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 시대의 지식인
아는 자는 떠벌리지 아니하고 떠벌리는 자는 알지 아니하다(知者不博 博者不知, 노자, 81)
말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켜야 한다(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고전적 자유주의 사회에서 상품은 노동과 토지와 제품이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전쟁과 경쟁의 적자생존의 사회가 극단으로 치달으면서 사랑과 성에 이어서 담론과 지식까지 상품이 되는 시대가 도래했다. 이제 차원을 한 단계 높인 새로운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상품이 되지 않는 것은 없어 보인다. 바야흐로 신자본주의/신자유주의 시대인 것이다.
세기말에 이어 21세기를 요란하게 장식하고 있는 화두인 신자유주의는 노동시장과 금융시장뿐만 아니라 지식시장 나아가 지식산업사회의 주체인 지식인 사회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고 지식인의 행태 변화는 신자유주의를 표방해온 김대중 정부의 언론(신문/조중동/특히 조선일보)개혁/탄압 문제와 맞물려 일파만파의 지식인 논쟁을 촉발시켰다.
지식인 논쟁이 비단 오늘날에 와서 나타나는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하지만 인문학의 위상을 놓고 적지 않은 위기론이 등장하는 가운데, 단순한 하나의 사실을 놓고 벌이는 견해차이가 아닌 정치, 이념의 문제를 포함한 광범위한 논쟁이 벌어지기는 오늘날이 처음이다. 80년대 음울한 독재정권 시절에 지식인의 현실참여 논쟁에 이어서 90년대 포스트모던과 근대화, 진리의 존재성과 지식인의 종언 등을 둘러싼 지식인 정체성 문제는 현재, 자유나 민족을 외치는 보수 지식인 그룹과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비판 지식인 무리의 새로운 대립 양상으로 번져가고 있다.
지식, 진리, 학문 등의 엄정한 개념 정의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이나, 좌우의 극단적 이념대립이 심화되는 현실정치를 둘러싼 지식인 논쟁을 통해서 참된 지식인이 설 자리는 어디인가를 돌아보고자 한다.
1. 지식과 권력
아는 것이 힘이다(프랜시스 베이컨)
근대 세계를 이끌어온 동력은 무기나 상품만은 아니었다. 세계유일의 지배자로서의 신의 권위를 추락시키고 봉건 영주를 축출한 부르조아의 자본과 권력에 정당성을 부여해준 지식체계가 없었다면 근대는 불가능한 꿈으로 끝났을 것이다. 형식적 민중권력을 정당화하고 상품개발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며 약소국을 침공하는 제국주의의 정당성을 부여해준 것도 다 근대적 지식의 산물이다. '아는 것이 힘'이라던 베이컨의 꿈이 실현된 것이다!
이성의 빛이 무지와 암흑에서 계몽과 해방을 가져다준다고 믿어온 지난 과거의 역사가 허구라는 것을 폭로한 이는 니체적 전통 위에서 전복적 학문의 꽃을 피운 미셀 푸코였다. 지식은 자연 정복의 도구였으며 감시와 처벌을 정당화하고 무엇보다도 그 자체가 권력적 속성을 가지고 타인과 세계를 지배하는 또 하나의 절대적 억압체계라는 것이었다.
이문열 작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권력과 지식의 절묘한 그러나 매우 교묘한 결합과 갈등을 보여준다. 지식 그 자체의 속성으로 보면 근대적/기계론적 체계를 가지고 힘을 발휘해온 지식은 학교라는 대량생산적 메카니즘을 통해서 권력 재생산의 시동을 걸었다. 오늘날 서울대를 중심으로 공고하게 굳어진 학벌주의는 권력과 지식이 행복하게 만난 우리사회의 일그러진 영웅담이다. 이문열 스스로 주류에 편입하기 위한 몸부림의 과정에서 탁월하게 그려진 이 소설은 역설적으로 문화권력을 지향해온 이문열의 보수적 현실인식이 강하게 드러난다.
'기회주의적인 태도, 용의주도한 침묵, 애국적 무모함, 회고적이고 자기극화적인 변질 그 이상으로 지성인의 공적 역할을 훼손하는 것은 없다(에드워 사이드)는 말에 걸맞게 무모한 자유를 외치는 이문열, 이인화에 이어 신자유주의 정책가인 김대중 정부를 사회주의로 몰아붙이는 한나라당 정책위장 김만제의 행태나 조갑제류의 멸공이념 공세는 권력 쟁탈전에서 패배하고 자조와 자위에 빠진 지식인의 우울한 초상인 한병태를 닮아 있다. 목소리 높여 사회정의와 자본주의의 승리를 외치는 이면에 단물을 빼앗긴 자의 비애와 초라한 파시즘에의 향수가 공허하게 울려퍼지는 것이다. 순수문학가를 자처하는 이문열의 '홍위병' 논쟁과 '악령' 혹은 '선택' 파동은 그가 지식인이기 이전에 영남양반의 유림(儒林)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보수적이고 권력적인 이데올로그임을 보여준다. 비판받아 마땅한 그의 허무주의를 가장한 보수주의는 솔직한 속내를 드러내고 소설가로서가 아닌 정치 선동가로서의 솔직한 삶을 인정하여야 한다.
동인 문학상 제정을 둘러싼 황석영의 거부나 미당문학상 제정을 둘러싼 잡음 뒤에도 지식의 권력화와 그에 대한 거부 의식이 자리를 잡고 있다. 민족문학작가회의라는 진보진영의 문인들이 오늘날의 사태를 놓고 침묵하고 있는 행태를 '침묵의 카르텔이 지겹다'고 일갈한 황석영은 친일 행적을 한 김동인을 기리는 동인문학상 수상과 선정 방식에 반기를 들었다.(조선일보에서 주최하는 동인 문학상은 김주영, 박완서, 이문열 등이 종신으로 심사위원을 맡고 있다) 친일 행적과 독재자 미화 논쟁이 끊이지 않았던 미당(未堂) 서정주는 스스로를 친일이 아닌 순일종천파라 변명했지만 죽어서 땅에 묻힌 지금도 말당(末堂)의 지위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평소 친애하던 제자로부터 죽어서 등에 칼을 맞은(미당 제자 이근배의 표현) 미당은 지하에서나마 자기가 그리던 님(천황폐하)의 곁으로 갔는지 모를 일이다. (영미제국주의를 규탄하고 황군이 되어 명예롭게 죽을 것을 종용한 '마쓰이 히데오 오장 송가'를 비롯한 친일작은 물론 미당의 등단작 '자화상'을 비롯 대표작 '국화 옆에서'를 치밀하게 분석한 창비의 무명 평론가에 이르기까지 이제 미당을 둘러싼 외적 현실을 넘어선 작품의 내재적 분석은 걸음마 단계를 막 시작했다) 그 숱한 행적과 친일 작품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미당에 대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비판 논의가 없었다는 것은 미당의 권력의 본질을 반증하는 것이며 나아가 우리 사회가 지식 권력 앞에 얼마나 굴욕적인가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가 될 것이다.
90년도 조선일보를 통해 '죽음의 굿판을 집어치우라'는 표제로 학생운동을 -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연쇄분신자살 속에 나타난 죽임의 의식과 정치운동을 - 비판하는 글을 썼다가 후배, 문인들로부터 비난의 집중 포화를 맞은 김지하의 경우 10년이 지난 오늘에도 운동가나 사상가 혹은 시인으로서의 명망은 물론 화해의 자리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
90년도의 정치적, 사회적 지형은 죽음의 연쇄 작용을 불러일으킬만큼 뜨거운 것이었다. 그들의 배후로 주사파를 지목한 서강대 박홍 총장과 더불어서 생명시인 김지하의 나약한 역사 인식은 저항과 민주의 상징으로 20년을 영웅으로 군림해온 김지하도 그가 주창한 보편적 생명주의가 한 신문사의 작란(作亂)에 의해 그의 고귀한 생명사상이 하루 아침에 반공주의로 변질되면서 그 자신도 한 순간에 역사의 배반자로 낙인찍혔다. 이 또한 영원회귀하는 생명의 본성을 따름인가! 영웅과 천재가 사라지고 스타만 반짝거리다가 명멸하는 초국가적 산업자본주의사회에서 소위 주류에 영합하지 못하는 지식인의 위상은 때로 그지없이 초라해짐을 보여준다.
