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개혁의 역사Ⅱ-2. 유학적 계몽군주, 정조의 보수적 개혁

by 이윤주원 posted Feb 06, 2003
실패한 개혁의 역사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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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수파 정권의 한계를 넘지 못한 조광조의 개혁

2. 유학적 계몽군주, 정조의 보수적 개혁

3. 외세의 위협 속에 이씨왕조의 부활을 추진했던 대원군의 개혁
4. 공민왕의 대리통치자 신돈의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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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개혁을 꿈꾸면서 보수적 개혁을 추진할 수 있을까?
역사학자 박광용은 정조의 개혁이 바로 그랬다고 한다. 도대체 정조의 개혁이 어떤 것이었기에 진보적 개혁을 꿈꾸면서 보수적 개혁을 추진했다는 평가를 들었는지 알아보자.

영·정조 집권기는 대개혁이 필요한 시기였다. 이 시기 조선사회는 지배계급의 타락, 집약농업과 유통경제의 성장, 백성들의 신분상승의 변화가 빠르게 일어나던 때였다. 더 이상 봉건적인 지배이념과 방식으로는 이런 변화를 담을 그릇이 못되었다.

이 시기 정치권은 당쟁(黨爭)을 심하게 벌였다. 당파싸움은 사회학자 팔레트의 '엘리트 이론'에 가장 잘 들어맞는 지배엘리트들의 권력 투쟁이었다. 이 싸움은 조선 후기 집약농업과 유통경제로 부를 획득한 중간계층의 사회적 성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부유한 상인들과 농민들은 돈을 이용해 당파에 줄을 대고 신분 상승을 꾀했던 것이다. 정치 권력을 지키려 했던 당파로서는 부유한 상인과 농민들의 '돈'이 곧 정치자금이었다. 이런 밀월관계는 곧 지배계층의 타락으로 이어졌다.

18세기 조선에서 중간계층의 성장은 엄청났다. 이들이 돈으로 신분을 산 결과 양반층이 이 때에 50%를 넘어버렸다. 지배계층이 아무리 많이 잡아도 25%를 넘어 간다면, 더 이상 지배계층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국가의 보수적인 입장인 신분제를 유지하려면 평민에서 양반으로, 노비에서 평민으로 신분을 산 사람들을 원래의 신분으로 돌려보내야 했다. 그러나 영·정조 시대에는 신분이 올라간 것을 그대로 인정한 상태에서 사회의 틀을 다시 짰다. 백성에 대한 파악방식의 변화를 의미했다.

이런 사회적 격변기에 대개혁의 필수였다. 그런데 개혁은 미적거린 채 이루어지지 않았다. 1728년 전국적 조직을 가진 유일한 반란인 무신란이 일어난 뒤에야 개혁은 시작되었다. '탕평'이라는 사회개혁은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나오게 된 것이다.

'탕평'은 보수적 개혁의 성격을 가진다. 탕평이란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을 크고 공평하게 쓰겠다는 통치관이다. 즉 인사가 만사라는 것이다. 인사가 만사라는 것은 제도개혁보다 인사정책이 강조되는 개혁이다. 인사 중심의 개혁인 탕평은 그래서 보수적 개혁이라 할 수 있다.

영조의 탕평은 보면, 권력은 임금에게 집중시키되 관직을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모든 온건파에게 고루 배분했다. 이때에는 집권기에는 온건파인 '완론(緩論)' 집단이 개혁을 주도했다.

그런데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개혁 주도세력을 근본적으로 바꿔버렸다. 권력의 균형있는 배분을 중시하는 조제론(調劑論)을 근본적으로 바꿔 정치원칙인 의리론(義理論)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정치집단을 개편했다.

이는 당파 사이의 관직배분에서, 당파 사이의 정치참여 기회의 확대로 전환한 것을 의미했다. 즉 관직 나눠먹기에서, 정책을 가진 새로운 정치집단이 국가운영의 장에 참여할 기회를 열어준 것이었다. 중요한 점은 정책을 갖고 충돌할수록 좋다. 다만 싸움에도 원칙은 있어야 하니 정치원칙을 가지고 싸울 수 있는 사람들(정치집단)을 기용하겠다는 취지였다. 이를 준론(峻論) 집단이라고 부른다.

개혁의 주도세력인 준론 집단은 노론의 청명당, 남인의 청론, 소론의 준론으로 나뉘었다. 이 세력들은 한데 묶어 '맑은 것을 좋아하고 맑은 흐름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당파들'이라는 뜻에서 청류당(淸流黨)이라고 부른다. 이렇듯 정조는 개혁적 성향을 가진 새로운 관료집단을 육성했다. 이들을 청류당이라 불렸으나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묶이지는 않았다. 이 당을 하나로 묶기 위한 탕평이 바로 정조의 탕평이다.

