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문화아카데미 유동걸입니다.
작년 집담회에서 한 번 뵙고, 글로써만 몇 번 뵙습니다. 같이 살아보지 않고, 혹은 한 번도 둘만의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어보지 않은 상태에서 앞글에 대한 반론을 펴려니 부담이 됩니다만은, 한국사회의 지식인 문화에 대한 생산적인 논쟁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내보고자 합니다. 제 글에 앞서서 개혁에 대한 님의 글을 보건대 이윤주원 님께서도 역사와 현실과 개혁 그리고 나아가서 종교에 대해서가지 깊은 조예를 지니신 듯 합니다. 올려주시는 옥고 잘 읽고 깊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식인 문제와 조선일보를 둘러싼 논쟁지점에서 홍세화 선생님 글을 이해하는 과정이나 시각은 좀 다른 듯 하여 제 생각을 말해보고자 합니다.
똘레랑스의 한국어 번역은 '화이부동'(和而不同)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 번역되어 널리 쓰이는 '관용'(寬容)이라는 말은 적절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관용'(寬容)이란 말은 마치 누구나 다 용서하고 받아들이자는 말처럼 느껴져서 그 말이 담고 있는 원래의 뜻을 잘 살리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정확하게 들어맞는 짧은 한자어를 찾지 못했지만 굳이 두 글자 한자어로 바꾸어 쓰자면 '용인'(容認)이라는 말이 더 적절할 듯합니다. (홍세화, 2003년 1월24일 한겨레 강좌에서)
조화를 이루되 같음을 강요하지 않는다. 대동(大同)과 더불어서 동양적 가치의 핵을 이루는 자세를 보여주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을 똘레랑스와 연결시킨 점은 탁견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조선일보와의 화이부동(和而不同) 혹은 조선일보에 글을 쓰는 문인과의 화이부동(和而不同) 그 과정이 존재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홍세화 선생님께서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을 통해 '앵똘레랑스에 대한 앵똘레랑스'를 본격적으로 선언하시면서 관용의 의미에 대한 반성적 고찰을 하신 부분이 눈에 띕니다. 똘레랑스가 타인에 대한 배려나 존중을 중시하고 조화와 통일의 철학(이라기보다는 역사가 더 어울리겠지요)을 기반으로 해서 생겨난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그 의미가 부처님이나 예수님같은 성인의 무한한 자비나 용서와는 격이 다르다는 - 일테면 개인적 신앙의 차원을 넘어선 역사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성인의 내면적 혁명과는 궤를 달리하지 않으면서도 한 차원 더 높을 수도 있다는 - 생각이 듭니다. 이는 홍세화 선생님의 인격이 붓다나 예수를 초월한다기보다는 붓다나 예수의 역사인식이 적어도 21세기의 사회과학적 분석과 비판 능력에 뛰어난 부르디외나 홍세화보다는 못하다는 뜻이지요. 일단 그런 전제 하에 쓰신 글의 내용을 반박해보겠습니다.
조선일보를 둘러싼 지식인 논쟁이 치열해지는 가운데 신경림, 박완서, 김용택 등의 문인들한테까지 실명을 거론하며 비판을 하는 일이 온당한지? 한마디로 저는 온당하다는 입장입니다.
우린 너무 멀리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린 너무 가까이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신경림, 장자를 빌려, 시집 『길』)
大知觀於遠近 - 큰 지혜는 멀리 보면서도 가까이서 보는 것이다. (장자, 추수편)
김지하나 고은에 비견할 만한 분이신지 모르지만 신경림 선생하면 내노라는 시인들도 고개를 숙이는 한국 문단의 큰 시인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문단의 원로이자 민중시의 산 증인으로 민초의 한과 떠돌이의 철학을 담고 있는 훌륭한 시인이시라는 점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겁니다. 제 아내와 동성동향이며 촌수로도 그리 멀지 않은 그 분은 한 때 제 시공부의 스승이기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분의 눈길이 어디메쯤 머무는지 궁금해집니다, 문득. 너무 높은 데만 계시다보니 이제는 행여 가까운 데를 놓치시고 그저 높이 나는 새처럼 멀리만 보고 계시지는 않은가 해서지요.
