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똘레랑스를 앵똘레랑스로 대하라니요

by 이윤주원 posted Feb 24, 2003

-홍세화 선생의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을 읽고-


9년전이었다. 동네 서점 한 켠에서 무심코 책 한 권을 빼어들었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설마 했다. 이 책이 내 가슴을 그토록 매어지게 하리라고는. 머나먼 이국땅 프랑스에서 타의에 의해 조국을 등져야 했던 홍세화. 이 이름 석자가 그토록 제 가슴을 매어지게 할 줄은 몰랐다.

선생님 먼저 감사의 인사부터 드리겠습니다.
1995년 선생님께서 우리사회에 가져다 준 선물, 똘레랑스. 지금껏 감사한 마음 간직하고 있습니다. 고된 택시운전을 하면서도 좌절과 분노를 사회적 성찰로 승화시킨 선생의 높으신 문제의식은 제게 큰 가르침이었습니다. 똘레랑스! 굳이 번역하자면 ‘사회적 관용’쯤이나 될까요? 어째든 앵똘레랑스가 지배하던 우리사회에 선생께서 주신 ‘똘레랑스’는 한국의 지성사를 다시 써도 될 큰 선물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박정희 암흑통치 시기, 혁명을 꿈꿨던 감성적 청년 ‘홍세화’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빠리에 유폐되는 아픔을 겪게 됩니다. 동지들이 한 평 남짓한 감옥에서 고통 받을 때, 빠리의 밤하늘을 바라보며 죄책감의 눈물도 흘렸을 것입니다. 조국을 그리워도 죄어오는 독재의 사슬 때문에 빠리에 눌러 앉게 되었다지요. 아마도 망명 신청하던 날, 선생께서는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홍세화, 그는 탄압을 피해 망명하는 유명한 정치가도 아니었습니다. 조국으로부터 버림받은 이름 없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런 그를 프랑스는 너무도 따뜻하게 받아드렸지요. 그래서 선생께서는 프랑스 사회의 좋은 점을 우리에게 알리는 전도사를 자처하고 계십니다.

선생님의 3부작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한강은 남북을 가르고 세느강은 좌우를 가른다>,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을 보면 망명자의 눈에 비친 프랑스 사회의 좋은 모습들이 꽤 그려집니다. 대체 어떤 관용을 보여줬기에, 책 곳곳에 프랑스와 프랑스인에 대한 감사가 느껴질까요? 이름 없는 망명객을 감동시킨 똘레랑스를 가진 프랑스 시민사회의 저력이 부럽기만 합니다.

그래도 좀 불만스럽습니다. 프랑스도 사람 사는 곳이라면 안 좋은 점도 있을 것입니다. 좀 더 성숙된 사회를 바란다면 한 사회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같이 말해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어이쿠, 들어가는 말이 너무 길었습니다. 이제 숨 가쁘게 본말을 풀어나가겠습니다.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이틀 걸려 한 숨에 읽어 내렸지요. 선생님은 지식인의 눈이 아닌 택시운전사의 눈으로 본 한국의 수구세력을 여전히 날카롭게 분석하고 비판하셨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지식인의 유약함보다 일하는 사람의 건강함이 더 날카롭습니다 그려.

수구세력의 상징이 ‘뻔뻔스러움’이라고 하셨던가요? 이 뻔뻔스러움을 <조선일보>가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힘주어 말하셨습니다. 동의합니다. 친일을 한 죄 많은 역사를 뉘우치지 못하고 독재정권에 기생해 민주주의를 왜곡했던 <조선일보>. “대통령은 우리가 만든다”는 오만함으로 정치발전의 장애가 되었던 <조선일보>. 언론 본연의 임무를 잊고 시장을 독점해 많은 폐해를 낳고 있는 <조선일보>. 죄가 많아 일일이 죄목을 열거하기도 어렵군요. 언제나 이 죗값을 다 씻을 수 있을지 궁금해집니다.

선생님의 표현처럼 <조선일보>는 수구 기득권의 대변지로서 사회귀족의 충실한 경비견이 맞습니다. 그러면서도 민주와 정의를 외치더군요. 그 파렴치하고 뻔뻔스러운 위선이 너무 ‘추’해 보입니다.

