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것들
"이제 우리가 주류이다."
비트 세계의 『딴지일보』는 노무현 당선 이후 30대들이 얻은 자신감을 이렇게 표현했다. 아톰 세계의 『중앙일보』는 반대로 '갑작스러운 주도권 상실에 충격'이라는 제목을 뽑으면서 50대들이 느끼는 최근의 열패감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세대는 이제 이 시대의 새로운 화두가 되고 있다.
전에 모시던 사장님은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노래방에 가면 항상 그 달의 최신곡을 한 곡 뽑는 것으로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했다. 그는 신곡 모음 CD를 늘 차에서 들으며 시대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고 했다. 한편으로는 애처롭기도 했지만, 더 큰 한편으로는 존경스러웠다. 나는 그것이 성공을 위한 몸부림만이 아니라 새로운 세대와의 대화를 위한 그만의 노력이라고 믿었다.
장강의 앞물은 뒷물에 밀려 황해에 이른다. 한 시대의 가장 선진적인 상상력은 가장 젊은 이들에게서 나오는 법이다. 그래서 새로운 세대와의 교감은 구주류이든 신주류이든 기성의 세대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하다.
근대화의 주력 세대였던 한국사회에서의 50대 리더십은 상당한 곤경에 처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제일 존경한다는 박정희의 근대화 신화, 미국과의 열렬한 사랑, 생존과 경쟁의 무한질주, 공동체에 대한 '자기비하적' 평가, 목표의 성취를 위해 당연히 이용되었던 부정한 거래, 그리고 그 탐욕의 사슬. 오십 평생을 금과옥조로 여겼던 이 모든 것들이 물거품처럼 사라질 운명에 처한 것이다. 그들을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주류에서 밀려나고 있다는 패배감보다 그들이 이루어놓은 세상에서 새롭게 자라나는 신진 세대와의 소통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새롭게 부상하는 30∼40대의 자신감에는 근거가 있다. 기성의 세대가 적자생존의 치열한 경쟁에 익숙해 있다면, 역설적이게도 이들은 공동체의 가치와 위력을 체험했다. 사회적 책무와 개인 욕망의 긴장관계를 잘 다스리는 법을 학습할 기회를 가졌다는 것은 이번에 보인 30대 파워가 일회성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를 낳는다. 하지만 이들 앞에는 신구를 아우르는 소통을 이뤄야 한다는 만만치 않은 도전이 기다리고 있다.
언젠가 이들도 기성세대가 될 것이고, 신진 무리들에게 밀려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봐야 할 지도 모른다. 어쩌랴, 시대는 그렇게 새로운 기운으로 채워져 가는 법이다. 그 때 자신들을 딛고 올라서는 새로운 세대를 대견하게 지켜볼 욕심이라면 세대적 오만함을 버려야 한다. 윗세대는 굳어있고, 젊은 세대는 가볍다는, 그래서 자신의 세대가 가장 지혜롭고 실력 있다는 오만함은 자기 성찰의 기회를 가로막는다.
30대의 중간 관리자들은 요즘의 이십대들과 일하는 것이 그리 만만치 않다고 불평한다. 하긴 지금의 이십대들은 해독하기 어려운 존재들이다. 그들은 기성의 질서를 인정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지극히 개인적이면서도, 못지 않게 의존적이다. 그들은 권위를 불편해 하지만, 자율을 두려워한다. 그들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버리는 것을 고리타분해 하면서도, 성공에 대한 집착은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들은 나와 다르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직장에서 이십대의 나의 모습은 당시 30대였던 과장들의 눈으로 보면 역시 독해 불가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대표이사 앞에서 청바지 차림으로 건들거리며 프로젝트 진행 상황을 보고하고, 이틀 밤을 꼴딱 새웠다는 이유를 대며 하루를 무단으로 결근하면서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냐며 오히려 과장에게 대드는 모습이 귀여워 보였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20대의 미숙함과 불안함은 그들의 세대적 원죄가 아니라 그 나이의 모습일 뿐이다. 그들에게서 느끼는 단절감은 그들의 탓이 아니라 다른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하는 자연사적 차이일 뿐이다. 세대적 경험의 단절이 주는 낯설음은 소통을 가로막는 벽이 아니라 풍부한 소통을 촉진시키는 좋은 매개이다.