이런 청류당을 하나로 묶어 정조가 달성하려 했던 목표는 무엇이었을까?
성리학은 명분과 의리를 중시하는 패러다임이다. 따라서 당시에는 정치적 시비논쟁이 꽤 많았다. 조선왕조에 성리학 패러다임을 뿌리내린 조광조와 사람세력도 훈척세력을 공격하는 무기로 명분과 의리를 들지 않았던가. 시비논쟁으로 당파끼리의 숙청이 심했던 때였다. 정조는 피를 부르는 시비논쟁을 멈추고 정치원칙을 가지고 싸우는 발전적인 정치문화를 달성하고 싶어했다.

정조가 살아있는 동안의 정조의 정치력으로 탕평책이 성공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정조가 죽고 난 뒤 5년이 채 되기 전에 정조의 개혁은 사라지고 말았다.

왜, 정조의 개혁이 실패했는가?
대개혁이 필요한 역사적 시기에, 개혁세력을 키우는 것은 좋았으나, 제도개혁을 통해서 개혁의 기반을 빨리 개혁세력으로 옮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빠른 시대적 변화를 단을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수혈됐어야 했다. 정조는 실학(實學)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성리학을 보조하는 실용학문쯤으로만 생각했다. 여전히 주자성리학이 조선의 중심 이데올로기로 바로서야 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주자성리학은 더 이상 조선의 변화를 담을만한 그릇이 되지 못했다.

정조가 집권하던 18세기 유럽은 계몽사상의 영향을 받으면서 '군주는 백성들의 공복'이라는 생각을 가진 계몽군주들이 출현하였다. 계몽군주는 봉건시대의 모순을 해결하고 새시대의 과제를 실현하기 위한 시대적 요청이었다.

정조 또한 동시대의 군주였다. 그도 봉건시대의 모순을 해결할 과제를 떠않았던 것이다. 18세기 조선의 성리학은 유학적 계몽군주를 내올 여력은 이었다. 그러나 역사는 발전한다는 개념이 없었던 성리학은 개혁의 이념이 되기에는 너무 모자랐다.

정조집권기인 18세기는 상공업이 꽤 발달했지만, 여전히 조선은 봉건적 농경사회였다. 1월4일 종영된 MBC 드라마 <어사 박문수>를 보면 당대 농민들의 참혹함이 화면에 가득 그려졌다. 지배계층의 타락과 수탈이 농민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기 때문이다.

이렇듯 당대의 모든 모순은 토지문제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토지개혁을 하지 않고서는 사회개혁의 물적토대를 새롭게 만들 수가 없었다.  지금의 재벌개혁만큼이나 중요했던 개혁과제였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정조는 토지개혁에는 손대지도 못했다. 가장 근본적인 경제개혁은 못했다.

또 다른 개혁 실패의 이유는 인재등용 제도를 개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든 권력은 표준으로부터 나온다. 표준은 권력의 배경이 되어 통치의 수단을 제공한다. 개혁은 기득권을 가진 구세력과 대결일 수밖에 없다. 권력을 가진 기득권 세력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켜주는 구시대의 통치 기준과 가치, 제도를 옹호하기 마련이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개혁세력이 발을 붙이기가 쉽지는 않다.

그래서 모든 성공한 혁명과 개혁은 구시대의 '표준'을 허물고 새시대의 '표준'으로 바꾸지 않았던가. 정조의 개혁이 성공하려 했다면 당대의 핵심적인 '표준'인 '인재선발 방식'을 과감하게 바꿨어야 했다. 아쉽게도 구시대의 패러다임인 주자성리학의 성취도만 검증하여 관리로 등용하는 과거제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 시대는 이미 부유한 농민과 상인들이 신분상승이 시작되던 시대였다. 지배계층이었던 양반층도 50%를 넘어섰던 시대였다. 도저히 철저한 신분제사회를 뒷받침하던 주자성리학만으로 어찌 해볼 수 없던 시대였다. 영조 때 북학파 유수원이 주장했듯이 상인도 과거를 볼 수 있게 하던지. 정조 때 다산선생이 주장했듯이 성실하게 농사짓는 농민들에게도 관직의 길을 열어줬던지. 과감한 인재선발 방식의 개혁이 필요했다.

신분과 계급을 넘어선 과감한 인재선발.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탕평이 아니던가. 하지만 영조의 개혁은 지배계급만의 탕평이지, 그 이상을 추진하지는 못했다. 크고 작은 기득권을 공유했기에, 정조가 죽은 뒤 그의 뜻을 따라던 노론계의 인재들은 왕실 외척과 결탁하면서 개혁적 성격을 포기해 버렸다. 이것이 정조 개혁의 핵심이었던 '탕평'의 한계였다.

마지막으로 정조는 조선시대 어떤 군주보다 많은 백성들은 만나 그들의 아픔을 달래준 유학적 계몽군주였다. 많은 관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반 백성들의 억울함을 군주가 직접 듣고 처리하는 상언과 격쟁제도도 실행했다.

