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여는집 가족들은 목요일만 되면 서둘러 귀가한다. 공동체 모임 ‘한마음 가족’ 때문이다.
어느 가정이나 아이들 교육문제, 부부사이의 갈등, 사소한 버릇들 때문에 다투면서 살아간다. 가족은 비슷한 환경에서 부대끼며 살기 때문에 서로 익숙해진다. 사소한 버릇까지도 익숙해진 가족들도 자주 다투는데, 낯선 사람들이 모여 살면 어떨까? 갓 결혼한 신혼부부가 살아온 환경이 달라 툭탁거리는 걸 보면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노숙인 쉼터 ‘아침을여는집’. 사생활조차 누릴 수 없는 좁은 공간에서 노숙인들이 이런 저런 갈등을 겪으며 살고 있다. 그것도 이십여 명이나 되는 대식구가 말이다. 아침을여는집 가족들은 자주 다툰다. 서로 다른 생각과 성장환경에서 고된 삶을 살아왔기에 더욱 그러하다. 알고 보면 다투거나 미워하는 이유도 참 같잖은 것들이다.
김영식씨는 “설거지가 잘 안 돼요. 순서를 정해서 하면 되는데, 까먹어서 그런지 귀찮아서 그런지 잘 안 해요. 이런 사소한 문제 때문에 말다툼이 나거나 미움이 생긴”다며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책임감을 없어 다툼이 생기는 것 같다고 나름대로 분석했다.
“휴지나 비누 같은 생필품은 매달 삼천원씩 거둬서 단체로 사 써요. 그런데 이 몇 푼 안 되는 돈도 잘 안내는 사람이 있어요. 이러니 돈을 내는 사람만 억울하죠. 맘 같아서는 저도 내기 싫어요. 소장님께서는 운영비가 항상 모자란다고 하니 사무실에 요구할 수도 없구요.” 김용봉씨의 말 속에는 뼈가 있다. 정부보조금은 턱없이 모자라고, 호주머니에 먼지만 남은 아침을여는집 가족에겐 더 이상 나올 게 없고. 답답하기는 서로 마찬가지다.
이것뿐만 아니다. 다툼의 이유가 되는 같잖은 소재들은 널렸다.
잘 안 씻는 최씨 할아버지. 최씨 할아버지는 한 번 입은 옷을 버릴 때까지 안 갈아입고 사는 기인이라고 소문이 났다. 그러니 얼마나 냄새가 날까. 곁에 다가가기만 해도 쿠리고 찌린 냄새에 코를 막게 된다. 최씨 할아버지가 아침을여는집에서 다툼의 이유가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최씨 할아버지만 안 씻는 게 아니다. 유씨와 최씨도 꽤나 강적들이다. 아침을여는집은 “항상 씻어라, 못 씻는다” 큰소리가 담을 넘는다.
코골이 김씨. 탱크도 이런 탱크가 없다고 모두들 고개를 절레거린다. 김씨의 코고는 소리는 담을 넘어 밖에서도 들린다고 하니, 같이 자는 사람들의 괴로움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방도 아닌 거실도 아닌 부엌 한 귀퉁이에서 혼자 잔다. 누가 거기서 자라고 해서 부엌에 잠자리를 편 것은 아니다. 남에게 민폐를 더 이상 끼치기 싫어 본인이 스스로 들어갔다.
먹을거리, 빨래, 식사 준비 등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하는 모든 것들이 다툼의 이유가 된다. 정말 같잖다. 그러나 노숙인들이라서 이런 같잖은 이유들로 다투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같이 살다보면 누구나 이런 같잖은 이유들로 싸운다. 사찰에서 수행하는 스님들이 꽤 거창한 이유로 다툴 것 같아도 그들의 계율을 보면 다 같잖은 것들은 조심하자는 내용뿐이다. 그건 수도원에서 사는 수사나 신부들도 마찬가지다. 성직자인 스님이나 신부들을 비난하려고 꺼낸 말이 아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럴 수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다.
이런 상상을 해본다. 만약 아침을여는집에 덕 높은 스님 이십여분이 함께 산다면 어떤 그림이 그려질까? 만약 아침을여는집에 청빈한 신부들 이십여분이 함께 산다면 어떤 영화가 찍힐까? 아마 현재 노숙인들이 사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사생활이 보장되지 않는 좁은 공간에서 함께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발생한 갈등은 풀어야 한다. 아무리 작은 다툼이라도 풀지 않으면 큰 사건이 된다. 티끌모아 태산이라고. 같잖은 이유로 다툼이 빈번해지면 결국 큰 사고를 불러온다.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는 부부도 작은 불만들이 쌓여 결국엔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되는 게 아닌가.