우리 시대의 깨인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조선일보라는 언론권력의 실체를 대개는 알고 있을 것이므로(이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90년 시인 김지하가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라'고 일갈을 하던 때와는 다른 시대라는 -지성적으로 훨씬 성숙하고 나아진 시대라는 - 맥락도 함께 담고 있습니다) 그 왜곡된 권력의 성채를 유려하게 돋보이는데 일조하는 것이 과연 아무런 잘못이 없는가에 대해서는 달리 생각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비록 차원과 영역은 다르지만 마치 예술의 순수성 논쟁과도 유사한 성격을 띄는 이 논쟁은 단지 문인이기 때문에, 혹은 내용이 순수하고 아름답기 때문에 조선일보의 부정적인 행태와는 무관하다든지, 혹은 이건 차원이 다른 영역의 문제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불교의 연기이든 현대물리학이든 순수객관의 절대세계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제시하고 있는 만큼 순수성 논쟁은 의미가 없으며, 행여 조선일보에 글을 쓰신 문인들이 자신들의 위치를 '문제는 전쟁광 부시지 부시 화장실의 방향제가 무슨 죄가 있느냐'라고 했을 때 그 부시 화장실의 방향제' 정도로 인식하고 있지 않다면 조선일보에 글을 쓰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그 글이 조선일보를 빛내주고 문화권력자들을 통해서 문화적 위상을 더욱 높이는 것처럼 보이는 착시현상을 유발한다면 말입니다. 특히 문화권력자로 오만함이 극에 달한 형태로 조선일보의 논조를 앵무새처럼 -혹은 선도적인 이데올로그로 - 확대재생산 하는 이문열의 경우에도 자기 이름을 걸고 쓴 글에 대해서 실명을 비판하는 글쓰기를 할 수 없다면 그건 조선일보가 주장하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고 위협이라고 생각합니다.
실명을 거론하며 새로운 글쓰기의 영역을 개척하는 강준만에 대한 평가도 생각이 다릅니다. 혹시 강준만을 만나보고 대화한 뒤에 든 생각이신지는 모르겠습니다.(그렇다면 저 역시 그를 만나보고 나서야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요) 글로써만 그의 공격성과 타인에 대한 인격모독을 지적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을까요? 일단 저는 그의 공격적 글쓰기를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바입니다. 실은 강준만 교수의 그 '공격적 글쓰기와 포장된 비난 혹은 사회학적 테러리즘'이라는 말은 반대세력의 - 일테면 강준만한테 씹히는 세력들의 수사적 공격이자 언어-정치적인 보복이지요. 수백만의 눈과 귀를 가리고 왜곡과 오보를 마다않는 조선일보야말로 사상검증을 통한 인신-인격공격과 정치.문화적 테러의 주역이 아닙니까? 홍세화나 강준만 혹은 부르디외를 언급하며 부처님의 자비와 같은 무한 똘레랑스를 지니라는 주문은 아무래도 번지수를 잘못 찾은 비판이 아닐런지요. 침묵과 비겁으로 일관해온 - 그걸 강준만은 침묵의 카르텔이라 부르지요 - 지식인 사회에 경종을 울려주는 제대로된 글쓰기의 전형을 보여주는 선구적인 노력은 한국 사회학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홍세화의 글쓰기도 강준만만큼 도발적이지는 않지만 무게 있는 지식인의 성찰과 고뇌에 찬 행동이 아닐까 싶고요?