선생님께서는 한발 더 나아가 조선일보에 침묵․동조․참여하는 지식인들을 비판하고 계십니다.

<조선일보>에 ‘아침 생각’이라는 칼럼난이 있다. 주로 문인들이 이 난을 채워 주고 있다. 신경숙, 박완서, 김용택, 신경림 등 한국의 유명한 문인들이 글을 실었다. 그들은 강준만 교수가 목이 아프도록 외치는 소리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듣고도 모르는 체하는지 아예 무시하고 있는지 계속 <조선일보에 기고하고 있다.
『농무(農舞)』로 유명한 신경림 시인은 민중시인, 농민시인으로 불리기도 하는 한국의 대표적인 시인의 한사람이다. 그는 ‘왜 조선일보 같은 매체에 기고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시인은 우주를 말하는 사람이다. 어느 매체에 글을 싣든지 그것은 시인의 자유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의 우주적 시 정신이 토론마저 불가능하게 하는 것인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리고 문학에는 문외한이어서 문학의 진정성이란 게 무엇인지 나는 잘 모른다. 대신에 ‘지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져 보고 싶다. 사물과 현상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안목을 가지고 자신과 세계-우주-사이의 관계를 성찰하여 그 바탕 위에서 행동함을 지성이라 말하지 않던가.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가운데서 p57

좀 길게 인용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조선일보>에 기고하는 지식인이나 문인들을 수구 기득권 세력의 경비견이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극우-수구의 성채에서 경비견들만 짖어대는 게 아니라 아름다운 소리도 함께 묻어 나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조선일보>에 침묵․동의․참여하는 문인과 지식인들은 아마도 중세 영주 밑에서 재롱과 웃음을 파는 삐에로와 같은 존재일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조선일보>는 한국의 진보적 지식인과 문인들을 비판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성찰의 빈곤’이 그들로 하여금 극우-수구 매체에 몸담아 발언하는 모순을 만들었다고 하십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선생께서는 ‘성찰의 빈곤’을 고백 못하는 그들의 ‘용기 없음’도 따끔하게 야단치고 계십니다.

저 또한 많은 진보적 지식인과 문인들의 <조선일보>가 쳐놓은 권위와 명예, 성공이라는 그물에 빠져들어 헤매는 걸 보면서 안타깝습니다. <조선일보>에 글 한편 기고하지 못하는 지식인과 문인은 유명하지도 성공하지도 못한 비주류일 뿐이지요. 그래서 <조선일보>에 그들이 더 집착하나 봅니다. 정말 안타깝습니다.

권위와 명예, 성공이라는 그물에 빠진 문인과 지식인들을 비판할 때,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격에 대한 공격을 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에두르지 말고 직접 말해야겠지요. 하지만 대부분 비판의 이름으로 언어폭력을 휘두르는 게 다반사였습니다. 양심과 지성에 호소하면 될 걸 비판을 한다는 명목으로 비난, 어느 경우엔 비난을 넘어 언어의 폭력까지 일삼더군요. 선생님께서 그러셨다는 것은 아닙니다. ‘성찰의 빈곤’을 극복하지 못한 한국 지식인 사회의 수준 낮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저도 강준만 교수의 열정적인 호소에 동의하는 편입니다만, 간혹 강 교수가 보이는 공격적 글쓰기에는 눈시울이 찌푸려지곤 합니다. 공격적 글쓰기는 양심과 지성을 향한 간절한 호소가 아닙니다. 그저 포장된 비난일 뿐입니다. 비판의 이름으로 비난하는 것은 결국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선생님께서는 “프랑스의 피에르 부르디외파가 95년 노동자들의 대파업 직후에 프랑스 지식인들을 대상으로 폈던 사회학적 비판, 그리하여 ‘사회학적 테러리즘’이라는 말까지 들었던 분석과 비판을 한국에서 강 교수가 펼치고 있다”고 말하셨습니다. 선생님, ‘사회학적 테러리즘’까지 동원해서 얻은 결과는 무엇인가요? 피에르 부르디외파가 수행한 분석과 비판이 프랑스 사회를 얼마나 더 성숙시켰는지요. 잘 몰라 드리는 물음입니다.

