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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작가 류연산의 일제시대 인물발굴
- 그러나 그의 인간성은 따뜻했다? -
류연산
2001년 10월 22일 취재차 장춘에 갔을 때 만난 원지희 옹(1919년 조선 함흥 태생, 장춘시 조양구 연안대가에 거주, 전 건축설계원 고급공정사)은 소년시절 장춘에서의 생활에 대해 아주 감회 깊게 말했다.
“조선에 있을 때 집이 곤란해서 4학년만 다녔단 말이. 신이 없어서 겨울에도 짚신을 신었지라우. 소학교 4학년 들어가는 해에 중퇴하고 일했슴다. 그리고 이듬해에 함흥시내에 가서 소학교를 겨우 졸업했지. 중학교는 돈이 없어서 못 갔지라우. 친구가 봤던 교과서를 가지고 자습했슴다.”
그는 마침 만주국 일본대사관에서 과장으로 있던 외삼촌을 믿고 16세에 신경(지금의 장춘)으로 왔다고 한다. 삼촌의 소개로 『만선일보(滿鮮日報)』에 들어가 급사 일을 하였으며 1938년 장춘공학원에 입학하였다고 한다. 이 학교는 밑바닥 무산자들이 다니는 야학이었단다.
“공부하면서 신문배달을 했단 말이. 신문이 하루 두 번 나오는데 오전 한 번, 오후 4시에 한 번 나온단 말이. 학교 등교시간은 오후 6시부턴데 4시에 나온 걸 가지고 배달하고 나면 지각한단 말이. 강의를 제때에 듣지 못했지. 그래 애를 먹었는데 최남선 사장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지라우.
최남선 아시오? 3.1 운동 때 독립선언문 쓴 분인데 그 후에 일본 사람한테 투항했지. 신문사 사장인데 이분이 차도 안 타고 꼭 조선 두루마기 입고 조선옷 입고 댕기지 말이. 내가 신문 배달할 때 장갑 없어서 이래구 댕기지 말이(팔짱을 낀 시늉을 해보였다). 그러다 최남선 사장님을 만났는데 그분이 자기 손으로 내 손을 만져주고, 빨갛게 언 내 손에 자기가 끼었던 장갑을 끼워주는 거라.
(내가 공부하는 걸 알고는) 사장실 소제하고 이 방에서 자라고 했지. 그 영감이 돌봐주어서 낮에는 급사 노릇 하고 밤에는 신문 배달하고, 원래는 공인들과 같이 있었는데 공인들과 있게 되면 공부 못한다고 하면서 사장실에서 자고 소제하게 했단 말이. 1938년도에 학교 들어가서 41년까지 4년 동안 학교를 다녔지 말이.”
원지희 옹의 기억 속에 살아 있는 최남선은 아버지와 같이 자상하고 정이 많은 분이었다고 한다. 설 명절 같은 때면 한낱 급사에 불과한 그를 집에 데리고 가서 손님으로 대접하기도 했고 꼭 공부를 잘해서 일본인들이나 권세 있는 사람들이 다니는 제국대학 같은 데는 못 가더라도 그들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되어 조선인의 본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했다면서 “내가 보기에 최남선은 민족주의자란 말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민족주의에서 ‘만선일체’로
『만선일보』는 1937년 만주에서 발행된 친일성향의 한국어 일간신문이었다. 1933년 당시의 만주국 수도였던 신경(新京)에서 창간된 친일적 한국어 신문 『만몽일보(滿蒙日報)』가 용정(龍井)에서 발행되고 있던 역시 같은 경향의 한국어 신문 『간도일보』를 통합하여 단일지로 발간하면서 제호를 바꾼 것이다. 당시 만주에는 1백50만에서 2백만 명에 이르는 한국인이 살고 있었으며 정책적으로 이들을 대상으로 언론통제정책을 단행하고 ‘만선일여(滿鮮一如 : 만주와 조선은 하나다)’를 달성하며 5족협화(한족, 만주족, 몽골족, 조선족, 일본족의 단결)를 도모하려는 데 이 신문의 취지가 있었다.
일제로부터 많은 자금을 보조받은 『만선일보』는 조,석간을 발행했고 광복이 될 때까지 만주지역에서의 유일한 한국어 신문으로서 이른바 당시 한민족 유명인사들에 의해 꾸려지면서 한국 내에도 지국을 설치하기도 했다. 초기에는 사장에 이용석, 고문에 진학문 최남선 편집국장에 염상섭 홍양명 등이 취임했다. 2002년 10월 초 서울에서 만난 신동환 선생(申東煥, 1928년 충남 서천군 서천면 출생)의 부친 신서야(원명 신영철) 선생도 1938년 『만선일보』에 취직했다고 한다.
“아버지(신서야)는 1938년엔가 (만주로) 갔어요. 아버지는 신문학 초기부터 해방 전까지 문학평론을 했지요. 육당 최남선, 춘원 이광수 이런 사람과 함께 활동했지요. 김동리, 염상섭은 다 그 후에 (문단에) 나온 사람들이구. 그때 『만선일보』 주필이 최남선인데 아버지는 그하고 아주 가까운 사이였지요. 염상섭이 편집국장, 아버지는 학예부장이었지요.”
