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부처님께 묻는다면
-참여불교의 흐름과 21세기 한국불교의 방향을 읽고-
<b>부처님, 참여불교가 무엇입니까?<b/>
‘참여’라는 단어가 유행인냥, 들불처럼 번진다. 참여연대, 참여정부, 참여종단, 참여불교…. 참여가 이 시대의 화두가 된 듯 싶다.
돌이켜보면, 역사적으로 어떤 시기마다 그 시대를 상징하는 유행어가 있었다. 박정희 시대의 ‘새마을 운동’, 전두환 정권의 ‘정의사회구현’, 노태우 정권의 ‘보통사람’. 과연, 새마을 운동이 새마을 운동이었고, 정의사회를 구현했으며, 보통사람의 시대였던가? 새마을 운동은 산업화의 앞잡이가 되어 농총공동체를 파괴했고, 광주학살을 정당화하기 위한 정의사회구현이었으며, 특별한 보통사람의 시대가 아니었던가? 가깝게는 국민의 정부도 있었지만, 국민을 위한 정부는 아니었다. 정권이 출범할 때마다 내걸은 슬로건은 국정철학이었다기보다 정치적 레토릭에 가까웠다. 시민들을 기만하고자 내세운 정치적 레토릭.
그럼 노무현 정부가 내건 ‘참여정부’는 국정철학일까? 아니면, 정치적 레토릭일까? 참여시대에 조계종단이 내건 ‘참여종단’은 불교적 사유에서 나온 윤리적․실천적 아젠다일까? 아니면, 유행에 따라 붙인 정치적 레토릭일까? 쉽게 답할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도대체 참여가 무엇이기에 너도 나도 참여~ 참여~ 외치는 것일까? 참여의 정체를 묻고자 한다.
먼저, 박광서 교수님이 말하는 참여불교의 정의를 통해 참여의 정체를 밝히도록 하자. 박 교수님은 참여불교를 “불교적 가치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확신에서 시작되었다고 밝힌 뒤, 달라이 라마나 틱낫한의 이념을 빌려와 참여불교를 정의했다.
“참여불교는 실천불교와 또 다른 분명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나 베트남의 틱낫한과 같은 대표적인 참여불교지도자들은 세간의 고통을 돌보는 보살행과, 자신을 돌보는 수행은 둘로 나뉘거나, 자기 수행을 끝내고 나서 중생을 돌보겠다는 선후 또는 단계의 문제가 아님을 강조한다. 철저한 연기의 관점에서 보아 자기수행과 보살행이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참여불교의 흐름과 21세기 한국불교의 방향(2003)>
박 교수님은 참여불교를 보살행과 수행의 통일로 정의한 뒤, 80년대 피어났던 사회적 실천에 무게를 실고 보살의 전통만 강조한 민중불교와 실천불교와는 차이가 있다고 주장하셨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참여불교와 실천불교(민중불교)의 차이는, 보살행과 수행의 통일 대 보살의 전통만 강조한 차이가 아닌 것 같다.
80년대 피어났던 민중불교, 실천불교가 보살행의 전통만 강조하여 사회구조 개혁에 중심을 두었던 것은 사실이다. 더구나 민중불교, 실천불교의 사유방식은 불교적이라고 부르기에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80년대 한국사회를 풍미했던 변혁이론인 마르크스주의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심하게 말해 민중불교, 실천불교는 불교의 겉옷을 입은 마르크시즘 불교가 아니었을까?
그에 비해 요즘 각광받는 달라이 라마와 틱낫한 스님의 참여불교는 보살행과 수행의 완벽한 조화일까? 물론 두 분의 탁월성이 상식적이고 현실적인 언어(말)에 있음을 부인할 생각은 없다. 혹시 두 분으로 상징되는 ‘참여불교’는 서구사회에서 불었던 변형된 오리엔탈리즘의 또 다른 변종은 아닐까?
“지금 미국에선 달라이 라마의 책을 읽는 계층은 중산층 이상이라고 합니다. 미국의 빈곤계층은 읽지 않는대요. 우리나라에서도 틱낫한 스님 책의 독자는 어느 정도 생활의 여유가 있는 계층이라고 여겨집니다. 체제에서 희생과 고통 받는 계층은 거의 안 보지요.