참여, 동의, 침묵하는 지식인들을 싸잡아 몰아붙여 비난하는 밑바탕에는 분노가 숨어 있고 분노는 좌절에서 나온다는 말에는도전혀 동의할 수 없습니다. 강준만과 홍세화의 글을 보십시오. 어디서 그 좌절과 분노가 묻어 나옵니까? 저도 지난 설 연휴 기간에 홍세화 선생님의 글을 읽고 두 사회에 대한 한과 고뇌와 성찰과 식견들을 접하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분의 글 어디에 좌절의 기운이 느껴지셨는지요? 좌절보다는 오히려 자신감과 솔직함의 용기와 기개가 묻어나오지 않습니까? 단지 표현에 있어서 기성-내숭 지식인의 머리를 속된 말로 깨게 만드는 획기적인 표현들이 나온다는 이유로 인격에 대한 공격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유신시대 오적을 쓴 김지하에게 '당신 너무 심한 거 아냐'라는 충고를 던지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일보에 글을 쓰는 사람이 실명으로 쓰지 않는다면 실명 비판을 할 이유가 없겠지요. 제가 보기에는 실명비판은 좌절의 소산이 아니라, 다소 늦었지만 누구나 할 말을 할 수 있는 풍토의 개선과 여유 속에서 나오는 힘이라고 봅니다. 과거에는 함부로 이름을 들먹거렸다가 사회적으로 매장되기 십상이었으나 이제는 '솔직히 말하자'는 김남주의 시귀처럼 혹은 '할말을 하는' 조선일보의 주장처럼 누구나 할 말을 제대로 하는 사회가 된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좌절과 체념이 분노를 낳고 분노가 인격모독의 비판 아닌 비난으로 이어진다는 님의 말에는 선뜻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일부 네티즌들 혹은 지식인들의 격한 표현이나 소수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 내부의 파시즘 문제가 적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물론 그들이 자처하는 만큼 진보적인지 사이비인지는 실천을 통해서 검증을 해보아야 아는 것이지만 '폭력의 반복, 이것이 어찌 미국이 벌이는 전쟁보다 어리석지 않다 하겠습니까'라는 말은 일부의 왜곡된 가치관을 지닌 사람들에게 해야 할 말을 대상을 잘못 선정해서 쓰는 말이며 나아가 그 말 자체 안에는 폭력을 부르는 근원적 폭력에 대한 성찰과 해결 대안이 뚜렷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님의 용서와 자비만으로는 부족하지 않나 싶고요. 그을 쓰신 맥락에는, 부처나 예수가 아니더라도 간디나 마틴 루터킹이 자기 희생을 각오하고 양심과 지성에 비폭력을 호소한 정신에 기반한다는 걸 느끼지만, 수백만을 살상하는 거대한 폭력에 대한 작은 반발을 '폭력의 반복'이라는 이름으로 폄하하거나 방향을 비틀어서는 안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작은 폭력이 다시 권력자의 심기를 건드려 더 큰 폭력으로 이어지는 것을 우려한 말씀이기도 하겠지만 그럼 거대한 폭력에 정항하고 변혁하는 그 대안은 무엇인지 묻고 싶습니다.
미국에 의해 지난 백여 년 동안 희생당한 약소국가의 수백만 희생자들의 넋을 위무하고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길은 인내와 자비인지요?
이윤주원 님께서는 한 마디로 '차이를 인정하자'라고 말씀하시는 듯 합니다. 맞습니다. 화이부동(和而不同) - 조화를 추구하되 모두가 똑같음을 강요할 필요는 없다라는 그 똘레랑스 정신의 첫걸음은 차이를 존중하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정신이 맞습니다. 하지만 법은 존중받은 가치를 지닌 사람을 보호해주어야 하듯이 차이에 대한 존중 또한 무차별적일 수는 없지 않을까요?