이 밖에도 황건, 안수길, 김창걸, 박영준, 김조규 등이 기자로 있었고 현경준, 이학성(이욱) 등 많은 문인들이 『만선일보』를 통해서 배출되었다.
“이듬해 나는 어머니하고 신경으로 갔수다. 장춘대가 대동광장이 있는 곳에 집이 있었지요. 장춘 역에서 쭉 가면 대동광장이 있고 거기에서 부채살처럼 거리들이 펼쳐 있었는데 우리는 장춘대가에 살았지요. 원래 염상섭씨가 살던 집이었는데 그 양반이 살다가 『만선일보』를 그만두고 대동아건설국인지 하는 데 갔어. 우리 집은 국민주택 비슷한 수준이었고 여러 채가 붙어 있었어요. 일제말기 김조규씨가 징역을 피해서 만주로 왔잖아요. 우리 옆집에 방을 빌려 살고 있었어요. 우리 집에서 편집국 사람들이 자주 와서 술을 마시고 그랬어요.
그때 자주 온 사람들이 카프 평론가 이갑기씨, 유명한 시인 박팔양, 영화평론가 이태호, 좌우간 만주의 이름 있는 문인들은 다 왔다 갔지요. 최남선씨는 건국대학 교수를 하니까 건국대학교 관사에 있었어요. 동양사 전공교수예요. 그러면서 『만선일보』 주필을 했지. 내가 가끔 아버지를 따라 놀러 갔잖아요, 서고가 어마어마해요. 근엄한 양반이지요. 한복을 입고 다녔고 말이 아주 적지는 않았는데, 이 양반이 조선역사책도 내고 조선상식문답 수십 가지를 냈지 않아요. 동양사에 대해서는 일본 학자보다도 더 달통했었으니까.”
당시 문학소년 신동환 선생의 눈에 비친 최남선은 한복을 입은 근엄한 조선사학자였다. 최남선의 서재에서 그의 말에 도취되곤 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그는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문학가, 사학가. 호는 육당. 19세의 젊은 나이에 신문관(新文館)을 창설. 1908년 그가 발행한 『소년』은 당시 민족의 새 희망과 새 이상을 발표하던 잡지였고 그로 해서 최남선은 한국 근대문학 개척기의 선구자로 부상했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독립선언문을 기초하고 체포되어 2년 10개월 동안 감옥생활을 하고 출옥, 다시 잡지 『동명(東明)』을 발행하면서 국사의 연구에 몰두, 국사를 통한 민족적 주체의식의 확립을 목표로 많은 저서를 내어 학계의 원로가 되었던 최남선이다.
시켜서 한 친일?
그는 1939년 일본관동군이 만주에 세운 건국대학에 와서 꼭 4년을 살면서 만주에 거주하는 조선인 학자, 문인들의 구심점이 되기도 했었다. 최남선을 주축으로 해서 모인 이들 문인들은 만주 신경을 중심으로 일제식민지인 한국 내에서 할 수 없게 된 한글문학을 이른바 오족협화, 왕도낙토의 만주국이라는 특수한 환경 속에서 계속해 왔다. 『만선일보』의 문예란에는 시, 소설, 수필 등 여러 장르의 문학작품들이 발표되었고 박영준의 『쌍영』과 같은 장편소설도 연재되었다. 그리고 『만선일보』 학예부장 신서야는 1941년 만주조선인 소설집 『싹트는 대지』를 출간했고, 『만선일보』 기자 김조규는 『재만 조선인 시집』을 출판했다. 1943년 만선학해사(滿鮮學海社)의 상강 홍병철, 매원 유찬근은 『반도사화와 낙토만주』를 세상에 내놓았다.
1939년 한 해 동안 『만선일보』에 발표된 시가 무려 2백80여 수인데 그 중 90% 가량이 고향을 그리는 망향 시와 님 잃은 애절한 사랑 시였고 소설집 『싹트는 대지』에서도 박영준의 「밀림의 여인」을 제외한 기타 작품들은 모두가 개척민의 삶을 그린 것이었다. 『재만조선인 시집』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리 만주개척민은 예나 이제나 호미나 바가지쪽 밖에 가지고 온 것이 없으나 그 바가지에는 생활이 담겨 있고 그 호미 끝은 거치른 정서를 돋구기에 넉넉하니 여기에서도 문학은 자라났다. 이 작품들만은 역시 호미와 바가지와 피땀 이외에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간민(墾民) 속에서 자라난 것이다. 그 속에서 호흡하고 그 속에서 살찌고 기름진 시혼(詩魂) 이 나올 수 있는 만주조선인의 문학이다. 일망무애(一望無涯)의 황막한 수수밭에서 진흙 구덩이를 후벼 파고 돋아 나온 개척민의 문학이다. 그 어느 작품에서나 만주의 흙내 안 남이 없고 조선 문학의 어느 구석에서도 엿볼 수 없는 대륙문학, 개척자 문학의 특징과 신선미, 신생면(新生面)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전 조선 문학을 위하여 큰 수확이 아닐 수 없을 것이요, 작가와 편자의 자랑이라 할 것이다.”
