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일 느지막한 오후였다. 봉천동 <나눔의 집>에 다녀온 아침을여는집 상담실장이 “대단하다”면서 말문을 열었다.
그 대단한 얘기를 들어보니, “송경용 신부가 주임 신부로 있는 성공회 봉천동 <나눔의 집>에서 5층짜리 건물을 올렸는데, 규모와 시설이 대단해 부럽다”는 얘기였다. 듣다보니 꽤나 좋은 시설을 갖춘 것 건물인 듯싶었다.
그 건물 이름이 ‘함께사는세상’이란다. “어쩌면 경불련 소식지와 이름이 똑같을까!” 최윤순 실장은 탄성까지 섞어가며 소감을 계속 말하였다. 최실장에 따르면 “1층은 <장애인센터 함께사는세상>, 2층은 <청소년쉼터 우리세상>, 3~4층은 <위기가족공동체 살림터>, 5층은 <청소년가정공동체 행복한 우리집>이 입주하기”로 되어 있단다.
확인삼아 봉천동 <나눔의 집>에서 발간하는 소식지를 넘겨보니 사실이었다. 더구나 봉천동 <나눔의 집>은 <관악자활후원기관>, <푸드뱅크>, <어린이집>, <관악청소년자활지원관> 등을 더 운영하고 있었다.
영역과 분야, 규모로 보면 경불련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는 규모였다. 한마디로 사회복지 재벌(?)이라고 할까? 전형적인 문어발식 확장이 빚어낸…. 나쁜 뜻으로 말한 건 아니다. 부러운 마음이 섞여있어 질투하는 게다.
어찌됐건 송신부의 경영능력과 로비능력이 아는 사람은 다 인정한다. “대단한 사람이라”고 또한 “국가로부터 사회복지에 대해 더 많은 지원을 얻어내는데 큰 기여도 했지만 욕도 많이 얻어먹는 분”이기도 하다고 모 사회복지재단의 실무자가 귀띔해준 기억이 떠오른다.
문제의 건물 ‘함께사는세상’에 입주할 위기가족공동체 살림터는 본디 노숙인 쉼터로 노숙가족이 입소하던 쉼터이다. 그 살림터가 3층과 4층을 방이 16개나 된다고 하니, 가만히 듣고 있던 나도 조금은 아니, 많이 부러웠다. 그러면서 순간적으로 욕심이 나기 시작했다.
“우리도 좀 고생하여 건물을 올려볼까?”
이런 생각이 들자마자, 두려움과 부끄러움이 내게 찾아들었다. 건물을 올려보자고 생각한 내 마음 속에 숨어있는 의도를 성찰했기 때문이다.
“홈리스들에게 좀더 쾌적한 주거공간을 제공하려는 좋은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송신부가 가진 명예, 소유, 안정을 갖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렇게 묻자마자 부끄럽기 시작했다.
우리사회에서 사회적 약자의 권리와 인권을 옹호하는 종교․시민단체를 보면, 큰 규모의 단체도 있고, 작은 규모의 단체도 있다.
문제는 작은 규모의 시민단체에서 사회적 약자들과 공동체를 일구던 사람들이 박원순 변호사의 <아름다운 재단>이나 송신부의 <나눔의 집>처럼 규모가 큰 단체를 보게 되면, 움츠려들게 된다는 것에 있다.
왜 움츠려들까? 그 이유를 꼼꼼히 따져보면, 우선 후원자가 큰 규모의 단체에 몰리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아침을여는집> 같은 작은 규모의 시설에서는 후원을 받기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렵다. 더구나 홈리스들은 사회적 편견까지 덧칠해져 더욱 힘들다. 세상 사람들은 몸도 멀쩡하고 노동능력도 있어 보이는(말 그대로 있어 보일뿐, 실상과는 거리가 먼) 홈리스들에게 선뜻 후원의 손길을 내밀지 않는다. 이런 현실인데, 요즘은 경제도 어려운 후원이 딱 끊겼다고 봐도 무방하다.
아름다운 재단은 어떠한가. 다음커뮤니케이션, KTF, 태평양 같은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큰 기업에서 너도나도 아름다운 재단의 1% 나눔 운동에 동참하질 않는가. 태평양에 다니는 후배는 “사장이 나눔에 관심이 많아 박변호사를 초청해 직원들에게 강의도 듣게 하고, 박변호사의 책도 사장이 구입해 직원들에게 모두 나눠줬”다고 얘기해 주었다. 그 태평양은 아름다운 재단에 결국 수십억을 선뜻 기부하지 않았던가.
