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주의를 넘어서

by 이윤주원 posted Jun 27, 2003

1945년 8월 15일 이후, 한국사회의 리더십은 권위주의와 반공주의였다. 한국인들은 권위주의와 반공주의라는 유령에 순응하여 지난 50여년은 숨죽인 채 살아왔다. 시민들은 참았다. 아니, 참지 않으면 안 됐다. 이 ‘주의’에 대항한다는 것은 계급사회 질서와 정면충돌을 의미하기 때문에 쉽게 선택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압축․고도성장 시대에서 생존을 위해서라도 이 ‘주의’를 민중들은 선택했던 것이다. 일제로부터 해방 뒤, 50여년동안 이 ‘주의’가 철저하게 한반도를 지배했다.

이 두 ‘주의’는 군사독재정권의 철권통치와 맞물려 톱니바퀴처럼 우리사회를 통치했다. 군사독재정권이 시민들의 힘에 의해 물러가고 민간정부가 들어섰어도 여전히 우리사회의 통치 리더십은 ‘권위주의’였다. 2000년 6. 15 남북정상회담 이후, 반공주의는 기가 한풀 꺾여 ‘색깔론’이 힘을 잃어버렸지만, 권위주의는 여전히 힘을 가지고 있다.

아직도 조직문화의 뿌리는 권위주의다. 권위주의에 의지하는 우리사회의 조직문화는 지시와 명령이라는 일방주의를 강요한 문화이고, 그건 여전히 변함이 없다. 아마 징병제가 계속 유지되는 한, 군대의 지시․명령․복종․순응 등의 핵심 아이콘이 변하지 않는 한, 권위주의는 우리사회를 움직이는 리더십의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군대는 이 ‘주의’를 재생산하고 배출하는 공장이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이 ‘주의’는 조직은 움직이고 통제하는데 아주 효율적이다. 오너의 지시 하나면 뭐든지 진행되는 일사불란함이 있다. 도무지 약점이라고는 안 보인다. 오너는 명령을 내리고 직원들은 오너의 지시대로만 움직이면 된다. 더구나 출세가 하고 싶으면 다른 눈치 볼 것 없이 오너에게만 딸랑거리면 된다.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 멈추지 마라. 용비어천가를….

이 ‘주의’ 아래서 오너의 지시와 명령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지성을 상실한다. 따라서 도덕적이지 못하고 반사회적인 지시와 명령에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일을 한다. 그리고 나중에 일이 커져서 잘잘못을 물으면 이렇게 대답한다. “시키는대로 했는데, 그게 무슨 큰 잘못이냐?” 시키는대로 했기 때문에 잘못이 없다고? 잘못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묻고 싶다. “오너는 머리고 당신은 손발인가? 당신의 지성은 도덕적이지 못하고 반사회적인 지시와 명령조차 구분 못하게 되었는가?”  

지시와 복종, 우리들의 아버지들이 늘 보여줬던 모습이었다. 아니, 우리들도 군대와 사회생활을 하면서 몸에 배인 모습이기에 남 얘기 같지만은 않다. 안타깝다. 이 ‘주의’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을까? 죽은 자들의 전통이 산 자들의 앞길을 가로막는다.

이 ‘주의’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개인의 창조성과 주인의식이 발휘할 수 없다는 약점을 가진다. 더구나 압축․고도 성장기에는 이 ‘주의’가 먹혔을지도 모르지만, 시장의 부족과 저성장 시대로 들어선 21세기 경쟁사회에서 더 이상 경쟁력을 가질 수가 없다. 우리는 살기 위해서 이 ‘주의’를 받아들였듯이, 우리는 살기 위해서 이 ‘주의’를 버려야만 한다.

놀라운 것은 이 ‘주의’가 정부와 기업뿐만 아니라, 시민단체에도 만연해 있다는 사실이다.


“시민단체에 이직율이 높은 것은 경제적인 문제보다 비민주적인 내부구조에 있다고 생각해 왔다. 어찌된 것이 오래전부터 운동을 해 왔던 분들이 실.국장, 사무총(처)장으로 있는데도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아 답답함을 느껴야만 했다.…(생략) 단체에서 실질적인 결정권한을 가지고 있는 주요 실.국장들이 모여 단체의 운동방향 등을 논의하면서 함께 운동한다는 후배활동가들의 의견수렴과정조차 거치지 않고 그런 과정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면 별 문제될 것이 없다는 식의 반응은 화냄을 넘어 회의적이기까지 하다.

