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공화국을 돌아보며

by 유동걸 posted May 15, 2003
노무현 대통령이 국민참여정부와 토론공화국을 내세운지 어언 3개월이 되어간다. 노무현 이전의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이 집권 초기에 대인기를 누렸다가 나중에 완전히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잃었던 것과 달리 노무현의 행보는 조금 다른 방향을 모색하고 있는 듯 하다. 집권 초기의 반짝 인기보다는 보다 긴 호흡으로 한국의 정치개혁을 비롯한 주요 현안들을 다루어나간다는 느낌을 받는다. 아직 백일도 안된 정권을 이리저리 둘러치고 메치면서 평가하는 것이 온당한지 모르지만 요즘처럼 변화가 급박한 시대에는 자주 그리고 지속적으로 피드백을 해주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하여 소위 '토론 공화국'에 대한 몇 가지 지점을 정리해보았다. 이글은 노무현 정부를 비방 혹은 찬양하는데 목적을 두지 않고 그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과거 어느 정권보다도 힘겨운 전투를 수행하고 있는 국민참여정부의 현주소를 냉정하게 돌아보고 보다 나은 국정방향 모색에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쓴다.

1. 인사(人事)가 만사(萬事)인데

모든 정권이 그렇듯이 참여정부의 잣대도 가장 뜨거운 감자격인 인사(人事) 문제로부터 접근해보자.
참여정부는 초기 내각 구성에서 고건 총리를 내세워 뜨뜻미지근한 내각의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아직 우리 사회에서 대다수 국민들이 신뢰하고 존경하는 총리에 값하는 인재가 없는 (있어도 그런 분들은 이전투구의 정치판에 나서기를 꺼려하므로...) 까닭에 행정의 달인을 내세웠다고 본다. 고총리의 경우 4.3 사건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늦춤으로써 추미애 의원으로부터 쓴소리를 듣긴 했지만 아직 큰 공과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단 총리자리에 걸맞는 역할을 무난히 하는 듯 하다.

야당이나 언론과의 대립각을 내세운 대표적인 인사로는 장관직의 강금실 법무와 이창동 문공, 김두관 행자, 진대제 정통 등이 있고, 서동구 카드의 실패 후에 정연주씨로 정해진 케이이비에스 사장, 그리고 가장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킨 고영구 국정원장과 서동만 국정원 기조실장이 있다.
아직 실무적인 능력과 평가를 받기에는 이르지만 장관들 가운데 가장 성실하게 업무수행을 하고 있는 장관으로 강금실, 이창동, 김두관의 순서를 달리는 걸 보면 일단 성과 나이와 영역을 파괴한 파격인사라고 지목되었던 사람들에 대한 인사는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검찰 개혁이나 언론 정상화 그리고 지방자치에 대한 참여정부의 기틀세우기란 점에서 적어도 이 신임 장관들이 걷고 있는 행보는 개혁이란 코드에 잘 부합된다는 점이다. 진대제장관의 경우 실무평가는 4위지만 삼성전자 주식보유와 연계된 도덕성 논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어 어떤 형태로든지 교통정리가 필요한 상황이다. 장고를 거듭한 교육부총리의 경우 아직 네이스나 교육개방 혹은 전교조와 교장단 갈등 등 교육 현안이나 현황을 파악하고 정리해나가는데 어려움이 많지만 점차 가닥을 잡아나가고 있다고 본다면 비교적 원만한 인사가 아니었나 평가해볼 수 있다.
지명관 이사장의 딴지걸기성 행보에도 불구하고 케이비에스의 개혁은 이제 시동을 막 걸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 이래 가장 참담한 심경을 표현했던 서동구씨의 경우에는 하나의 오점으로 남을 것임에 틀림 없지만 그 과정에 조선일보 기자가 끼어들었다는 점과 그 결과 더 개혁적이고 참신한 정연주씨가 발탁되었다는 점은 그야말로 한국 방송계를 위한 전화위복이며 아직은 하늘이 참여정부를 버리지 않았다는 느낌까지 전해준다.
낡은 색깔론으로 수구세력들이 덧칠하려는 붉은 이미지도 고영구 국정원장의 인사를 막지 못했다. 국민들은 친북좌파나 반미용공의 이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지 못했지만 적어도 무조건적인 매카시즘(빨갱이 사냥, 마녀재판)이나 학문의 자유에 대한 이념적 색칠하기는 이제 구시대의 관행이라는 점을 일깨우고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여야를 막론한 정보위 위원들의 낡은 색깔론에 의연하게 대처한 대통령이 전교조 교사들의 반전평화교육에 대해서는 '반미'라는 낡은 딱지의 의혹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지 못함으로써, 지난 2000년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거친 우리 사회는 '북한'보다 '미국'이 더 큰 과제이고 금기라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환기시켜주었다.
고영구 국정원장과 서동만 실장의 국정원 개혁이 1급간부들의 대대적인 인사개혁으로 시작되고, 과거 정치사찰의 악행이란 관행을 줄이고 해외정보 업무 강화의 측면으로 나아간 것 역시 국민들의 바램을 담은 개혁 코드와 일치하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국정원이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지향하는' 조직이 아니라, 이 땅의 음지를 밝혀서 양지로 개척하는 안보와 정의의 산실이길 바라는 것으로 인사에 대한 평가를 대신하고자 한다.