『싹트는 대지』의 서문에서 밝힌 염상섭의 이상의 말을 ‘안경’으로 삼아 당시의 작품들의 속을 들여다보면 이주민의 생존환경에 뿌리 박고 그들의 삶의 모습을 될수록 그대로 보여주려고 한 작가의 숨은 뜻이 작품의 내면에 두텁게 깔려 있음을 본다. 동시에 또 염상섭이가 서문에서 희망했듯이 ‘신만주의 협화정신을 체득한 국민문학’을 지향하여 만주국의 이념에 영합한 흔적이 표층에 두드러져 있다. 문학평론가 최삼룡 선생은 그런 경위를 ‘작가 의식성향의 동요와 이념적 좌절이라는 두 측면’으로 분석하고 있다.
당시 만주에서 활동한 대부분의 작가가 이러한 이중적 경향성을 가지고 있었다. 오랫동안 『만선일보』에서 활동하다 광복을 앞두고 신경에서 사망한 신서야와 같이 언론계에서 깨끗한 민족양심을 보인 분들도 일제의 식민지인 만주국을 “민족협화 왕도실현의 이상적 신국가”라며 어색한 표현을 사용했다면 “간 데마다 일본 사람 되시기 바라오며”(1940년 신년축사 「재만 반도동포께 올림」에서)를 외친 춘원 이광수나 “일본 민족과 조선 민족은 명실공히 운명공동체”이므로 “동아공영권(東亞共榮圈) 건설에 우리도 적극적으로 참가해야 한다”고 고함을 지른 이웅길(창씨명 淸原雄吉)처럼 발광적으로 친일을 선전한 사람도 있다.
중국에는 양 머리를 걸고 개고기를 판다는 말이 있다. 개를 토템 숭배한 만족이 청나라를 세운 다음 개고기를 먹지 못하도록 어명을 내리자 개고기를 즐겨 먹던 한족들이 양을 핑계로 어명을 피해 갔다는 고사성어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문학에 대한 탄압이 심한 때일수록 문인학자들은 만세 소리 속에 칼을 갈기도 했었다. 그러한 문장을 유심히 살펴보면 대개 글자들 틈새에서 글을 발견할 수 있다. 중국의 문호 노신은 소설 『광인일기』에서 “아무튼 잠이 오지 않아 밤중까지 책을 보다가 글자들 사이에서 글을 발견하였는데 온통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것이다”라고 한 것처럼 그러한 문장들은 구밀복검(口蜜腹劍) 식이다.
이미 깨진 골동품을 다시 주워 붙인들
어떤 때 나는 최남선의 친일행위도 그런 식으로 이해해 주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받는다. 최남선, 이광수, 홍명희를 20세기 우리 민족의 삼재(三才)라고 했는데 이광수를 잃고 다시 또 최남선까지 잃는 마음의 고통을 참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를 학술계의 대표자로, 민족양심의 대변자로 갖고 싶은 욕망 때문이리라.
그러나 그것은 나름대로의 욕망일 뿐이었다. 지난 4월 우연히 접해 본 『반도사화와 낙토만주』라는 책은 가시가 되어 나의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 이 책은 만선학해사의 홍병철, 유찬근이 “혈족적으로 보나 역사적으로 보나 동원분류(同源分流)이요 영원불가분(永遠不可分)의 밀접한 관계에 있는 내선만(內鮮滿)의 문화적 결합을” 위한 사업에 “공헌되는 바 있다 하면 더 말할 수 없는 행복으로” 알고 5년 동안의 노고를 아끼지 않고 원고를 모아서 찍은 책으로 만주국 건국 10주년에 헌정된 도서이다.
책을 펼쳐 보면 이른바 만주제국 황제의 조서(詔書)며 조선 총독의 유고(諭告)를 책머리에 싣고 만주국 총리대신 장경혜(張景惠), 일본국 총리대신 도오조 히데키(東條英機), 중화민국정부 주석 왕정위(汪精衛) 등을 받들어 모시고 이범익, 최남선, 이광수, 박팔양 등 조선인 정객, 학자, 문인 1백여 명이 책 속에 비좁게 앉아서 주절거리고 있었다.
어떤 이는 역사를 말하고 어떤 이는 현실을 말하고 어떤 이는 예술을 말하고 어떤 이는 인물을 말하고 입 가진 사람마다 찧고 까불어댔는데 결국에는 “대동아전쟁에서의 일본군의 승리”에 고무돼 “동방공영의 성역 건설의 개가”를 외치며 “오족협화 왕도낙토”를 소리 높이 외치는 데 입들이 모아졌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가야마 미쓰로오(香山光郞)로 나타난 이광수는 정치와는 먼 ‘반도소설사’를 말하는 데 그쳤고 최남선의 「가지(箕子)는 지나(支那)의 기자(箕子)가 아니다」 「만선약사(滿州略史)」 「간도와 조선인」 「조선과 세계의 공통어」 「만주의 명칭」 「몽고의 명의(名義)」 등 여섯 편의 글들은 모두가 학술에 관한 것이었다. 그런데 문장마다 매듭을 지면서 일제의 침략을 미화하고 있어서 기분이 여간 잡치는 것이 아니었다.
