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없는 저항

by 이윤주원 posted May 29, 2003

땅을 따뜻하게 덮은 하늘을 당신들이 어떻게 사고 팔겠다는 건가? 우리들에게는 이상하게 들리는 소리다. 우리는 맑은 공기와 반짝이는 물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그걸 팔 수 있겠는가?
-시아스(Sealth) 추장-


1855년 두와미시 부족의 시아스(Sealth) 추장은 프랭클린 피어스(Franklin Pierce) 대통령에게 한 통의 편지를 썼다. 추장의 편지엔 두와미시 부족이 거주하는 땅을 사겠다는 미국 정부의 제안을 거절하고 백인들의 오만한 파괴 행위가 부를 재앙을 경고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추장의 말을 잠시 들어보자.

"백인들이 우리의 생각을 이해하기 힘들 것이란 점을 잘 알고 있다. 백인들은 도둑 같아서 이 땅이나 저 땅이나 특별하지 않고 필요한 것을 빼앗아 갈 대상으로만 여긴다. 대지는 더 이상 백인들의 형제가 아닌 적이 되어 정복의 대상이 되었다… 백인들이 앞으로 깨닫게 될 사실이 하나 있다. 우리의 신과 당신의 신은 같다. 백인들은 아마도 이 땅을 소유할 것이기 때문에 신이 당신들의 편이라 생각하겠지. 그러나 그렇지 않다. 신은 사람들의 몸이다. 신의 사랑은 인디언과 백인에게 공평하고, 이 땅은 신에게도 소중하다. 그래서 땅을 해치면 창조주를 모독하는 것이다… 자신들의 잠자리를 더럽히면 어느 날 자신이 버린 쓰레기에 질식하게 된다…."


신화와 전설, 역사가 없는 앵글로색슨들이 할리우드 서부영화에서 찬양하고 신격화해서 하나의 전설로 굳어진 서부개척시대. 황금을 찾아 대륙을 횡단하면서 버팔로를 멸종시켰고 인디언들의 대지를 유린한 별로 자랑스럽지도 못한 그런 역사. 역사가 짧기 때문에 다양한 대중소비문화로 오염된 땅, 미국은 위대한 추장 시아스의 '저주'대로 쓰레기에 질식하는 땅이 되었다.

땅 속 깊은 곳에서 퍼 올린 석유로 쌓아온 문명국 미국은 아직도 신을 모독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세계 곳곳에 폭탄을 퍼붓고 유전자조작 농산물을 심어대고 과도한 에너지를 소비하며 미국인들만의 불야성을 밝힌다. 밤이 낮같은 불야성의 밑바닥엔 제3세계 민중들의 피와 고통이 깔려있다. 이게 다 그들의 역사가 짧기에, 역사에서 교훈을 배우지 못했기에 우리들이 서로 나눠져야 할 강요된 고통이다. 미국이야 근본도 없는 국가이기 때문에 그러려니 해도 반만년의 역사와 전통을 간직했다는 우리의 모습은 뭐라 설명할꼬.

땅이 죽어간다. 벼가 자라야할 논이 버려진다. 콩이 자라야할 밭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나마 남은 땅엔 뭘 심어도 땅심이 약해 자라 자라지도 못한다. 비료와 농약 없으면 어떻게 농사를 질까. 더구나 WTO 뉴라운드가 예상대로 타결되면 마지막 남은 쌀농사 마저 포기해야 한다.

그런데 우는 아이 뺨을 때려도 유분수지 한반도를 강타한 태풍 루사 덕분에 고향자리에서 죽기를 소원한 어르신들마저 삶의 기반을 잃어버려 도시에 사는 자식들에게 의지해 살아야한단다. 그나마 농촌사회를 지키던 어르신들마저도 생활고 때문에 고향을 떠나신다. 1980년대 초만 하더라도 청장년층이 전체에 절반 이상이었는데 현재엔 전체인구의 1/5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농촌인구가 줄어드는 건 아시다시피 농민의 소득이 형편없어서 그렇다. 농촌은 전보다 더 빈곤에 허덕인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사라진 농촌. 일손이 모자라 버려진 농지. 이래저래 땅이 죽어간다.

