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은 표준에서 나온다

by 이윤주원 posted Jan 23, 2003
권력은 표준에서 나온다
-2002 대선, 구시대의 표준과 새시대의 표준이 자웅을 겨룬 한 편의 드라마-


<모든 권력은 표준에서 나온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 중국대륙을 붉은 깃발로 뒤덮은 중국공산당의 지도자 마오쩌뚱이 했던 말이다. 실제 마오쩌뚱의 중국공산당은 무력투쟁으로 공산혁명에 성공했다.

역사적으로 많은 권력이 총구(폭력)로부터 나왔다. 한국현대사를 암흑으로 빠트린 박정희와 전두환의 군부정권도 총구를 앞세워 권력을 찬탈했었다.  

총구는 권력으로 들어가는 문일 뿐, 권력의 모든 것은 아니다. 권력을 장악하는데 있어 '총'으로 상징되는 폭력이 필요할지는 모르지만 통치의 근본이 되는 '표준'을 확립해야만 권력이 유지된다. 박정희와 전두환이 일으킨 군부 쿠데타가 역사적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했던 것은 통치의 표준을 확립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권력은 표준에서 나온다. 권력은 스스로 표준을 만들어낸다. 또한 표준을 타인에게 강요함으로써 권력을 행사한다.

중국대륙을 통일한 진시황제는 문자, 도량형 등의 통일로 춘추전국시대의 '표준'을 붕괴시키고 새로운 표준을 만들려고 하지 않았는가. 고려의 기틀을 잡은 광종도, 형제간의 살육으로 권력을 잡은 태종도 왕조의 백년대계를 세우고자 한 일이 결국 그 시대 통치 기준인 '표준'을 만드는 것이 아니었던가.

전제왕정을 이끌던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짐이 곧 법"이라고까지 했다. 봉건시대 절대권력을 가졌던 인물만이 했을법한 말이다. 최고 권력자인 루이14세가 권력의 표준을 만들 수 있었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그의 말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권력은 스스로 표준을 만들고, 표준은 권력의 배경이 되어 통치의 수단을 제공한다. 그렇다면 과연 표준은 영원할까? 표준은 스스로 변화할 수 있을까?

권력은 영원하지도 스스로 변화하지도 못한다. 역사적으로 어떤 권력이 스스로의 기득권을 내놓고 변화했던가. 아무리 역사책을 훑어봐도 찾을 길이 없다. 절대권력 중에 부패하지 않은 권력은 없었다. 권력은 속성상 변화를 바라지 않는다. 권력의 속성이 이러할진대 어찌 권력의 근원인 통치의 '표준'이 변할 수 있으랴.

변화하지 못하는 표준은 표준이 아니다. 다만 기득권 유지의 법적·제도적 장치일 뿐이다. 표준이 기득권 유지의 법적·제도적 장치로 전락했다는 건 권력이 노후하고 부패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변화를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권력과 표준은 구시대의 유물일 뿐이다. 다시 말해 죽은 전통이 될 뿐이다. 어찌 모든 죽은 자들의 전통이 산 자들의 삶을 억압할 수 있겠는가?


<2002 대선, 구시대의 표준과 새시대의 표준이 자웅을 겨룬 한 편의 드라마>

2002년 한국의 대통령 선거는 죽은 표준과 새롭게 떠오르는 표준이 승부를 벌인 한 편의 드라마였다. 그렇다. 조중동으로 대변되는 노후하고 부패한 권력과 인터넷 네티즌이 벌인 숨막히는 승부였다.