논쟁과 토론이 익숙한 프랑스 사회에서 시도된 것이 문화적 배경이 다른 우리사회에서도 가능할 것이라고 보십니까? 저는 상대방이 더럽고 치사하게 나오거나, 침묵하거나, 원색적인 비판을 하거나, 사실을 왜곡하더라도 공격적인 비난은 삼가야 한다고 봅니다. 상대방이 어떻게 나오든 양심과 지성에 호소하면 결실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양심과 호소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차이’로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요.

분명 우익-수구의 경비견 <조선일보>는 일방적입니다. 그 어떤 충고도 듣지 않습니다. 김동민 교수는 “조선은 수구․기득권 집단 편에 서서 노동자, 농민, 전교조, 개혁적 시민운동, 진보진영 등을 적으로 모는 ‘피아 식별법’을 체질화하고 있다. 사상검증을 주도하는 등 색깔론의 원조다. 이는 민주주의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파시스트적 발상(한겨레신문 2003.2.19. <김동민의 미디어 읽기>”이라면서 비판의 펜을 치켜세웠습니다.

그렇다고 거기에 참여․동의․침묵하는 지식인들까지 싸잡아서 몰아붙여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올바르고 잘했다고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싸잡아 몰아붙여 비난하는 것의 밑바탕에는 분노가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분노는 좌절에서 나옵니다. 현실 개혁에 대한 좌절과 체념이 분노를 만들고, 그 분노가 다른 인격에게 쏟아 붇는다는 게 문제입니다.

<조선일보>에 참여․동의․침묵하는 많은 문인과 지식인들의 양심과 지성에 호소해야 합니다. 조금 호소해보다 안 된다고 실명을 거론하며 공격하면 안 됩니다. 둘 다 상처받습니다. 오히려 양심과 지성에 호소했는데도 그 호소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다시 한번 성찰의 시간을 가져봐야 합니다. 혹시 “내가 지금 ‘성찰의 빈곤’ 상태에 빠진 것은 아닌가?”라고 말입니다.

살다보면 무례한 말로 모욕을 당하기도 합니다. 무례한 말의 대부분은 비판, 충고, 가르침, 명령, 논쟁의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무례한 말로 모욕을 당하는 것은 언어폭력에 희생당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언어폭력을 당할 때마다 마음속에서 ‘분노가 불끈 솟아’ 똑같은 폭력으로 되갚음을 하지요. 우리사회 지식인들이 하는 비판과 논쟁이 대부분 이런 모습을 띤다고 생각합니다. 폭력의 반복, 이것이 어찌 미국이 벌이는 전쟁보다 어리석지 않다 하겠습니까.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언어의 폭력 속에 숨겨진 분노의 본질을 깨우쳐 주십니다.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 라자가하의 벨루바나에 있는 깔란다까니바빠에 계셨다.
2. 그때 바라문 아쑤린다까 바라드와자가 이와 같이 들었다. ‘바라드와자 가문의 한 바라문이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수행자 고따마의 앞에 출가했다.’
3. 그는 화가 나서 불만스럽게 세존께서 계신 곳으로 찾아왔다. 가까이 다가와서 세존을 무례하고 추악한 말로 비난하고 모욕했다.
4. 이와 같이 말했을 때 세존께서는 침묵하셨다.
5. 그때 바라문 아쑤린다까 바라드와자는 세존께 이와 같이 말했다.
[아쑤린다까] “수행자여, 그대가 졌다. 수행자여, 그대가 졌다.”
6. [세존] “말로 거칠게 꾸짖으면서
어리석은 자는 이겼다고 생각하네.
그러나 인내가 무엇인가 아는 자에게
승리는 돌아가리.
분노하는 자에게 다시 분노하는 자는
더욱 악한 자가 될 뿐,
분노하는 자에게 더 이상 화내지 않는 것은
이기기 어려운 싸움에 승리하는 것이네.
다른 사람이 분노하는 것을 알고
주의 깊게 마음을 고요히 하는 자는
자신만이 아니라 남을 위하고
그 둘 다를 위하는 것이리.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
모두를 치료하는 사람을
가르침을 모르는 자들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네.”
<쌍윳다니까야> p363 아쑤린다까[Asurindako] 가운데서

부처님께 귀의한 바라문 가문의 청년이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지도자급 되는 바라문이 부처님께 찾아왔습니다. 분노와 원망을 가득 품 채 말이죠. 당대 사회귀족이자 지식인이었던 그 바라문은 부처님께 찾아와 엄청 무례한 말로 모욕을 주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 무례한 말을 묵묵히 듣고만 계셨습니다. 침묵한 채 말입니다. 결코 똑같이 언어적 폭력으로 되갚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말로써 거칠게 꾸짖으면서 어리석은 자는 이겼다고 생각하네. 그러나 인내가 무엇인가 아는 자에게 승리가 돌아가리.”

