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의 길, 평화의 길

by 이윤주원 posted Jun 17, 2003
오태양, 김도형, 나동혁…. 이들은 누구인가? 이들은 사상, 종교, 양심에 따라 병역의 의무를 저버린(?) 젊은 벗들이다. 젊은 벗들은 양심의 소리를 외면한 채 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젊은 벗들은 병역을 거부하고 고통스런 평화의 길을 택했다.

젊은 벗들의 소신은 뚜렷하다.
“전쟁은 물론 인간을 살생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병역제도는 옳지 않다.”

이들의 소신과 달리, 세상은 양심적 병역거부가 국민된 도리의 ‘회피’이자 의무로부터 ‘도주’일뿐이라고 한다. 세상은 전쟁을 억제하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강한 군사력의 확보가 우선이라고 한다. 2003년 4월 세계의 메스미디어를 도배한 이라크 전쟁의 결과는 이를 더욱 부채질했다. 강한 군사력이 배제된 평화는 환상이라고들 한다. 한국의 애국주의 세력에게 양심적 병역거부는 나약한 젊은이들의 비애국적이며 비평화적인 환상일 뿐이다.

묻겠다. 과연 평화의 전제인 전쟁 억제력을 위한 병역제도는 정당한 것일까? 이런 물음을 놓고 두 갈래의 답변이 우리사회에서 맞붙었다.

한 갈래는 남북이 대립하고 있는 현실에서 국가의 안보와 개인의 자유를 지켜 낼 징병제는 정당하며, 따라서 병역의 의무는 성스러운 행동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한 갈래는 군 복무는 국가의 의한 합법화된 폭력이기 때문에 병역을 거부할 권리를 주장한다. 이들은 현재 비전투 분야에서 사회봉사를 할 수 있는 대체복무제의 도입을 요구하고 있다.

두 갈래의 의견이 맞붙어 갈등이 깊어지는 현실을 돌아보면서 과연 부처님께서는 이런 물음에 어떠한 태도를 취하셨을까 궁금해진다. 『우리말 쌍윳다니까야』7권 전사의 경(經)에 따르면 부처님 당시에도 이런 문제는 꽤 비중 있던 사회적 화두였음을 알 수 있다. 경(經)은 보면 ‘적을 죽이는 성스러운 전쟁은 정당한 것일까’라는 주제로 부처님과 전사마을 촌장의 대화가 나온다.

전사마을 촌장은 부처님께 “전사는 전쟁터에서 전력을 다해서 싸워야 하는데 전력을 다해 싸우면서 적들에 의해 살해되어 죽임을 당하면 그는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환희라는 하늘나라의 무리에 태어”날 수 있느냐고 수차례 묻는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촌장이여, 그만두십시오. 내게 그런 질문하지 마십시오.”라며 대답을 계속 피하셨다. 부처님께서는 촌장의 견해가 그릇된 견해라고 하는 순간, 그것이 진리인줄 알고 살았던 촌장은 물론 전사마을의 전사들이 받아야 할 마음의 고통이 미루어 짐작했기 때문에 대답을 피하셨다.

부처님의 계속된 답변의 회피에도 불구하고 촌장은 끈질기게 세존에 답을 요청 드렸다. 부처님도 어쩔 수 없었던지 이렇게 설명하셨다.

“촌장이여, 전사가 전쟁터에서 전력을 다해 싸우면 그의 마음은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을 구타하거나 결박하거나 박멸하거나 없애버려야 한다’라고 저열하고 나쁜 곳으로 향하고 사악한 곳으로 향합니다. 그 전력을 다해 싸우는 자를 적들이 살해하여 죽인다면 그는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환희라는 지옥이 있는데 그곳에 태어납니다. 그런데 만약 이와 같이 ‘전사는 전쟁터에서 전력을 다해서 싸워야 하는데 전력을 다해서 싸우면서 적들에 의해 살해되어 죽임을 당하면 그는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환희라는 하늘사람의 무리에 태어난다.’라는 견해를 지녔다면 그것은 잘못된 견해일 것입니다. 촌장이여, 잘못된 견해를 지닌 사람에게는 지옥이나 축생이나 두 가지 길 가운데 하나의 길이 있다고 나는 말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살생이 난무하는 혼란스런 전쟁터에 서면 그 마음이 저열하고 나쁜 곳으로 향하고 사악한 곳으로 향한다고 이르셨다. 피비린내 나는 싸움터에서 싸우고 다투는 이들의 마음속엔 공포 같은 두려움이 일어난다. 이 두려움은 생존의 욕망으로 드러나 다른 생명을 분노, 폭력 더 나아가 살생으로 대하게 된다. 싸우고 다투는 이들이 두렵기 때문에 살생의 도구를 꽉 쥔 채 놓지 못한다. 이런 어리석음을 보면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싸우고 다투는 자들을 보라. 저들은 몽둥이를 들고 있기 때문에 두려움이 일어나고 있다. 내가 얼마나 그것을 미워하여 거기에서 떠났는가에 대해 말하리라.”