이성적 합리성이 발달하지 못한 우리사회가 논쟁과 토론이 익숙한 프랑스 사회처럼 될 수 있느냐며 어떤 경우에도 공격적인 비난은 삼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상대방이 어떻게 나오든 양심과 지성에 호소하면 결실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양심과 호소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차이’로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요. 탱크를 몰고와서 군화발로 짓밟든, 전국민의 세뇌하여 용공조작을 하든, 사이비애국심을 부추겨 전쟁을 일으키든 그 어떤 경우에도 공격적인 비난은 삼가고 양심과 지성에 호소하다 결실을 맺지 못하면 '차이'로 이해하자는 말씀이시겠지요. 그 밑바탕에는 무한한 자비와 기다림의 마음이, 연민이, 아쉬움이 깔려 있다는 걸 압니다. 알기에 저 또한 더욱 아쉽습니다. 우선 그 말은 '차이'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불러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생존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던 베트남 사람들과 정의의 이름으로 베트콩을 소탕하러 가서 서로 주고 죽였던 국군들에 대해서는 그 차이와 용인이 행해질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반공이데올로기 강화와 경제성장을 빌미로 젊은이들을 사지로 몰아넣었던 박정희와 그 배후로 작용하며 베트남 곳곳에 고엽제를 살포했던 오만한 미국의 행태를 우리와의 '차이'로 이해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수천만의 세계시민이 이라크 전쟁에 대한 반대를 외치고 있는 지금,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유엔을 압박하고 그 어떤 양심의 호소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으며, 나라 인구의 절반이 어린이로 남아 있는 이라크에 대해서 전쟁을 일으키려는 부시의 행태를 단지 차이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양심과 지성에 호소하는 목소리가 바로 무엇입니까? 홍세화 선생님이 말하는 '앵똘레랑스에 대한 앵똘레랑스'는 공격적 글쓰기나 인격모독이 아니라 성찰적 지성의 양심과 지성에 호소하는 목소리 바로 그것이 아닐런지요?
노무현 대통령이 토론공화국을 언급한 바처럼, 우리도 충분히는 아니지만 이제 다양한 토론의 장이 마련되면서 옳고그름을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의 사회.문화적 성숙함은 갖추어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아직도 톼행적인 모습을 보이는 관료집단이나 수구언론, 보수권력의 반발도 만만치 않지만요...... 한 마디로 '차이에 대한 이해', 거기에도 많은 차이가 있음을 느낍니다.
그리하여 다시, 저는 앵똘레랑스에는 단호히 앵똘레랑스로 대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똘레랑스임을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앵똘레랑스의 대상은 내 밖의 타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의 혹은 나 자신 안의 파시즘에도 있는 것이며, 그것은 정치.사회적인 영역 뿐만 아니라 동시에 내면적이고 심적이 영역을 아우른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 역시 중생 모두가 거룩함을 찾아가는 대중적 성화야말로 우리가 꿈꾸는 현실 속에서의 이상사회임을 믿고 있습니다. 분노와 화를 다스리고 기다림과 인내와 용서를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세상이 어서 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지만 그 세상을 이루는 것을 위장된 욕망과 노골적인 권력의 이름으로 자행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최대한의 앵똘레랑스 - 이 경우의 똘레랑스는 전자의 부당하고 폭력적인 앵똘레랑스와는 질이 다른 '성찰-부정-저항-권고-호소-반박-비판'의 과정을 거치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변혁과정일 것입니다.
즉 이윤주원님게서 섬뜩하다고 하신 '앵똘레랑스에 대한 앵똘레랑스'는 말에서의 '앵똘레랑스'는 둘 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처럼 피의 복수를 다짐하는 뜻의 말이 아닙니다. 전자의 앵똘레랑스가 '부당하고 폭력적이며 극복되어야 할 비이성적 억압'이라면 후자의 앵돌레랑스는 이 부당한 권력과 억압에 맞서는 '성찰-부정-저항-권고-호소-반박-비판'의 과정을 거치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변혁과정임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니 다시 한 번
'앵똘레랑스에는 앵똘레랑스로!' 이것이 우리의 슬로건이 되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수반되는 극단적인 언어나 폭력성은 늘 잠재해 있는 만큼 주의하고 신중할 필요에는 저도 동의합니다)
두서 없는 긴 글 줄이고요
2년 전엔가 쓴 '신자유주의 시대의 지식인'을 같이 올려놓겠습니다. 우리시대의 언론과 지식인 문제를 놓고(이는 한반도 문제를 바라보며 아젠다를 형성하는 세력들의 문제이기도 하므로 일굼의 정체성이나 방향성과도 아주 무관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하므로...) 한반도를 둘러싼 핵소동이나 동북아 평화정착 과제를 고민하는데 병행해나가는 것은 어떨가싶네요. 모든 글이 그렇듯이 제 글 또한 아마 조금은 화실아 빗나간 부분도 있을 법 하니 꼼꼼하게 짚어 비판해주시기를 바라고요, 일굼을 형성하는 우리들의 삶의 자세 정립에도 이 논쟁이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작년 집담회에서 한 번 뵙고, 글로써만 몇 번 뵙습니다. 같이 살아보지 않고, 혹은 한 번도 둘만의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어보지 않은 상태에서 앞글에 대한 반론을 펴려니 부담이 됩니다만은, 한국사회의 지식인 문화에 대한 생산적인 논쟁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내보고자 합니다. 제 글에 앞서서 개혁에 대한 님의 글을 보건대 이윤주원 님께서도 역사와 현실과 개혁 그리고 나아가서 종교에 대해서가지 깊은 조예를 지니신 듯 합니다. 올려주시는 옥고 잘 읽고 깊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식인 문제와 조선일보를 둘러싼 논쟁지점에서 홍세화 선생님 글을 이해하는 과정이나 시각은 좀 다른 듯 하여 제 생각을 말해보고자 합니다.