상언은 백성들이 어가가 쉬는 곳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억울함을 군주에게 말하는 것이었고, 격쟁은 어가 행차 중에 꽹과리를 쳐서 군주의 행차를 일단 방해하고 약간의 벌을 받은 뒤 억울함을 말했던 제도였다. <일성록(日省錄)>에서는 3,217건의 상언과 격쟁을, <정조실록(正祖實錄)>2,671건이 접수·처리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정조는 백성과 군주 사이의 거리를 좁히려는 노력을 꾸준히 했고 많은 성과도 거뒀다. 특히 백성들과 군주의 잦은 교류는 기득권층을 견제하는데 아주 유효했다. 하지만 백성들을 정치개혁의 주체로 묶어내지는 못했다.

정조의 죽음 뒤,  외척세력이 주도한 정치적 반동은 정조재위 24년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북한과 미국의 핵게임이 더욱 과열되고 있다. 한반도 핵위협의 피해자인 한국의 시민들은 체념에 가까운 공포에 떨고 있다. 이런 국제정세라면 아마 노무현 차기 정권 개혁의 발목을 잡는 세력은 미국과 북한이 될 것이다. 이럴수록 국민들의 뜻이 갈라져서는 안 된다. 국론을 모아야만 위기상황을 가까스로 헤쳐갈 수 있다.

국론을 어떻게 모을 수 있을까? 정조 개혁의 키워드인 '탕평'을 과감하게 실천해야 한다. 차기 정권이 인사정책에서 실패한다면, 상대적 박탈감과 소외감에 빠져 있는 다수의 시민들은 개혁에 등을 돌릴 것이다. 호남 몇 명, 영남 몇 명 나눠먹기식의 탕평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특정대학 출신과 기득권 계층이 독식하고 있는 자리를 널리 나눠야 한다는 뜻이다.

명문대학을 나왔다는 학력, 고시에 합격했다는 이력이 출세의 보증수표가 되는 게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명문대를 나오지 못한, 고시에 합격하지 못한 90%이상의 젊은이들은 무슨 희망이 있을 것인가. 명문대 졸업, 고시합격, 화려한 경력이 곧 뛰어난 능력을 입증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개혁의 주체를 발굴하고 키워야 한다. 개혁은 긴 안목을 갖고 차분히 준비, 실천해야 한다. 전략적 사고와 사회적 성찰이 갖춰진 개혁주체의 육성은 그래서 중요하다. 학력과 학벌, 화려한 이력에 좌우되어 인재를 쓰면 안 된다. 숨은 인재를 발굴하고, 출사(出師)의 길이 막힌 인재에게 길을 열어 줘야 한다.

유비가 제갈공명을 군사(軍師)로 맞기 위해 삼고초려(三顧草廬)할 때 제갈공명은 불과 스물일곱이었다. 또한 그는 화려한 관직 경력도 없이 초야에 묻혀 지내던 무명의 새파란 젊은이에 불과했다. 그렇다. 삼고초려의 본뜻은 인재를 '모셔온 것'이 아니라 인재감을 '발굴한 것'이다. 인사에서 학벌과 화려한 경력을 따지는 것은 숨은 인재를 발굴할 안목과 키울 자신이 없다는 것을 반증할 뿐이다. 정조는 규장각과 초계문신제도를 통해 인재를 발굴, 육성시키지 않았나.

또 하나 노 당선자가 가슴에 새겨야 할 것이 있다. 절대로 중종같은 지도자가 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벽초 홍명희의 소설 임거정(林巨正)을 보면 갖바치가 조광조에게 "공의 재주는 일세를 건질 수 있으나 임금을 잘 만난 후에야 그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이오. 그런데 지금 임금은 공의 고명(高名)함만 취하여 쓰고 있었을 뿐 실은 공이 어떠한 사람인가 잘 모르고 있소. 그러기에 하찮은 소인이라도 임금과 공 사이에 들어 이간붙이기가 쉬울 것이오."라고 했다.

경향신문 논설고문 이광훈은 "<개혁대통령 안정총리>에 숨어 있는 함정도 바로 이름만 보고총리를 지명했다는 점에 있다. 앞서 얘기한 갖바치의 충고처럼 이름만 보고 사람을 쓰면 측근의 조그만 이간질에도 신뢰가 무너지기 십상이"라고 했다.

인재선발 방식과 평가, 인간적 신뢰의 중요성을 지적하는 대목이다. 인간적 신뢰만 너무 앞세워도 측근정치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없고, 이력의 화려함만 앞세워도 인재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를 할 수 없다.

누구도 선발될 수 있다는 희망. 선발된 자는 중요한 직책에 오를 수 있다는 희망. 꿈을 꾸고 펼칠 수 있다는 희망. 이런 희망만이 전쟁의 위협을 딛고 평화와 개혁의 꽃을 피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