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대통령이 국빈방문의 형식으로 중국을 다녀왔다.
부시와 푸틴에게만 허용된 공동기자회견의 파격까지 누리면서, 중국과의 ‘전면적 협력 동반자 관계’의 언술까지 얻어낸 정상외교였다. 그런데 왜 이리 속이 쓰리고 마음이 괴로운가. 구두선으로 가득 찬 성과 이면에 막상 우리가 얻은 실리가 없고 오히려 잃어버린 것이 많기 때문이다.
첫째, 정상외교의 신뢰를 잃어버렸다.
정상외교라면 국가간 외교의 꽃이다. 한마디로 정상의 한마디 한마디가 향후 국가간 관계와 신뢰의 시금석이 된다. 그러나 노대통령은 불과 한 달 만에 이를 무너뜨렸다. 워싱턴과 도쿄에 가서 합의한 문서의 잉크도 아직 마르지 않았는데, ‘추가적 조치’까지 거론하며 북핵의 제조와 확산을 막고 북한을 확대다자회담의 형식을 띤 대화의 장으로 불러내자고 한 한미일 정상 간의 약속을, 북한의 안보우려 해소와 당사자간 대화란 언명으로 엉킨 실타래처럼 만들어 버렸다. 앞으로 워싱턴이나 도쿄에서 한국 대통령의 말은 믿을 수 없다고 하면 무어라 답할 것인가.
둘째, 한국의 안보위협을 도외시 했다.
공동성명 그 어디에서도 북한의 안보우려 해소를 거론하면서도, 북핵으로 인한 한국의 절체절명의 안보위협에 관한 말이 없지 않은가. 물론 북핵이 미칠 동북아와 국제사회에의 악영향 또한 언급이 없었다. 이대로라면 북핵의 본질은 국제사회의 상식과 달리, 안보우려를 해소키 위한 자구책이란 북한의 선전논리로 자연스레 연결될 수 있다. 그렇다면 당사자도 아닌 대한민국은 지금까지 가공(架空)의 위협으로 호들갑을 떨었단 말인가.
셋째, 청와대 외교안보팀에 관한 기대를 접게 만들었다.
한중회담의 여러 오류를 변명하며 상황논리와 함께 전략적 모호성에 관한 이야기까지 흘러나온다. 강대국 틈새의 우리로서야 어디를 가든 듣기 싫은 소리를 할 수 없지 않은가, 대신 우리가 직접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남북관계를 차분히 쌓으며 향후 외교적 지렛대를 준비해보잔 이야기다. 참으로 어이없고 위험한 발상이다. 외교는 말과 글로 하는, 총성이 없는 전쟁이 아닌가. 우리가 강대국들에게 힘으로 시위를 할 수 없다면, 머리로 하는 외교라는 전장에서는 반드시 국익을 관철해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외교는 무엇 때문에 하는가.
노대통령은 사스(SARS)로 곤경에 처한 베이징에 처음으로 방문한 국빈이다.
그들의 파격적인 대우에 그리 고마워 할 이유도 없는 게 아닌가. 오히려 막대한 선물을 안긴 건 우리 정부다.
무엇보다 평양에 관한 베이징의 연고권을 확실히 인정해주었다.
지난 3월 석유공급까지 중단하며 평양을 궁지로 몬 베이징이, 이번에 워싱턴의 유엔 안보리 의장성명을 단호히 뿌리치고 나아가 3자회담의 재회를 고집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베이징의 메시지는 자신의 별채로 생각하는 평양의 운명을 워싱턴이 좌지우지 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며, 그 직접적 표현이 ‘북한의 안보우려가 해소’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북경회담으로부터 시작된 대화의 모멘텀을 지속’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외교안보팀은 이를 토씨 하나 고치지 못하고 인정해주었다.
그리고 ‘하나의 중국’에 관해서도 큰 선물을 안겼다.
98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합의한 ‘대만은 중국 영토의 불가분의 일부’를 넘어서서 중국이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표현까지 동원하며 베이징의 모든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나. 이는 대만 문제로 미중 관계에서 촉각이 곤두선 중국 지도부에게 아주 큰 선물이다.
그러나 우리가 얻은 게 무엇이 있나.