인사문제가 여야간의 정쟁의 대상이 되어온지는 오래 전의 일이며 이제는 보혁의 갈등 구도를 드러내고 가려내는 시금석 역할을 하기도 한다. 지역이나 이념으로 갈라져온 우리네 풍토에서 모두의 입맛에 맞는 인사란 애초에 불가능하다. 다만 전문성과 개혁성(도덕성)의 양측면을 고루 갖춘 인물들을 최대한 발탁하여 정부와 국정에 참여시키는 것이 앞으로 산적한 문제를 풀어가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인사 참여방법에 대한 개혁부분은 온.오프 라인을 통틀어 다양한 이견을 듣고 수렴하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 박주현 국민참여수석과 - 천호선 라인으로 이어지는 국민참여 활성화는 아직 그 윤곽을 제대로 드러내고 있지 않지만 (이전까지 없었던 새로운 기획이자 시도이기 때문에)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으며 앞으로는 보다 생산적이고 실제적인 참여정부의 위상을 세워나가는 작업이 요청된다.

2. 정책은 국민 앞에서 당당한가?

대통령 선거 기간이나 당선자로서 인수위를 이끌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노무현 대통령은 국민들(특히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를 지지했던 사람)로부터 통치자의 면모를 갖추지 못했다는 점에 대해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각종 자리에서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그의 말투와 행보를 두고 일었던 많은 평가들이 정당한가 혹은 의미 있는가는 다른 자리에서 논하기로 하자. 과거 한 사람이 국민의 초점이 되었던 제왕적 대통령 시절이야 그의 행동 하나가 큰 의미를 지닐 수 있겠지만 이제는 말 그대로 '국민이 대통령'일 수 있는 시점이니 우리도 이제 '막걸리를 자전거 꽁무니에 싣고 시인 친구집에 놀러가는 대통령'을 그려보는 것도 그다지 꿈 속에서만 있을 법한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대통령이라는 공인으로서 화제를 불러일으킬만한 충격적인 어법이나 행동은 신중하게 판단해서 하는 것이 좋다(내 머리 속에 좋은 지도자상은 그가 있는지 없는지 모를수록 좋다는 고대적 관점에 동의하므로)
따라서 그가 강조하는 토론공화국이니 잡초니 하는 말에 집착하여 딴지를 걸기보다는 그가 지향하는 세계에 대한 실제적 의미를 정책을 통해서 진단해보자.

쉽게 이야기해서 과정이나 결과를 보았을 때 국민들로부터 지지와 성원을 받는 정책과 그렇지 못한 정책으로 나누어보자. 그에 앞서서 김대중 정부 때와 마찬가지로 진보(를 표방하는) 세력과 소위 보수를 자처하는 세력 양쪽으로부터 강한 공격을 받고 있는 현정부의 성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대선 구도와 거의 유사한 형태가 당선이 되고 난 뒤에도 사안과 정책에 따라서 계속 반복되고 있다. 문제는 참여정부(혹은 노무현 대통령 개인)를 비판하는 두 시각이 극단으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는 비슷한 양태를 띤다는 점이다(우연인지 모르지만 예컨대 참여연대 장하성 교수가 극좌와 재벌개혁반대를 싸잡아 연결시킨 데에서 양극단의 단일화(?) 조짐을 발견할 수 있다. 이 경우는 완전히 엉뚱한 지적이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이런 현상이 간간히 나타난다)

다시 말해서 우리 사회는 지금 거칠게 분류하면
극우(소수의 수구꼴통이라 불림) - 보수(전교조를 사회주의라고 매도하거나 참여정부를 친북좌파로 모는 강경보수에서 비교적 합리적인 한나라당 의원까지, 거기에 유시민같은 자유주의자도 포함) - 진보(일단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면서 약자들을 위한 정치를 주장하는 친노동, 친민족 계열) - 극좌(좌익꼴통이란 신조어를 받고사는 소위 확신범들?)의 구도를 이루고 있고 보수(이회창 후보 지지)와 진보(권영길 후보 지지)의 중간 쯤에 정책과 이념에 따른 다양한 스펙트럼 속에서 개혁을 표방하는 노무현 참여정부가 존재한다.