친일에서 독재자 미화.찬양까지 반민족의 상징이자 권력의 대변지였던 조선일보를 둘러싼 지식인/대중들의 저항은 언론을 핑계삼아 지식권력화(92년부터 언론이 정치권력을 능가하기 시작했다는 보고서가 나왔다)를 진행시켜온 퇴행적 근대세계에 대한 작은 뒤집기로 보인다. 안티조선으로 유명한 인터넷 싸이트 '우리모두'와 옥천시민들이 자주적으로 힘을 모아 조선일보 바로보기 운동을 벌이는 '물총닷컴' 대 조선일보 및 안티한겨레를 포함한 지식 전쟁과, 신문사 세무 조사 및 사주처벌을 둘러싼 국제기자연맹(IFJ)과 국제언론인협회(IPI)/세계신문협회(WAN)의 대립은 경영권과 편집권을 독점 남용해온 사주측과 펜을 무기삼아 자유를 확대해온 시민/기자들의 대립의 확대 연장으로, 이제 더 이상 지식이 무한권력을 남용하는 횡포를 저지하려는 운동의 씨앗으로 보인다.
21세기 시장의 자유만이 무한으로 늘어나고 있는 현실에서 언론.지식인의 사명은 무엇인가? 그들이 서야할 위치는 어디인가?
정녕 펜이 칼보다 강해지는 것은 진부한 자유주의와 환원적 반공주의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지성인의 과업 가운데 하나는 인간의 사고와 의사 전달을 극도로 제한하는 진부한 관념들과 환원적 범주들을 분쇄하는 것이다'는 사이드의 말이 신념이자 행동으로 옮겨질 때나 가능한 것이 아닌지, 아니 펜은 칼보다 펜으로서의 자기 사명을 다할 때 진정 빛나는 것이 아닌지......
지식이 권력의 자리를 탐하여 언론을 통해 권력의 극한에 달한 한국 사회에서 이제 지식과 권력은 관계는 어떻게 새롭게 정립되어야 하는지? 아는 것은 정녕 힘이고, 힘이어야 하는지...
2. 민중 시대의 지식인
鳥獸哀鳴海岳嚬(조수애명해악빈) 槿花世界已沈淪(근화세계이침륜)
秋燈掩卷懷千古(추등엄권회천고) 難作人間識字人(난작인간식자인)
새와 짐승들도 슬피 울고 바다 또한 찡그리네/무궁화 이 나라가 이미 물속으로 가라앉네
가을의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지난 역사를 되새기니/어렵구나, 지식인의 사람다움을 지키기가.(매천 황현, 절명시)
두말 할 것 없이 지금은 탈민중성에 열을 올리는 지식인들이 더 많지만, 한때 지식인이 '민중성'을 지향하고 민중과 나란히 어깨를 겯던 시절이 있었다.
5.16 군사 구테타를 경험하기 전의 한국사회에서, 그래도 순수와 가치 중립의 자세를 견지한 양대 세력이 있었다면 그들은 군인과 지식인이었다. 4.19의 뒤를 이어 4월 26일 이승만 독재정권을 몰아낸 교수단 데모는 지식인의 현실참여에 불을 당겼고 61년 박정희의 등장은 군의 정치적 중립을 깨뜨리는 사건이었다. 더 이상 한국사회에서 정치적으로 자유로운 집단은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이다.
군사독재로 시작한 박정희 정권은 전태일 죽음과 10월 유신과 긴급조치와 박정희 피살의 과정을 겪으면서 지식인 사회에 근대화 논쟁을 남겨두었다. 경부고속도로를 둘러싼 지식인 사회의 격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 가시적 성과가 적지 않아 한국사회의 경제개발을 둘러싼 논쟁의 중심이 되었다. 박정희 기념관 건립추진을 둘러싼 논쟁의 바탕에는 경제발전/독재의 대립항이 존재한다. 김종필, 박근혜에서 조갑제, 이인화까지 박정희의 영웅화가 계속되는 가운데 개발독재의 그늘에서 고통받아온 민중적 지식인의 관점에서는 박정희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독재자로 남아 있다.
지식인의 역할과 사명이 본격화된 것은 군부독재라는 악의 씨앗을 물려받은 악의 꽃 전두환 정권에서였다. 최루탄이 대학가와 길거리를 덮어온 80년대는 민중운동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노동자, 농민, 학생, 빈민 등이 역사의 전면에 나서서 부패한 권력을 향해 돌을 던졌다. 70년대를 상징하던 김지하가 생명의 뿌리를 찾아 침잠하는 동안 김남주와 고은 같은 시인이 자유 정신을 포효(咆哮)하기 시작했고 노동자 출신 사상가인 박노해가 얼굴 없는 시인으로 등장하여 '노동의 새벽'을 노래하였다. 노동자 소설인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객지'에 이어 반미 소설인 '고삐' '무기의 그늘'이 쓰여졌고 대학가엔 한완상의 '민중과 지식인'이나 싸르트르이 '지식인을 위한 변명'이 운동권 학생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민주'와 '민중', '통일'을 외치는 지식인이 감옥으로 끌려갔고 70년대 운동권 출신들의 지식인들은 야당과 재야로 나뉘어지며 현실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반미사상의 고조속에 미문화원 방화 사건, 인천5.3 사태, 건국대 사태 등이 줄을 이었고 급기야 박종철, 이한열 군의 죽음으로 군부독재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어져가던 시절이었다. 80년대의 금서목록에는 '마르크스'나 '유물론' 뿐만이 아닌 '타는 목마름으로', '신동엽 전집' 등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하긴 지금은 문학교과서에 실려 있는 '향수(鄕愁)'로 널리 알려진 정지용의 시집만 읽어도 파출소로 끌려가던 시절이 80년대였다.
70년대 동아일보 사태에 이어 언론 통폐합이 진행되면서 땡전 뉴스가 유행을 했다. 창비지와 문지 계열로 나뉜 문인들이 폐간에 항의하며 창작공간을 확보하는 동안 지식인의 사명에 대한 숱한 논쟁들이 이어졌다.
지식인은 민중인가 아닌가? 즉자적 민중과 대자적 민중(한완상, 민중과 지식인)의 구분, 지식인은 사회참여(앙가쥬망)를 하는데서 지식의 존재가치를 찾아야 한다(싸르트르, 지식인을 위한 변명)는 주장이 상식이 되어갔다. 극한 독재의 상황에서 지식인은 무엇을 할 것인가? 나찌 치하에서 저항 운동을 하다 죽은 독일의 '본 회퍼' 목사의 사례는 두고두고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었다.(고다드, 죽음 앞에서) '살아남은 자의 슬픔'(브레히트)은 감옥에 끌려가지 못하고 남아서 역사의 주변을 서성거리는 부끄러움을 견뎌야만 하는 자의 위안이자 고통이었다. 더러 '숲 속의 방'(강석경)을 노래하며 '회색지대의 진실'을 언급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독재/반독재의 대립항이 극한으로 치닫던 시절에 이분법의 영역 밖에선 중간항이나 제3의 진실은 존재할 수 없었다. 총칼이 지배하던 사회에서 지식인 고유의 역할인 건전한 비판이 공적인 자리에서 토론과 논쟁 혹은 신문을 통해서 표출될 수 없었고 그래서 숙명적으로 80년대는 문학이나 철학의 시대이기도 했다.
7, 80년대 지식인의 역할과 사명은 '시여, 무기여'라는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강단은 현장과 분리되었고 정부.재벌 주도하의 군사독재적 근대.개발과 민중의 대립구도 가운데 민족, 민주, 민중의 사상과 논리가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절의 그때 그 자리 그 사람들이 지금은 어디에 있는가로 7, 80년대 지식인의 자리를 매김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 당시 행동하는 양심의 상징이었지만 감옥 생활과 망명 생활을 번갈아가면서 하던 김대중이 정권을 잡은 지금 더러는 여당으로 혹은 야당으로 아니면 지금도 재야에서 정치권에 편입해 있거나 386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여당의 부총리로 살아가는 그들은 그 시절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지성과 반지성'이라는 대립 구도로 당시를 정리하는 문학과지상사의 김병익은 '지식인됨의 괴로움'에서 지성인과 지식인이라는 대립항을 제시하기도 했다. 열린 지성보다는 깨인 지성을 강조하던 그 시절, 지식인의 사명은 비판과 성찰이었다는 것이 90년대에서 70년대를 되돌아보는 그의 회고이다. 그렇다면 진짜 중요한 실천의 문제는? 아마 역사가 대답을 해주리라 여기며 절명(絶命)을 노래하는 매천 선생의 싯구를 오늘에야 다시 듣는다. '읽던 책 덮고 지난 역사를 되새기니, 진정 어렵구나, 지식인의 사람다움을 지키기가......'