똘레랑스의 한국어 번역은 '화이부동'(和而不同)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 번역되어 널리 쓰이는 '관용'(寬容)이라는 말은 적절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관용'(寬容)이란 말은 마치 누구나 다 용서하고 받아들이자는 말처럼 느껴져서 그 말이 담고 있는 원래의 뜻을 잘 살리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정확하게 들어맞는 짧은 한자어를 찾지 못했지만 굳이 두 글자 한자어로 바꾸어 쓰자면 '용인'(容認)이라는 말이 더 적절할 듯합니다. (홍세화, 2003년 1월24일 한겨레 강좌에서)
조화를 이루되 같음을 강요하지 않는다. 대동(大同)과 더불어서 동양적 가치의 핵을 이루는 자세를 보여주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을 똘레랑스와 연결시킨 점은 탁견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조선일보와의 화이부동(和而不同) 혹은 조선일보에 글을 쓰는 문인과의 화이부동(和而不同) 그 과정이 존재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홍세화 선생님께서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을 통해 '앵똘레랑스에 대한 앵똘레랑스'를 본격적으로 선언하시면서 관용의 의미에 대한 반성적 고찰을 하신 부분이 눈에 띕니다. 똘레랑스가 타인에 대한 배려나 존중을 중시하고 조화와 통일의 철학(이라기보다는 역사가 더 어울리겠지요)을 기반으로 해서 생겨난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그 의미가 부처님이나 예수님같은 성인의 무한한 자비나 용서와는 격이 다르다는 - 일테면 개인적 신앙의 차원을 넘어선 역사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성인의 내면적 혁명과는 궤를 달리하지 않으면서도 한 차원 더 높을 수도 있다는 - 생각이 듭니다. 이는 홍세화 선생님의 인격이 붓다나 예수를 초월한다기보다는 붓다나 예수의 역사인식이 적어도 21세기의 사회과학적 분석과 비판 능력에 뛰어난 부르디외나 홍세화보다는 못하다는 뜻이지요. 일단 그런 전제 하에 쓰신 글의 내용을 반박해보겠습니다.
조선일보를 둘러싼 지식인 논쟁이 치열해지는 가운데 신경림, 박완서, 김용택 등의 문인들한테까지 실명을 거론하며 비판을 하는 일이 온당한지? 한마디로 저는 온당하다는 입장입니다.
우린 너무 멀리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린 너무 가까이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신경림, 장자를 빌려, 시집 『길』)
大知觀於遠近 - 큰 지혜는 멀리 보면서도 가까이서 보는 것이다. (장자, 추수편)
김지하나 고은에 비견할 만한 분이신지 모르지만 신경림 선생하면 내노라는 시인들도 고개를 숙이는 한국 문단의 큰 시인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문단의 원로이자 민중시의 산 증인으로 민초의 한과 떠돌이의 철학을 담고 있는 훌륭한 시인이시라는 점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겁니다. 제 아내와 동성동향이며 촌수로도 그리 멀지 않은 그 분은 한 때 제 시공부의 스승이기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분의 눈길이 어디메쯤 머무는지 궁금해집니다, 문득. 너무 높은 데만 계시다보니 이제는 행여 가까운 데를 놓치시고 그저 높이 나는 새처럼 멀리만 보고 계시지는 않은가 해서지요.