“1931년 9월 18일에 만주사변의 발발(勃發)을 보고 익년 3월 1일 만주의 건국선언이 발포되기에 이르렀다. 만주 일역(一域)은 고래로 제 민족 각축의 연무장(演武場)이요, 신제국 생성의 요람지로 역사도 길고 풍운도 야단스러워 왔지만 이제 민족협화와 왕도실현의 이상국(理想國) 건설국으로 뽑힌 것은 진실로 만주에 역사 있어 온 이래의 빛난 책장일 것이다.”(「만주약사」 중에서)
“이제 풍운회명(風雲晦冥)의 만주는 오족협화의 왕도낙토로 새 출발을 하여 자광(慈光)과 은로(恩露)가 무른 조선 민족의 위에 보급균첨(普及均霑)하고 있나니 신천지에 있는 금후 조선인의 발전은 진실로 측량하지 못할 것이 있게 되었다.”(「간도와 조선인」 중에서)
문맥을 보면 구질구질하게 이러한 말을 할 필요는 없었음에도 억지다짐으로 군더더기를 만든 것을 보면 이것이 당시 육당의 진심인지 아니면 가식인지 그 마음이 헷갈린다. 대개 글이란 시작과 마지막에 작가가 하려고 하는 중심이 자리하는 데 위에서 선을 보인 친일 언사들로 문장의 매듭을 지은 육당의 본심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훗날 최남선은 자신의 친일행각을 변호하여 학술을 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라고 했다.
『세계인명대사전』 편찬자도 최남선을 다루면서 글맥 속에 학자로서의 최남선을 살리려고 조심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러나 1925년 일본이 한국 식민정책의 진척을 위해 총독부 내에 조선사편수위원회를 둘 때 편수위원직을 맡았으며 뒤에 조선총독부 중추원참의를 지내고 일본관동군이 만주에 세운 건국대학에서 4년간 교편을 잡았으며 귀국 후 1943년 12월에는 재일 조선유학생의 학병 지원 권고 강연차 이광수, 김연수, 이성근 등과 도쿄에 파견되었었다. 이로 인해 8?5해방 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비난을 받았으나 끝까지 학자적 소신을 지켜 『한국역사대사전』을 집필하다가 중도에 병사했다.”
마치 깨진 골동품 조각을 하나하나 조심조심 주워 모아 ‘그러나’ ‘이로 하여’ ‘소신을 지켜’ 등등의 어휘들을 풀로 삼아 적재적소에 땜질을 한 그 솜씨가 아무래도 서툴다는 느낌이 아쉬움을 불러 나의 마음을 채웠다. 최남선은 땜질하기엔 너무나 험하게 깨진 골동품이 되어 있다는 사실이 나의 마음을 울렸다.
소인 최남선, 대인 최남선
일부 한국인들은 최남선의 학술성과를 들어 최남선이 일본침략을 위해 선동을 했다고 해서 무조건 친일파로 몰아붙여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서슴지 않는다.
“억지로 끌려나가서 한 거지요. 나가서 하라니 어떡해요. 춘원은 자의적으로 움직인 흔적이 있어요, 그런데 육당은 그렇게는 안 했어요. 나와서 얘기를 하라니 어떡하나요. 못하겠다고 나자빠질 수는 없잖아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논리로 간다면 최남선은 물론 이완용까지도 친일파에서 제외시켜야 한다는 결론에 빠진다. 안 하면 죽인다는데 어쩔 텐가? 살기 위해선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일제치하에서 극소수의 독립운동가를 제외하고 천황폐하 만세를 부르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그렇다면 3천만 한민족 모두가 친일을 한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는 그러한 주장을 들고 나오는 사람과 같은 서민의 논리일 뿐이다. 보통사람은 살기 위해서 일제의 식민지 노예가 되어 살아도 무방하다. 왜냐하면 그는 그 자신일 뿐이며 그들한테는 먹고사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윤해영이 『반도사화와 낙토만주』에 「낙토만주」라는 친일 시를 발표하였다고 해서 그를 친일파라고 매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그 자신일 뿐이기 때문이다. 안수길이 『새마을』과 같은 친일 소설을 내놓았다고 해서 그를 친일파로 타매하지 않는다. 역시 그 자신은 그 자신만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완용이나 이광수나 최남선의 경우는 다르다. 왜냐하면 그들은 벌써 개인이 아닌 민족과 나라의 대표자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이완용은 이완용이기 앞서 한국의 총리대신이다. 그러므로 한일합방조약에 이완용이 한 서명은 그 개인의 서명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이광수나 최남선은 이광수나 최남선이기 앞서 한국 문단과 사학계의 대표자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한 편의 글, 한 마디 말은 그 시대 민족과 나라의 숨결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한테 1905년 을사조약 체결로 의분을 참지 못해 자결하면서 민영환이 “나라의 부끄러움과 백성의 욕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대체로 살기를 바라는 사람은 반드시 죽고 죽기를 기약하는 사람은 도리어 삶을 얻나니 여러분은 어찌 이것을 알지 못하는가”라는 비장한 유서로써 갈 길을 분명히 가르쳐 주었다고 본다.
인간은 소인과 대인으로 나뉘며 한 인간의 인격도 소인과 대인으로 갈린다고 본다. 원지희 선생한테 비친 자상한 부친과 같은 최남선과 신동환 선생의 기억 속에 살아 있는 근엄한 사학자인 최남선은 소인의 최남선이다. 대인으로서의 최남선은 1925년 조선사편수위원회 편수위원직을 맡았을 때 벌써 죽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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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연산 | 연변대학과 광주 중산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했으며, 현재 연변인민출판사 종합편집부장을 맡고 있다.