이러니 복지시설과 기관의 규모를 왜 안 키우고 싶어 할까?
“노숙자 시설 <자유의 집> 같은 수백명이 넘는 시설은 후원이 없더라도 정부지원금만으로도 운영하는데 큰 부족은 없을 걸, 우리 쉼터만 하더라도 어느 정도 숨 돌릴 여유가 있는 걸 보면 말이지.”
입소정원이 백명인 노숙자 쉼터의 총무가 나에게 한 말이다. 그런데 왜 후원은 살림이 빠듯한 작은 규모의 단체나 시설을 외면하고 그리 큰 단체나 시설로 몰리는지. 노숙자 쉼터도 후원을 받는 질과 양을 등수로 매긴다면, 아마 인원수가 많은 쉼터 순으로 등수가 매겨질 것이다.
또한 <아침을여는집> 같은 곳은 언론에서 먼저 관심을 갖질 않는다. 왜? 규모가 작으니까. 언론은 규모가 큰 단체나 시설 위주로 기사를 써댄다. <아름다운 재단>을 보라. 이런 저런 언로에서 도배를 해주지 않는가. 이러니, 후원이 어디로 몰릴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시민운동이나, 사회복지를 하는 사람들은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들은 과연 ‘작은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할까? 작은 것이 아름답다면 지역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과 공동체를 일궈가는 작은 모임들과 사람들을 후원하고 지원해야하지 않을까?
안타깝지만 그런 아름다운 상상은 현실에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박원순 변호사는 훌륭한 인격을 갖춘 분이시다. 그 분이 하시는 일도 우리사회에서는 꼭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 왜, 재활용 가게인 <아름다운 가게>를 재단에서 직접 운영할까? 지역의 단체들과 연계하여 물건의 공급과 수급의 인프라는 <아름다운 재단>이 하고, <아름다운 가게>는 지역단체가 직접 운영하여 지역운동을 성장 발전시킬 수는 과연 없었을까? 무엇이 그것을 가로막을까?
<아름다운 재단> 관계자여, 용서해주오. 재단이 미워서 박변호사가 미워서 언급하는 게 아니니 이해해주오. 봉천동 <나눔의 집> 관계자들께서 마찬가지로 용서를 비오. 내 마음 속에 일어나 명예와 환대, 이득의 유혹에 대해서 쓰다보니 여러분들께 누가되는 이야기도 있구려. 부디 용서해주오.
애기가 좀 다른 데로 샜다. 얼른 돌아가자.
세상은 <아름다운 재단>이나 봉천동 <나눔의 집>이 운영하는 기관들처럼 규모도 크고 잘 포장된 단체나 운동을 선호하고 후원금도 그 쪽으로 몰린다.
그렇다고 그 길을 따라갈 것인가? 그 길을 따라가면 문제는 과연 없을까?
앞서도 말했지만 나도 명예와 소유, 안정을 추구하는 마음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가능하다면, 명예와 소유, 안정을 바라는 마음을 소멸시키고 싶다. 그러나 쉽지 않은 길임을 잘 알기에 노력할 뿐이지, 소멸시켰다고 거짓 증언을 못하겠다.
돌이켜 생각해 봤다. 송신부와 박변호사가 제시한 길(그 분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 분들이 이뤄놓은 결과가 그분들이 제시한 길이기에)에는 과연 함정이 없을까 하고 말이다.
함정은 있다. 먼저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원칙과 모순이 되는 삶이 된다. 슈마허가 말 안했더라도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것은 나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그렇지만 두 분이 제시한 길을 걷게 된다면, 나는 규모의 사회복지, 규모의 시민운동이란 함정에서 빠져 나오기가 힘들 것 같다.
또 다른 함정은 명예, 소유의 집착이 더 커진다는 것이다. 이 순간 부처님의 가르침이 절실하게 떠오른다.
“수행승들이여, 번뇌를 소멸한 거룩한 수행승에게도 이득과 환대와 명성은 장애라고 나는 말한다.”