우리 시대의 깨인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조선일보라는 언론권력의 실체를 대개는 알고 있을 것이므로(이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90년 시인 김지하가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라'고 일갈을 하던 때와는 다른 시대라는 -지성적으로 훨씬 성숙하고 나아진 시대라는 - 맥락도 함께 담고 있습니다) 그 왜곡된 권력의 성채를 유려하게 돋보이는데 일조하는 것이 과연 아무런 잘못이 없는가에 대해서는 달리 생각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비록 차원과 영역은 다르지만 마치 예술의 순수성 논쟁과도 유사한 성격을 띄는 이 논쟁은 단지 문인이기 때문에, 혹은 내용이 순수하고 아름답기 때문에 조선일보의 부정적인 행태와는 무관하다든지, 혹은 이건 차원이 다른 영역의 문제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불교의 연기이든 현대물리학이든 순수객관의 절대세계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제시하고 있는 만큼 순수성 논쟁은 의미가 없으며, 행여 조선일보에 글을 쓰신 문인들이 자신들의 위치를 '문제는 전쟁광 부시지 부시 화장실의 방향제가 무슨 죄가 있느냐'라고 했을 때 그 부시 화장실의 방향제' 정도로 인식하고 있지 않다면 조선일보에 글을 쓰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그 글이 조선일보를 빛내주고 문화권력자들을 통해서 문화적 위상을 더욱 높이는 것처럼 보이는 착시현상을 유발한다면 말입니다. 특히 문화권력자로 오만함이 극에 달한 형태로 조선일보의 논조를 앵무새처럼 -혹은 선도적인 이데올로그로 - 확대재생산 하는 이문열의 경우에도 자기 이름을 걸고 쓴 글에 대해서 실명을 비판하는 글쓰기를 할 수 없다면 그건 조선일보가 주장하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고 위협이라고 생각합니다.
실명을 거론하며 새로운 글쓰기의 영역을 개척하는 강준만에 대한 평가도 생각이 다릅니다. 혹시 강준만을 만나보고 대화한 뒤에 든 생각이신지는 모르겠습니다.(그렇다면 저 역시 그를 만나보고 나서야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요) 글로써만 그의 공격성과 타인에 대한 인격모독을 지적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을까요? 일단 저는 그의 공격적 글쓰기를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바입니다. 실은 강준만 교수의 그 '공격적 글쓰기와 포장된 비난 혹은 사회학적 테러리즘'이라는 말은 반대세력의 - 일테면 강준만한테 씹히는 세력들의 수사적 공격이자 언어-정치적인 보복이지요. 수백만의 눈과 귀를 가리고 왜곡과 오보를 마다않는 조선일보야말로 사상검증을 통한 인신-인격공격과 정치.문화적 테러의 주역이 아닙니까? 홍세화나 강준만 혹은 부르디외를 언급하며 부처님의 자비와 같은 무한 똘레랑스를 지니라는 주문은 아무래도 번지수를 잘못 찾은 비판이 아닐런지요. 침묵과 비겁으로 일관해온 - 그걸 강준만은 침묵의 카르텔이라 부르지요 - 지식인 사회에 경종을 울려주는 제대로된 글쓰기의 전형을 보여주는 선구적인 노력은 한국 사회학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홍세화의 글쓰기도 강준만만큼 도발적이지는 않지만 무게 있는 지식인의 성찰과 고뇌에 찬 행동이 아닐까 싶고요?