전쟁터에 서 있다는 것만으로도 분노와 성냄, 폭력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전사가 전쟁터에서 살생을 할 때 “이 사람들을 구타하거나 결박하거나 절단하거나 박멸하거나 없애버려야 한다”라고 마음 쓰듯이….

세존께서는 수행자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전쟁터 근처엔 얼씬도 말아야 하며, 살생의 도구를 지닌 자들에게는 설법도 하지 말라고 했다. 더불어 눈에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멀리 사는 것이든 가까이 사는 것이든, 이미 태어난 것이든 앞으로 태어나려고 하는 것이든 모든 살아 있는 생명들의 행복을 빌어야 한다고 하셨다.

세존께서는 평생 동안 폭력과 폭력적인 태도를 버려야 할 ‘악마’로 생각하셨다. 더구나 살생은 물론 살생 도구의 소지하는 것조차 옳지 않다고 하셨다.

그런데 우리사회는 평화의 길을 놔두고 폭력의 길을 강요하는 사회 분위기가 크다. 그 대표적인 것이 병역의 의무라 일컬어지는 징병제이다. 우리사회가 성냄과 분노, 폭력이 사라진 사회가 아닌 이상 병역제도를 일거에 없앨 수야 없다고 본다. 그렇더라도 사상, 종교, 양심에 따라 병역을 거부하고 대체복무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안타깝다. 폭력을 거부하는 양심과 그 양심의 선택이 국가주의에 의해 애써 외면당하고 있어서….

전쟁을 미워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젊은 벗들에게 국가주의자들은 이렇게 묻는다.
“너의 누이와 부인이 흉악한 범죄자 앞에서 잔혹한 범죄의 대상이 되었다면 그래도 너는 비폭력의 태도를 취할 수 있는가?”

답답하다. 국가에 의한 폭력과 그 폭력의 극단적인 형태인 전쟁을 반대하는 것과 개인의 삶에서 발생 가능한 방어적 폭력을 일치시키는 그들의 모습이. 국가와 ‘나’는 항상 하나였기에, 국가에 의한 폭력과 개인의 삶 속에서 발생 가능한 방어적 폭력을 구분할 지성이 활동할 자리가 없다.

물론, 애국자들은 말할 것이다. 답답하다고 국민국가 성립 뒤, 계약 당사자인 국가와 국민을 분리시킬 수 없다고. 때문에 국가 사이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곧 국민의 몫이자 고통이라고. 맡다. 국가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면 고통은 국민들의 몫이다. 그렇다고 국가에 의해 합법적으로 자행하는 폭력과 폭력적인 태도를 묵인하고 인정할 수는 없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들도 현실의 한계를 인정하기 때문에 병역제도 자체를 없애자고 하지는 않는다. 생물의 종다양성이 생태계를 건강하게 하듯이, 사회의 다양성이 사회제도와 구성원을 건강하게 한다고 젊은 벗들은 믿는다. 젊은 벗들은 우리사회의 이성과 지성에게 간곡하게 요청한다. 양심적 병역거부는 병역을 회피하고자 펼친 수단이 아니라고. 총이 아닌 양심으로, 군사적 대치 현장이 아닌 사회봉사의 현장에서 병역의 의무를 다 할 것이라고.

젊은 벗들의 간곡한 요청을 싸잡아서 비난하기보다, 차분히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자.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무시한 채 외면한다면, 그 순간 우리는 폭력의 길을 걷게 된다. 우리사회가 계속 양심의 소리에 정직하고자하는 이들이 거부한다면, 국가와 제도의 폭력을 성찰할 길이 없어진다. 그렇게 된다면, 개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분노와 성냄 그리고 폭력을 찬양하는 사회로 이끌어 간다.

사실, 한국의 청년들은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총을 들고 적을 죽이는 전쟁은 정당하다고 배운다. 그들은 군사문화가 강요하는 권위주의와 여성에 대한 도구적 태도를 습득한 채 사회로 쏟아져 나오고 있기도 하다. 덕분에 여성은 섹스와 출산이 도구였고, 조직문화는 명령계통의 중시하는 군사문화에 오염되었다. 어떤 조직이고 리더와 의사소통에 심각한 문제점을 호소한다. 이렇듯 우린 군사독재의 잔재인 권위주의를 극복하지 못했다. 이 길은 결코 평화의 길이 아니다. 죽음의 길, 폭력의 길일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