번뇌를 소멸한 거룩한 수행승에게도 이득과 환대와 명성은 장애일진대, 하물며 나 같은 보통사람은 어련할까. 이 말씀을 떠올리고 보니, 내가 왜 봉천동 <나눔의 집>에서 건립한 건물 얘기를 듣고 흔들렸는지 이해가 같다.
세존께서는 계속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이득과 환대와 명성은 두렵고 자극적이고 거친 것으로 위없는 평화를 얻는데 장애가 된다.”
“아난다여, 그러므로 그대는 ‘나는 이미 생겨난 이득과 환대와 명성을 버릴 것이며, 아직 생겨나지 않은 이득과 명성과 환대에 집착하지 않고 지낼 것이다’라고 배워야 한다.”
명예는 함정이다. 환대는 함정이다. 이득은 함정이다. 꽃동네를 생각해본다. 오웅진 신부, 그 분을 내 비록 겪어보지 않아서 어떻다고 평가하기가 힘들지만 그동안 일궈놓은 <꽃동네>를 보면 꽤 훌륭하신 분 같다.
그런 분께서 명예와 환대, 이득의 함정에 빠져 검찰에 소환당하는 모습을 보니 세존의 말씀은 나에게 놀라운 성찰로 다가온다.
내 성찰이란 것도 모자란 것이기에, 내가 명예와 환대, 이득의 유혹에 무심할 수 없는 사람이란 것을 성찰했다는 것만으로도 기쁘다. 계속해서 노력한다면, 진정으로 유혹의 손길로부터도 자유롭게 되지 않을까?
이렇게 말하지만 명예와 환대, 이득의 함정에 문득 문득 빠져드는 내 자신을 보게 된다. 내가 못나서 다행이지. 조금이라도 잘났다면 난 유혹의 손길에 쉽게 넘어갔을 것 같다. 정말 내가 모자라고 못나서 다행이다.
난 송경영 신부와 박원순 변호사의 성공(?)을 보면서 그 길에도 함정이 있다고 성찰했지만, 오늘도 흔들리는 마음 어쩔 수가 없다. 오마이뉴스에서 공동번역성서를 가슴에 품고 검찰의 소환에 응하는 오신부의 사진을 보면서도 쉽게 그 성공(?)의 유혹을 떨쳐버릴 수 없다.
벗이여, 흔들리는 날 꾸짖게. 단호하고 매서운 목소리로….
그 대단한 얘기를 들어보니, “송경용 신부가 주임 신부로 있는 성공회 봉천동 <나눔의 집>에서 5층짜리 건물을 올렸는데, 규모와 시설이 대단해 부럽다”는 얘기였다. 듣다보니 꽤나 좋은 시설을 갖춘 것 건물인 듯싶었다.
그 건물 이름이 ‘함께사는세상’이란다. “어쩌면 경불련 소식지와 이름이 똑같을까!” 최윤순 실장은 탄성까지 섞어가며 소감을 계속 말하였다. 최실장에 따르면 “1층은 <장애인센터 함께사는세상>, 2층은 <청소년쉼터 우리세상>, 3~4층은 <위기가족공동체 살림터>, 5층은 <청소년가정공동체 행복한 우리집>이 입주하기”로 되어 있단다.
확인삼아 봉천동 <나눔의 집>에서 발간하는 소식지를 넘겨보니 사실이었다. 더구나 봉천동 <나눔의 집>은 <관악자활후원기관>, <푸드뱅크>, <어린이집>, <관악청소년자활지원관> 등을 더 운영하고 있었다.
영역과 분야, 규모로 보면 경불련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는 규모였다. 한마디로 사회복지 재벌(?)이라고 할까? 전형적인 문어발식 확장이 빚어낸…. 나쁜 뜻으로 말한 건 아니다. 부러운 마음이 섞여있어 질투하는 게다.
어찌됐건 송신부의 경영능력과 로비능력이 아는 사람은 다 인정한다. “대단한 사람이라”고 또한 “국가로부터 사회복지에 대해 더 많은 지원을 얻어내는데 큰 기여도 했지만 욕도 많이 얻어먹는 분”이기도 하다고 모 사회복지재단의 실무자가 귀띔해준 기억이 떠오른다.
문제의 건물 ‘함께사는세상’에 입주할 위기가족공동체 살림터는 본디 노숙인 쉼터로 노숙가족이 입소하던 쉼터이다. 그 살림터가 3층과 4층을 방이 16개나 된다고 하니, 가만히 듣고 있던 나도 조금은 아니, 많이 부러웠다. 그러면서 순간적으로 욕심이 나기 시작했다.