3. 포스트 모던과 지식인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32)
진리를 믿지 말아라 진리가 너희를 괴롭게 하리라(리오타르, 포스트모던의 조건)
90년대가 어떤 시대였는가? 자본주의 체제의 단일화 등 세계 체제의 변화 속에서 진보적 사상과 운동도 퇴조하고 그 사상가들 다수는 자유주의에 포섭되었으며 핵심은 소진되었다.(노동운동의 상징이었던 박노해가 '참된 시작'을 다짐하였으나 결국 '사람만이 희망'이다거나 '내일은 다르게'로 개방의 길을 걸은 것이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이제 노동진영은 신자유주의의 가속화 속에서 단결의 기치를 높이고 있으나, 노동 계층의 다양화 속에서 노동해방과 대단결의 상징은 찾아보기 힘들다) 적어도 비판적, 실천적, 민중적 지향을 거듭해온 사상가적/지식인적 경향이 급속히 뒷걸음질 쳤다.
문익환 목사의 죽음, 황석영의 구속은 통일 운동의 칼자루를 정부에게 넘겨주었고 남북 기본합의서에 6.15정상 회담에 이르기까지 정부주도하의 남북 관계 개선은 눈에 띄는 성취를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분오열된 민간/지식 계층의 통일 운동은 백인백색의 목소리로 혼란상을 연출하였다(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된 강정구 교수에서 재향군인회까지 여전히 이념적 사상적 합의가 안된 상태에서 통일 운동은 역설적으로 남쪽의 통일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문제를 일깨워주었다)
후쿠야마를 비롯 드러커, 케네디, 토플러 류의 친자본주의 사상가들은 서둘러 한걸음 더 나아간 자본주의, 자유주의 사상의 깃발을 휘두르고 있고 좌파의 개혁성에 밀려 사회의 전면에 드러나지 못했던 보수.우파 지식인들이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간판 아래 속속들이 모여들었다.
그렇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이 열병처럼 퍼지던 시대가 있었다. 동서독이 통합되고 소련이 해체되면서 냉전의 기운이 사라진 90년대 초반. '잔치가 끝났다'(최영미,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한 시인의 선포와 더불어 사회주의 이론에 기초했던 거대담론은 급속하게 퇴조현상을 보여왔고 지식인들의 이합집산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영화이론, 문화론을 중심으로 한 미시담론이 탄생했고 그 중심에 모스트모더니즘이 우뚝 섰다.
아직까지도 포스트주의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내려지지 않은 가운데 세기말과 더불어 포스트모더니즘에 일격을 가한 미국의 물리학자인 소칼이 제시한 '지적 사기' 논쟁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지닌 의식기반의 허약성과 그 자체의 속성인 가벼움을 보여준다.
대중문화를 중심 화두로 등장한 포스트모던의 몇 가지 특징은 ① 거대담론의 퇴조형상이라는 틈바구니에서 등장한 작은 이야기(미시담론), ② 동양과 서양의 만남 혹은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만남 등 다양한 사상의 혼합(패스티쉬 혹은 혼성모방) ③ 영화나 광고, 소설 등 저급하다고 평가받아온 대중 문화/매체의 부상 ④ 대중 매체의 영향 속에서 영웅 혹은 천재의 소멸과 스타 시대의 부상 ⑤ 이론.계몽.이성에 대한 불신과 회의 속에 해체와 여백의 강조 등이다.
대서사의 죽음, 신과학과 동서양사상의 결합, 시뮬라시옹이나 이마골로기 등 이념보다는 이미지 중심의 화두 등장, 이론 수명의 단축과 가벼움, 지식인의 종언과 진리에 대한 회의 등이 이들을 뒷받침하는 현상이다.
10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대를 풍미한 이 사상의 정체는 무엇인가? 여전히 오리무중인 가운데 그 실체가 '무엇인가'보다는 한국적 상황에서 '무엇을 남겼는가'에 대한 평가로 그 언저리를 더듬어 보고 마지막 '지적 사기' 논쟁의 의미를 평가해보자.
소칼과 장 브리크몽이 함께 쓴 '지적 사기' 논쟁은 '포스트모더니즘 사기'논쟁으로 이어지며 세계를 강타했다. 라깡에서 들뢰즈, 이리가레이, 크리스테바, 장 보드리야르 등 이름만 내놓아도 알만한 대학자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지적엄밀성을 (더 구체적으로는 그 인문.사회학자들이 자연과학적 지식을 오.남용 하여 - 자신도 알지 못하는 수학이나 물리학 지식을 지나치게 남용하여' - 과학에 무지한 독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 무엇보다 겁을 주려는 것'을) 문제삼아 '포스트모던식' 일격을 가한 것이다.
대가들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매도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는 저자의 입장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곧 두 부류로 나누어졌다. 프랑스 사상가들로부터 '비판을 위한 비판', '자연과학자가 인문사회과학의 방법론을 모르고 한 주장', '미국 지식인의 반프랑스주의', '파리 지성계를 겨냥한 미국의 제국주의적 공격', '좌파에 가하는 우파의 총질'이라는 비난을 퍼부었지만 '현대 프랑스 철학이 헛소리의 집적임을 증명했다'는 호평도 적지 않았다. 적어도 그들의 주장이 아주 무모하지만은 않다는 게 학계의 반응이다.
그들 주장이 갖는 의미를 나름대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① 포스트모던에서 주장하는 대서사의 해체를 그들에게 그대로 적용하여 현대철학의 본산인 프랑스사상계에 대한 권위를 해체하였다.
② 자연과학에 대한 엄밀한 이해 없이 인문학의 남용이 진행되어 온 것에 대한 경종을 울렸다
③ '인식론적 상대주의'에 대한 '절대주의.객관주의'의 비판
④ '정치적.문화적 개혁.급진주의'에 대한 '보수주의.실용주의'의 반격
검증의 불가능을 제시하고 반증가능성을 제시한 칼 포퍼나, 과학 혁명의 구조를 저술하여 과학의 역사성을 이론화한 토마스 쿤까지를 상대주의자로 싸잡아 비판하는 소칼의 주장은 실용적, 절대적 가치의 미국적 재현이라는 점이 앞으로 남은 지적 사기 논쟁의 숙제로 남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에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좌파 지식인 진중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의 포스트모던은 크게 네 방향으로 수용되었다. 첫째는 포스트모던의 근대 비판을 민주주의의 폭력적 전복으로 해석하는 극우적 수용방식이다. 가령 포스트모던을 빙자하여 박정희를 낭만주의적 영웅=천재=악마로 둔갑시키면서 그의 헌정 파괴 행위를 찬양하는 이인화를 생각해보라. 둘째는 근대를 '탈(脫)'하여 전근대로 되돌아가는 복고주의적 해석이다. 포스트모던의 이름으로 낡은 유교적 전통의 복고를 주장하는 함재봉의 논리가 여기에 속한다. 셋째는 포스트모던의 근대 비판에서 곧바로 선불교와 노자를 찬양하는 데로 날아가는 동양주의적 해석이다. 넷째는 ‘근대’라는 희생양에 모든 사회악의 책임을 돌리며 아무 대안없는 거기에 급진적 비판을 가하는 니체주의자들의 극좌적 수용방식이다'.
결국 포스트모던은 미국식 대중문화 이론을 수용한 보수적 지식인들이 대체로 한국적 전근대성을 탈근대의 가면으로 위장하면서 '극단적 복고 혹은 신지식'을 유포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다만 네 번째의 김진석(세르), 이진경(들뢰즈) 류의 학자들은 프랑스 좌파의 전통의 영향을 받아 '탈주'의 개념으로 유목적 사고와 운동을 제창하는 것이 독특하긴 하지만 세기말의 혼란상을 해석하고 이끌어갈 운동성은 부족해보인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그 숱한 논의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을 현혹시키거나 자신의 원래적 입장을 강화하는 수단으로만 기능했을 뿐 한국사회에 필요한 진보적이고 독창적인 사상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서구의 포스트모던은 미국적.대중문화적.보수적 포스트모던과 프랑스의 급진적.좌파적 포스트 모던으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 프랑스 좌파의 경우에도 포스트모던의 조건을 서술한 리오타르와 데리다 류의 해체 및 비판사상가로 유명한 푸코 계열로 구분할 필요가 있고......)