2002년, 한국사회의 킹메이커라고 자부하는 언론권력, 구체적으로 조중동은 지난 97년 대선에서 대통령을 만들지 못했던 한을 이번 대선에서 풀려고 단단히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념, 경제정책, 대미외교 등에서 그들만의 기준을 제시하고 이를 벗어나려고 하는 노무현 후보에 대해 '노무현 죽이기'를 일삼았다. 조중동이 내세웠던 표준인 반공·성장·안보·안정·수구 등은 모든 죽은 자들의 전통일 뿐인데, 구시대적 표준을 사회의 잣대인양 남용하는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살아있는 사람들은 평화·경제정의·반전·화해를 새시대의 '표준'으로 내놓았다. 이들은 인터넷(모든 인터넷 사이트는 그 성격상 대안언론의 기능을 하고 있다.)을 도구(커뮤니케이션 매체)로 삼아 힘을 겨룬 끝에 승리했다. 구시대적인 '표준'을 거부하는 시민들에게 무릎꿇은 것이다.

인터넷의 혁명적인 보급이 조중동으로 하여금 더 이상 정보를 독점하지 못하게 했다. 인터넷에서 대안언론(오마이뉴스, 대자보, 참세상 등)을 접했던 많은 수의 네티즌들에게 더 이상 조중동의 편파적이고 선정적 보도는 먹힐 씨알이 아니었다.

2002년 대선에서 조중동으로 대변되는 언론권력에 네티즌들이 승리를 거뒀다. 하지만 거대 권력은 아직도 건재할 뿐만 아니라, 거대 권력의 만들어 낸 표준만 바꾼다고 세상이 바뀌지는 않는다. 거대 권력이 내세우는 표준과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미세 권력의 표준들도 같이 바꿔가야 한다.


<자격주의 시대를 넘어서>

한국사회는 시장, 국가, 언론의 거대 권력뿐만 아니라, 다양한 표준을 내세우는 미세한 권력들이 있다. 대부분 대한의사회, 대한약사회, 대한변호사협회 등 이익단체의 형태로 존재한다. 이런 미세 권력들이 내세우는 표준은 성장위주의 시대에 정립된 '자격주의'이다. 60년대∼90년대 초까지 성장위주의 시대에 '자격주의'가 한국 경제성장의 원동력이 된 것은 인정한다.

그렇지만 2000년대는 더 이상 '자격주의'가 한국의 미래에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90년대 중반 한국사회에 다양성이 퍼지기 시작하면서 '자격주의'는 진보성을 상실하고 개혁과 변화의 발목만 잡고 있다. 의사와 한의사의 갈등, 법조인 대량 양성을 사보타주하는 기존의 법조계 등 여러 이익단체들이 자격제도를 강화하여 공익보다 사익을 챙기려는 모습들만 보인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이 새 시대에는 새로운 '표준'들이 필요하다. 새로운 표준은 평화·경제정의·반전·화해가 돼야 한다. 한국사회의 표준이었던 성장위주의 '자격주의'가 우리사회에 무엇을 기여했는지 묻고 싶다. 일부 의사의 이야기지만 의사 자격증을 가진 이들은 병자의 생명을 담보로 이익을 챙기려 했지 않았는가. '자격'은 이미 '자격'이 아니라 '기득권'이 돼버렸다.

우리는 거대한 권력이든 미세한 권력이든 죽은 '표준'의 전통을 붙잡은 채 기득권을 놓지 못하는 세력과 결별해야 한다. 새로운 정보환경에 맞는 부패하지 않은 '표준'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NGO가 정치세력화해야 한다. 다시 말해 거대 권력이든 미세 권력이든 모든 권력과 맞짱을 뜰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는 뜻이다. NGO가 건강하게 정치세력화를 성공하지 못한다면, 소멸하거나 낡은 표준을 제시하는 기존 권력의 품안으로 투항해버릴 것이다.

NGO는 거대한 권력이든 미세한 권력이든 낡고 부패한 권력(표준)을 해체시키고 새로운 대안으로 성장 잠재력이 있다. NGO의 건강한 정치세력화만이 구시대의 유물이자 시민들의 삶을 억누르는 크고 작은 전통(표준)을 해체시키고 새로운 가치관을 뿌리내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