“우리도 좀 고생하여 건물을 올려볼까?”
이런 생각이 들자마자, 두려움과 부끄러움이 내게 찾아들었다. 건물을 올려보자고 생각한 내 마음 속에 숨어있는 의도를 성찰했기 때문이다.
“홈리스들에게 좀더 쾌적한 주거공간을 제공하려는 좋은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송신부가 가진 명예, 소유, 안정을 갖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렇게 묻자마자 부끄럽기 시작했다.
우리사회에서 사회적 약자의 권리와 인권을 옹호하는 종교․시민단체를 보면, 큰 규모의 단체도 있고, 작은 규모의 단체도 있다.
문제는 작은 규모의 시민단체에서 사회적 약자들과 공동체를 일구던 사람들이 박원순 변호사의 <아름다운 재단>이나 송신부의 <나눔의 집>처럼 규모가 큰 단체를 보게 되면, 움츠려들게 된다는 것에 있다.
왜 움츠려들까? 그 이유를 꼼꼼히 따져보면, 우선 후원자가 큰 규모의 단체에 몰리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아침을여는집> 같은 작은 규모의 시설에서는 후원을 받기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렵다. 더구나 홈리스들은 사회적 편견까지 덧칠해져 더욱 힘들다. 세상 사람들은 몸도 멀쩡하고 노동능력도 있어 보이는(말 그대로 있어 보일뿐, 실상과는 거리가 먼) 홈리스들에게 선뜻 후원의 손길을 내밀지 않는다. 이런 현실인데, 요즘은 경제도 어려운 후원이 딱 끊겼다고 봐도 무방하다.
아름다운 재단은 어떠한가. 다음커뮤니케이션, KTF, 태평양 같은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큰 기업에서 너도나도 아름다운 재단의 1% 나눔 운동에 동참하질 않는가. 태평양에 다니는 후배는 “사장이 나눔에 관심이 많아 박변호사를 초청해 직원들에게 강의도 듣게 하고, 박변호사의 책도 사장이 구입해 직원들에게 모두 나눠줬”다고 얘기해 주었다. 그 태평양은 아름다운 재단에 결국 수십억을 선뜻 기부하지 않았던가.
이러니 복지시설과 기관의 규모를 왜 안 키우고 싶어 할까?
“노숙자 시설 <자유의 집> 같은 수백명이 넘는 시설은 후원이 없더라도 정부지원금만으로도 운영하는데 큰 부족은 없을 걸, 우리 쉼터만 하더라도 어느 정도 숨 돌릴 여유가 있는 걸 보면 말이지.”
입소정원이 백명인 노숙자 쉼터의 총무가 나에게 한 말이다. 그런데 왜 후원은 살림이 빠듯한 작은 규모의 단체나 시설을 외면하고 그리 큰 단체나 시설로 몰리는지. 노숙자 쉼터도 후원을 받는 질과 양을 등수로 매긴다면, 아마 인원수가 많은 쉼터 순으로 등수가 매겨질 것이다.
또한 <아침을여는집> 같은 곳은 언론에서 먼저 관심을 갖질 않는다. 왜? 규모가 작으니까. 언론은 규모가 큰 단체나 시설 위주로 기사를 써댄다. <아름다운 재단>을 보라. 이런 저런 언로에서 도배를 해주지 않는가. 이러니, 후원이 어디로 몰릴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시민운동이나, 사회복지를 하는 사람들은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들은 과연 ‘작은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할까? 작은 것이 아름답다면 지역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과 공동체를 일궈가는 작은 모임들과 사람들을 후원하고 지원해야하지 않을까?
안타깝지만 그런 아름다운 상상은 현실에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박원순 변호사는 훌륭한 인격을 갖춘 분이시다. 그 분이 하시는 일도 우리사회에서는 꼭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 왜, 재활용 가게인 <아름다운 가게>를 재단에서 직접 운영할까? 지역의 단체들과 연계하여 물건의 공급과 수급의 인프라는 <아름다운 재단>이 하고, <아름다운 가게>는 지역단체가 직접 운영하여 지역운동을 성장 발전시킬 수는 과연 없었을까? 무엇이 그것을 가로막을까?