베이징에 가서 북핵 문제만 아니라 대만문제까지 일방적인 줄 서기를 해주고 나서, 우리는 탈북자 문제는커녕 사진작가 석재현씨 구금문제조차도 해결하지 못했다. 오히려 사전 실무준비에서 확정되고 조율되지 않은 안건의 정상회담 상정으로 인해 한국 대통령의 난처한 모습을 연출하고, 그것도 모자라 출처가 불분명한 보도자료의 배포로 국내외의 웃음거리만 샀다. 외교안보팀의 효용에 관해 심각히 고려할 시점이 되었다고 아니 할 수 없다.
앞으로가 문제다.
국정원에서 밝혔듯이 금지선(Red line)을 넘어 핵보유국의 야망을 버리지 않는 평양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워싱턴과 베이징 그리고 평양의 3자 관계에서 비켜서서, 개성공단이든 금강산 육로관광이든 교류협력의 기회만 늘리면 언젠가 ‘외교적 지렛대’가 생길 것이란 발상이 얼마나 현실성을 잃은 지는 햇볕정책이 웅변하고 있지 않은가. 더군다나 일관성의 부재로 외교의 신뢰마저 의심받는 지금에야 더더욱 어려운 지경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이는 두 가지 문제에 관한 판단과 직결되어 있다.
평양의 장래에 관한 판단과 미중 간의 줄타기에 관한 ‘한반도 책략’이다. 세기적인 기아사태에도 무너지지 않은 김정일 체제의 영구존속을 전제한다면, 대화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 그러나 체제의 내구연한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판단을 할 경우에, 개입의 유보를 택한다면 이는 곧 민족사의 극적인 전환기에 엄청난 직무유기를 한 셈이 된다. 그리고 ‘한반도 책략’ 또한 이 두 가지 경우의 수에서 한국의 외교전략이 어떠해야 하는지 그 방향을 명확히 세우는 일이다. 이미 미중은 물론 일러까지 나름의 방향으로 접근하고 있다. 오로지 우리만 특검 논란에서 보듯이 끝없이 미궁을 헤매고 있다.
Quo Vadis,Korea?
더 이상 외국 석학을 찾지 말고 이제 우리의 지혜로 풀어야 할 때가 왔다. 앞으로 여러 賢者들과 밤을 지새며 그 길을 찾고 싶다.
부시와 푸틴에게만 허용된 공동기자회견의 파격까지 누리면서, 중국과의 ‘전면적 협력 동반자 관계’의 언술까지 얻어낸 정상외교였다. 그런데 왜 이리 속이 쓰리고 마음이 괴로운가. 구두선으로 가득 찬 성과 이면에 막상 우리가 얻은 실리가 없고 오히려 잃어버린 것이 많기 때문이다.
첫째, 정상외교의 신뢰를 잃어버렸다.
정상외교라면 국가간 외교의 꽃이다. 한마디로 정상의 한마디 한마디가 향후 국가간 관계와 신뢰의 시금석이 된다. 그러나 노대통령은 불과 한 달 만에 이를 무너뜨렸다. 워싱턴과 도쿄에 가서 합의한 문서의 잉크도 아직 마르지 않았는데, ‘추가적 조치’까지 거론하며 북핵의 제조와 확산을 막고 북한을 확대다자회담의 형식을 띤 대화의 장으로 불러내자고 한 한미일 정상 간의 약속을, 북한의 안보우려 해소와 당사자간 대화란 언명으로 엉킨 실타래처럼 만들어 버렸다. 앞으로 워싱턴이나 도쿄에서 한국 대통령의 말은 믿을 수 없다고 하면 무어라 답할 것인가.
둘째, 한국의 안보위협을 도외시 했다.
공동성명 그 어디에서도 북한의 안보우려 해소를 거론하면서도, 북핵으로 인한 한국의 절체절명의 안보위협에 관한 말이 없지 않은가. 물론 북핵이 미칠 동북아와 국제사회에의 악영향 또한 언급이 없었다. 이대로라면 북핵의 본질은 국제사회의 상식과 달리, 안보우려를 해소키 위한 자구책이란 북한의 선전논리로 자연스레 연결될 수 있다. 그렇다면 당사자도 아닌 대한민국은 지금까지 가공(架空)의 위협으로 호들갑을 떨었단 말인가.
셋째, 청와대 외교안보팀에 관한 기대를 접게 만들었다.