아침을여는집은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장으로, 작은 불만들은 푸는 마당으로 공동체 모임인 ‘한마음 가족’을 택했다. 목요일마다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입소인 모두가 모여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 지난 한 주를 정리하고 맞이할 다음 주를 준비하는 모임이다.
노숙인 쉼터는 어느 정도의 안정된 생활을 꾸릴 수 있으면 떠나야 하며, 또 새로운 가족을 맞아야한다. 쉼터의 가족들은 영원한 ‘가족’으로 묶이지 못한다. ‘임시 가족’이라고나 할까. 인연이 다서 만난 인생들이기에, 사는 동안만은 다툼 없이 화합하며 살아야 한다.
일반적인 가정에서 성장한 사람들은 가정과 사회에서 공동체성을 배운다. 가족과 사회의 울타리 안에서 어렸을 때부터 보고, 느끼고, 배운다. 노숙인들은 대부분 공동체가 무엇인지 배울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일찍부터 가족이 해체되거나 버림받은 삶을 살았기 때문에 공동체를 학습하지 못하고 성장했다. 더구나 사회에서도 적응 못하고 낙오됐기에 공동체성은 낮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쉼터에서 생활하는 동안이라도 최소한의 공동체 의식을 갖고 생활 속에서 부딪치는 문제들을 함께 해결하는 기회를 마련하기 위해 한마음 가족은 시작되었다.
그렇지만, 처음에 가족들은 낯설어 했다. 모임이 열린지 얼마 안 되서는 서로 얼굴을 보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 도무지 진행이 안 돼 한 사람씩 돌아가며 말을 시켰다.
정운홍씨는 “선생님, 그냥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텐데, 뭣 하러 이딴 걸 해요?”라며 공동체 모임 자체를 어색해 했다. 정씨의 한 마디에 조금씩 말문이 트인 가족들이 한 마디씩 거들었다. 이석규씨는 “도대체 주제가 뭡니까? 무슨 이야길 해야 하는지 미리 정해주고 이야기를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라며 불평을 털어놓았다. 실무자의 일방적인 지시에서 벗어나 쉼터의 실제적인 주인이 주인노릇 하게끔 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그렇다고 그동안 수용시설처럼 일방적인 지시와 규칙만 강요하진 않았다. ‘아침을여는집 전체회의’를 가끔 진행하곤 했다. 그러나 전체회의는 가족들의 의견을 듣기에는 미흡한 점이 많았다. 실무자는 지시자의 입장으로 참석했고 노숙인들은 마지못해서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말투는 딱딱했고 일방적이었다.
아침을여는집 가족들의 수동적인 모습도 문제였지만, 어느새 관료적으로 변한 실무자의 태도도 문제였다. 둘 다 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쉽지는 않겠지만 수평적인 관계를 다시 맺어갈 필요가 있었다.
현 노숙인 쉼터는 결코 노숙인들이 주인이 될 수 없는 공간이다. 쉼터에서 생활하는 대다수의 노숙인들은 무력감을 느낀다. 인정하긴 싫겠지만 쉼터는 무기력한 노숙인들과 권력을 독점한 관리자(생활지도사 혹은 사회복지사 등)로 나눠져 있다. 아무리 민주적인 방식으로 운영하는 쉼터일지라도 질적인 차이는 있겠지만 권력관계의 본질은 똑같다고 봐야 한다.
만약 쉼터 생활이 민주적이라면 공동생활에 관한 가장 중요한 결정이나 선택을 모두가 의논해서 해야 한다. 즉 스스로가 참가하고, 함께 논의하고, 함께 결정해야 한다. 이것이 민주주의고 민주주의의 힘이다. 그런데 쉼터에서는 민주주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참여하고, 의논하고, 결정하는 과정에서 소외된 쉼터 노숙인들 모두가 무력감을 느낀다.
실험이었다. 아침을여는집이 풀어나갈 모든 문제의 결정권을 ‘운영회의’와 ‘한마음 가족’에 넘겼다. 실무자들의 결심이 필요했다. 시시콜콜한 모든 사안을 함께 결정하고 진행하는 건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고 한다. 상담실장 조최윤순씨는 “번거롭지요. 왜 안 그렇겠어요. 사실 어떤 사안에 대해 실무자가 결정하고 진행시켜버리면 쉽잖아요. 그런데 운영회의를 거쳐 전체 모임에서 결정하려하니 얼마나 번잡스럽겠”냐며 어려움을 호소했다.
