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복사는 직접하세요
벌써 7년이 지난 일이지만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첫직장에서의 일이다. “미연씨, 이거 10부만 복사 해줄래?” 얼마 전에 새로 온 김과장님이 부드럽고 다정한 태도로 회의자료를 건네며 준비를 부탁했다. 공손하게 자료를 받아 말끔하게 철까지 끝내 책상 위에 자료를 올려놓으며 미연씨는 웃으며 말했다. “김과장님이 회사에 오신지 얼마 안되어서 잘 모르시는 것 같아 이번엔 제가 일을 해드렸는데요, 앞으로 복사는 직접 하시는 게 좋겠어요.” 당시 나의 상사였던 김과장님은 이후 모든 잡무를 혼자서 처리했음은 물론이다. 어쩌면 새로운 직장 문화를 만들겠다는 의지가 충천해있던 소기업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손님이 찾아오면 사장님이 손수 차 준비를 했다. 혹시 눈치빠른 직원이 어쩌다 차 두어잔을 타서 회의실로 가져가면 사장님은 고마워 어쩔 줄을 몰라하곤 했다.
낡은 업무 시스템이 새로운 시대적 문화와 충돌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이사들은 부장과 한편이 되어 과장과 대리를 압박한다. 꽤나 오랜시간동안 아무도 문제로 삼지 않았던 일요일 야유회가 새삼스럽게 노동착취 아니냐는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는 사실에 사장은 당혹해 한다. 참가하지 않으면 월차를 없애겠다는 총무팀의 협박에 겨우 전원참석의 전통을 이어갔지만 내년이면 다시 그 소동을 겪어야 한다. 시대가 변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고용주와 피고용인의 힘이 역전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고용주는 직접적으로는 해고를 위협 수단으로, 간접적으로는 직무에 대한 간섭과 평가를 무기로 피고용인을 관리하고 통제한다. 피고용인은 언제나 약자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제 그들이 더 이상 묵묵히 부당한 처사를 수용하고만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표면적으로는 차시중을 둘러싸고 벌어진 얼마전 초등학교장선생님의 자살 파문을 보면서 안타까운 심정을 감출 수 없었다. 기간제 교사는 왜 매일 아침 교장 선생에게 차를 타 주는 것을 성차별적 업무 지시라고 여겼을까? 그 초등학교의 교장, 교감선생님은 왜 그 기간제 교사의 접대 업무 거부를 권위에 대한 당돌한 도전으로 받아들였을까? 그리고 그 갈등이 결국 교장단과 전교조의 기세싸움으로 번져 한 교육자를 자살로 몰아가기에 이르렀을까?
어떤 이들은 기간제 교사가 겪은 ‘부당한 대우’ 정도는 산전수전 다 겪어본 직장 선배 입장에서 보면 새발의 피에 불과한 일인데 그 정도를 견디지 못하고 문제를 확산시킨 ‘적응 능력’ 부족을 아쉬워 한다. 사건이 일어난 초등학교가 학생 65명에 교사 9명의 작은 학교였음을 감안한다면, 권위적인 교장과 당돌한 신출내기 교사의 갈등은 화해 불가능한 격돌로 치닫지 않을 수도 있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출근에서 사표를 내기까지 20일의 시간은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기에도 참으로 짧은 시간 아닌가?
다른 이들은 교장단의 전교조에 대한 뿌리깊은 반목과 불신을 탓한다. 신임 교사가 겪을 수밖에 없는 서투른 업무 처리를 다독거리고 지도하기 보다는 권위적인 구태를 벗지 못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사표 제출 강요’라는 부당한 압력에 대한 전교조의 정당한 복직 및 사과 요구를 ‘밀려서는 안된다’는 이유로 수용불가 입장을 고수한 것은 그 교장 선생님을 자살로 내몰게된 직접적 원인이 되지 않았냐며 안타까와 하는 이들이 많다. 하긴 수십년 교단 경험을 가진 그 교장 선생님에게 어디 신임 교사 하나 다스리는 일이 그렇게 까지 큰 일이었겠냐 싶기도 하다.
우리는 모두 우리의 일터가 갈등과 반목이 아니라 이해와 격려로 가득차기를 바라고 있다. 통제를 통해 운영되던 구체제는 투쟁을 통해서만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머리가 아프고 학교 갈 생각만 하면 몸서리가 쳐”졌다는 그 기간제 교사의 고통을 이해한다. 하지만 그 문제를 ‘여교사라는 이유만으로 접대를 강요받는’ 그래서 ‘교권이 무너지는’ 것으로만 받아드려야 했을까?
‘부당한 관행’을 ‘정당한 업무 시스템’으로 다시 세팅하는 것은 자기성찰적인 상호작용을 필요로 한다. 엉뚱한 상상이지만, 기간제 교사가 “첫출근 기념으로 모든 선생님들께 차한잔씩 타드릴께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하지만 매일 아침은 부담스러운데요, 다시한번 생각해 주세요”라고 했다면, 그리고 교장 선생님이 “허허, 이런 요즘 애들이란..”하면서 철없는 신임 교사의 당돌함을 수용할 여유를 가졌다면, “교장 선생님, 요즘 신세대들은 이렇답니다. 너무 심려치 마세요. 차는 제가 타드리겠습니다.”라고 달래 줄 주임 선생님이 있었다면, 사태는 다른 국면으로 전개되지 않았을까?