나는 요즘 이십대들에 대해 지금의 30대들과 살아온 환경과 경험이 달라서 낯선 세대라는 선입견을 버리고 오히려 마음을 열어 그들에게 한 걸음 다가가기로 마음먹는다. 그래서 그 내면을 탐지하고, 그리고 내 작은 깨달음과 의문들을 겸손하게 전송하기로 한다. 소통의 가능성은 그 자리에서 생길 것이다.
지난 월드컵 때의 기억이다. 16강 이탈리아전 후반 40분이 넘어가자 나는 패배를 인정하는 일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습관처럼 굳어버린 버릇이었다. 최선을 다했으니 아름답고 담담하게 지는 것을 인정하자. 하지만 피를 토하는 몸놀림으로 격전장을 뛰어다니는 선수들이나 그들을 응원하는 '새로운' 세대들은 한치의 흔들림 없이 승리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패배에 대한 인정이야 패배의 결과를 눈으로 확인한 후에 이루어져도 늦지 않건만 혹여 그 허망함을 조금이나마 줄이려는 영악함 때문인지 지레 포기하는데 익숙해 있던 나였다. 설기현의 골이 후반 43분 이탈리아의 골대로 들어갔을 때, 나는 가슴이 터질 듯이 기뻤다. 나는 생각했다. 너무 쉽게 패배를 인정하는 못된 습관에 빠져버린 낡은 나를 반성하고, 불굴의 투지로 오직 승리만을 향해 달려가는 것에 익숙한 새로운 그들을 찬미하리라.
내보일 것 하나 없는 나의 인생에도 용기는 필요해
지지 않고 매일 살아남아 내일 다시 걷기 위해서
나는 알고 있어 너도 나와 똑같다는 것을
주저앉지 않기 위해서 너도 하늘을 보잖아
언젠가의 그날을 위해, I see the light shining in your eyes
I'm my fan I'm mad about me, I love myself
내가 90년대를 치열하게 살았던 이십대였듯이, 자우림의 '팬이야'를 멋들어지게 뽑아내는 그들은 새로운 천년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이십대인 것이다.
하나의 시대는 결국 여러 세대의 합작물이다. 회사나 사회나 한 시대를 살아가는 다른 세대의 소통의 성패 여부에 그 미래가 달려 있는 것 아닐까?
"이제 우리가 주류이다."
비트 세계의 『딴지일보』는 노무현 당선 이후 30대들이 얻은 자신감을 이렇게 표현했다. 아톰 세계의 『중앙일보』는 반대로 '갑작스러운 주도권 상실에 충격'이라는 제목을 뽑으면서 50대들이 느끼는 최근의 열패감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세대는 이제 이 시대의 새로운 화두가 되고 있다.
전에 모시던 사장님은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노래방에 가면 항상 그 달의 최신곡을 한 곡 뽑는 것으로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했다. 그는 신곡 모음 CD를 늘 차에서 들으며 시대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고 했다. 한편으로는 애처롭기도 했지만, 더 큰 한편으로는 존경스러웠다. 나는 그것이 성공을 위한 몸부림만이 아니라 새로운 세대와의 대화를 위한 그만의 노력이라고 믿었다.
장강의 앞물은 뒷물에 밀려 황해에 이른다. 한 시대의 가장 선진적인 상상력은 가장 젊은 이들에게서 나오는 법이다. 그래서 새로운 세대와의 교감은 구주류이든 신주류이든 기성의 세대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하다.
근대화의 주력 세대였던 한국사회에서의 50대 리더십은 상당한 곤경에 처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제일 존경한다는 박정희의 근대화 신화, 미국과의 열렬한 사랑, 생존과 경쟁의 무한질주, 공동체에 대한 '자기비하적' 평가, 목표의 성취를 위해 당연히 이용되었던 부정한 거래, 그리고 그 탐욕의 사슬. 오십 평생을 금과옥조로 여겼던 이 모든 것들이 물거품처럼 사라질 운명에 처한 것이다. 그들을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주류에서 밀려나고 있다는 패배감보다 그들이 이루어놓은 세상에서 새롭게 자라나는 신진 세대와의 소통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새롭게 부상하는 30∼40대의 자신감에는 근거가 있다. 기성의 세대가 적자생존의 치열한 경쟁에 익숙해 있다면, 역설적이게도 이들은 공동체의 가치와 위력을 체험했다. 사회적 책무와 개인 욕망의 긴장관계를 잘 다스리는 법을 학습할 기회를 가졌다는 것은 이번에 보인 30대 파워가 일회성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를 낳는다. 하지만 이들 앞에는 신구를 아우르는 소통을 이뤄야 한다는 만만치 않은 도전이 기다리고 있다.