2003년01월23일
* 지금부터 읽을 만한 글이 있으면 하나씩 퍼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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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작가 류연산의 일제시대 인물발굴
- 그러나 그의 인간성은 따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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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10월 22일 취재차 장춘에 갔을 때 만난 원지희 옹(1919년 조선 함흥 태생, 장춘시 조양구 연안대가에 거주, 전 건축설계원 고급공정사)은 소년시절 장춘에서의 생활에 대해 아주 감회 깊게 말했다.
“조선에 있을 때 집이 곤란해서 4학년만 다녔단 말이. 신이 없어서 겨울에도 짚신을 신었지라우. 소학교 4학년 들어가는 해에 중퇴하고 일했슴다. 그리고 이듬해에 함흥시내에 가서 소학교를 겨우 졸업했지. 중학교는 돈이 없어서 못 갔지라우. 친구가 봤던 교과서를 가지고 자습했슴다.”
그는 마침 만주국 일본대사관에서 과장으로 있던 외삼촌을 믿고 16세에 신경(지금의 장춘)으로 왔다고 한다. 삼촌의 소개로 『만선일보(滿鮮日報)』에 들어가 급사 일을 하였으며 1938년 장춘공학원에 입학하였다고 한다. 이 학교는 밑바닥 무산자들이 다니는 야학이었단다.
“공부하면서 신문배달을 했단 말이. 신문이 하루 두 번 나오는데 오전 한 번, 오후 4시에 한 번 나온단 말이. 학교 등교시간은 오후 6시부턴데 4시에 나온 걸 가지고 배달하고 나면 지각한단 말이. 강의를 제때에 듣지 못했지. 그래 애를 먹었는데 최남선 사장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지라우.
최남선 아시오? 3.1 운동 때 독립선언문 쓴 분인데 그 후에 일본 사람한테 투항했지. 신문사 사장인데 이분이 차도 안 타고 꼭 조선 두루마기 입고 조선옷 입고 댕기지 말이. 내가 신문 배달할 때 장갑 없어서 이래구 댕기지 말이(팔짱을 낀 시늉을 해보였다). 그러다 최남선 사장님을 만났는데 그분이 자기 손으로 내 손을 만져주고, 빨갛게 언 내 손에 자기가 끼었던 장갑을 끼워주는 거라.
(내가 공부하는 걸 알고는) 사장실 소제하고 이 방에서 자라고 했지. 그 영감이 돌봐주어서 낮에는 급사 노릇 하고 밤에는 신문 배달하고, 원래는 공인들과 같이 있었는데 공인들과 있게 되면 공부 못한다고 하면서 사장실에서 자고 소제하게 했단 말이. 1938년도에 학교 들어가서 41년까지 4년 동안 학교를 다녔지 말이.”
원지희 옹의 기억 속에 살아 있는 최남선은 아버지와 같이 자상하고 정이 많은 분이었다고 한다. 설 명절 같은 때면 한낱 급사에 불과한 그를 집에 데리고 가서 손님으로 대접하기도 했고 꼭 공부를 잘해서 일본인들이나 권세 있는 사람들이 다니는 제국대학 같은 데는 못 가더라도 그들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되어 조선인의 본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했다면서 “내가 보기에 최남선은 민족주의자란 말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민족주의에서 ‘만선일체’로
『만선일보』는 1937년 만주에서 발행된 친일성향의 한국어 일간신문이었다. 1933년 당시의 만주국 수도였던 신경(新京)에서 창간된 친일적 한국어 신문 『만몽일보(滿蒙日報)』가 용정(龍井)에서 발행되고 있던 역시 같은 경향의 한국어 신문 『간도일보』를 통합하여 단일지로 발간하면서 제호를 바꾼 것이다. 당시 만주에는 1백50만에서 2백만 명에 이르는 한국인이 살고 있었으며 정책적으로 이들을 대상으로 언론통제정책을 단행하고 ‘만선일여(滿鮮一如 : 만주와 조선은 하나다)’를 달성하며 5족협화(한족, 만주족, 몽골족, 조선족, 일본족의 단결)를 도모하려는 데 이 신문의 취지가 있었다.
일제로부터 많은 자금을 보조받은 『만선일보』는 조,석간을 발행했고 광복이 될 때까지 만주지역에서의 유일한 한국어 신문으로서 이른바 당시 한민족 유명인사들에 의해 꾸려지면서 한국 내에도 지국을 설치하기도 했다. 초기에는 사장에 이용석, 고문에 진학문 최남선 편집국장에 염상섭 홍양명 등이 취임했다. 2002년 10월 초 서울에서 만난 신동환 선생(申東煥, 1928년 충남 서천군 서천면 출생)의 부친 신서야(원명 신영철) 선생도 1938년 『만선일보』에 취직했다고 한다.
“아버지(신서야)는 1938년엔가 (만주로) 갔어요. 아버지는 신문학 초기부터 해방 전까지 문학평론을 했지요. 육당 최남선, 춘원 이광수 이런 사람과 함께 활동했지요. 김동리, 염상섭은 다 그 후에 (문단에) 나온 사람들이구. 그때 『만선일보』 주필이 최남선인데 아버지는 그하고 아주 가까운 사이였지요. 염상섭이 편집국장, 아버지는 학예부장이었지요.”