그럼 농촌의 땅만 죽어가나. 그렇지 않다. 기거할 방 한 칸이 없어 거리를 떠도는 노숙인이 있는가 하면 금싸라기같이 비싼 땅, 강남에 여러 채의 아파트를 소유한 사람도 부지기수다. 간디 선생의 말처럼 인류가 가진 재화를 나누면 남는데 욕망을 채우려하면 모자란다고. 수십 채의 아파트를 소유한 그들에겐 거리의 노숙인들이 안 보이나 보다. 욕망을 버리고 세상을 똑바로 보고 나눔과 섬김의 삶을 살라고 아무리 도덕적인 말을 해도 재물에 눈먼 그들에겐 소귀에 경읽기 같다.

욕망을 못 버리고 살면 지만 손해지. 그렇게 그들은 무시한 채 살고 싶어도 인드라망이라 그 그물을 벗어날 수 없다. 그들이 '돈'을 가지고 부동산 시장을 휘저으면 우리 같은 서민들은 절망과 냉소 속에 빠지고 만다. 나 혼자 도인처럼 산다는 게 얼마나 거짓된 위선인지 쉽게 알 수 있다. 그들과 나는 그렇게 인드라망이란 그물 속에서 욕망의 포로가 된 채 서로가 서로에게 고통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우리는 서로 공범이 되어 땅을 죽이고 있다. 돈의 노예가 된 가진 사람들은 개발을 외치면서 투기할 땅만 찾아다니고. 돈에 노예가 되고 싶은데 한푼도 없는 서민들은 떡고물이라도 얻어먹을 게 없나하고 굶주린 개 쓰레기더미 냄새맡듯 여기저기서 킁킁. 가진 놈, 못 가진 놈 가려서 욕할 게 못된다. 가졌던 못 가졌던 항상 부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 찬 우리들의 자화상이기 때문에. 문제는 가진 놈 못 가진 놈 가릴 것 없이 들쑤시고 다니는 바람에 나무가 잘리고, 산이 파헤쳐지고, 물이 썩고, 땅이 죽는다. 당연하게도 땅이 죽으니 땅위에 사는 사람도 죽더라. 작년에 불어닥친 태풍 루사는 천재(天災)였지만 난개발이 불러온 처참한 인재(人災)가 아니었던가.

땅을 살려야 한다면 어떻게 살릴 수 있을까? 대지를 유린하고 황폐하게 만드는 사람들을 처벌하면 될까. 대체로 가진 사람들이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함부로 나대니 그들만 처벌하면 될까.

문제는 욕망이다. 인류 이상이자 최초의 실험이었던 사회주의도 '인간의 욕망' 문제를 간과함으로써 실패하지 않았던가. 우리에겐 욕망을 통제할 수 있는 성찰적 시스템이 필요하다. 그건 가진 자와 자본주의 제도에 분노어린 저항으로서는 해결되진 않을 것 같다. 욕망을 부추기는 사회제도에 반항하고 공격하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

하지만 그 제도를 만든 사람을 향해 저항하거나 공격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저항하고 공격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저항의 밑뿌리에는 분노가 바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분노없는 저항'이 필요하다. 분노없는 저항은 사회제도에 저항하고 공격하더라도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분노의 칼을 들이대진 않기 때문이다.

땅을 살리기 위해서는 욕망을 향해 '분노없는 저항'을 시작해야 한다. 욕망은 역사 속에서 고찰해보면 그 실체를 잘 알 수 있다. 부처님도 욕망의 실체를 역사 속에서 살피지 않았나. 그렇기에 세상을 바꾸려하지 말고 나 자신을 바꿔야 한다고 했다. 분노에 찬 '나'는 결코 욕망을 이기지 못한다. 욕망을 극복하지 못한다 함은 기존의 평등하지 못한 사회제도를 바꿔내지 못한다는 뜻이다. '화'를 버리고 '평화'를 선택해야 한다. 분노없는 저항은 사회제도를 바꾸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분노와 폭력, 미움, 질투 등의 감정을 최대한 정화시켜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