(생략)… 주 독자층인 중산층들은 경쟁과 폭력적인 부분들-시험 봐서 남을 이겨야 학교 들어가고, 기업에서 벌어지는 끊임없이 경쟁관계-에서 얻어진 안락을 향유-실제 이러한 안락이 폭력성에 기반한 것인데도-하면서도, 다른 쪽으로는 경쟁과 폭력의 체제를 벗어나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가지는 시대사적 화두가 평화입니다. 그런데 이 평화는 과거 우리가 역사 속에서 생각했던 평화와는 다른 것이라고 생각해요.
(생략)… 미국이나 우리나라의 중산층은 자기가 안고 있는, 과거 역사에서 경험하지 못한 폭력적인 제도 안에서 평화를 구하고 있는 겁니다. 이 차원에서 보면, 달라이라마와 틱낫한 스님도 현실 속에서 평화를 구했고, 자본주의라는 큰 제도 속에서 피해를 봤던 분들입니다. 이런 부분이 오늘날 평화를 구하는 중산층의 욕구와 맞아떨어졌다는 겁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들은 보수적이에요. 중산층들은 이미 성공을 했기 때문에 평화를 구하기는 하지만 이 사회를 바꾸겠다는 의지는 없기 때문이죠. 틱낫한이나 달라이라마의 책에는 ‘행복’이나 ‘웃음’에 대해 말씀은 하시지만, 왜 우리의 현실이 그것을 필요로 하는지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을 피하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좀 더 근본적인 갈등을 끄집어 내지 않고 제한된 사랑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중산층한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 아닌가요. 이런 점들이 현 제도의 열매를 따 먹으면서도, 폭력을 거부하는 중산층, 즉 현실의 불평등하고 억압적이며 폭력적인 제도를 본질적으로 바꾸려 하지 않는 층에게 의미 있게 수용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보다 본질적으로 사유하지 않는 사람들인 중산층과 이해요구가 맞았다는 거지요.”<격월간 인드라망 4-5호, 2003, 난상토론 불교는 어렵다? 中 여운 김광하의 발언>
여운 김광하 선생님의 주장에 따르면, 달라이 라마나 틱낫한 스님은 체제를 건드리지 않는 ‘행복’과 ‘웃음’의 전도사(필자도 그렇지만 여운 김광하 선생님도 달라이 라마나 틱낫한 스님이 훌륭하신 수행자가 아니라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분명 두 분은 우리시대의 훌륭한 수행자이자 스승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체제를 건드리지 않는 ‘행복’과 ‘웃음’의 전도사라고 표현한 것은 두 분의 훌륭함과 달리 사회적 역할을 분석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일 뿐이다.
여운 선생님의 주장에 동의한다. 두 수행자의 위대함과 훌륭함을 떠나서 두 수행자로 상징되는 ‘참여불교’는 민중불교, 실천불교와 달리 고통의 밭인 체제를 건드리지 않는다. 따라서 보살행과 수행의 통일이라기보다, 수행, 즉 마음의 평화만 강조하는 불교가 아닐까? 아무리 둘러봐도 참여불교에서 참여의 실체를 찾기가 쉽지 않다. 원래 없었던 것인지, 필자가 무지한 것인지 헷갈린다.
오늘 부처님께 묻는다
“부처님, 과연 참여불가 무엇입니까?”
“부처님, 한국적 참여불교는 어떤 가르침에 발을 딛고 서서 실천을 이끌어 내야 합니까?”
<b>고통을 아십니까? 얼마나 힘든지</b>
한국불교는 우리시대의 고통을 어느 정도 경험했을까? 고통을 경험했는지 안 했는지 묻는 이유는, 고통을 경험하지 않고 ‘참여불교’를 말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말에 어느 분은 이렇게 반박을 하실 수도 있을 것 같다.
“똥인지 된장인지 꼭 먹어 봐야 되냐고.”
똥인지 된장인지는 꼭 안 먹어도 된다. 척 보면 아니까. 하지만 고통은 경험해야 한다. 고통은 척 보면 알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니까. 어느 종교라도 같은 시대의 대중들에게 어필할 수 있으려면, 대중들이 껴안고 있는 고통을 경험하고 고통 속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70~80년대, 도시산업선교회가 공단지역에서 노동자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 많은 선교활동을 했다. 노동문제에 관심이 많은 목사 몇몇이 뜻을 모았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일이 아니었다. 기독교는 유럽에서 18세기부터 산업화된 인간이 가지는 여러 가지 소외문제, 노동문제, 계급간의 갈등을 경험했다. 기독교의 언어 속에는 이런 산업사회의 필연적인 고통의 경험들이 담겨져 있다. 경험을 가지고 말하니까, 70~80년대 공단지역 노동자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고 노동자들도 쉽게 이해하며 교회로 갔던 것이다.