<아름다운 재단> 관계자여, 용서해주오. 재단이 미워서 박변호사가 미워서 언급하는 게 아니니 이해해주오. 봉천동 <나눔의 집> 관계자들께서 마찬가지로 용서를 비오. 내 마음 속에 일어나 명예와 환대, 이득의 유혹에 대해서 쓰다보니 여러분들께 누가되는 이야기도 있구려. 부디 용서해주오.
애기가 좀 다른 데로 샜다. 얼른 돌아가자.
세상은 <아름다운 재단>이나 봉천동 <나눔의 집>이 운영하는 기관들처럼 규모도 크고 잘 포장된 단체나 운동을 선호하고 후원금도 그 쪽으로 몰린다.
그렇다고 그 길을 따라갈 것인가? 그 길을 따라가면 문제는 과연 없을까?
앞서도 말했지만 나도 명예와 소유, 안정을 추구하는 마음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가능하다면, 명예와 소유, 안정을 바라는 마음을 소멸시키고 싶다. 그러나 쉽지 않은 길임을 잘 알기에 노력할 뿐이지, 소멸시켰다고 거짓 증언을 못하겠다.
돌이켜 생각해 봤다. 송신부와 박변호사가 제시한 길(그 분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 분들이 이뤄놓은 결과가 그분들이 제시한 길이기에)에는 과연 함정이 없을까 하고 말이다.
함정은 있다. 먼저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원칙과 모순이 되는 삶이 된다. 슈마허가 말 안했더라도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것은 나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그렇지만 두 분이 제시한 길을 걷게 된다면, 나는 규모의 사회복지, 규모의 시민운동이란 함정에서 빠져 나오기가 힘들 것 같다.
또 다른 함정은 명예, 소유의 집착이 더 커진다는 것이다. 이 순간 부처님의 가르침이 절실하게 떠오른다.
“수행승들이여, 번뇌를 소멸한 거룩한 수행승에게도 이득과 환대와 명성은 장애라고 나는 말한다.”
번뇌를 소멸한 거룩한 수행승에게도 이득과 환대와 명성은 장애일진대, 하물며 나 같은 보통사람은 어련할까. 이 말씀을 떠올리고 보니, 내가 왜 봉천동 <나눔의 집>에서 건립한 건물 얘기를 듣고 흔들렸는지 이해가 같다.
세존께서는 계속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이득과 환대와 명성은 두렵고 자극적이고 거친 것으로 위없는 평화를 얻는데 장애가 된다.”
“아난다여, 그러므로 그대는 ‘나는 이미 생겨난 이득과 환대와 명성을 버릴 것이며, 아직 생겨나지 않은 이득과 명성과 환대에 집착하지 않고 지낼 것이다’라고 배워야 한다.”
명예는 함정이다. 환대는 함정이다. 이득은 함정이다. 꽃동네를 생각해본다. 오웅진 신부, 그 분을 내 비록 겪어보지 않아서 어떻다고 평가하기가 힘들지만 그동안 일궈놓은 <꽃동네>를 보면 꽤 훌륭하신 분 같다.
그런 분께서 명예와 환대, 이득의 함정에 빠져 검찰에 소환당하는 모습을 보니 세존의 말씀은 나에게 놀라운 성찰로 다가온다.
내 성찰이란 것도 모자란 것이기에, 내가 명예와 환대, 이득의 유혹에 무심할 수 없는 사람이란 것을 성찰했다는 것만으로도 기쁘다. 계속해서 노력한다면, 진정으로 유혹의 손길로부터도 자유롭게 되지 않을까?
이렇게 말하지만 명예와 환대, 이득의 함정에 문득 문득 빠져드는 내 자신을 보게 된다. 내가 못나서 다행이지. 조금이라도 잘났다면 난 유혹의 손길에 쉽게 넘어갔을 것 같다. 정말 내가 모자라고 못나서 다행이다.
난 송경영 신부와 박원순 변호사의 성공(?)을 보면서 그 길에도 함정이 있다고 성찰했지만, 오늘도 흔들리는 마음 어쩔 수가 없다. 오마이뉴스에서 공동번역성서를 가슴에 품고 검찰의 소환에 응하는 오신부의 사진을 보면서도 쉽게 그 성공(?)의 유혹을 떨쳐버릴 수 없다.
벗이여, 흔들리는 날 꾸짖게. 단호하고 매서운 목소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