그렇습니다. 우익-수구 기득권 세력과 경비견 <조선일보>는 어리석기 때문에 말이 거칩니다. 그들은 이겼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내를 모르기 때문에 결국 승리를 얻지 못합니다.

분노할 필요가 없습니다. 분노는 분노를 낳을 뿐입니다. 우익-수구 기득권 세력과 싸움은 이기기 어려운 싸움입니다. 그들의 세력이 뿌리 깊고 두터워 이기기 어렵기도 하지만 분노와 증오로 공격하는 그들에게 분노하지 않고 주의 깊게 마음을 고요히 하는 사람이 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깨달음을 프랑스 사회에서 충분히 배워 우리사회에 전파하신 선생님께서 앵똘레랑스는 앵똘레랑스로 대하라니요. 걱정이 앞서게 됩니다.

“앵똘레랑스 세력은 이성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오직 힘의 논리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조선일보>의 역사가 일관되게 보여 주는 것은 그들의 사전에는 반성이나 성찰이란 단어가 없다는 것이다.……그러면 이성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오직 힘에만 의지하는 앵똘레랑스 세력에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똘레랑스 세력의 어려움이 여기 있다. 자칫 똘레랑스가 앵똘레랑스까지 용인하는 듯이 보이는 까닭도 이 어려움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앵똘레랑스가 헤게모니를 쥔 곳에 똘레랑스는 설 자리가 없다. 요컨대, 똘레랑스 세력도 앵똘레랑스 세력에 대하여는 앵똘레랑스로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다시금 강조하거니와 똘레랑스의 부드러움은 앵똘레랑스에 대한 단호한 앵똘레랑스를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가운데서 p57

선생님 말씀처럼 앵똘레랑스 세력은 이성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습니다. 오직 힘의 논리에 따라 움직입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앵똘레랑스 세력인 <조선일보>의 모습을 보면 너무 잘 알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이런 조선을 힘의 논리로 억누르고 짓밟아버리고 싶습니다. 그것이 앵똘레랑스를 앵똘레랑스로 극복하는 것이라면 말이죠. 동양에서는 이를 두고 ‘오랑캐를 오랑캐로 제압한다’고 하지요.

분명 똘레랑스 세력의 어려움은 있습니다.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보이는 앵똘레랑스 세력에게 어찌 포용과 관용을 베풀 수 있겠습니까? 특히 그들이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나라에서 말이죠. 그렇다고 이것이 앵똘레랑스 세력에 참여․침묵․동의하는 문인과 지식인들을 폭력적으로 공격하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선생님, 제가 보기에 앵똘레랑스는 ‘적대감’이 다른 말입니다. 상대가 나에게 적대감을 보인다고 나도 상대에게 적대감을 갖고 대해야 할까요? 그 결과는 과연 어떨까요? 폭력만 남을 것입니다. 그 속에서 이성, 성찰, 화해, 평화, 겸손 같은 단어를 찾아보기는 힘들 것입니다. 이렇듯 생각과 신념이 달라 일어나는 적대감을 앵똘레랑스로 해결하려하면 안 됩니다. 제가 옛 이야기 한편을 들려드리겠습니다.

세존께서 왕사성의 죽림정사에 계셨을 때입니다.
그 당시 다난자니라는 특별히 고귀한 바라문 가문에서 태어난 지혜로운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아주 독실한 바라문 가문의 성직자였으므로 정기적으로 가난한 성직자들에게 공양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부처님을 믿었기 때문에 남편이 성직자에게 공양을 올릴 때마다 삼귀의를 읊조리곤 했습니다. 남편은 이를 매우 싫어했지요. 그래서 하루는 남편이 그녀에게 반강제적으로 요구했습니다. 남편이 여는 잔치에 나와 삼귀의를 읊조리며 방해하지 말라고 말이죠.