카톨릭교회도 마찬가지다. 카톨릭의 바티칸2공회 문헌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 8항 [자선사업]을 보자.
“사랑의 실천은 아무런 의혹도 자아내지 않는 순수한 것이어야 한다. (생략)… 또한 도움을 받는 사람의 자유와 품위를, 마음을 다하여 존경할 것이다. 순순한 지향이나 이기심이나 지배욕으로 흐려질까 조심할 것이다. 먼저 정의의 요구를 충족시켜야 할 것이니, 정의의 입장에서 이미 주어야 할 것을, 사랑의 선물처럼 주어서는 안 된다. 불행은 그 결과뿐 아니라, 그 원인부터 없애야 한다. 도움을 받는 사람들이 점차로 남에게 의존하는 예속에서 해방되어 자립할 수 있도록 질서 있게 도와 줄 것이다.”
카톨릭교회의 실천 아젠다가 거저 나왔을까? 아니다. 로마 카톨릭교회도 이전까지만 해도 개인의 영성 추구에 치중했다.
그러나 남미 신부들이 민중들과 함께 고통을 경험하고 고통을 극복하면서 로마에 압력을 넣어 ‘카톨릭의 바티칸2공회 문헌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 8항 [자선사업]’ 같은 아젠다를 내올 수 있었다.
한국 카톨릭교회의 성장도 현실의 고통을 경험하고 이해했던 교회가 민주화 운동을 이끌어 간 결과일 뿐이다. 우리들에게 존경받는 목사님들이나 신부님들을 보면 선교하지 않았다. 어려운 이웃들과 함께 먹고 살며 정의롭지 못한 현실에 투쟁했을 뿐이다. 삶의 함께하고 고통을 나눴기 때문에 개신교와 카톨릭이 대중들에게 어필할 수 있었다. 이 점을 한국불교는 유심히 봐야 한다. 여전히 한국불교는 현실을 사는 대중들의 고통을 이해 못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 불교는 대중에게 어렵고 말만 앞서는 종교일 수밖에 없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박광서 교수님도 “적당히 옛 경전을 논하고 전통에서 안주하는 데서 나아가 오늘날 세간과 중생이 고통 받고 있는 문제에 관심을 갖는 불교”를 참여불교의 한 축이라고 정의한다. 박 교수님은 참여불교의 두 가지 조건으로 ▲불교적 사유로 세상을 해석하고 해답을 내어놓은 것 ▲말이 아닌 실제 현장에서 중생고를 치유하는 데 나서야 하는 것을 내세웠다.(박광서, <참여불교의 흐름과 21세기 한국불교의 방향>, 2003, 제25차 열린토론마당 ‘참여불교의 현실과 전망’ 토론문, 불교포럼 주최)
하지만 박 교수님의 지적처럼 말이 아닌 실제 현장에서 중생고를 치유해야 하는 ‘현장주의’ 역시 만만한 문제는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한국불교는 우리시대의 고통을 전혀 경험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오랫동안 노숙인 복지 현장에서 일해 왔다. 소수자로서, 약자로서 피해의식만 가득한 노숙인들에게 틱낫한 스님이나 달라이 라마의 말씀이 위안이 됐을까? 대부분의 노숙인들이 책을 읽지 않는 현실에서 두 분의 메시지를 접할 기회라도 있을까? 틱낫한 스님과 달라이 라마는 외국분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쳐도, 한국의 승려들은 노숙인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줄 수 있을까? 메시지를 주기는커녕 그들의 고통이나 이해할까? 이해도 전제되지 않았는데, 무슨 메시지를 줄 수 있을까? 이런 현실에서 노숙인이 이해할 수 있는 참여불교는 무엇일까? 질문만 던질 뿐, 답을 줄 수 없는 게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가 참여불교를 말하려면, 먼저 우리사회의 현실을 말해야 한다. 더 구체적으로 많은 서민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현실을 말해야 한다. 말만 해서는 안 된다. 경험해야 한다. 경험이 전제되지 않은 관념뿐인 고통 속에서는 참여와 불교의 윤리실천이 나올 수 없다.
오늘 한국불교 승단에 묻고 싶다.
“알고나 계십니까? 우리가 겪는 고통이 얼마나 힘든지.”
“밥을 얻어먹고 사는 게 아니라, 밥을 벌어먹고 살기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아십니까?”