따라서 정책과 이념에 따라서 비판을 가할 때는 자기가 선 자리를 먼저 밝히고 비판을 하는 것이 순리이고 예의가 아닐까 싶다(나 자신은 대선 전날의 소동에도 불구하고, 아주 약간의 흔들림은 있었지만, 노무현의 당선을 확신하고 권영길을 찍었으므로 일단 진보 쪽에 가깝다고 해두자)

그런 지점에서 정책과 이념을 판단했을 때 노무현 정부는 개혁적인 측면에서 상당부분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강금실 법무 기용 이후 검사들과의 토론을 통해서 직접 돌파한 검찰개혁 - 이창동 문광부 장관과 함께 언론바로세우기(개혁이 아니라)에 대한 지속적인 추구로 언론의 편파성을 줄여나가며 공정위의 결정을 통해서 무가지 배포나 경품 살포 등을 혁신할 수 있게된 점 등- 사장이나 원장의 개혁적 인사를 통한 방송, 국정원 개혁 가능성) 이념적인 측면에서는 아직 뚜렷한 가치 정립 없이 혼재한 상태이다. 물론 아직 정치제도의 개혁이나 경제문제 등은 가닥을 확실히 못 잡아나가고 있으며 대미외교의 경우 자주와 안보 사이에 적절한 타협점을 못 찾고 있고 북한 핵문제를 둘러싼 역할 부분에서도 신뢰할만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점도 사실이다.

3. 미국으로 떠나는 대통령에 대해서 각계의 주문이 넘친다. 부시와의 어법차이부터 고치라는 소박한 주문부터 반드시 북핵해결의 방법을 갖고오라는 분에 넘치는 주문까지 다양하기 그지없다. 사실 노무현 정부가 안고 있는 최대의 딜레마는 북핵과 미국이다. 작년 월드컵 기간에 죽은 두 학생으로 인해 시청 앞에 모여든 촛불인파를 자제시켜야하는 그의 가슴도 한민족의 한 사람으로서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대통령으로서는 현단계의 역사적 상황에서 친미도 자주도 포기할 수 없기에, 이라크 침략전쟁에 국군을 파병하고는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이 비록 악어의 눈물일지라도 그로서는 달리 방법이 없는 것이 앞선 우리 조상들이 가져다준 짐이었다. 다시 말하면 지난 60년 동안의 해방 이후 역사 - 분단과 전쟁과 냉전 - 가 가져다준 짐을 노무현 개인이 일거에 풀기에는 역부족이라는 뜻이다. 이를 위해서는 해방 이후 한국에 뿌리내린 미국의 본성을 알아야하고 한반도 전쟁의 본질을 알아야하며, 지난 94년 전쟁위기 이후 맺어진 제네바 협약과 페리프로세스와 98년 광명성1호를 쏘아올린 뒤로 추진된 북미수교진행과정 및 현단계에서의 북미의 치열한 외교전의 현실을 냉철히 파악해야 한다. 단순한 냉전논리와 반공친미의 접근도 위험하고 그렇다고 북핵을 용인하면서 한반도를 비롯한 아시아 열강을 핵무장터로 몰아가는 태세에 팔짱을 끼고 있을 수만도 없다. 이 문제를 푸는데 남한의 경우 정부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남남갈등(친미-우파 -수구언론-지역감정-경제위기)이 풀리지 않는 상황에서 자주적으로 풀기도 어렵다. 또 반대로 미국의 강경파나 부시의 목소리를 도와 한반도에 이루어놓은 화해 협력 구도를 무너뜨리는 것 또한 중대한 오류를 범하는 일이 되기에 더더욱 신중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미국 문제와 더불어서 방향을 찾지 못하는 경제에 대해서는 더 가열찬 비판을 가할 수 있다. 소위 개혁을 할 수도 없고 그대로 유지할 수도 없는 딜레마가 여기에도 존재한다. 성장과 분배를 동시에 시행해야 하는 (나아가 재벌과 노동계를 동시에 만족시켜야 하는) 경제구조 정착과 방법이 한국의 경제현실에서 지극히 어렵기 때문이다. 팔소매를 걷어부치고 골프를 치는 행동으로 경제 부흥을 꾀하거나 비정규직의 현실을 묻는 말에 대기업 노조가 반성을 해야한다는 동문서답으로는 서민들이 바라는 경제발전도 노동개혁도 어렵기 때문이다.

맺음말 - 검찰이나 언론 등 대통령의 권한으로 제어할 수 있는 부분은 토론회라는 형식이나 법제화를 통해서 어느 정도의 물갈이와 개혁을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지만 경제나 북핵, 대미자주외교 등에 대해서는 큰 발전을 기대하기 어려운 게 토론공화국의 현주소가 아닌가 싶다. 국내적으로는 부동산 투기와 카드빚, 재벌의 방치 등 개혁의 요소가 실종되고 대외적으로는 북핵이나 미국에 대해서 현실적인 힘을 갖고 있지 못한 한계를 안고 있는 토론공화국이 진정으로 토론해야 할 대상과의 적극적인 자리마련을 통해서 산적한 난제를 풀어나가 한반도에 평화와 번영의 날이 속히 오기를 염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