시민단체내의 수평적인 의사소통은 현재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사무총(처)장과 주요 실.국장들에 의해 대부분 중요사항이 결정되고 활동가들에게는 상당부분 일방적으로 통보되어진다. 이에 항의하는 것조차 어려운 단체들이 존재하고 윗분들은 이런 의사소통 문제에 동의하면서도 스스로 이런 문제를 개성하기 위한 노력은 보여주지 않고 있다.” <박신용철, ‘활동가는 신념만 먹고산다?’, 제5회 메타사회운동토론회 ‘시민운동의 겉과 속을 파헤친다’ 중 발제문 >

전 경실련 간사의 고백은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충격적이라고 했지만 사실 시민운동에 발을 담근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던 사실이 아닌가. 시민의 참여는 사라지고 대표 1인 또는 몇몇이 시민단체를 좌지우지하는 것은 더 이상 비밀이 못된다.

경실련, YMCA 등 몇몇 시민단체에서 보여준 내부갈등은, 시민단체가 얼마나 권위주의에 찌들어 있는지를 정확히 보여주는 바로미터다. 이런 비민주적 권위주의가 어찌 몇몇 시민단체만의 문제겠는가? 아무리 도덕적이고 투명한 시민단체일지라도 현실과 타협하는 순간 오염되고 감염될 수 있다. 슬프다. 사회정의와 개혁, 평화를 가치관으로 활동하는 시민단체가 겉모습과 달리 조직 내 민주주의의 보장이 없다는 것은 우리시대의 비극이자 모순이다.

권위주의는 이렇듯 우리사회 모든 조직들의 공통분모였다. 그런 권위주의가 한 귀퉁이부터 무너지고 있다. 이는 지난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 시민들은 그 동안 우리사회를 지배해온 권위주의 대신에 새로운 리더십인 대화와 참여를 선택했다.

변화는 거대한 역사적 흐름이다. 한 개인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흐름이다. 변화를 막는 것은 역사의 죄인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토록 견고해보이던 ‘권위주의’도 구멍이 나 물줄기가 새기 시작하더니, 곳곳에서 무너져 가고 있지 않은가?

1989년 창립한 경실련 이래 발전해온 시민운동은 이제 새로운 전기를 찾아야 할 때가 왔다. 같은 과제를 불교시민운동도 껴않고 있다. 불교시민운동은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언어로 불자들에게 다가갈 큰 과제가 앞길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럼 권위주의라는 허울을 벗어던진 불교시민운동이 나가야 할 길을 제시해보도록 하겠다.

첫째, 부처님의 깨달음과 자비를 대사회적으로 실천하는 불교시민운동으로써 자리매김을 해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활동가들이 가장 불교적인 운동방법으로 우리사회에 기여하는 불교시민운동의 전형을 만들어야 한다.

둘째, 불교시민운동은 빠른 성장을 해 왔다. 특히, 지리산 살리기 운동과 새만금 삼보일배를 보듯이 환경운동 분야는 한국의 환경운동을 리드할 정도의 수준까지 도달했다. 그러나 전통적인 운동 분야인 도시빈민과 사회적 약자들을 지원하고 옹호하는 활동은 전무하다고 할 수 있다.

한국불교는 가톨릭이나 개신교와 달리 도시빈민과 소수자들의 인권에 관심이 덜하다. 특히, 이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덜어 줄 수 있는 사회적 실천을 찾아보기 힘들다. 불교시민운동은 앞으로 우리사회에서 소외된 도시빈민과 소수자(외국인 이주노동자, 장애우, 노숙인 등)들의 인권인 사회적 권리를 옹호하고 지원하는 운동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셋째, 백화점식으로 시민운동은 지양해야 한다. 그때마다 발생하는 사회적 이슈에 따라 사업을 벌이는 백화점식 시민운동은 시민 없는 시민운동으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한다.

넷째, 시민운동은 권위주의와 관료주의에 오염되어 가고 있다. 권위주의와 관료주의에 의해 오염되어 가는 시민운동은 ‘시민운동을 시민 없는 시민운동으로 만드는’ 하나의 원인이다. 따라서 혹시라도 침투할지 모르는 권위주의와 관료주의를 불교시민운동가들은 철저히 배격해야 한다. 우리들은 참여와 대화의 리더십으로 불자와 시민 곁으로 다가가야 한다.

다섯째, 의사결정과 재정을 후원자들에게 계속해서 투명하게 공개해 나가는 시민운동의 원칙을 거듭 강조해야 한다. 불교시민운동 단체는 불자와 시민들의 후원금으로 운영되는 사회적 기관이자 공적 기관이다. 결코 소수의 운동가가 좌지우지하는 단체가 아니다. 따라서 사회적 기관의 위상에 맞게 의사결정과 재정의 투명성을 밝혀 도덕성을 지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