이 밖에도 황건, 안수길, 김창걸, 박영준, 김조규 등이 기자로 있었고 현경준, 이학성(이욱) 등 많은 문인들이 『만선일보』를 통해서 배출되었다.
“이듬해 나는 어머니하고 신경으로 갔수다. 장춘대가 대동광장이 있는 곳에 집이 있었지요. 장춘 역에서 쭉 가면 대동광장이 있고 거기에서 부채살처럼 거리들이 펼쳐 있었는데 우리는 장춘대가에 살았지요. 원래 염상섭씨가 살던 집이었는데 그 양반이 살다가 『만선일보』를 그만두고 대동아건설국인지 하는 데 갔어. 우리 집은 국민주택 비슷한 수준이었고 여러 채가 붙어 있었어요. 일제말기 김조규씨가 징역을 피해서 만주로 왔잖아요. 우리 옆집에 방을 빌려 살고 있었어요. 우리 집에서 편집국 사람들이 자주 와서 술을 마시고 그랬어요.
그때 자주 온 사람들이 카프 평론가 이갑기씨, 유명한 시인 박팔양, 영화평론가 이태호, 좌우간 만주의 이름 있는 문인들은 다 왔다 갔지요. 최남선씨는 건국대학 교수를 하니까 건국대학교 관사에 있었어요. 동양사 전공교수예요. 그러면서 『만선일보』 주필을 했지. 내가 가끔 아버지를 따라 놀러 갔잖아요, 서고가 어마어마해요. 근엄한 양반이지요. 한복을 입고 다녔고 말이 아주 적지는 않았는데, 이 양반이 조선역사책도 내고 조선상식문답 수십 가지를 냈지 않아요. 동양사에 대해서는 일본 학자보다도 더 달통했었으니까.”
당시 문학소년 신동환 선생의 눈에 비친 최남선은 한복을 입은 근엄한 조선사학자였다. 최남선의 서재에서 그의 말에 도취되곤 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그는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문학가, 사학가. 호는 육당. 19세의 젊은 나이에 신문관(新文館)을 창설. 1908년 그가 발행한 『소년』은 당시 민족의 새 희망과 새 이상을 발표하던 잡지였고 그로 해서 최남선은 한국 근대문학 개척기의 선구자로 부상했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독립선언문을 기초하고 체포되어 2년 10개월 동안 감옥생활을 하고 출옥, 다시 잡지 『동명(東明)』을 발행하면서 국사의 연구에 몰두, 국사를 통한 민족적 주체의식의 확립을 목표로 많은 저서를 내어 학계의 원로가 되었던 최남선이다.
시켜서 한 친일?
그는 1939년 일본관동군이 만주에 세운 건국대학에 와서 꼭 4년을 살면서 만주에 거주하는 조선인 학자, 문인들의 구심점이 되기도 했었다. 최남선을 주축으로 해서 모인 이들 문인들은 만주 신경을 중심으로 일제식민지인 한국 내에서 할 수 없게 된 한글문학을 이른바 오족협화, 왕도낙토의 만주국이라는 특수한 환경 속에서 계속해 왔다. 『만선일보』의 문예란에는 시, 소설, 수필 등 여러 장르의 문학작품들이 발표되었고 박영준의 『쌍영』과 같은 장편소설도 연재되었다. 그리고 『만선일보』 학예부장 신서야는 1941년 만주조선인 소설집 『싹트는 대지』를 출간했고, 『만선일보』 기자 김조규는 『재만 조선인 시집』을 출판했다. 1943년 만선학해사(滿鮮學海社)의 상강 홍병철, 매원 유찬근은 『반도사화와 낙토만주』를 세상에 내놓았다.
1939년 한 해 동안 『만선일보』에 발표된 시가 무려 2백80여 수인데 그 중 90% 가량이 고향을 그리는 망향 시와 님 잃은 애절한 사랑 시였고 소설집 『싹트는 대지』에서도 박영준의 「밀림의 여인」을 제외한 기타 작품들은 모두가 개척민의 삶을 그린 것이었다. 『재만조선인 시집』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리 만주개척민은 예나 이제나 호미나 바가지쪽 밖에 가지고 온 것이 없으나 그 바가지에는 생활이 담겨 있고 그 호미 끝은 거치른 정서를 돋구기에 넉넉하니 여기에서도 문학은 자라났다. 이 작품들만은 역시 호미와 바가지와 피땀 이외에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간민(墾民) 속에서 자라난 것이다. 그 속에서 호흡하고 그 속에서 살찌고 기름진 시혼(詩魂) 이 나올 수 있는 만주조선인의 문학이다. 일망무애(一望無涯)의 황막한 수수밭에서 진흙 구덩이를 후벼 파고 돋아 나온 개척민의 문학이다. 그 어느 작품에서나 만주의 흙내 안 남이 없고 조선 문학의 어느 구석에서도 엿볼 수 없는 대륙문학, 개척자 문학의 특징과 신선미, 신생면(新生面)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전 조선 문학을 위하여 큰 수확이 아닐 수 없을 것이요, 작가와 편자의 자랑이라 할 것이다.”