거대서사의 획일성.억압성에 대한 도전과 다양성.상호교환성의 개척이라는 성공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체제의 극대화 속에서 정치 혹은 경제 체제가 갖는 모순과 현상 분석에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기(아니 오히려 정치성을 약화시키고 경제모순을 은폐하거나 복고로 귀향하려는 속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한국적 포스트모던에서 지적해야할 것은 오히려 식민성이다. 서구의 이론을 무분별하게 들여와 유포하고 응용하고 폐기하는 냄비근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한국의 지성계는 이제라도 세기말이자, 90년대라는 특별했던 10년에 대한 냉정한 성찰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종합적으로 우리나라와 서구의 포스트모던 논의를 비교해보면
우리나라의 경우 이인화를 비롯한 극우와 보수 중립, 혼성모방, 자유 등을 표방한 사람들이 포스트모던을 적극 수용하여 모방, 표절, 무국적성 등의 이유로 진보적 좌파의 공격을 받았으나 프랑스의 포스트모던 계열 학자들은 기존의 논의를 심리, 여성, 사회 각방면에 대해 비판, 극복하려는 좌파적 성향이 강해 객관,중립,과학의 이름으로 미국 보수파의 공격을 당했다는 차이가 가장 두드러진다.
특기할 것은 2000년대의 언론개혁과 맞물려 나타나는 지식인의 양상을 살펴보았을 때 포스트모던을 비판해온 진보적 학자, 문인들이 언론개혁에 지지를 보내고 있으며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에 속해 있던 사람들은 침묵이나 탄압 쪽에 무게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적 포스트모던의 계보를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에 대한 음미할만한 일이 아닌가 싶다.
4. 다시, 한국의 지식인은 무엇을 하려는가?
아는 것을 안다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하는 것이 참된 앎이다(공자)
당신은 한국의 지식인사를 정리할 때 화두로 삼을 만한 한 사람을 꼽는다면 누구를 꼽는가? 계몽주의자 이광수로부터 함석헌 선생에 이르기까지 한동안 머리를 굴려봐야 정리가 되겠지만 아무래도 지식인 논쟁의 중심에 있는 사람은 역시 '강준만'이 아닐까 싶다. '김대중 죽이기'를 비롯 '김영삼 이데올로기'나 '노무현과 국민사기극' 등 아카데미와 저널리즘을 넘나드는 도발적인 문제제기로 유례없는 정권교체의 동기유발에 힘쓴 그의 행보는 한국의 지식인 사회에 적지 않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인물과 사상'시리즈로 널리 알려준 그의 글쓰기는 ① 중립을 표방하는 객관적 글쓰기의 틀을 깨는 지식인 글쓰기의 새로운 마당을 개척했다 ② 실명을 거론함으로써 애매모호함의 틀안에 안주하던 지식인의 가면을 벗겨버렸다. ③ 언론인과 학자 등 지식인 사회 그 자체를 개혁 대상에 올려놓음으로써 지식 논쟁의 새장을 열어가고 있다. ④ 비판과 성찰, 실천이라는 지식인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경지를 열어가고 있다.
주목할 일은 그가 벌여온 일련의 작업은 단지 지식인의 허위의식을 까발려온 본질 추구적 측면 뿐만 아니라 지식과 권력의 (혹은 이문열 같은 우파적 이데올로그나 당대비평의 필진으로 조선일보에 글을 쓰는 임지현 같은 좌파적 지식권력을 포함하여) 함수관계를 끝없이 들추어냄으로써 현실정치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쳐왔다는 사실이다. 소위 지식인의 대자(對自)적 성찰 시대를 열었다고나 할까...
지식권력의 등장을 예고한 토플러의 권력이동이 무색하게 한국의 지식인 사회는 급속히 퇴조의 길을 걷고 있다. 비케이21이나 인문학의 위기 논쟁은 그 전조가 될 것이며 나아가 지식의 상품화가 극단으로 치닫는 2005년 이후에는 그 정도가 가속화 될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발흥과 극우보수의 회귀라는 현실 속에서 자본과 권력을 중심으로 지식인의 지형도가 새롭게 그려지는 가운데 현 단계 한국사회의 지식인 사회는 어떤 화두를 문제삼아 경계를 그어나가고 있는가?
① 언론의 개혁을 둘러싼 찬반논쟁 내지는 조중동 대 한겨레의 이분법적 구도이다. 개혁대 탄압, 언론권력 대 언론자유의 양분화는 논점 일탈의 오류에도 불구하고 지루하고 긴 논쟁을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친일과 독재 미화논쟁으로 이어진 언론사 세무조사 문제는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이 부회장으로 있는 국제 언론인협회(IPI) 방한단 대표가 정권이 교체되면 모두 석방될 것이라는 말에서 그 결말을 예감할 수 있다. 펜이 칼보다 강하다고 한 사람이 누구인가? 안타깝게도 펜은 결코 돈보다 강하지 못하다(조갑제, 이문열, 이인화)
② 자유주의 이념 대 사회주의 이념의 대립으로 상당히 포괄적이긴 하지만 20세기의 이념 논쟁이 한국 사회에서는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 특기할 것은 양자가 다 민주주의라는 이념과의 접목에 상당한 기대를 걸고 있다는 점이다. 진정한 민주주의보다는 '국가주의'에 가까운 한국의 정치현실에서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가운데 과연 누가 민주주의에 먼저 다가설 것인가? (유시민, 복거일, 공병호)
③ 진보의 색채를 띤 사람들 사이에 논쟁을 들 수 있다. 보수는 많아도 보수주의자는 없고, 진보주의자는 많아도 진보는 없는 우리 사회에서 진보를 표방한 사람들끼리의 논쟁은 한국 사회 진보적 지식인의 정체성을 확연하게 드러내는 동시에 쪼개진 가치지향의 통합 가능성을 엿보게 한다. 지금도 계속 되는 당대비평 논쟁은 그 결과에 따라 상당한 논쟁진보의 한 예로 평가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임지현, 홍윤기, 진중권)
④ 최명재, 김용옥 등에 대한 평가는 학문과 자본의 관계에 대한 한 성찰적 계기가 된다. 신자유주의의 부흥으로 문화의 상품화, 지식의 상품화가 격화되는 가운데 학자로서 엔터테인먼트의 기능을 극대화한 김용옥 논쟁이나 민족을 핑계삼아 소수엘리트를 양성하려는 최명재는 권력보다는 자본이 학문과 더 밀접한 관계를 맺어가는 오늘날 하나의 중요한 이슈가 된다.
교실붕괴와 대학생의 학비인상, 연대의 기여입학제, 자립형 사립학교로 완성되는 학교 서열화와 7차교육과정으로 이어지는 교사들 구조조정 및 교사서열화는 교육외적인 세계를 둘러싼 지식계 내부의 태풍을 예고하고 있다. 성과급에 이은 연봉제는 지식의 독립성과 비판성을 무력화하면서 창조와 신지식의 이름 아래 지식의 도구화와 상품화를 가속화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21세기 지식인 지도는 상품화 대 성찰/비판의 구도가 될 가능성이 많다.
생산과 창조를 표방하는 신지식인 뒤에는 자본과 권력이 부추기는 경쟁논리가 자리잡고 있고 비판과 실천을 사명으로 삼아 역사의 정의와 진보를 추구하는 세력에게는 찬바람 부는 길거리만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89년 1500명의 해직교사를 낸 전교조는 파업을 불사하고 민교협 또한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에 반기를 들고 있다. 작가들은 상업주의 논쟁에 휘말리면서 문학 본연의 사명을 저버린지 오래고 교수들도 이제 자기 상품화로부터 자유롭기 어려워져간다. 진리의 전당은 장사꾼의 소굴이 되었고 홍익인간을 표방한 중등학교의 이념은 신지식창출로 빛이 바랬다. 자 이제 신자유주의 시대에도 지식인이 있다고 할 것인가?
물론 다양한 방식으로 현실에 뛰어들어 지식인의 사명을 찾아가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신자유주의 시대 지식인의 새로운 전형으로 지식 게릴라 진중권을 들 수 있다. 네오막스주의자인 그람시의 진지전, 기동전 개념을 잘 활용하여 다양한 인터넷 싸이트를 오가며 조선일보 밤의 주필로 등극한 진중권은 좌파 지식인게릴라로서 새로운 글쓰기와 활동의 모범이라 할 만하다.
항상 큰 어른을 찾는 잘못된 습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큰 어른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누가 지성계의 큰 어른이 될 것인가? 이미 큰 어른의 시대가 사라졌다면 우리들 작은 사람들이 소박하나마 지식인의 사명을 다해야 하는 것이 아닐런지?