어색하고 쑥스러웠지만 몇 번의 모임이 진행되면서 가족들 스스로 공동체 모임에 적응해 갔다. 공동체 모임의 이름도 그들이 정했다. 대박가족, 한마음가족, 샛별가족, 희망가족, 명랑가족, 한별가족 등 다양한 의견이 쏟아져 나왔다. 이 명칭들 중에서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한마음가족’이 공식이름으로 정해졌다. 이름이 정해진 뒤부터는 이야기의 가속도가 붙었다.
발전이었다. 처음 공동체 모임을 하던 날 어색하게 서로의 눈치만 살피던 가족들이 열변을 토해가며 의견을 내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물론 먹물들이 꾸린 공동체 모임처럼 엄청난(?) 철학은 없지만 나름의 철학과 공동체에 대한 태도는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아 보였다.
지난 4월 3일 목요일 7시. 다른 약속을 미룬 채 한 두 사람씩 모이더니 어느새 열여덟 명이 한 자리에 모였다. 이 날도 여전히 같잖은 이유로 말들이 오가기 시작했다. 지난 일주일동안 생활하면서 부닥친 사소하고 자잘하지만 갈등의 소지가 될 수 있는 얘깃거리가 도마 위에 올랐다. 화장실을 짧게 사용하자든가, 늦은 시간에 조용히 다녔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있었다. 음식솜씨가 좋은 이씨는 “누구는 청소하고 밥도 하는데, 밥상을 피는 것도 귀찮아서 안 하는 사람이 있다”며 불평의 포문을 열었다. 평소에 말이 없던 정씨도 한마디 거든다. “젊은 사람들이 몸을 더 사려요. 또 늦은 밤 다닐 때 현관문을 조용히 여닫아야지, 거실에서 잠을 자는 식구들이 있는데 말이야.”
설왕설래하며 한참 말들이 오갔다. 말들이 오가다 보니 문제를 해결할 방안들이 하나둘 세워졌다. 아침을여는집 가족들은 이렇게 같잖은 이유로 다툼도 벌이고 의논도 하면서 공동체를 배우고 지켜나간다.
‘한마음 가족’이 진행된 지 일년하고도 한 달이 다 되어 간다. 함께 살아오면서 부닥쳐온 일들이 모임에서 이야기되고,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는 시간으로 채워지기 시작한 모임이었다. 더 많은 시간이 지나면 함께 살아가는 사람에 대한 예의도 지키고, 토론을 통해 의견을 조율하는 멋진 공동체가 될 것이다.
어느 가정이나 아이들 교육문제, 부부사이의 갈등, 사소한 버릇들 때문에 다투면서 살아간다. 가족은 비슷한 환경에서 부대끼며 살기 때문에 서로 익숙해진다. 사소한 버릇까지도 익숙해진 가족들도 자주 다투는데, 낯선 사람들이 모여 살면 어떨까? 갓 결혼한 신혼부부가 살아온 환경이 달라 툭탁거리는 걸 보면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노숙인 쉼터 ‘아침을여는집’. 사생활조차 누릴 수 없는 좁은 공간에서 노숙인들이 이런 저런 갈등을 겪으며 살고 있다. 그것도 이십여 명이나 되는 대식구가 말이다. 아침을여는집 가족들은 자주 다툰다. 서로 다른 생각과 성장환경에서 고된 삶을 살아왔기에 더욱 그러하다. 알고 보면 다투거나 미워하는 이유도 참 같잖은 것들이다.
김영식씨는 “설거지가 잘 안 돼요. 순서를 정해서 하면 되는데, 까먹어서 그런지 귀찮아서 그런지 잘 안 해요. 이런 사소한 문제 때문에 말다툼이 나거나 미움이 생긴”다며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책임감을 없어 다툼이 생기는 것 같다고 나름대로 분석했다.
“휴지나 비누 같은 생필품은 매달 삼천원씩 거둬서 단체로 사 써요. 그런데 이 몇 푼 안 되는 돈도 잘 안내는 사람이 있어요. 이러니 돈을 내는 사람만 억울하죠. 맘 같아서는 저도 내기 싫어요. 소장님께서는 운영비가 항상 모자란다고 하니 사무실에 요구할 수도 없구요.” 김용봉씨의 말 속에는 뼈가 있다. 정부보조금은 턱없이 모자라고, 호주머니에 먼지만 남은 아침을여는집 가족에겐 더 이상 나올 게 없고. 답답하기는 서로 마찬가지다.
이것뿐만 아니다. 다툼의 이유가 되는 같잖은 소재들은 널렸다.