한중회담의 여러 오류를 변명하며 상황논리와 함께 전략적 모호성에 관한 이야기까지 흘러나온다. 강대국 틈새의 우리로서야 어디를 가든 듣기 싫은 소리를 할 수 없지 않은가, 대신 우리가 직접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남북관계를 차분히 쌓으며 향후 외교적 지렛대를 준비해보잔 이야기다. 참으로 어이없고 위험한 발상이다. 외교는 말과 글로 하는, 총성이 없는 전쟁이 아닌가. 우리가 강대국들에게 힘으로 시위를 할 수 없다면, 머리로 하는 외교라는 전장에서는 반드시 국익을 관철해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외교는 무엇 때문에 하는가.
노대통령은 사스(SARS)로 곤경에 처한 베이징에 처음으로 방문한 국빈이다.
그들의 파격적인 대우에 그리 고마워 할 이유도 없는 게 아닌가. 오히려 막대한 선물을 안긴 건 우리 정부다.
무엇보다 평양에 관한 베이징의 연고권을 확실히 인정해주었다.
지난 3월 석유공급까지 중단하며 평양을 궁지로 몬 베이징이, 이번에 워싱턴의 유엔 안보리 의장성명을 단호히 뿌리치고 나아가 3자회담의 재회를 고집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베이징의 메시지는 자신의 별채로 생각하는 평양의 운명을 워싱턴이 좌지우지 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며, 그 직접적 표현이 ‘북한의 안보우려가 해소’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북경회담으로부터 시작된 대화의 모멘텀을 지속’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외교안보팀은 이를 토씨 하나 고치지 못하고 인정해주었다.
그리고 ‘하나의 중국’에 관해서도 큰 선물을 안겼다.
98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합의한 ‘대만은 중국 영토의 불가분의 일부’를 넘어서서 중국이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표현까지 동원하며 베이징의 모든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나. 이는 대만 문제로 미중 관계에서 촉각이 곤두선 중국 지도부에게 아주 큰 선물이다.
그러나 우리가 얻은 게 무엇이 있나.
베이징에 가서 북핵 문제만 아니라 대만문제까지 일방적인 줄 서기를 해주고 나서, 우리는 탈북자 문제는커녕 사진작가 석재현씨 구금문제조차도 해결하지 못했다. 오히려 사전 실무준비에서 확정되고 조율되지 않은 안건의 정상회담 상정으로 인해 한국 대통령의 난처한 모습을 연출하고, 그것도 모자라 출처가 불분명한 보도자료의 배포로 국내외의 웃음거리만 샀다. 외교안보팀의 효용에 관해 심각히 고려할 시점이 되었다고 아니 할 수 없다.
앞으로가 문제다.
국정원에서 밝혔듯이 금지선(Red line)을 넘어 핵보유국의 야망을 버리지 않는 평양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워싱턴과 베이징 그리고 평양의 3자 관계에서 비켜서서, 개성공단이든 금강산 육로관광이든 교류협력의 기회만 늘리면 언젠가 ‘외교적 지렛대’가 생길 것이란 발상이 얼마나 현실성을 잃은 지는 햇볕정책이 웅변하고 있지 않은가. 더군다나 일관성의 부재로 외교의 신뢰마저 의심받는 지금에야 더더욱 어려운 지경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이는 두 가지 문제에 관한 판단과 직결되어 있다.
평양의 장래에 관한 판단과 미중 간의 줄타기에 관한 ‘한반도 책략’이다. 세기적인 기아사태에도 무너지지 않은 김정일 체제의 영구존속을 전제한다면, 대화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 그러나 체제의 내구연한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판단을 할 경우에, 개입의 유보를 택한다면 이는 곧 민족사의 극적인 전환기에 엄청난 직무유기를 한 셈이 된다. 그리고 ‘한반도 책략’ 또한 이 두 가지 경우의 수에서 한국의 외교전략이 어떠해야 하는지 그 방향을 명확히 세우는 일이다. 이미 미중은 물론 일러까지 나름의 방향으로 접근하고 있다. 오로지 우리만 특검 논란에서 보듯이 끝없이 미궁을 헤매고 있다.
Quo Vadis,Korea?
더 이상 외국 석학을 찾지 말고 이제 우리의 지혜로 풀어야 할 때가 왔다. 앞으로 여러 賢者들과 밤을 지새며 그 길을 찾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