(2년여 지나 읽어보니 부족함이 많지만 앵똘레랑스 이야기와 연관이 있어 그냥 올립니다. 시간나면 수정하여 다시 올리겠습니다. )
아는 자는 떠벌리지 아니하고 떠벌리는 자는 알지 아니하다(知者不博 博者不知, 노자, 81)
말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켜야 한다(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고전적 자유주의 사회에서 상품은 노동과 토지와 제품이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전쟁과 경쟁의 적자생존의 사회가 극단으로 치달으면서 사랑과 성에 이어서 담론과 지식까지 상품이 되는 시대가 도래했다. 이제 차원을 한 단계 높인 새로운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상품이 되지 않는 것은 없어 보인다. 바야흐로 신자본주의/신자유주의 시대인 것이다.
세기말에 이어 21세기를 요란하게 장식하고 있는 화두인 신자유주의는 노동시장과 금융시장뿐만 아니라 지식시장 나아가 지식산업사회의 주체인 지식인 사회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고 지식인의 행태 변화는 신자유주의를 표방해온 김대중 정부의 언론(신문/조중동/특히 조선일보)개혁/탄압 문제와 맞물려 일파만파의 지식인 논쟁을 촉발시켰다.
지식인 논쟁이 비단 오늘날에 와서 나타나는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하지만 인문학의 위상을 놓고 적지 않은 위기론이 등장하는 가운데, 단순한 하나의 사실을 놓고 벌이는 견해차이가 아닌 정치, 이념의 문제를 포함한 광범위한 논쟁이 벌어지기는 오늘날이 처음이다. 80년대 음울한 독재정권 시절에 지식인의 현실참여 논쟁에 이어서 90년대 포스트모던과 근대화, 진리의 존재성과 지식인의 종언 등을 둘러싼 지식인 정체성 문제는 현재, 자유나 민족을 외치는 보수 지식인 그룹과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비판 지식인 무리의 새로운 대립 양상으로 번져가고 있다.
지식, 진리, 학문 등의 엄정한 개념 정의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이나, 좌우의 극단적 이념대립이 심화되는 현실정치를 둘러싼 지식인 논쟁을 통해서 참된 지식인이 설 자리는 어디인가를 돌아보고자 한다.
1. 지식과 권력
아는 것이 힘이다(프랜시스 베이컨)
근대 세계를 이끌어온 동력은 무기나 상품만은 아니었다. 세계유일의 지배자로서의 신의 권위를 추락시키고 봉건 영주를 축출한 부르조아의 자본과 권력에 정당성을 부여해준 지식체계가 없었다면 근대는 불가능한 꿈으로 끝났을 것이다. 형식적 민중권력을 정당화하고 상품개발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며 약소국을 침공하는 제국주의의 정당성을 부여해준 것도 다 근대적 지식의 산물이다. '아는 것이 힘'이라던 베이컨의 꿈이 실현된 것이다!
이성의 빛이 무지와 암흑에서 계몽과 해방을 가져다준다고 믿어온 지난 과거의 역사가 허구라는 것을 폭로한 이는 니체적 전통 위에서 전복적 학문의 꽃을 피운 미셀 푸코였다. 지식은 자연 정복의 도구였으며 감시와 처벌을 정당화하고 무엇보다도 그 자체가 권력적 속성을 가지고 타인과 세계를 지배하는 또 하나의 절대적 억압체계라는 것이었다.
이문열 작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권력과 지식의 절묘한 그러나 매우 교묘한 결합과 갈등을 보여준다. 지식 그 자체의 속성으로 보면 근대적/기계론적 체계를 가지고 힘을 발휘해온 지식은 학교라는 대량생산적 메카니즘을 통해서 권력 재생산의 시동을 걸었다. 오늘날 서울대를 중심으로 공고하게 굳어진 학벌주의는 권력과 지식이 행복하게 만난 우리사회의 일그러진 영웅담이다. 이문열 스스로 주류에 편입하기 위한 몸부림의 과정에서 탁월하게 그려진 이 소설은 역설적으로 문화권력을 지향해온 이문열의 보수적 현실인식이 강하게 드러난다.
'기회주의적인 태도, 용의주도한 침묵, 애국적 무모함, 회고적이고 자기극화적인 변질 그 이상으로 지성인의 공적 역할을 훼손하는 것은 없다(에드워 사이드)는 말에 걸맞게 무모한 자유를 외치는 이문열, 이인화에 이어 신자유주의 정책가인 김대중 정부를 사회주의로 몰아붙이는 한나라당 정책위장 김만제의 행태나 조갑제류의 멸공이념 공세는 권력 쟁탈전에서 패배하고 자조와 자위에 빠진 지식인의 우울한 초상인 한병태를 닮아 있다. 목소리 높여 사회정의와 자본주의의 승리를 외치는 이면에 단물을 빼앗긴 자의 비애와 초라한 파시즘에의 향수가 공허하게 울려퍼지는 것이다. 순수문학가를 자처하는 이문열의 '홍위병' 논쟁과 '악령' 혹은 '선택' 파동은 그가 지식인이기 이전에 영남양반의 유림(儒林)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보수적이고 권력적인 이데올로그임을 보여준다. 비판받아 마땅한 그의 허무주의를 가장한 보수주의는 솔직한 속내를 드러내고 소설가로서가 아닌 정치 선동가로서의 솔직한 삶을 인정하여야 한다.
동인 문학상 제정을 둘러싼 황석영의 거부나 미당문학상 제정을 둘러싼 잡음 뒤에도 지식의 권력화와 그에 대한 거부 의식이 자리를 잡고 있다. 민족문학작가회의라는 진보진영의 문인들이 오늘날의 사태를 놓고 침묵하고 있는 행태를 '침묵의 카르텔이 지겹다'고 일갈한 황석영은 친일 행적을 한 김동인을 기리는 동인문학상 수상과 선정 방식에 반기를 들었다.(조선일보에서 주최하는 동인 문학상은 김주영, 박완서, 이문열 등이 종신으로 심사위원을 맡고 있다) 친일 행적과 독재자 미화 논쟁이 끊이지 않았던 미당(未堂) 서정주는 스스로를 친일이 아닌 순일종천파라 변명했지만 죽어서 땅에 묻힌 지금도 말당(末堂)의 지위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평소 친애하던 제자로부터 죽어서 등에 칼을 맞은(미당 제자 이근배의 표현) 미당은 지하에서나마 자기가 그리던 님(천황폐하)의 곁으로 갔는지 모를 일이다. (영미제국주의를 규탄하고 황군이 되어 명예롭게 죽을 것을 종용한 '마쓰이 히데오 오장 송가'를 비롯한 친일작은 물론 미당의 등단작 '자화상'을 비롯 대표작 '국화 옆에서'를 치밀하게 분석한 창비의 무명 평론가에 이르기까지 이제 미당을 둘러싼 외적 현실을 넘어선 작품의 내재적 분석은 걸음마 단계를 막 시작했다) 그 숱한 행적과 친일 작품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미당에 대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비판 논의가 없었다는 것은 미당의 권력의 본질을 반증하는 것이며 나아가 우리 사회가 지식 권력 앞에 얼마나 굴욕적인가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가 될 것이다.
90년도 조선일보를 통해 '죽음의 굿판을 집어치우라'는 표제로 학생운동을 -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연쇄분신자살 속에 나타난 죽임의 의식과 정치운동을 - 비판하는 글을 썼다가 후배, 문인들로부터 비난의 집중 포화를 맞은 김지하의 경우 10년이 지난 오늘에도 운동가나 사상가 혹은 시인으로서의 명망은 물론 화해의 자리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
90년도의 정치적, 사회적 지형은 죽음의 연쇄 작용을 불러일으킬만큼 뜨거운 것이었다. 그들의 배후로 주사파를 지목한 서강대 박홍 총장과 더불어서 생명시인 김지하의 나약한 역사 인식은 저항과 민주의 상징으로 20년을 영웅으로 군림해온 김지하도 그가 주창한 보편적 생명주의가 한 신문사의 작란(作亂)에 의해 그의 고귀한 생명사상이 하루 아침에 반공주의로 변질되면서 그 자신도 한 순간에 역사의 배반자로 낙인찍혔다. 이 또한 영원회귀하는 생명의 본성을 따름인가! 영웅과 천재가 사라지고 스타만 반짝거리다가 명멸하는 초국가적 산업자본주의사회에서 소위 주류에 영합하지 못하는 지식인의 위상은 때로 그지없이 초라해짐을 보여준다.