잘 안 씻는 최씨 할아버지. 최씨 할아버지는 한 번 입은 옷을 버릴 때까지 안 갈아입고 사는 기인이라고 소문이 났다. 그러니 얼마나 냄새가 날까. 곁에 다가가기만 해도 쿠리고 찌린 냄새에 코를 막게 된다. 최씨 할아버지가 아침을여는집에서 다툼의 이유가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최씨 할아버지만 안 씻는 게 아니다. 유씨와 최씨도 꽤나 강적들이다. 아침을여는집은 “항상 씻어라, 못 씻는다” 큰소리가 담을 넘는다.
코골이 김씨. 탱크도 이런 탱크가 없다고 모두들 고개를 절레거린다. 김씨의 코고는 소리는 담을 넘어 밖에서도 들린다고 하니, 같이 자는 사람들의 괴로움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방도 아닌 거실도 아닌 부엌 한 귀퉁이에서 혼자 잔다. 누가 거기서 자라고 해서 부엌에 잠자리를 편 것은 아니다. 남에게 민폐를 더 이상 끼치기 싫어 본인이 스스로 들어갔다.
먹을거리, 빨래, 식사 준비 등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하는 모든 것들이 다툼의 이유가 된다. 정말 같잖다. 그러나 노숙인들이라서 이런 같잖은 이유들로 다투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같이 살다보면 누구나 이런 같잖은 이유들로 싸운다. 사찰에서 수행하는 스님들이 꽤 거창한 이유로 다툴 것 같아도 그들의 계율을 보면 다 같잖은 것들은 조심하자는 내용뿐이다. 그건 수도원에서 사는 수사나 신부들도 마찬가지다. 성직자인 스님이나 신부들을 비난하려고 꺼낸 말이 아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럴 수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다.
이런 상상을 해본다. 만약 아침을여는집에 덕 높은 스님 이십여분이 함께 산다면 어떤 그림이 그려질까? 만약 아침을여는집에 청빈한 신부들 이십여분이 함께 산다면 어떤 영화가 찍힐까? 아마 현재 노숙인들이 사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사생활이 보장되지 않는 좁은 공간에서 함께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발생한 갈등은 풀어야 한다. 아무리 작은 다툼이라도 풀지 않으면 큰 사건이 된다. 티끌모아 태산이라고. 같잖은 이유로 다툼이 빈번해지면 결국 큰 사고를 불러온다.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는 부부도 작은 불만들이 쌓여 결국엔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되는 게 아닌가.
아침을여는집은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장으로, 작은 불만들은 푸는 마당으로 공동체 모임인 ‘한마음 가족’을 택했다. 목요일마다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입소인 모두가 모여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 지난 한 주를 정리하고 맞이할 다음 주를 준비하는 모임이다.
노숙인 쉼터는 어느 정도의 안정된 생활을 꾸릴 수 있으면 떠나야 하며, 또 새로운 가족을 맞아야한다. 쉼터의 가족들은 영원한 ‘가족’으로 묶이지 못한다. ‘임시 가족’이라고나 할까. 인연이 다서 만난 인생들이기에, 사는 동안만은 다툼 없이 화합하며 살아야 한다.
일반적인 가정에서 성장한 사람들은 가정과 사회에서 공동체성을 배운다. 가족과 사회의 울타리 안에서 어렸을 때부터 보고, 느끼고, 배운다. 노숙인들은 대부분 공동체가 무엇인지 배울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일찍부터 가족이 해체되거나 버림받은 삶을 살았기 때문에 공동체를 학습하지 못하고 성장했다. 더구나 사회에서도 적응 못하고 낙오됐기에 공동체성은 낮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쉼터에서 생활하는 동안이라도 최소한의 공동체 의식을 갖고 생활 속에서 부딪치는 문제들을 함께 해결하는 기회를 마련하기 위해 한마음 가족은 시작되었다.
그렇지만, 처음에 가족들은 낯설어 했다. 모임이 열린지 얼마 안 되서는 서로 얼굴을 보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 도무지 진행이 안 돼 한 사람씩 돌아가며 말을 시켰다.
정운홍씨는 “선생님, 그냥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텐데, 뭣 하러 이딴 걸 해요?”라며 공동체 모임 자체를 어색해 했다. 정씨의 한 마디에 조금씩 말문이 트인 가족들이 한 마디씩 거들었다. 이석규씨는 “도대체 주제가 뭡니까? 무슨 이야길 해야 하는지 미리 정해주고 이야기를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라며 불평을 털어놓았다. 실무자의 일방적인 지시에서 벗어나 쉼터의 실제적인 주인이 주인노릇 하게끔 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그렇다고 그동안 수용시설처럼 일방적인 지시와 규칙만 강요하진 않았다. ‘아침을여는집 전체회의’를 가끔 진행하곤 했다. 그러나 전체회의는 가족들의 의견을 듣기에는 미흡한 점이 많았다. 실무자는 지시자의 입장으로 참석했고 노숙인들은 마지못해서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말투는 딱딱했고 일방적이었다.