그러나 그녀는 남편의 요구를 거부했습니다. 마침내 잔치가 벌어져 향응이 무르익자 다난자니는 부처님을 떠올리며 합장하고 삼귀의를 읊조렸습니다.

[다난자니] “세상에 존경받는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께 귀의합니다. 세상에 존경받는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께 귀의합니다. 세상에 존경받는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께 귀의합니다.”

그러자 그때까지 향응을 즐기던 바라문들이 모두 분노하며 집을 떠나버렸습니다. 잔치를 열었던 남편은 당연히 화가 났겠지요. 자기를 무시하는 부인에게 화가 났고, 그 부인이 따르는 부처님에게 화가 났습니다. 남편은 부인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부처님께 따지러 갔습니다. 남편은 부처님을 만나자마자 머리끝까지 치솟은 화를 감추고 시로써 말했습니다.

[바라문] “무엇을 끊어서 편안히 잠자며
무엇을 끊어서 슬프지 않은가?
어떤 하나의 원리를 죽이는 것을
고따마여, 당신은 가상히 여기는가?”

남편은 활활 타오르는 분노를 감추고 부처님께 논쟁(시비걸기)을 걸었습니다. 말인즉, “당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다난자니의 신념의 본질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바라문의 사상을 무시하는 다난자니의 행동이 올바르다고 보는가?”라고 물었습니다. 남편의 시 속에는 배타적인 독선주의가 짙게 깔려 있었습니다.

[세존] “미움을 끊어서 편안히 잠자고
미움을 끊어서 슬프지 않네.
참으로 바라문이여
뿌리에는 독이 있지만 꼭지에 꿀이 있는
미움을 죽이는 것을 성자는 가상히 여기니
그것을 죽이면 슬프지 않기 때문이네.”

부처님께서는 남편의 시비걸기는 피하시며, 지금 왜 분노하고 있는지 똑바로 볼 것을 권하셨습니다. 당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다난자니의 행동을 칭찬도 비난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타오르는 ‘화’를 억제하지 못하는 남편에게 자비의 가르침을 일러주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남편, 즉 바라문의 배타적독선주의 속에 분노와 미움이 숨어있는 것을 일러 주셨지요. 대화를 통해서 남편을 치유하셨습니다. 바라문인 남편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분명 분노를 대할 때, 분노로써 맞받아 치지 않았습니다. ‘화’의 참 모습이 무엇인지 올바로 볼 수 있도록 양심과 지성에 호소했습니다. 다난자니의 남편은 부처님의 호소에 마음을 움직였던 것이지요. 부처님이라도 매번 양심과 지성에 호소한다고 상대방이 설득되지는 않았습니다. 부처님이 보기에 양심과 이성의 호소를 무시하고 어리석은 길을 갈지라도 상대를 비난하거나 무시, 외면, 소외시키지는 않으셨습니다. 다만 가슴아파하셨을 뿐이지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부처님 생존시 강대국이었던 코살라국이 부처님께서 태어나신 석가족을 침공하려 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전쟁의 공포와 고통을 아시기 때문에, 그 어떤 전쟁도 찬성하실 수 없었습니다. 당연히 부처님께서는 80노구의 몸을 이끌고 코살라 대군이 진격하는 앞을 가로막고 조용히 가부좌를 하셨습니다. 요즘 말로 비폭력 반전시위쯤 되겠지요.

코살국 국왕은 당황했을 것입니다. 아마 2월 15일 전 세계 시민들의 반전시위에 전쟁 주도국 미국과 영국의 정책 결정자들이 당황스러웠던 기분과 같겠지요. 부처님께서는 당시 민중들은 물론 재산이 많던 장자들에게도 영향력이 컸던 정신적 지도자셨습니다. 그런 분께서 노구를 이끌고 전쟁을 온 몸으로 막고 계시니 코살라국도 함부로 진격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 다른 얘기지만 넬슨 만델라가 이라크 행을 고민하고 계신다지요. 저는 넬슨 만델라는 물론 지미 카터, 국경없는 의사회, 바웬사, 김대중 대통령 등 노벨평화상 수상자들이 모두 이라크로 가서 부처님처럼 온 몸으로 전쟁을 막았으면 좋겠습니다. - 코살라국은 군대를 돌려 돌아갔습니다. 부처님께서 전쟁을 막으신 거죠.

