신자유주의를 무너뜨리는 작은 새싹이다. 사이버 공간에서, 사이버를 가로지르며, 사이버를 비판하고, 사이버로 싸우는 모바일 전사들이 21세기를 이끌어갈 것이다.
지난 세기의 유물 형상론은 당분간 그 자리를 쉽게 내주지 않을 것이지만 그 균열과 붕괴의 속도는 갈수록 가속화될 것이다(절대권력의 절대부패처럼, 절대속력의 절대가속화를 부를 것이다) 두 사람의 영혼이 하늘에서 울리는 미세한 떨림과 움직임으로 미국은 무너진다. 그게 21세기다.


하나. 통일은 미친 짓이다?

사랑이 움직이는 시대에 결혼은 미친 짓이라고 외치는 사람이 있다. 가상현실로 결혼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취한 대중들에게 각성을 요구하는 이 영화-소설은 두 사람의 관계의 최고 형태인 결혼과 두 민족(?)의 관계의 최고 형태인 통일을 떠올리게 한다. 결혼이 두사람의 통일이라면 통일은 남과 북의 민족적 결혼(結婚)일 터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허위 결혼-통일론은 많으나 진정한 결혼/통일은 없고 오히려 그것을 가로막는 무수히 많은 벽들이 존재한다. 크게는 돈과 이념으로 치장된 보이지 않는 욕망들이다.
6.15 정상회담이 갖는 의미는 말로 할 수 없다. 김대중과 김정일의 정치쇼라고 폄하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런 과정이 없었다면 아마 한반도는 이라크 이전에 벌써 불바다로 변했을런지도 모른다. 통일논의의 불씨를 피운 남북 정상의 만남은 갖가지 흡수통일론을 경계하면서 남북이 만날 수 있는 다양한 길을 열어놓았다. 이제 통일(通一) 의지는 통일(統一)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
흡수 통일론자들이 원하는 동일과 서로 다름을 인정하면서 하나를 지향하는 통일은 매우 다르다. 낮은 단계의 연방제와 국가연합의 일치점을 찾아나가면서 통일 논의를 진전시켜나가자는 것은 한반도의 역사를 바꾸어놓은 것이다. 그 밑바탕에 북은 남을, 남은 북은 인정하고 존중하는 대화의 원칙과 정신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분단 반세기는 적잖은 차이를 양산시켜 왔지만 세상에 근본적으로 다른 종자는 없는 법이다. (어찌보면 이단(異端)도 다 예수의 사람들이 아닌가! 끝(단端이 조금 다를異 뿐이지) 분단시대는 대립과 갈등으로 많은 죽임과 분열이 있었지만 이제라도 공멸을 피하기 위해 서로 만나고 대화를 시작한 것은 한반도의 민족사적, 세계사적 운명의 방향을 가늠하는 중요한 일이다. 남북이 상대를 자기 안의 타자로 보는 인식과 현실의 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는 원효가 금강삼매경론에서 보여준 같으면서도 다른(亦同亦異) 혹은 같지 않으면서 다르지도 않은(非同非異) 인식의 세계를 보여준 것에 대한 첫걸음이다. 타자와 차이에 대한 무감각이 현대의 비극이라면 이제 그 비극을 넘어서는 첫걸음에 축하를 보낼 일이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대화(對話)의 힘을 타고 말 달리자

단선적인고 직선적인 생명의 진화가 아니라 무궁한 생명의 조화를 외친지도 오래 되었다. 수렴 확산을 거듭하며 뻗어나가고 돌아오는 생명의 움직임은 이제 새문명의 싹과 관계론을 창출한다. 그 중심에 화이부동의 실현을 꿈꾸는 대화가 있다. 마주 대하여 이야기하지 않으면 만남도 창조도 싹트지 않는다. 나와 너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침묵과 말씀의 지경을 오락가락 하면서 새역사와 문명은 탄생한다. 과거의 원한이 해소되고 미래의 희망이 다가온다. 그리하여 사라져가는 시간과 공간의 틈새에서, 소멸되어가는 너와 나의 틈새에서 우리 같이 말 달리자. 21세기형 정착세계의 유목민들이여


살다보면 그런 거지 우후 말은 되지
모두들의 잘못인가 난 모두를 알고 있지 닥쳐!
노래하면 잊혀지나 사랑하면 사랑받나
돈많으면 성공하나 차 있으면 빨리가지 닥쳐
닥쳐 닥쳐 닥쳐 닥치고 내 말 들어
우리는 달려야해 바보놈이 될순 없어 말달리자
말달리자 말달리자 말달리자 말달리자
이러다가 늙는거지 그땔위해 일해야해
모든것은 막혀있어 우리에겐 힘이 없지 닥쳐
사랑은 어려운 거야 복잡하고 예쁜거지
잊으려면 잊혀질까 상처받기 쉬운거야 닥쳐
닥쳐 닥쳐 닥쳐 닥치고 가만있어
우리는 달려야해 거짓에 싸워야해 말달리자
말달리자 말달리자 말달리자 말달리자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지구상에서
우리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달리는 것 뿐이다
무얼 더 말하랴
이봐 거기 숨어 있는 친구! 이리 나오라구!(말 달리자, 크라잉 넛)


참고자료

김지하 전집1 철학사상(김지하)
경계인의 사색 (송두율)
소설 속의 철학(이왕주, 김영민)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 [참여사회 1월호]당신, 무슨재미로 회사다녀? 이왕재 2003.01.16 1255
» 21세기와 통일한국의 미래 유동걸 2003.01.03 1674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13 14 15 16 17 18 19 Next
/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