참여, 동의, 침묵하는 지식인들을 싸잡아 몰아붙여 비난하는 밑바탕에는 분노가 숨어 있고 분노는 좌절에서 나온다는 말에는도전혀 동의할 수 없습니다. 강준만과 홍세화의 글을 보십시오. 어디서 그 좌절과 분노가 묻어 나옵니까? 저도 지난 설 연휴 기간에 홍세화 선생님의 글을 읽고 두 사회에 대한 한과 고뇌와 성찰과 식견들을 접하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분의 글 어디에 좌절의 기운이 느껴지셨는지요? 좌절보다는 오히려 자신감과 솔직함의 용기와 기개가 묻어나오지 않습니까? 단지 표현에 있어서 기성-내숭 지식인의 머리를 속된 말로 깨게 만드는 획기적인 표현들이 나온다는 이유로 인격에 대한 공격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유신시대 오적을 쓴 김지하에게 '당신 너무 심한 거 아냐'라는 충고를 던지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일보에 글을 쓰는 사람이 실명으로 쓰지 않는다면 실명 비판을 할 이유가 없겠지요. 제가 보기에는 실명비판은 좌절의 소산이 아니라, 다소 늦었지만 누구나 할 말을 할 수 있는 풍토의 개선과 여유 속에서 나오는 힘이라고 봅니다. 과거에는 함부로 이름을 들먹거렸다가 사회적으로 매장되기 십상이었으나 이제는 '솔직히 말하자'는 김남주의 시귀처럼 혹은 '할말을 하는' 조선일보의 주장처럼 누구나 할 말을 제대로 하는 사회가 된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좌절과 체념이 분노를 낳고 분노가 인격모독의 비판 아닌 비난으로 이어진다는 님의 말에는 선뜻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일부 네티즌들 혹은 지식인들의 격한 표현이나 소수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 내부의 파시즘 문제가 적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물론 그들이 자처하는 만큼 진보적인지 사이비인지는 실천을 통해서 검증을 해보아야 아는 것이지만 '폭력의 반복, 이것이 어찌 미국이 벌이는 전쟁보다 어리석지 않다 하겠습니까'라는 말은 일부의 왜곡된 가치관을 지닌 사람들에게 해야 할 말을 대상을 잘못 선정해서 쓰는 말이며 나아가 그 말 자체 안에는 폭력을 부르는 근원적 폭력에 대한 성찰과 해결 대안이 뚜렷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님의 용서와 자비만으로는 부족하지 않나 싶고요. 그을 쓰신 맥락에는, 부처나 예수가 아니더라도 간디나 마틴 루터킹이 자기 희생을 각오하고 양심과 지성에 비폭력을 호소한 정신에 기반한다는 걸 느끼지만, 수백만을 살상하는 거대한 폭력에 대한 작은 반발을 '폭력의 반복'이라는 이름으로 폄하하거나 방향을 비틀어서는 안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작은 폭력이 다시 권력자의 심기를 건드려 더 큰 폭력으로 이어지는 것을 우려한 말씀이기도 하겠지만 그럼 거대한 폭력에 정항하고 변혁하는 그 대안은 무엇인지 묻고 싶습니다.
미국에 의해 지난 백여 년 동안 희생당한 약소국가의 수백만 희생자들의 넋을 위무하고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길은 인내와 자비인지요?
이윤주원 님께서는 한 마디로 '차이를 인정하자'라고 말씀하시는 듯 합니다. 맞습니다. 화이부동(和而不同) - 조화를 추구하되 모두가 똑같음을 강요할 필요는 없다라는 그 똘레랑스 정신의 첫걸음은 차이를 존중하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정신이 맞습니다. 하지만 법은 존중받은 가치를 지닌 사람을 보호해주어야 하듯이 차이에 대한 존중 또한 무차별적일 수는 없지 않을까요?