그러나 코살라국은 다시 석가족의 땅으로 군대를 보냈습니다. 허리가 휘어져 걸음조차 옮기는 게 힘드신 늙으신 부처님께서는 다시 그늘 한 점도 없는 뙤약볕 아래에 앉아서 비폭력과 침묵으로 전쟁을 막으셨습니다. 코살라국의 국왕으로써도 부처님을 코끼리의 발로 짓밟고 군대를 진격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얼마 뒤 코살라국은 세 번째로 군사를 일으켜 석가족을 침공합니다. 이때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더 이상 자신의 힘으로 전쟁을 막을 수 없음을 아시고 반전시위를 포기하십니다.

부처님께서는 일관되게 코살라국의 국왕과 지배자들의 양심과 이성에 전쟁의 참상과 공포, 고통에 대해 설득하셨습니다. 하지만 인류의 스승이신 부처님께서도 설득시키기 어려운 일을 있었지요. 두 번까지는 됐는데, 그 이상은 무리였나 봅니다.

비록 코살라의 국왕과 지배자들이 전쟁을 일으켰어도, 부처님께서는 그들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연민의 마음을 일으켜 따사로이 품어주셨지요. 누구나 이런 커다란 자비를 일으킬 수는 없겠지요. 피가 튀는 살육의 현장에서도 고통과 번민을 버리고 자비의 가슴을 열어주신 분도 계신데. 그보다 작은 ‘차이’ 정도야 이해하는 마음으로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렇게 말하는 저도 ‘내 안의 평화’보다 ‘분노’를 더 많이 일으키곤 합니다. 이 글을 쓰면서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저는 요즘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과연 시비를 가리는 게 올바른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타인에게 상처를 준다면 그것이 과연 정의인지. 분노를 가슴에 깔고 싸우다 보면 자기를 잃지나 않을지. 꽤나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보게 됩니다. 아직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다만 분노, 미움, 시기, 질투 같은 마음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면 그 어떤 주의주장도 모두 위선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 저는 선생님께서 분노의 마음으로 <조선일보>를 비판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미움의 마음으로 문인과 지식인들을 비판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요. 다만 앵똘레랑스를 앵똘레랑스로 대응해야 한다는 글귀가 섬뜩하여 이렇게 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저는 선생님이 사회적 성찰을 믿습니다.

글을 마치기에 앞서 제가 사람을 보는 태도에 대해 말씀드리려 합니다. 저는 어떤 문인과 지식인들의 글을 보면서 그들에 대해 판단하지 않으려 합니다. 이유는 제가 그분들의 삶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드물지만 정치적으로 우익-수구인 분들도 인격이 높으신 분도 있고, 진보적이지만 인격을 찾아볼 수 없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선입견이 아니라 제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직접 당해봐서 그렇습니다. 대부분은 아니지만 진보진영에 속하신다는 사람들 중 어떤 분들의 인격은 차마 입으로 담기가 힘든 경우도 있습니다. 민주, 진보, 평화, 평등이라는 가치를 겉으로는 앞세우면서도 그 밑바탕에는 분노, 시기, 질투, 미움이 깔려 있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그럼 어떠해야 사람의 참 모습을 올바로 보고 알 수 있을까요? 부처님의 말씀을 옮기면서 이 글을 맺을까 합니다.

“대왕이여, 그들이 계율을 지니고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은 함께 살아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오랫동안 같이 살아보아야 알지, 짧은 동안에는 알 수 없습니다. 대왕이여, 그들이 청정한가 하는 것은 같이 대화를 해 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오랫동안 대화를 해야 알지, 짧은 동안에는 알 수 없습니다. 대왕이여, 그들이 견고한가 하는 것은 같이 그들이 재난을 만났을 때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것도 오랫동안 재난을 만났을 때 알지, 짧은 동안에는 알 수 없습니다. 대왕이여, 그들이 지혜가 있는가 하는 것은 논의를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것도 오랫동안 논의를 함으로써 알지, 짧은 동안에는 알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에) 주의 깊어야 알지 주의가 깊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지혜로워야 알지 우둔하면 알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