언젠가 이들도 기성세대가 될 것이고, 신진 무리들에게 밀려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봐야 할 지도 모른다. 어쩌랴, 시대는 그렇게 새로운 기운으로 채워져 가는 법이다. 그 때 자신들을 딛고 올라서는 새로운 세대를 대견하게 지켜볼 욕심이라면 세대적 오만함을 버려야 한다. 윗세대는 굳어있고, 젊은 세대는 가볍다는, 그래서 자신의 세대가 가장 지혜롭고 실력 있다는 오만함은 자기 성찰의 기회를 가로막는다.
30대의 중간 관리자들은 요즘의 이십대들과 일하는 것이 그리 만만치 않다고 불평한다. 하긴 지금의 이십대들은 해독하기 어려운 존재들이다. 그들은 기성의 질서를 인정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지극히 개인적이면서도, 못지 않게 의존적이다. 그들은 권위를 불편해 하지만, 자율을 두려워한다. 그들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버리는 것을 고리타분해 하면서도, 성공에 대한 집착은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들은 나와 다르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직장에서 이십대의 나의 모습은 당시 30대였던 과장들의 눈으로 보면 역시 독해 불가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대표이사 앞에서 청바지 차림으로 건들거리며 프로젝트 진행 상황을 보고하고, 이틀 밤을 꼴딱 새웠다는 이유를 대며 하루를 무단으로 결근하면서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냐며 오히려 과장에게 대드는 모습이 귀여워 보였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20대의 미숙함과 불안함은 그들의 세대적 원죄가 아니라 그 나이의 모습일 뿐이다. 그들에게서 느끼는 단절감은 그들의 탓이 아니라 다른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하는 자연사적 차이일 뿐이다. 세대적 경험의 단절이 주는 낯설음은 소통을 가로막는 벽이 아니라 풍부한 소통을 촉진시키는 좋은 매개이다.
나는 요즘 이십대들에 대해 지금의 30대들과 살아온 환경과 경험이 달라서 낯선 세대라는 선입견을 버리고 오히려 마음을 열어 그들에게 한 걸음 다가가기로 마음먹는다. 그래서 그 내면을 탐지하고, 그리고 내 작은 깨달음과 의문들을 겸손하게 전송하기로 한다. 소통의 가능성은 그 자리에서 생길 것이다.
지난 월드컵 때의 기억이다. 16강 이탈리아전 후반 40분이 넘어가자 나는 패배를 인정하는 일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습관처럼 굳어버린 버릇이었다. 최선을 다했으니 아름답고 담담하게 지는 것을 인정하자. 하지만 피를 토하는 몸놀림으로 격전장을 뛰어다니는 선수들이나 그들을 응원하는 '새로운' 세대들은 한치의 흔들림 없이 승리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패배에 대한 인정이야 패배의 결과를 눈으로 확인한 후에 이루어져도 늦지 않건만 혹여 그 허망함을 조금이나마 줄이려는 영악함 때문인지 지레 포기하는데 익숙해 있던 나였다. 설기현의 골이 후반 43분 이탈리아의 골대로 들어갔을 때, 나는 가슴이 터질 듯이 기뻤다. 나는 생각했다. 너무 쉽게 패배를 인정하는 못된 습관에 빠져버린 낡은 나를 반성하고, 불굴의 투지로 오직 승리만을 향해 달려가는 것에 익숙한 새로운 그들을 찬미하리라.
내보일 것 하나 없는 나의 인생에도 용기는 필요해
지지 않고 매일 살아남아 내일 다시 걷기 위해서
나는 알고 있어 너도 나와 똑같다는 것을
주저앉지 않기 위해서 너도 하늘을 보잖아
언젠가의 그날을 위해, I see the light shining in your eyes
I'm my fan I'm mad about me, I love myself
내가 90년대를 치열하게 살았던 이십대였듯이, 자우림의 '팬이야'를 멋들어지게 뽑아내는 그들은 새로운 천년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이십대인 것이다.
하나의 시대는 결국 여러 세대의 합작물이다. 회사나 사회나 한 시대를 살아가는 다른 세대의 소통의 성패 여부에 그 미래가 달려 있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