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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실패한 개혁의 역사
1. 소수파 정권의 한계를 넘지 못한 조광조의 개혁
2. 보수적 개혁 속에서 진보적 개혁을 꿈꿨던 정조
3. 외세의 위협 속에 이씨왕조의 부활을 추진했던 대원군의 개혁
4. 공민왕의 대리통치자 신돈의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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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국수가 개혁의 상징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김영삼 정권의 문민정부는 청와대에서 칼국수를 먹으며 개혁을 그림을 그렸다. 그때 개혁이 성공했더라면, 아마 지금도 개혁의 상징은 칼국수였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지금 먹는 칼국수의 맛은 옛 맛이 아니다.
개혁이라 부르기도 뭐하지만, 문민정부의 개혁은 실패했고 국가적인 재앙만 불러왔다. 물론 금융실명제 실시, 하나회 척결, 광주항쟁 진상규명과 같은 개혁의 성과물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IMF 국기위기를 불러 온 재벌정책과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의 부정부패는 모든 개혁의 성과를 덮어버리기에 충분했다.
개혁의 흐름이 문민정부의 실패 때문에 멈출 수는 없었다. 개혁은 도도한 강물이 되어 흘렀다. 수평적 정권교체와 국난극복의 과제를 떠않은 김대중 정권도 개혁을 외쳤고, 국민이 대통령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노무현 차기 정권도 개혁을 준비하고 있다. 문민시대부터 외쳐 온 '개혁'이라는 시대적 요청은 화두처럼 한국사회를 아직도 감싸고 있다.
개혁은 역사가 평가한다. 역사는 과연 이 시대의 개혁을 어떻게 평가할까? 개혁의 성격은 무엇이고, 교훈은 무엇이며, 실패인지 성공인지 냉정하게 평가할 것이다. 우리시대의 개혁을 성공한 개혁의 역사로 기록하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개혁의 평가는 역사의 몫이지만 개혁의 성격과 역사적 교훈, 성공인지 실패인지는 우리들의 몫이다. 성공한 개혁으로 기록하려면 우선 역사 속의 개혁을 살펴봐야 한다. 역사적 교훈을 밝혀내야 실패의 전철을 밟지 않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중요한 시대적 전환기에 전개된 개혁의 역사를 살펴보고 간략하게나마 평가해보려고 한다.
한국사에서 중요한 개혁들을 살펴보면 거의 실패했음을 알 수 있다. 공민왕과 신도의 개혁, 조광조의 개혁, 정조의 개혁, 대원군의 개혁이 그러했다. 시대적 상황도 다르고 개혁의 주체도 달랐지만 이들의 개혁의 실패에는 공통분모가 숨어 있었다. 그것은 전근대적 봉건사회라는 시대적 한계를 뛰어 넘을 수가 없었고, 새로운 사회세력의 뒷받침이 없었다는 점이다. 이들의 개혁을 보면 사회세력간의 투쟁이 아니라 엘리트간의 권력투쟁으로 비쳐진다. 봉건사회라는 한계와 새로운 사회세력이 뒷받침하지 못한 개혁이었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공통분모를 보면 공민왕과 정조, 대원군의 개혁은 군주권(왕권) 강화가 개혁의 목표였기 때문에 근대적 개념의 사회세력을 키워내지 않았다.
자! 그럼 소수파 정권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실패한 조광조 개혁의 역사를 보자. 조선은 강한 중앙집권적 국가였다. 이런 중앙집권적 국가에서 대안세력들을 견제하고 활용하는 정책은 관료제로 편입이었다. 중앙집권적 관료제로 편입된 대안세력들은 보수세력과 경쟁하면서 서서히 기득권 층으로 탈바꿈해갔다.
이런 현실에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소수의 세력이 등장하더라도 새로운 사회세력의 뒷받침이 없기 때문에 급진적인 정책을 내세우게 되고,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못해 개혁의 실패를 좌초하는 경우가 많았다. 소수파 정권으로 급진적인 정책을 추진한 조광조의 개혁도 마찬가지였다.
조광조의 개혁은 어떤 시대적 요청에 따른 것이었나?
조광조의 개혁이 요청되던 16세기 초반은 조선 전기의 통치시스템이던 <경국대전>체계가 점차 한계와 모순을 드러내던 때였다. 또한 이 시기는 국가주도의 경제에서 민간주도의 경제로 변화하던 때이기도 하다.
그런데 건강한 민간주도의 경제시스템이 정착하기도 전에 문제가 발생했다. 훈척세력이라 불리는 기득권 지배세력이 사회경제적 변동 속에서 생겨난 사회적 부를 국가 전체에 바람직한 방향으로 활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은 정치권력을 이용해 사회적 부를 개인이 독점하였다.
이런 시기에 등장한 세력이 바로 조광조로 대표되는 사림세력이었다. 이들은 주자성리학을 사상적 기반으로 한 재야세력이었다. 이후 주자성리학의 세계관은 조선사회의 지배적인 패러다임이 되었고, 명분과 실천을 중시하는 경향이 조선 성리학의 주요한 특성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조광조의 현실인식은 성리학에서 이상 사회로 여기는 요순 시대의 정치만이 당시 사회모순을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사회·경제개혁보다는 정치·의식개혁을 중심과제로 설정하고 밀어 부쳤다.