벌써 7년이 지난 일이지만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첫직장에서의 일이다. “미연씨, 이거 10부만 복사 해줄래?” 얼마 전에 새로 온 김과장님이 부드럽고 다정한 태도로 회의자료를 건네며 준비를 부탁했다. 공손하게 자료를 받아 말끔하게 철까지 끝내 책상 위에 자료를 올려놓으며 미연씨는 웃으며 말했다. “김과장님이 회사에 오신지 얼마 안되어서 잘 모르시는 것 같아 이번엔 제가 일을 해드렸는데요, 앞으로 복사는 직접 하시는 게 좋겠어요.” 당시 나의 상사였던 김과장님은 이후 모든 잡무를 혼자서 처리했음은 물론이다. 어쩌면 새로운 직장 문화를 만들겠다는 의지가 충천해있던 소기업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손님이 찾아오면 사장님이 손수 차 준비를 했다. 혹시 눈치빠른 직원이 어쩌다 차 두어잔을 타서 회의실로 가져가면 사장님은 고마워 어쩔 줄을 몰라하곤 했다.
낡은 업무 시스템이 새로운 시대적 문화와 충돌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이사들은 부장과 한편이 되어 과장과 대리를 압박한다. 꽤나 오랜시간동안 아무도 문제로 삼지 않았던 일요일 야유회가 새삼스럽게 노동착취 아니냐는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는 사실에 사장은 당혹해 한다. 참가하지 않으면 월차를 없애겠다는 총무팀의 협박에 겨우 전원참석의 전통을 이어갔지만 내년이면 다시 그 소동을 겪어야 한다. 시대가 변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고용주와 피고용인의 힘이 역전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고용주는 직접적으로는 해고를 위협 수단으로, 간접적으로는 직무에 대한 간섭과 평가를 무기로 피고용인을 관리하고 통제한다. 피고용인은 언제나 약자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제 그들이 더 이상 묵묵히 부당한 처사를 수용하고만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표면적으로는 차시중을 둘러싸고 벌어진 얼마전 초등학교장선생님의 자살 파문을 보면서 안타까운 심정을 감출 수 없었다. 기간제 교사는 왜 매일 아침 교장 선생에게 차를 타 주는 것을 성차별적 업무 지시라고 여겼을까? 그 초등학교의 교장, 교감선생님은 왜 그 기간제 교사의 접대 업무 거부를 권위에 대한 당돌한 도전으로 받아들였을까? 그리고 그 갈등이 결국 교장단과 전교조의 기세싸움으로 번져 한 교육자를 자살로 몰아가기에 이르렀을까?
어떤 이들은 기간제 교사가 겪은 ‘부당한 대우’ 정도는 산전수전 다 겪어본 직장 선배 입장에서 보면 새발의 피에 불과한 일인데 그 정도를 견디지 못하고 문제를 확산시킨 ‘적응 능력’ 부족을 아쉬워 한다. 사건이 일어난 초등학교가 학생 65명에 교사 9명의 작은 학교였음을 감안한다면, 권위적인 교장과 당돌한 신출내기 교사의 갈등은 화해 불가능한 격돌로 치닫지 않을 수도 있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출근에서 사표를 내기까지 20일의 시간은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기에도 참으로 짧은 시간 아닌가?
다른 이들은 교장단의 전교조에 대한 뿌리깊은 반목과 불신을 탓한다. 신임 교사가 겪을 수밖에 없는 서투른 업무 처리를 다독거리고 지도하기 보다는 권위적인 구태를 벗지 못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사표 제출 강요’라는 부당한 압력에 대한 전교조의 정당한 복직 및 사과 요구를 ‘밀려서는 안된다’는 이유로 수용불가 입장을 고수한 것은 그 교장 선생님을 자살로 내몰게된 직접적 원인이 되지 않았냐며 안타까와 하는 이들이 많다. 하긴 수십년 교단 경험을 가진 그 교장 선생님에게 어디 신임 교사 하나 다스리는 일이 그렇게 까지 큰 일이었겠냐 싶기도 하다.
우리는 모두 우리의 일터가 갈등과 반목이 아니라 이해와 격려로 가득차기를 바라고 있다. 통제를 통해 운영되던 구체제는 투쟁을 통해서만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머리가 아프고 학교 갈 생각만 하면 몸서리가 쳐”졌다는 그 기간제 교사의 고통을 이해한다. 하지만 그 문제를 ‘여교사라는 이유만으로 접대를 강요받는’ 그래서 ‘교권이 무너지는’ 것으로만 받아드려야 했을까?
‘부당한 관행’을 ‘정당한 업무 시스템’으로 다시 세팅하는 것은 자기성찰적인 상호작용을 필요로 한다. 엉뚱한 상상이지만, 기간제 교사가 “첫출근 기념으로 모든 선생님들께 차한잔씩 타드릴께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하지만 매일 아침은 부담스러운데요, 다시한번 생각해 주세요”라고 했다면, 그리고 교장 선생님이 “허허, 이런 요즘 애들이란..”하면서 철없는 신임 교사의 당돌함을 수용할 여유를 가졌다면, “교장 선생님, 요즘 신세대들은 이렇답니다. 너무 심려치 마세요. 차는 제가 타드리겠습니다.”라고 달래 줄 주임 선생님이 있었다면, 사태는 다른 국면으로 전개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