이성적 합리성이 발달하지 못한 우리사회가 논쟁과 토론이 익숙한 프랑스 사회처럼 될 수 있느냐며 어떤 경우에도 공격적인 비난은 삼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상대방이 어떻게 나오든 양심과 지성에 호소하면 결실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양심과 호소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차이’로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요. 탱크를 몰고와서 군화발로 짓밟든, 전국민의 세뇌하여 용공조작을 하든, 사이비애국심을 부추겨 전쟁을 일으키든 그 어떤 경우에도 공격적인 비난은 삼가고 양심과 지성에 호소하다 결실을 맺지 못하면 '차이'로 이해하자는 말씀이시겠지요. 그 밑바탕에는 무한한 자비와 기다림의 마음이, 연민이, 아쉬움이 깔려 있다는 걸 압니다. 알기에 저 또한 더욱 아쉽습니다. 우선 그 말은 '차이'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불러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생존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던 베트남 사람들과 정의의 이름으로 베트콩을 소탕하러 가서 서로 주고 죽였던 국군들에 대해서는 그 차이와 용인이 행해질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반공이데올로기 강화와 경제성장을 빌미로 젊은이들을 사지로 몰아넣었던 박정희와 그 배후로 작용하며 베트남 곳곳에 고엽제를 살포했던 오만한 미국의 행태를 우리와의 '차이'로 이해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수천만의 세계시민이 이라크 전쟁에 대한 반대를 외치고 있는 지금,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유엔을 압박하고 그 어떤 양심의 호소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으며, 나라 인구의 절반이 어린이로 남아 있는 이라크에 대해서 전쟁을 일으키려는 부시의 행태를 단지 차이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양심과 지성에 호소하는 목소리가 바로 무엇입니까? 홍세화 선생님이 말하는 '앵똘레랑스에 대한 앵똘레랑스'는 공격적 글쓰기나 인격모독이 아니라 성찰적 지성의 양심과 지성에 호소하는 목소리 바로 그것이 아닐런지요?
노무현 대통령이 토론공화국을 언급한 바처럼, 우리도 충분히는 아니지만 이제 다양한 토론의 장이 마련되면서 옳고그름을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의 사회.문화적 성숙함은 갖추어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아직도 톼행적인 모습을 보이는 관료집단이나 수구언론, 보수권력의 반발도 만만치 않지만요...... 한 마디로 '차이에 대한 이해', 거기에도 많은 차이가 있음을 느낍니다.
그리하여 다시, 저는 앵똘레랑스에는 단호히 앵똘레랑스로 대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똘레랑스임을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앵똘레랑스의 대상은 내 밖의 타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의 혹은 나 자신 안의 파시즘에도 있는 것이며, 그것은 정치.사회적인 영역 뿐만 아니라 동시에 내면적이고 심적이 영역을 아우른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 역시 중생 모두가 거룩함을 찾아가는 대중적 성화야말로 우리가 꿈꾸는 현실 속에서의 이상사회임을 믿고 있습니다. 분노와 화를 다스리고 기다림과 인내와 용서를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세상이 어서 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지만 그 세상을 이루는 것을 위장된 욕망과 노골적인 권력의 이름으로 자행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최대한의 앵똘레랑스 - 이 경우의 똘레랑스는 전자의 부당하고 폭력적인 앵똘레랑스와는 질이 다른 '성찰-부정-저항-권고-호소-반박-비판'의 과정을 거치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변혁과정일 것입니다.
즉 이윤주원님게서 섬뜩하다고 하신 '앵똘레랑스에 대한 앵똘레랑스'는 말에서의 '앵똘레랑스'는 둘 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처럼 피의 복수를 다짐하는 뜻의 말이 아닙니다. 전자의 앵똘레랑스가 '부당하고 폭력적이며 극복되어야 할 비이성적 억압'이라면 후자의 앵돌레랑스는 이 부당한 권력과 억압에 맞서는 '성찰-부정-저항-권고-호소-반박-비판'의 과정을 거치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변혁과정임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니 다시 한 번
'앵똘레랑스에는 앵똘레랑스로!' 이것이 우리의 슬로건이 되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수반되는 극단적인 언어나 폭력성은 늘 잠재해 있는 만큼 주의하고 신중할 필요에는 저도 동의합니다)
두서 없는 긴 글 줄이고요
2년 전엔가 쓴 '신자유주의 시대의 지식인'을 같이 올려놓겠습니다. 우리시대의 언론과 지식인 문제를 놓고(이는 한반도 문제를 바라보며 아젠다를 형성하는 세력들의 문제이기도 하므로 일굼의 정체성이나 방향성과도 아주 무관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하므로...) 한반도를 둘러싼 핵소동이나 동북아 평화정착 과제를 고민하는데 병행해나가는 것은 어떨가싶네요. 모든 글이 그렇듯이 제 글 또한 아마 조금은 화실아 빗나간 부분도 있을 법 하니 꼼꼼하게 짚어 비판해주시기를 바라고요, 일굼을 형성하는 우리들의 삶의 자세 정립에도 이 논쟁이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