조광조와 사림세력은 낭관권, 문묘종사, 향촌사회의 개혁 등 개혁정책을 실천하여 조선시대 통치제도와 이념의 기틀을 잡아갔다. 그중 가장 급진적인 당시 기득권 층을 뿌리째 뽑아내려 한 위훈삭제의 단행 요구였다. 위훈삭제는 중종반정 때 책봉된 정국공신들 가운데 상당수가 거짓 공훈이니, 이들을 골라내어 공신명단에서 삭제할 것을 요구한 혁명적인 개혁조치였다. 이는 곧 훈척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붕괴시키겠다는 급진적인 개혁안이었다.
공신에서 삭제되면 그 대가로 받았던 토지와 노비까지 국가에 반납해야 되는데, 당시 기득권을 가졌던 훈척세력이 가만히 있었을까? 당연히 개혁에 대해 거세게 반발했다. 117명의 공신가운데 3/4에 해당하는 76명이 위훈삭제를 당했으니 훈척세력의 분노는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조광조와 사림세력은 위훈삭제 조치가 결정되고 3일만에 일어난 기묘사화로 중앙정치무대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조광조의 개혁은 시대적 정당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사회세력의 뒷받침이 없이 중종에게만 의지하여 개혁을 추진하다보니 급진적인 정책을 무리하게 추진하였고, 이 과정에서 많은 적들을 만들고 말았다. 대화와 타협, 설득하는 권력이 아닌 밀어 부치기식의 권력은 실패를 예상할 수밖에 없다.
조광조와 사림세력도 개혁이 힘들고 어렵다는 것을 몰랐을까? 결코 그들은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에게 닥쳐올 운명, 즉 큰 화를 입을 수 있다는 것도 미리 알았다. 그런데도 왜 그들은 개혁을 거칠게 밀고 나갔을까? 그들은 주자성리학 패러다임에 근거한 실천이 조선사회의 지배적인 실천이념이 되기를 바랬기 때문입니다.
퇴계 선생은 조광조 개혁의 실패 원인을 "조광조가 타고난 기질은 아름다웠으나 학력이 충실하지 못하여 하는 일이 지나침을 면치 못했기 때문에 마침내 실패했다. 만일 학문에 충실하고 덕기(德器)가 이루어진 세상에 나가 이를 담당했더라면 그 성취한 것을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다"고 평가했다.
조광조 개혁의 실패 원인을 정리하면, 우선 뒷받침할만한 사회세력이 없었고 △개혁세력이 중종이라는 군주에게 많이 의존했고 △비전은 있었으나 비전을 담을만한 철학이 다듬어지지 못했고 △뒷받침할만한 사회세력이 없다보니 개혁 조급증에 빠져 급진적인 정책만 일관하는 등 정치력의 미숙함을 드러냈다. 이런 한계 때문에 조광조의 개혁도 엘리트들의 정권투쟁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시대의 개혁은 어떠한가? 개혁주체는 있는지. 개혁의 사상적 기반은 있는지. 개혁세력을 새로운 사회세력이 뒷받침을 하는지. 개혁의 비전은 있는지. 명확하게 대답하기 어려울 따름이다. 우리가 지금 말하는 개혁은 흐름일 뿐 구체적인 그 무엇은 아닌 것 같다.
조광조의 실패한 개혁의 역사를 교훈 삼아 노무현 당선자에게 몇 가지를 제시해보고자 한다. 우선 소수파 정권임을 인정하고 노무현 당선자의 주장대로 대화와 타협의 정치, 설득하는 권력의 자세를 잃지 말기를 바란다. 그리고 개혁을 담을 철학을 지금부터라도 준비해야 한다. 철학이 없는 개혁은 팥고물 없는 찐빵일 뿐이다. 철학이 다듬어지지 않으면 개혁 조급증에 빠지더라도 헤어나올 길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또한 든든하고 믿음직한 우군을 만들어야 한다. 국민이 대통령이다. 시민의 정치의식을 믿어야 한다. 즉 시민이 노무현 정권의 정치 파트너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노무현 정권은 건강한 시민사회 육성을 위해 어떠한 지원도 아껴서는 안 된다. 비록 시민사회가 쓴소리를 하고 권력을 견제하더라도 겸손하고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시민사회의 비판을 외면하거나 강경하게 대응한다면 개혁은 이미 물 건너가게 될 것이다.
대원군의 개혁을 다루면서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겠지만, 북·미 사이의 전운이 감도는 현실에서 개혁은 더욱 어려운 문제이다. 이럴수록 국론이 분열돼서는 안 된다. 때문에 개혁조급증을 피해야 한다. 고인이 된 코미디언 이주일씨처럼 "뭔가, 보여주겠습니다"며 성과 위주의 개혁 정책은 국론을 분열시킬 수 있다. 오히려 개혁의 기초를 닦는데 힘을 기우려야 한다. 어떤 정권이 들어서더라도 개혁의 흐름이 꺾기지 않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