-참여불교의 흐름과 21세기 한국불교의 방향을 읽고-
<b>부처님, 참여불교가 무엇입니까?<b/>
‘참여’라는 단어가 유행인냥, 들불처럼 번진다. 참여연대, 참여정부, 참여종단, 참여불교…. 참여가 이 시대의 화두가 된 듯 싶다.
돌이켜보면, 역사적으로 어떤 시기마다 그 시대를 상징하는 유행어가 있었다. 박정희 시대의 ‘새마을 운동’, 전두환 정권의 ‘정의사회구현’, 노태우 정권의 ‘보통사람’. 과연, 새마을 운동이 새마을 운동이었고, 정의사회를 구현했으며, 보통사람의 시대였던가? 새마을 운동은 산업화의 앞잡이가 되어 농총공동체를 파괴했고, 광주학살을 정당화하기 위한 정의사회구현이었으며, 특별한 보통사람의 시대가 아니었던가? 가깝게는 국민의 정부도 있었지만, 국민을 위한 정부는 아니었다. 정권이 출범할 때마다 내걸은 슬로건은 국정철학이었다기보다 정치적 레토릭에 가까웠다. 시민들을 기만하고자 내세운 정치적 레토릭.
그럼 노무현 정부가 내건 ‘참여정부’는 국정철학일까? 아니면, 정치적 레토릭일까? 참여시대에 조계종단이 내건 ‘참여종단’은 불교적 사유에서 나온 윤리적․실천적 아젠다일까? 아니면, 유행에 따라 붙인 정치적 레토릭일까? 쉽게 답할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도대체 참여가 무엇이기에 너도 나도 참여~ 참여~ 외치는 것일까? 참여의 정체를 묻고자 한다.
먼저, 박광서 교수님이 말하는 참여불교의 정의를 통해 참여의 정체를 밝히도록 하자. 박 교수님은 참여불교를 “불교적 가치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확신에서 시작되었다고 밝힌 뒤, 달라이 라마나 틱낫한의 이념을 빌려와 참여불교를 정의했다.
“참여불교는 실천불교와 또 다른 분명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나 베트남의 틱낫한과 같은 대표적인 참여불교지도자들은 세간의 고통을 돌보는 보살행과, 자신을 돌보는 수행은 둘로 나뉘거나, 자기 수행을 끝내고 나서 중생을 돌보겠다는 선후 또는 단계의 문제가 아님을 강조한다. 철저한 연기의 관점에서 보아 자기수행과 보살행이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참여불교의 흐름과 21세기 한국불교의 방향(2003)>
박 교수님은 참여불교를 보살행과 수행의 통일로 정의한 뒤, 80년대 피어났던 사회적 실천에 무게를 실고 보살의 전통만 강조한 민중불교와 실천불교와는 차이가 있다고 주장하셨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참여불교와 실천불교(민중불교)의 차이는, 보살행과 수행의 통일 대 보살의 전통만 강조한 차이가 아닌 것 같다.
80년대 피어났던 민중불교, 실천불교가 보살행의 전통만 강조하여 사회구조 개혁에 중심을 두었던 것은 사실이다. 더구나 민중불교, 실천불교의 사유방식은 불교적이라고 부르기에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80년대 한국사회를 풍미했던 변혁이론인 마르크스주의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심하게 말해 민중불교, 실천불교는 불교의 겉옷을 입은 마르크시즘 불교가 아니었을까?
그에 비해 요즘 각광받는 달라이 라마와 틱낫한 스님의 참여불교는 보살행과 수행의 완벽한 조화일까? 물론 두 분의 탁월성이 상식적이고 현실적인 언어(말)에 있음을 부인할 생각은 없다. 혹시 두 분으로 상징되는 ‘참여불교’는 서구사회에서 불었던 변형된 오리엔탈리즘의 또 다른 변종은 아닐까?
“지금 미국에선 달라이 라마의 책을 읽는 계층은 중산층 이상이라고 합니다. 미국의 빈곤계층은 읽지 않는대요. 우리나라에서도 틱낫한 스님 책의 독자는 어느 정도 생활의 여유가 있는 계층이라고 여겨집니다. 체제에서 희생과 고통 받는 계층은 거의 안 보지요.