『싹트는 대지』의 서문에서 밝힌 염상섭의 이상의 말을 ‘안경’으로 삼아 당시의 작품들의 속을 들여다보면 이주민의 생존환경에 뿌리 박고 그들의 삶의 모습을 될수록 그대로 보여주려고 한 작가의 숨은 뜻이 작품의 내면에 두텁게 깔려 있음을 본다. 동시에 또 염상섭이가 서문에서 희망했듯이 ‘신만주의 협화정신을 체득한 국민문학’을 지향하여 만주국의 이념에 영합한 흔적이 표층에 두드러져 있다. 문학평론가 최삼룡 선생은 그런 경위를 ‘작가 의식성향의 동요와 이념적 좌절이라는 두 측면’으로 분석하고 있다.
당시 만주에서 활동한 대부분의 작가가 이러한 이중적 경향성을 가지고 있었다. 오랫동안 『만선일보』에서 활동하다 광복을 앞두고 신경에서 사망한 신서야와 같이 언론계에서 깨끗한 민족양심을 보인 분들도 일제의 식민지인 만주국을 “민족협화 왕도실현의 이상적 신국가”라며 어색한 표현을 사용했다면 “간 데마다 일본 사람 되시기 바라오며”(1940년 신년축사 「재만 반도동포께 올림」에서)를 외친 춘원 이광수나 “일본 민족과 조선 민족은 명실공히 운명공동체”이므로 “동아공영권(東亞共榮圈) 건설에 우리도 적극적으로 참가해야 한다”고 고함을 지른 이웅길(창씨명 淸原雄吉)처럼 발광적으로 친일을 선전한 사람도 있다.
중국에는 양 머리를 걸고 개고기를 판다는 말이 있다. 개를 토템 숭배한 만족이 청나라를 세운 다음 개고기를 먹지 못하도록 어명을 내리자 개고기를 즐겨 먹던 한족들이 양을 핑계로 어명을 피해 갔다는 고사성어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문학에 대한 탄압이 심한 때일수록 문인학자들은 만세 소리 속에 칼을 갈기도 했었다. 그러한 문장을 유심히 살펴보면 대개 글자들 틈새에서 글을 발견할 수 있다. 중국의 문호 노신은 소설 『광인일기』에서 “아무튼 잠이 오지 않아 밤중까지 책을 보다가 글자들 사이에서 글을 발견하였는데 온통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것이다”라고 한 것처럼 그러한 문장들은 구밀복검(口蜜腹劍) 식이다.
이미 깨진 골동품을 다시 주워 붙인들
어떤 때 나는 최남선의 친일행위도 그런 식으로 이해해 주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받는다. 최남선, 이광수, 홍명희를 20세기 우리 민족의 삼재(三才)라고 했는데 이광수를 잃고 다시 또 최남선까지 잃는 마음의 고통을 참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를 학술계의 대표자로, 민족양심의 대변자로 갖고 싶은 욕망 때문이리라.
그러나 그것은 나름대로의 욕망일 뿐이었다. 지난 4월 우연히 접해 본 『반도사화와 낙토만주』라는 책은 가시가 되어 나의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 이 책은 만선학해사의 홍병철, 유찬근이 “혈족적으로 보나 역사적으로 보나 동원분류(同源分流)이요 영원불가분(永遠不可分)의 밀접한 관계에 있는 내선만(內鮮滿)의 문화적 결합을” 위한 사업에 “공헌되는 바 있다 하면 더 말할 수 없는 행복으로” 알고 5년 동안의 노고를 아끼지 않고 원고를 모아서 찍은 책으로 만주국 건국 10주년에 헌정된 도서이다.
책을 펼쳐 보면 이른바 만주제국 황제의 조서(詔書)며 조선 총독의 유고(諭告)를 책머리에 싣고 만주국 총리대신 장경혜(張景惠), 일본국 총리대신 도오조 히데키(東條英機), 중화민국정부 주석 왕정위(汪精衛) 등을 받들어 모시고 이범익, 최남선, 이광수, 박팔양 등 조선인 정객, 학자, 문인 1백여 명이 책 속에 비좁게 앉아서 주절거리고 있었다.
어떤 이는 역사를 말하고 어떤 이는 현실을 말하고 어떤 이는 예술을 말하고 어떤 이는 인물을 말하고 입 가진 사람마다 찧고 까불어댔는데 결국에는 “대동아전쟁에서의 일본군의 승리”에 고무돼 “동방공영의 성역 건설의 개가”를 외치며 “오족협화 왕도낙토”를 소리 높이 외치는 데 입들이 모아졌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가야마 미쓰로오(香山光郞)로 나타난 이광수는 정치와는 먼 ‘반도소설사’를 말하는 데 그쳤고 최남선의 「가지(箕子)는 지나(支那)의 기자(箕子)가 아니다」 「만선약사(滿州略史)」 「간도와 조선인」 「조선과 세계의 공통어」 「만주의 명칭」 「몽고의 명의(名義)」 등 여섯 편의 글들은 모두가 학술에 관한 것이었다. 그런데 문장마다 매듭을 지면서 일제의 침략을 미화하고 있어서 기분이 여간 잡치는 것이 아니었다.