친일에서 독재자 미화.찬양까지 반민족의 상징이자 권력의 대변지였던 조선일보를 둘러싼 지식인/대중들의 저항은 언론을 핑계삼아 지식권력화(92년부터 언론이 정치권력을 능가하기 시작했다는 보고서가 나왔다)를 진행시켜온 퇴행적 근대세계에 대한 작은 뒤집기로 보인다. 안티조선으로 유명한 인터넷 싸이트 '우리모두'와 옥천시민들이 자주적으로 힘을 모아 조선일보 바로보기 운동을 벌이는 '물총닷컴' 대 조선일보 및 안티한겨레를 포함한 지식 전쟁과, 신문사 세무 조사 및 사주처벌을 둘러싼 국제기자연맹(IFJ)과 국제언론인협회(IPI)/세계신문협회(WAN)의 대립은 경영권과 편집권을 독점 남용해온 사주측과 펜을 무기삼아 자유를 확대해온 시민/기자들의 대립의 확대 연장으로, 이제 더 이상 지식이 무한권력을 남용하는 횡포를 저지하려는 운동의 씨앗으로 보인다.
21세기 시장의 자유만이 무한으로 늘어나고 있는 현실에서 언론.지식인의 사명은 무엇인가? 그들이 서야할 위치는 어디인가?
정녕 펜이 칼보다 강해지는 것은 진부한 자유주의와 환원적 반공주의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지성인의 과업 가운데 하나는 인간의 사고와 의사 전달을 극도로 제한하는 진부한 관념들과 환원적 범주들을 분쇄하는 것이다'는 사이드의 말이 신념이자 행동으로 옮겨질 때나 가능한 것이 아닌지, 아니 펜은 칼보다 펜으로서의 자기 사명을 다할 때 진정 빛나는 것이 아닌지......
지식이 권력의 자리를 탐하여 언론을 통해 권력의 극한에 달한 한국 사회에서 이제 지식과 권력은 관계는 어떻게 새롭게 정립되어야 하는지? 아는 것은 정녕 힘이고, 힘이어야 하는지...
2. 민중 시대의 지식인
鳥獸哀鳴海岳嚬(조수애명해악빈) 槿花世界已沈淪(근화세계이침륜)
秋燈掩卷懷千古(추등엄권회천고) 難作人間識字人(난작인간식자인)
새와 짐승들도 슬피 울고 바다 또한 찡그리네/무궁화 이 나라가 이미 물속으로 가라앉네
가을의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지난 역사를 되새기니/어렵구나, 지식인의 사람다움을 지키기가.(매천 황현, 절명시)
두말 할 것 없이 지금은 탈민중성에 열을 올리는 지식인들이 더 많지만, 한때 지식인이 '민중성'을 지향하고 민중과 나란히 어깨를 겯던 시절이 있었다.
5.16 군사 구테타를 경험하기 전의 한국사회에서, 그래도 순수와 가치 중립의 자세를 견지한 양대 세력이 있었다면 그들은 군인과 지식인이었다. 4.19의 뒤를 이어 4월 26일 이승만 독재정권을 몰아낸 교수단 데모는 지식인의 현실참여에 불을 당겼고 61년 박정희의 등장은 군의 정치적 중립을 깨뜨리는 사건이었다. 더 이상 한국사회에서 정치적으로 자유로운 집단은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이다.
군사독재로 시작한 박정희 정권은 전태일 죽음과 10월 유신과 긴급조치와 박정희 피살의 과정을 겪으면서 지식인 사회에 근대화 논쟁을 남겨두었다. 경부고속도로를 둘러싼 지식인 사회의 격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 가시적 성과가 적지 않아 한국사회의 경제개발을 둘러싼 논쟁의 중심이 되었다. 박정희 기념관 건립추진을 둘러싼 논쟁의 바탕에는 경제발전/독재의 대립항이 존재한다. 김종필, 박근혜에서 조갑제, 이인화까지 박정희의 영웅화가 계속되는 가운데 개발독재의 그늘에서 고통받아온 민중적 지식인의 관점에서는 박정희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독재자로 남아 있다.
지식인의 역할과 사명이 본격화된 것은 군부독재라는 악의 씨앗을 물려받은 악의 꽃 전두환 정권에서였다. 최루탄이 대학가와 길거리를 덮어온 80년대는 민중운동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노동자, 농민, 학생, 빈민 등이 역사의 전면에 나서서 부패한 권력을 향해 돌을 던졌다. 70년대를 상징하던 김지하가 생명의 뿌리를 찾아 침잠하는 동안 김남주와 고은 같은 시인이 자유 정신을 포효(咆哮)하기 시작했고 노동자 출신 사상가인 박노해가 얼굴 없는 시인으로 등장하여 '노동의 새벽'을 노래하였다. 노동자 소설인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객지'에 이어 반미 소설인 '고삐' '무기의 그늘'이 쓰여졌고 대학가엔 한완상의 '민중과 지식인'이나 싸르트르이 '지식인을 위한 변명'이 운동권 학생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민주'와 '민중', '통일'을 외치는 지식인이 감옥으로 끌려갔고 70년대 운동권 출신들의 지식인들은 야당과 재야로 나뉘어지며 현실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반미사상의 고조속에 미문화원 방화 사건, 인천5.3 사태, 건국대 사태 등이 줄을 이었고 급기야 박종철, 이한열 군의 죽음으로 군부독재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어져가던 시절이었다. 80년대의 금서목록에는 '마르크스'나 '유물론' 뿐만이 아닌 '타는 목마름으로', '신동엽 전집' 등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하긴 지금은 문학교과서에 실려 있는 '향수(鄕愁)'로 널리 알려진 정지용의 시집만 읽어도 파출소로 끌려가던 시절이 80년대였다.
70년대 동아일보 사태에 이어 언론 통폐합이 진행되면서 땡전 뉴스가 유행을 했다. 창비지와 문지 계열로 나뉜 문인들이 폐간에 항의하며 창작공간을 확보하는 동안 지식인의 사명에 대한 숱한 논쟁들이 이어졌다.
지식인은 민중인가 아닌가? 즉자적 민중과 대자적 민중(한완상, 민중과 지식인)의 구분, 지식인은 사회참여(앙가쥬망)를 하는데서 지식의 존재가치를 찾아야 한다(싸르트르, 지식인을 위한 변명)는 주장이 상식이 되어갔다. 극한 독재의 상황에서 지식인은 무엇을 할 것인가? 나찌 치하에서 저항 운동을 하다 죽은 독일의 '본 회퍼' 목사의 사례는 두고두고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었다.(고다드, 죽음 앞에서) '살아남은 자의 슬픔'(브레히트)은 감옥에 끌려가지 못하고 남아서 역사의 주변을 서성거리는 부끄러움을 견뎌야만 하는 자의 위안이자 고통이었다. 더러 '숲 속의 방'(강석경)을 노래하며 '회색지대의 진실'을 언급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독재/반독재의 대립항이 극한으로 치닫던 시절에 이분법의 영역 밖에선 중간항이나 제3의 진실은 존재할 수 없었다. 총칼이 지배하던 사회에서 지식인 고유의 역할인 건전한 비판이 공적인 자리에서 토론과 논쟁 혹은 신문을 통해서 표출될 수 없었고 그래서 숙명적으로 80년대는 문학이나 철학의 시대이기도 했다.
7, 80년대 지식인의 역할과 사명은 '시여, 무기여'라는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강단은 현장과 분리되었고 정부.재벌 주도하의 군사독재적 근대.개발과 민중의 대립구도 가운데 민족, 민주, 민중의 사상과 논리가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절의 그때 그 자리 그 사람들이 지금은 어디에 있는가로 7, 80년대 지식인의 자리를 매김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 당시 행동하는 양심의 상징이었지만 감옥 생활과 망명 생활을 번갈아가면서 하던 김대중이 정권을 잡은 지금 더러는 여당으로 혹은 야당으로 아니면 지금도 재야에서 정치권에 편입해 있거나 386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여당의 부총리로 살아가는 그들은 그 시절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지성과 반지성'이라는 대립 구도로 당시를 정리하는 문학과지상사의 김병익은 '지식인됨의 괴로움'에서 지성인과 지식인이라는 대립항을 제시하기도 했다. 열린 지성보다는 깨인 지성을 강조하던 그 시절, 지식인의 사명은 비판과 성찰이었다는 것이 90년대에서 70년대를 되돌아보는 그의 회고이다. 그렇다면 진짜 중요한 실천의 문제는? 아마 역사가 대답을 해주리라 여기며 절명(絶命)을 노래하는 매천 선생의 싯구를 오늘에야 다시 듣는다. '읽던 책 덮고 지난 역사를 되새기니, 진정 어렵구나, 지식인의 사람다움을 지키기가......'