(생략)… 주 독자층인 중산층들은 경쟁과 폭력적인 부분들-시험 봐서 남을 이겨야 학교 들어가고, 기업에서 벌어지는 끊임없이 경쟁관계-에서 얻어진 안락을 향유-실제 이러한 안락이 폭력성에 기반한 것인데도-하면서도, 다른 쪽으로는 경쟁과 폭력의 체제를 벗어나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가지는 시대사적 화두가 평화입니다. 그런데 이 평화는 과거 우리가 역사 속에서 생각했던 평화와는 다른 것이라고 생각해요.
(생략)… 미국이나 우리나라의 중산층은 자기가 안고 있는, 과거 역사에서 경험하지 못한 폭력적인 제도 안에서 평화를 구하고 있는 겁니다. 이 차원에서 보면, 달라이라마와 틱낫한 스님도 현실 속에서 평화를 구했고, 자본주의라는 큰 제도 속에서 피해를 봤던 분들입니다. 이런 부분이 오늘날 평화를 구하는 중산층의 욕구와 맞아떨어졌다는 겁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들은 보수적이에요. 중산층들은 이미 성공을 했기 때문에 평화를 구하기는 하지만 이 사회를 바꾸겠다는 의지는 없기 때문이죠. 틱낫한이나 달라이라마의 책에는 ‘행복’이나 ‘웃음’에 대해 말씀은 하시지만, 왜 우리의 현실이 그것을 필요로 하는지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을 피하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좀 더 근본적인 갈등을 끄집어 내지 않고 제한된 사랑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중산층한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 아닌가요. 이런 점들이 현 제도의 열매를 따 먹으면서도, 폭력을 거부하는 중산층, 즉 현실의 불평등하고 억압적이며 폭력적인 제도를 본질적으로 바꾸려 하지 않는 층에게 의미 있게 수용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보다 본질적으로 사유하지 않는 사람들인 중산층과 이해요구가 맞았다는 거지요.”<격월간 인드라망 4-5호, 2003, 난상토론 불교는 어렵다? 中 여운 김광하의 발언>
여운 김광하 선생님의 주장에 따르면, 달라이 라마나 틱낫한 스님은 체제를 건드리지 않는 ‘행복’과 ‘웃음’의 전도사(필자도 그렇지만 여운 김광하 선생님도 달라이 라마나 틱낫한 스님이 훌륭하신 수행자가 아니라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분명 두 분은 우리시대의 훌륭한 수행자이자 스승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체제를 건드리지 않는 ‘행복’과 ‘웃음’의 전도사라고 표현한 것은 두 분의 훌륭함과 달리 사회적 역할을 분석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일 뿐이다.
여운 선생님의 주장에 동의한다. 두 수행자의 위대함과 훌륭함을 떠나서 두 수행자로 상징되는 ‘참여불교’는 민중불교, 실천불교와 달리 고통의 밭인 체제를 건드리지 않는다. 따라서 보살행과 수행의 통일이라기보다, 수행, 즉 마음의 평화만 강조하는 불교가 아닐까? 아무리 둘러봐도 참여불교에서 참여의 실체를 찾기가 쉽지 않다. 원래 없었던 것인지, 필자가 무지한 것인지 헷갈린다.
오늘 부처님께 묻는다
“부처님, 과연 참여불가 무엇입니까?”
“부처님, 한국적 참여불교는 어떤 가르침에 발을 딛고 서서 실천을 이끌어 내야 합니까?”
<b>고통을 아십니까? 얼마나 힘든지</b>
한국불교는 우리시대의 고통을 어느 정도 경험했을까? 고통을 경험했는지 안 했는지 묻는 이유는, 고통을 경험하지 않고 ‘참여불교’를 말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말에 어느 분은 이렇게 반박을 하실 수도 있을 것 같다.
“똥인지 된장인지 꼭 먹어 봐야 되냐고.”
똥인지 된장인지는 꼭 안 먹어도 된다. 척 보면 아니까. 하지만 고통은 경험해야 한다. 고통은 척 보면 알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니까. 어느 종교라도 같은 시대의 대중들에게 어필할 수 있으려면, 대중들이 껴안고 있는 고통을 경험하고 고통 속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70~80년대, 도시산업선교회가 공단지역에서 노동자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 많은 선교활동을 했다. 노동문제에 관심이 많은 목사 몇몇이 뜻을 모았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일이 아니었다. 기독교는 유럽에서 18세기부터 산업화된 인간이 가지는 여러 가지 소외문제, 노동문제, 계급간의 갈등을 경험했다. 기독교의 언어 속에는 이런 산업사회의 필연적인 고통의 경험들이 담겨져 있다. 경험을 가지고 말하니까, 70~80년대 공단지역 노동자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고 노동자들도 쉽게 이해하며 교회로 갔던 것이다.