“1931년 9월 18일에 만주사변의 발발(勃發)을 보고 익년 3월 1일 만주의 건국선언이 발포되기에 이르렀다. 만주 일역(一域)은 고래로 제 민족 각축의 연무장(演武場)이요, 신제국 생성의 요람지로 역사도 길고 풍운도 야단스러워 왔지만 이제 민족협화와 왕도실현의 이상국(理想國) 건설국으로 뽑힌 것은 진실로 만주에 역사 있어 온 이래의 빛난 책장일 것이다.”(「만주약사」 중에서)
“이제 풍운회명(風雲晦冥)의 만주는 오족협화의 왕도낙토로 새 출발을 하여 자광(慈光)과 은로(恩露)가 무른 조선 민족의 위에 보급균첨(普及均霑)하고 있나니 신천지에 있는 금후 조선인의 발전은 진실로 측량하지 못할 것이 있게 되었다.”(「간도와 조선인」 중에서)
문맥을 보면 구질구질하게 이러한 말을 할 필요는 없었음에도 억지다짐으로 군더더기를 만든 것을 보면 이것이 당시 육당의 진심인지 아니면 가식인지 그 마음이 헷갈린다. 대개 글이란 시작과 마지막에 작가가 하려고 하는 중심이 자리하는 데 위에서 선을 보인 친일 언사들로 문장의 매듭을 지은 육당의 본심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훗날 최남선은 자신의 친일행각을 변호하여 학술을 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라고 했다.
『세계인명대사전』 편찬자도 최남선을 다루면서 글맥 속에 학자로서의 최남선을 살리려고 조심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러나 1925년 일본이 한국 식민정책의 진척을 위해 총독부 내에 조선사편수위원회를 둘 때 편수위원직을 맡았으며 뒤에 조선총독부 중추원참의를 지내고 일본관동군이 만주에 세운 건국대학에서 4년간 교편을 잡았으며 귀국 후 1943년 12월에는 재일 조선유학생의 학병 지원 권고 강연차 이광수, 김연수, 이성근 등과 도쿄에 파견되었었다. 이로 인해 8?5해방 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비난을 받았으나 끝까지 학자적 소신을 지켜 『한국역사대사전』을 집필하다가 중도에 병사했다.”
마치 깨진 골동품 조각을 하나하나 조심조심 주워 모아 ‘그러나’ ‘이로 하여’ ‘소신을 지켜’ 등등의 어휘들을 풀로 삼아 적재적소에 땜질을 한 그 솜씨가 아무래도 서툴다는 느낌이 아쉬움을 불러 나의 마음을 채웠다. 최남선은 땜질하기엔 너무나 험하게 깨진 골동품이 되어 있다는 사실이 나의 마음을 울렸다.
소인 최남선, 대인 최남선
일부 한국인들은 최남선의 학술성과를 들어 최남선이 일본침략을 위해 선동을 했다고 해서 무조건 친일파로 몰아붙여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서슴지 않는다.
“억지로 끌려나가서 한 거지요. 나가서 하라니 어떡해요. 춘원은 자의적으로 움직인 흔적이 있어요, 그런데 육당은 그렇게는 안 했어요. 나와서 얘기를 하라니 어떡하나요. 못하겠다고 나자빠질 수는 없잖아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논리로 간다면 최남선은 물론 이완용까지도 친일파에서 제외시켜야 한다는 결론에 빠진다. 안 하면 죽인다는데 어쩔 텐가? 살기 위해선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일제치하에서 극소수의 독립운동가를 제외하고 천황폐하 만세를 부르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그렇다면 3천만 한민족 모두가 친일을 한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는 그러한 주장을 들고 나오는 사람과 같은 서민의 논리일 뿐이다. 보통사람은 살기 위해서 일제의 식민지 노예가 되어 살아도 무방하다. 왜냐하면 그는 그 자신일 뿐이며 그들한테는 먹고사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윤해영이 『반도사화와 낙토만주』에 「낙토만주」라는 친일 시를 발표하였다고 해서 그를 친일파라고 매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그 자신일 뿐이기 때문이다. 안수길이 『새마을』과 같은 친일 소설을 내놓았다고 해서 그를 친일파로 타매하지 않는다. 역시 그 자신은 그 자신만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완용이나 이광수나 최남선의 경우는 다르다. 왜냐하면 그들은 벌써 개인이 아닌 민족과 나라의 대표자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이완용은 이완용이기 앞서 한국의 총리대신이다. 그러므로 한일합방조약에 이완용이 한 서명은 그 개인의 서명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이광수나 최남선은 이광수나 최남선이기 앞서 한국 문단과 사학계의 대표자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한 편의 글, 한 마디 말은 그 시대 민족과 나라의 숨결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한테 1905년 을사조약 체결로 의분을 참지 못해 자결하면서 민영환이 “나라의 부끄러움과 백성의 욕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대체로 살기를 바라는 사람은 반드시 죽고 죽기를 기약하는 사람은 도리어 삶을 얻나니 여러분은 어찌 이것을 알지 못하는가”라는 비장한 유서로써 갈 길을 분명히 가르쳐 주었다고 본다.
인간은 소인과 대인으로 나뉘며 한 인간의 인격도 소인과 대인으로 갈린다고 본다. 원지희 선생한테 비친 자상한 부친과 같은 최남선과 신동환 선생의 기억 속에 살아 있는 근엄한 사학자인 최남선은 소인의 최남선이다. 대인으로서의 최남선은 1925년 조선사편수위원회 편수위원직을 맡았을 때 벌써 죽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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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연산 | 연변대학과 광주 중산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했으며, 현재 연변인민출판사 종합편집부장을 맡고 있다.
2003년01월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