3. 포스트 모던과 지식인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32)
진리를 믿지 말아라 진리가 너희를 괴롭게 하리라(리오타르, 포스트모던의 조건)
90년대가 어떤 시대였는가? 자본주의 체제의 단일화 등 세계 체제의 변화 속에서 진보적 사상과 운동도 퇴조하고 그 사상가들 다수는 자유주의에 포섭되었으며 핵심은 소진되었다.(노동운동의 상징이었던 박노해가 '참된 시작'을 다짐하였으나 결국 '사람만이 희망'이다거나 '내일은 다르게'로 개방의 길을 걸은 것이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이제 노동진영은 신자유주의의 가속화 속에서 단결의 기치를 높이고 있으나, 노동 계층의 다양화 속에서 노동해방과 대단결의 상징은 찾아보기 힘들다) 적어도 비판적, 실천적, 민중적 지향을 거듭해온 사상가적/지식인적 경향이 급속히 뒷걸음질 쳤다.
문익환 목사의 죽음, 황석영의 구속은 통일 운동의 칼자루를 정부에게 넘겨주었고 남북 기본합의서에 6.15정상 회담에 이르기까지 정부주도하의 남북 관계 개선은 눈에 띄는 성취를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분오열된 민간/지식 계층의 통일 운동은 백인백색의 목소리로 혼란상을 연출하였다(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된 강정구 교수에서 재향군인회까지 여전히 이념적 사상적 합의가 안된 상태에서 통일 운동은 역설적으로 남쪽의 통일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문제를 일깨워주었다)
후쿠야마를 비롯 드러커, 케네디, 토플러 류의 친자본주의 사상가들은 서둘러 한걸음 더 나아간 자본주의, 자유주의 사상의 깃발을 휘두르고 있고 좌파의 개혁성에 밀려 사회의 전면에 드러나지 못했던 보수.우파 지식인들이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간판 아래 속속들이 모여들었다.
그렇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이 열병처럼 퍼지던 시대가 있었다. 동서독이 통합되고 소련이 해체되면서 냉전의 기운이 사라진 90년대 초반. '잔치가 끝났다'(최영미,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한 시인의 선포와 더불어 사회주의 이론에 기초했던 거대담론은 급속하게 퇴조현상을 보여왔고 지식인들의 이합집산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영화이론, 문화론을 중심으로 한 미시담론이 탄생했고 그 중심에 모스트모더니즘이 우뚝 섰다.
아직까지도 포스트주의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내려지지 않은 가운데 세기말과 더불어 포스트모더니즘에 일격을 가한 미국의 물리학자인 소칼이 제시한 '지적 사기' 논쟁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지닌 의식기반의 허약성과 그 자체의 속성인 가벼움을 보여준다.
대중문화를 중심 화두로 등장한 포스트모던의 몇 가지 특징은 ① 거대담론의 퇴조형상이라는 틈바구니에서 등장한 작은 이야기(미시담론), ② 동양과 서양의 만남 혹은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만남 등 다양한 사상의 혼합(패스티쉬 혹은 혼성모방) ③ 영화나 광고, 소설 등 저급하다고 평가받아온 대중 문화/매체의 부상 ④ 대중 매체의 영향 속에서 영웅 혹은 천재의 소멸과 스타 시대의 부상 ⑤ 이론.계몽.이성에 대한 불신과 회의 속에 해체와 여백의 강조 등이다.
대서사의 죽음, 신과학과 동서양사상의 결합, 시뮬라시옹이나 이마골로기 등 이념보다는 이미지 중심의 화두 등장, 이론 수명의 단축과 가벼움, 지식인의 종언과 진리에 대한 회의 등이 이들을 뒷받침하는 현상이다.
10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대를 풍미한 이 사상의 정체는 무엇인가? 여전히 오리무중인 가운데 그 실체가 '무엇인가'보다는 한국적 상황에서 '무엇을 남겼는가'에 대한 평가로 그 언저리를 더듬어 보고 마지막 '지적 사기' 논쟁의 의미를 평가해보자.
소칼과 장 브리크몽이 함께 쓴 '지적 사기' 논쟁은 '포스트모더니즘 사기'논쟁으로 이어지며 세계를 강타했다. 라깡에서 들뢰즈, 이리가레이, 크리스테바, 장 보드리야르 등 이름만 내놓아도 알만한 대학자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지적엄밀성을 (더 구체적으로는 그 인문.사회학자들이 자연과학적 지식을 오.남용 하여 - 자신도 알지 못하는 수학이나 물리학 지식을 지나치게 남용하여' - 과학에 무지한 독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 무엇보다 겁을 주려는 것'을) 문제삼아 '포스트모던식' 일격을 가한 것이다.
대가들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매도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는 저자의 입장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곧 두 부류로 나누어졌다. 프랑스 사상가들로부터 '비판을 위한 비판', '자연과학자가 인문사회과학의 방법론을 모르고 한 주장', '미국 지식인의 반프랑스주의', '파리 지성계를 겨냥한 미국의 제국주의적 공격', '좌파에 가하는 우파의 총질'이라는 비난을 퍼부었지만 '현대 프랑스 철학이 헛소리의 집적임을 증명했다'는 호평도 적지 않았다. 적어도 그들의 주장이 아주 무모하지만은 않다는 게 학계의 반응이다.
그들 주장이 갖는 의미를 나름대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① 포스트모던에서 주장하는 대서사의 해체를 그들에게 그대로 적용하여 현대철학의 본산인 프랑스사상계에 대한 권위를 해체하였다.
② 자연과학에 대한 엄밀한 이해 없이 인문학의 남용이 진행되어 온 것에 대한 경종을 울렸다
③ '인식론적 상대주의'에 대한 '절대주의.객관주의'의 비판
④ '정치적.문화적 개혁.급진주의'에 대한 '보수주의.실용주의'의 반격
검증의 불가능을 제시하고 반증가능성을 제시한 칼 포퍼나, 과학 혁명의 구조를 저술하여 과학의 역사성을 이론화한 토마스 쿤까지를 상대주의자로 싸잡아 비판하는 소칼의 주장은 실용적, 절대적 가치의 미국적 재현이라는 점이 앞으로 남은 지적 사기 논쟁의 숙제로 남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에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좌파 지식인 진중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의 포스트모던은 크게 네 방향으로 수용되었다. 첫째는 포스트모던의 근대 비판을 민주주의의 폭력적 전복으로 해석하는 극우적 수용방식이다. 가령 포스트모던을 빙자하여 박정희를 낭만주의적 영웅=천재=악마로 둔갑시키면서 그의 헌정 파괴 행위를 찬양하는 이인화를 생각해보라. 둘째는 근대를 '탈(脫)'하여 전근대로 되돌아가는 복고주의적 해석이다. 포스트모던의 이름으로 낡은 유교적 전통의 복고를 주장하는 함재봉의 논리가 여기에 속한다. 셋째는 포스트모던의 근대 비판에서 곧바로 선불교와 노자를 찬양하는 데로 날아가는 동양주의적 해석이다. 넷째는 ‘근대’라는 희생양에 모든 사회악의 책임을 돌리며 아무 대안없는 거기에 급진적 비판을 가하는 니체주의자들의 극좌적 수용방식이다'.
결국 포스트모던은 미국식 대중문화 이론을 수용한 보수적 지식인들이 대체로 한국적 전근대성을 탈근대의 가면으로 위장하면서 '극단적 복고 혹은 신지식'을 유포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다만 네 번째의 김진석(세르), 이진경(들뢰즈) 류의 학자들은 프랑스 좌파의 전통의 영향을 받아 '탈주'의 개념으로 유목적 사고와 운동을 제창하는 것이 독특하긴 하지만 세기말의 혼란상을 해석하고 이끌어갈 운동성은 부족해보인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그 숱한 논의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을 현혹시키거나 자신의 원래적 입장을 강화하는 수단으로만 기능했을 뿐 한국사회에 필요한 진보적이고 독창적인 사상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서구의 포스트모던은 미국적.대중문화적.보수적 포스트모던과 프랑스의 급진적.좌파적 포스트 모던으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 프랑스 좌파의 경우에도 포스트모던의 조건을 서술한 리오타르와 데리다 류의 해체 및 비판사상가로 유명한 푸코 계열로 구분할 필요가 있고......)
