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회 -권력에서 자유로운 신문

by 정창수 posted Apr 24, 2003
28회 -권력에서 자유로운 신문

정창수(시민행동 밑빠진독상 팀장)

신문은 언제부터 발행되기 시작했을까? 기록에 의하면 로마시대 원로원의 소식을 전하는 <악타디우르나>라는 신문이 가장 오래되었다고 한다. 이것을 신문의 기원이라 하지 않는 것은 각각의 나라에서 신문들이 제각기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도 유럽에도 부정기적인 신문은 뉴스를 원하는 사람들의 욕구로 인해 존재해왔다. 그리고 가장먼저 발행된 일간 신문은 1860년 독일에서 발행된<라이프치히 자이퉁겐>이고 이를 근대신문의 효시로 알고있다. 명나라에서도 1638년에 신문이 발행되었다는 기록이 있기는 하다.
그런데 우리는 조선 개국 초기인 1400년경에 이미 일간 신문이 있었다. 초기에는 기별이라고도 불리웠던 조보(朝報)라는 일간 신문이 있었는데 정부에서 발행하는 관보였다. 기록에는 삼국시대부터 관보형태의 신문이 있었다고 하지만 남아있는 것은 조선시대부터이다.
조보는 승정원에서 만들었는데 국왕의 명령과 지시, 유생·관리들의 소장(疏狀), 관리의 임면 등의 관보적 기사가 기본으로 들어가고 날씨나 강우량, 농사의 작황, 천재지변 등 일반사회면 기사에 해당되는 것들도 실어서 서울과 지방의 관서, 그리고 상류계급의 사람들에게도 돌렸으며, 1520년(중종 15)에는 상공관계인에게도 배포하였다. 그리고 때에 따라 분발(分撥)이라는 호외 등을 발행하기도 했다.
이러다가 1577년(선조 10) 8월에는 이를 본떠서 서울식자 30여명이 모여 신문을 발간한다. 매일 인쇄·발간하여 독자에게서 구독료도 받았다. 이것이 활판으로 인쇄된 세계최초의 일간신문이다. 그런데 선조가 이를 보고 이것이 이웃 나라에 흘러나가면 나라의 기밀을 알리는 결과가 된다고 진노하여 몇 개월 만에 금지되는 바람에 근대적 인쇄 매체로 발전하지 못하였고, 관계자들은 처벌을 받았다. 이후 '조보'는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관보(官報)’라는 이름으로 대치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관보인 조보가 구독료를 받았다는 것이다. 고위 관리는 매달 4냥, 하급관리는 1냥5전등을 지불하였다. 이것은 당시에 노비 대여섯명을 부릴 수 있는 큰돈이었다.
아무튼 예전에는 왕같은 정치권력이 신문의 내용과 판매에 대해 간섭하고 제한하는 역할을 수행했지만 이제는 거대자본들이 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발생하는 있는 불공정 경쟁을 방지하기 위해 우리나라를 비롯한 각국은 노력하고 있다. 우리도 일부 언론이 이를 몹시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지만 여론은 대체적으로 공감하고 있는 분위기인 듯 하다. 신문발행이 처벌받던 예전에 비하면 재정까지 지원해주니 새삼 격세지감을 느낀다. 이제라도 신문들이 정치권력이나 자본권력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이글은 시민의신문(www.ngotimes.net)에 연재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