카톨릭교회도 마찬가지다. 카톨릭의 바티칸2공회 문헌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 8항 [자선사업]을 보자.
“사랑의 실천은 아무런 의혹도 자아내지 않는 순수한 것이어야 한다. (생략)… 또한 도움을 받는 사람의 자유와 품위를, 마음을 다하여 존경할 것이다. 순순한 지향이나 이기심이나 지배욕으로 흐려질까 조심할 것이다. 먼저 정의의 요구를 충족시켜야 할 것이니, 정의의 입장에서 이미 주어야 할 것을, 사랑의 선물처럼 주어서는 안 된다. 불행은 그 결과뿐 아니라, 그 원인부터 없애야 한다. 도움을 받는 사람들이 점차로 남에게 의존하는 예속에서 해방되어 자립할 수 있도록 질서 있게 도와 줄 것이다.”
카톨릭교회의 실천 아젠다가 거저 나왔을까? 아니다. 로마 카톨릭교회도 이전까지만 해도 개인의 영성 추구에 치중했다.
그러나 남미 신부들이 민중들과 함께 고통을 경험하고 고통을 극복하면서 로마에 압력을 넣어 ‘카톨릭의 바티칸2공회 문헌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 8항 [자선사업]’ 같은 아젠다를 내올 수 있었다.
한국 카톨릭교회의 성장도 현실의 고통을 경험하고 이해했던 교회가 민주화 운동을 이끌어 간 결과일 뿐이다. 우리들에게 존경받는 목사님들이나 신부님들을 보면 선교하지 않았다. 어려운 이웃들과 함께 먹고 살며 정의롭지 못한 현실에 투쟁했을 뿐이다. 삶의 함께하고 고통을 나눴기 때문에 개신교와 카톨릭이 대중들에게 어필할 수 있었다. 이 점을 한국불교는 유심히 봐야 한다. 여전히 한국불교는 현실을 사는 대중들의 고통을 이해 못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 불교는 대중에게 어렵고 말만 앞서는 종교일 수밖에 없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박광서 교수님도 “적당히 옛 경전을 논하고 전통에서 안주하는 데서 나아가 오늘날 세간과 중생이 고통 받고 있는 문제에 관심을 갖는 불교”를 참여불교의 한 축이라고 정의한다. 박 교수님은 참여불교의 두 가지 조건으로 ▲불교적 사유로 세상을 해석하고 해답을 내어놓은 것 ▲말이 아닌 실제 현장에서 중생고를 치유하는 데 나서야 하는 것을 내세웠다.(박광서, <참여불교의 흐름과 21세기 한국불교의 방향>, 2003, 제25차 열린토론마당 ‘참여불교의 현실과 전망’ 토론문, 불교포럼 주최)
하지만 박 교수님의 지적처럼 말이 아닌 실제 현장에서 중생고를 치유해야 하는 ‘현장주의’ 역시 만만한 문제는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한국불교는 우리시대의 고통을 전혀 경험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오랫동안 노숙인 복지 현장에서 일해 왔다. 소수자로서, 약자로서 피해의식만 가득한 노숙인들에게 틱낫한 스님이나 달라이 라마의 말씀이 위안이 됐을까? 대부분의 노숙인들이 책을 읽지 않는 현실에서 두 분의 메시지를 접할 기회라도 있을까? 틱낫한 스님과 달라이 라마는 외국분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쳐도, 한국의 승려들은 노숙인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줄 수 있을까? 메시지를 주기는커녕 그들의 고통이나 이해할까? 이해도 전제되지 않았는데, 무슨 메시지를 줄 수 있을까? 이런 현실에서 노숙인이 이해할 수 있는 참여불교는 무엇일까? 질문만 던질 뿐, 답을 줄 수 없는 게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가 참여불교를 말하려면, 먼저 우리사회의 현실을 말해야 한다. 더 구체적으로 많은 서민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현실을 말해야 한다. 말만 해서는 안 된다. 경험해야 한다. 경험이 전제되지 않은 관념뿐인 고통 속에서는 참여와 불교의 윤리실천이 나올 수 없다.
오늘 한국불교 승단에 묻고 싶다.
“알고나 계십니까? 우리가 겪는 고통이 얼마나 힘든지.”
“밥을 얻어먹고 사는 게 아니라, 밥을 벌어먹고 살기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