거대서사의 획일성.억압성에 대한 도전과 다양성.상호교환성의 개척이라는 성공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체제의 극대화 속에서 정치 혹은 경제 체제가 갖는 모순과 현상 분석에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기(아니 오히려 정치성을 약화시키고 경제모순을 은폐하거나 복고로 귀향하려는 속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한국적 포스트모던에서 지적해야할 것은 오히려 식민성이다. 서구의 이론을 무분별하게 들여와 유포하고 응용하고 폐기하는 냄비근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한국의 지성계는 이제라도 세기말이자, 90년대라는 특별했던 10년에 대한 냉정한 성찰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종합적으로 우리나라와 서구의 포스트모던 논의를 비교해보면
우리나라의 경우 이인화를 비롯한 극우와 보수 중립, 혼성모방, 자유 등을 표방한 사람들이 포스트모던을 적극 수용하여 모방, 표절, 무국적성 등의 이유로 진보적 좌파의 공격을 받았으나 프랑스의 포스트모던 계열 학자들은 기존의 논의를 심리, 여성, 사회 각방면에 대해 비판, 극복하려는 좌파적 성향이 강해 객관,중립,과학의 이름으로 미국 보수파의 공격을 당했다는 차이가 가장 두드러진다.
특기할 것은 2000년대의 언론개혁과 맞물려 나타나는 지식인의 양상을 살펴보았을 때 포스트모던을 비판해온 진보적 학자, 문인들이 언론개혁에 지지를 보내고 있으며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에 속해 있던 사람들은 침묵이나 탄압 쪽에 무게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적 포스트모던의 계보를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에 대한 음미할만한 일이 아닌가 싶다.
4. 다시, 한국의 지식인은 무엇을 하려는가?
아는 것을 안다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하는 것이 참된 앎이다(공자)
당신은 한국의 지식인사를 정리할 때 화두로 삼을 만한 한 사람을 꼽는다면 누구를 꼽는가? 계몽주의자 이광수로부터 함석헌 선생에 이르기까지 한동안 머리를 굴려봐야 정리가 되겠지만 아무래도 지식인 논쟁의 중심에 있는 사람은 역시 '강준만'이 아닐까 싶다. '김대중 죽이기'를 비롯 '김영삼 이데올로기'나 '노무현과 국민사기극' 등 아카데미와 저널리즘을 넘나드는 도발적인 문제제기로 유례없는 정권교체의 동기유발에 힘쓴 그의 행보는 한국의 지식인 사회에 적지 않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인물과 사상'시리즈로 널리 알려준 그의 글쓰기는 ① 중립을 표방하는 객관적 글쓰기의 틀을 깨는 지식인 글쓰기의 새로운 마당을 개척했다 ② 실명을 거론함으로써 애매모호함의 틀안에 안주하던 지식인의 가면을 벗겨버렸다. ③ 언론인과 학자 등 지식인 사회 그 자체를 개혁 대상에 올려놓음으로써 지식 논쟁의 새장을 열어가고 있다. ④ 비판과 성찰, 실천이라는 지식인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경지를 열어가고 있다.
주목할 일은 그가 벌여온 일련의 작업은 단지 지식인의 허위의식을 까발려온 본질 추구적 측면 뿐만 아니라 지식과 권력의 (혹은 이문열 같은 우파적 이데올로그나 당대비평의 필진으로 조선일보에 글을 쓰는 임지현 같은 좌파적 지식권력을 포함하여) 함수관계를 끝없이 들추어냄으로써 현실정치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쳐왔다는 사실이다. 소위 지식인의 대자(對自)적 성찰 시대를 열었다고나 할까...
지식권력의 등장을 예고한 토플러의 권력이동이 무색하게 한국의 지식인 사회는 급속히 퇴조의 길을 걷고 있다. 비케이21이나 인문학의 위기 논쟁은 그 전조가 될 것이며 나아가 지식의 상품화가 극단으로 치닫는 2005년 이후에는 그 정도가 가속화 될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발흥과 극우보수의 회귀라는 현실 속에서 자본과 권력을 중심으로 지식인의 지형도가 새롭게 그려지는 가운데 현 단계 한국사회의 지식인 사회는 어떤 화두를 문제삼아 경계를 그어나가고 있는가?
① 언론의 개혁을 둘러싼 찬반논쟁 내지는 조중동 대 한겨레의 이분법적 구도이다. 개혁대 탄압, 언론권력 대 언론자유의 양분화는 논점 일탈의 오류에도 불구하고 지루하고 긴 논쟁을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친일과 독재 미화논쟁으로 이어진 언론사 세무조사 문제는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이 부회장으로 있는 국제 언론인협회(IPI) 방한단 대표가 정권이 교체되면 모두 석방될 것이라는 말에서 그 결말을 예감할 수 있다. 펜이 칼보다 강하다고 한 사람이 누구인가? 안타깝게도 펜은 결코 돈보다 강하지 못하다(조갑제, 이문열, 이인화)
② 자유주의 이념 대 사회주의 이념의 대립으로 상당히 포괄적이긴 하지만 20세기의 이념 논쟁이 한국 사회에서는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 특기할 것은 양자가 다 민주주의라는 이념과의 접목에 상당한 기대를 걸고 있다는 점이다. 진정한 민주주의보다는 '국가주의'에 가까운 한국의 정치현실에서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가운데 과연 누가 민주주의에 먼저 다가설 것인가? (유시민, 복거일, 공병호)
③ 진보의 색채를 띤 사람들 사이에 논쟁을 들 수 있다. 보수는 많아도 보수주의자는 없고, 진보주의자는 많아도 진보는 없는 우리 사회에서 진보를 표방한 사람들끼리의 논쟁은 한국 사회 진보적 지식인의 정체성을 확연하게 드러내는 동시에 쪼개진 가치지향의 통합 가능성을 엿보게 한다. 지금도 계속 되는 당대비평 논쟁은 그 결과에 따라 상당한 논쟁진보의 한 예로 평가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임지현, 홍윤기, 진중권)
④ 최명재, 김용옥 등에 대한 평가는 학문과 자본의 관계에 대한 한 성찰적 계기가 된다. 신자유주의의 부흥으로 문화의 상품화, 지식의 상품화가 격화되는 가운데 학자로서 엔터테인먼트의 기능을 극대화한 김용옥 논쟁이나 민족을 핑계삼아 소수엘리트를 양성하려는 최명재는 권력보다는 자본이 학문과 더 밀접한 관계를 맺어가는 오늘날 하나의 중요한 이슈가 된다.
교실붕괴와 대학생의 학비인상, 연대의 기여입학제, 자립형 사립학교로 완성되는 학교 서열화와 7차교육과정으로 이어지는 교사들 구조조정 및 교사서열화는 교육외적인 세계를 둘러싼 지식계 내부의 태풍을 예고하고 있다. 성과급에 이은 연봉제는 지식의 독립성과 비판성을 무력화하면서 창조와 신지식의 이름 아래 지식의 도구화와 상품화를 가속화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21세기 지식인 지도는 상품화 대 성찰/비판의 구도가 될 가능성이 많다.
생산과 창조를 표방하는 신지식인 뒤에는 자본과 권력이 부추기는 경쟁논리가 자리잡고 있고 비판과 실천을 사명으로 삼아 역사의 정의와 진보를 추구하는 세력에게는 찬바람 부는 길거리만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89년 1500명의 해직교사를 낸 전교조는 파업을 불사하고 민교협 또한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에 반기를 들고 있다. 작가들은 상업주의 논쟁에 휘말리면서 문학 본연의 사명을 저버린지 오래고 교수들도 이제 자기 상품화로부터 자유롭기 어려워져간다. 진리의 전당은 장사꾼의 소굴이 되었고 홍익인간을 표방한 중등학교의 이념은 신지식창출로 빛이 바랬다. 자 이제 신자유주의 시대에도 지식인이 있다고 할 것인가?
물론 다양한 방식으로 현실에 뛰어들어 지식인의 사명을 찾아가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신자유주의 시대 지식인의 새로운 전형으로 지식 게릴라 진중권을 들 수 있다. 네오막스주의자인 그람시의 진지전, 기동전 개념을 잘 활용하여 다양한 인터넷 싸이트를 오가며 조선일보 밤의 주필로 등극한 진중권은 좌파 지식인게릴라로서 새로운 글쓰기와 활동의 모범이라 할 만하다.
항상 큰 어른을 찾는 잘못된 습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큰 어른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누가 지성계의 큰 어른이 될 것인가? 이미 큰 어른의 시대가 사라졌다면 우리들 작은 사람들이 소박하나마 지식인의 사명을 다해야 하는 것이 아닐런지?
(2년여 지나 읽어보니 부족함이 많지만 앵똘레랑스 이야기와 연관이 있어 그냥 올립니다. 시간나면 수정하여 다시 올리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