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람시의 '옥중수고'<부산일보> 1.21 [고전의 향기]

by 조민 posted Jan 22,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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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 향기] <23> 그람시의 '옥중수고'  
마르크스주의 정치 저서 최고봉, 시민사회 헤게모니 '진지전' 강조
/조민,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2003/01/21 020면 09:34:38  


지금 안토니오 그람시를 묻는다면,누군가 이렇게 힐문할 것이다. '그대 아직도 혁명을 꿈꾸는가?' 혁명과 전쟁,그리고 이데올로기 투쟁으로 점철되었던 광란의 20세기는 이미 역사의 지평 저 너머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람시의 부르주아 시민사회를 파헤친 지성의 번득임은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그람시(1891∼1937)는 서구 마르크스주의 혁명가의 대명사다. 그는 이탈리아 사르데냐에서 태어났다. 당시 새로운 통일국가 이탈리아에서는 북부지역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산업화가 추진되고 있었으나,사르데냐는 여전히 후진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빈궁 속에서 자라던 어린 그람시는 평생 병약한 몸에도 불구하고 숙명적 사회에서 억압받고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투쟁하고 고뇌했던 혁명적 삶을 살았다. 그는 대학시절 사회주의운동에 발을 디뎠고,그후 이탈리아 공산당(PCI)을 이끌던 중 1926년 투옥되면서 마지막 생애의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냈다. 파시스트 검사는 '우리는 이 자의 두뇌 활동을 20년간 멈추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람시는 건강상의 엄청난 악조건 속에서도 집필에 온 몸을 불태웠다.

'옥중수고'는 그람시가 1929년부터 1935년까지 옥중에서 집필했던 33권의 노트를 편집해 출간한 책이다. 이탈리아의 역사,국가와 시민사회 등에 대한 깊은 사색과 통찰력은 이 책을 마르크스주의 정치저작 가운데 단연 최고봉에 올려놓았다.

'옥중수고' 정치편은 '현대의 군주' '국가와 시민사회' 그리고 '미국주의와 포드주의' 세 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자코뱅주의'는 그람시 혁명사상의 열쇠 개념으로,그는 노동자·농민 동맹의 자코뱅적 정당을 '현대의 군주'로 불렀다.

그람시 사상 형성에 러시아 10월혁명이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러시아 혁명은 '마르크스에 반(反)하는 혁명'이다. '혁명은 성숙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논리는 역사적 유물론의 기계론적 해석에 불과하다. 유럽이 서(西)라면,러시아는 동(東)이다. 동과 서는 왜 다른가? 바로 '시민사회'의 존재 양식에서 다르다. 러시아와는 달리 유럽은 다양한 계급,신분,집단의 정치적·문화적 이해관계가 착종하는 시민사회가 발달돼 왔다.

부르주아지의 헤게모니는 '강제와 동의'에 기반하고 있다. 그런즉 국가혁명에 앞서 먼저 시민사회가 정복돼야 한다. 시민사회의 혁명은 레닌식의 기동전(war of maneuver)으로 불가능하다. 그람시는 헤게모니 장악을 위한 진지전(war of position)방식의 정치투쟁을 설득했다. 마지막으로 당시 '미국식' 생산방식과 문화의 충격에 따른 계급혁명의 유동적 상황을 환기시키기도 했다.

1960∼70년대 서구 사회에서 뉴레프트 운동과 유로코뮤니즘은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전자가 지식인 중심의 사회주의 이론활동이라면,후자는 좌파정당의 선거를 통한 정권 장악으로 나타났다. 양자는 모두 평화적 방식에 의한 사회주의로의 합법적 이행을 추구했다.

뉴레프트와 유로코뮤니즘은 이론적·실천적 차원에서 그람시의 당당한 재림이었다. 1980년대 중반,해방과 자유를 외치는 바리케이드 이 쪽에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 그람시가 찾아왔다. 한국사회의 변혁을 꿈꾸던 뜨거운 가슴과의 짧은 만남이었다. 이제 그의 사상의 새로운 조명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