아침을여는집 가족들의 수동적인 모습도 문제였지만, 어느새 관료적으로 변한 실무자의 태도도 문제였다. 둘 다 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쉽지는 않겠지만 수평적인 관계를 다시 맺어갈 필요가 있었다.
현 노숙인 쉼터는 결코 노숙인들이 주인이 될 수 없는 공간이다. 쉼터에서 생활하는 대다수의 노숙인들은 무력감을 느낀다. 인정하긴 싫겠지만 쉼터는 무기력한 노숙인들과 권력을 독점한 관리자(생활지도사 혹은 사회복지사 등)로 나눠져 있다. 아무리 민주적인 방식으로 운영하는 쉼터일지라도 질적인 차이는 있겠지만 권력관계의 본질은 똑같다고 봐야 한다.
만약 쉼터 생활이 민주적이라면 공동생활에 관한 가장 중요한 결정이나 선택을 모두가 의논해서 해야 한다. 즉 스스로가 참가하고, 함께 논의하고, 함께 결정해야 한다. 이것이 민주주의고 민주주의의 힘이다. 그런데 쉼터에서는 민주주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참여하고, 의논하고, 결정하는 과정에서 소외된 쉼터 노숙인들 모두가 무력감을 느낀다.
실험이었다. 아침을여는집이 풀어나갈 모든 문제의 결정권을 ‘운영회의’와 ‘한마음 가족’에 넘겼다. 실무자들의 결심이 필요했다. 시시콜콜한 모든 사안을 함께 결정하고 진행하는 건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고 한다. 상담실장 조최윤순씨는 “번거롭지요. 왜 안 그렇겠어요. 사실 어떤 사안에 대해 실무자가 결정하고 진행시켜버리면 쉽잖아요. 그런데 운영회의를 거쳐 전체 모임에서 결정하려하니 얼마나 번잡스럽겠”냐며 어려움을 호소했다.
어색하고 쑥스러웠지만 몇 번의 모임이 진행되면서 가족들 스스로 공동체 모임에 적응해 갔다. 공동체 모임의 이름도 그들이 정했다. 대박가족, 한마음가족, 샛별가족, 희망가족, 명랑가족, 한별가족 등 다양한 의견이 쏟아져 나왔다. 이 명칭들 중에서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한마음가족’이 공식이름으로 정해졌다. 이름이 정해진 뒤부터는 이야기의 가속도가 붙었다.
발전이었다. 처음 공동체 모임을 하던 날 어색하게 서로의 눈치만 살피던 가족들이 열변을 토해가며 의견을 내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물론 먹물들이 꾸린 공동체 모임처럼 엄청난(?) 철학은 없지만 나름의 철학과 공동체에 대한 태도는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아 보였다.
지난 4월 3일 목요일 7시. 다른 약속을 미룬 채 한 두 사람씩 모이더니 어느새 열여덟 명이 한 자리에 모였다. 이 날도 여전히 같잖은 이유로 말들이 오가기 시작했다. 지난 일주일동안 생활하면서 부닥친 사소하고 자잘하지만 갈등의 소지가 될 수 있는 얘깃거리가 도마 위에 올랐다. 화장실을 짧게 사용하자든가, 늦은 시간에 조용히 다녔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있었다. 음식솜씨가 좋은 이씨는 “누구는 청소하고 밥도 하는데, 밥상을 피는 것도 귀찮아서 안 하는 사람이 있다”며 불평의 포문을 열었다. 평소에 말이 없던 정씨도 한마디 거든다. “젊은 사람들이 몸을 더 사려요. 또 늦은 밤 다닐 때 현관문을 조용히 여닫아야지, 거실에서 잠을 자는 식구들이 있는데 말이야.”
설왕설래하며 한참 말들이 오갔다. 말들이 오가다 보니 문제를 해결할 방안들이 하나둘 세워졌다. 아침을여는집 가족들은 이렇게 같잖은 이유로 다툼도 벌이고 의논도 하면서 공동체를 배우고 지켜나간다.
‘한마음 가족’이 진행된 지 일년하고도 한 달이 다 되어 간다. 함께 살아오면서 부닥쳐온 일들이 모임에서 이야기되고,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는 시간으로 채워지기 시작한 모임이었다. 더 많은 시간이 지나면 함께 살아가는 사람에 대한 예의도 지키고, 토론을 통해 의견을 조율하는 멋진 공동체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