知의 유혹

by 이윤주원 posted Jul 15, 2003

“밤이었다.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숲길을 걷는 느낌이었다. '모른다는 것'이 이토록 어두운 줄은 몰랐다.”

대학교 1학년 때 쓴 일기를 오랜만에 들춰 보았다. 시간은 나를 변하게 했건만, 유독 앎(지식)에 대한 호기심만은 꺾지를 못한 것 같다.

그 당시 앎(지식)은 빛이고 길이었다. 중학교 졸업 뒤로 꿈을 잃어버린 청년에게 '변혁의 꿈'을 키워 준 소중한 양식이었다.

앎(지식)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20살의 청년은 망설임도 없이 '혁명의 도구'라고 말했던 기억이 문득 떠오른다. 방황의 20대를 지나고 어느새 30대 중반에 접어든 요즘, 난 다시 묻고 있다.

“앎(지식)이란 무엇입니까?”

앎(지식)이란 무엇일까? 혁명(자기혁명이던 체제혁명이던)의 도구일까? 소유의식으로 가득 찬 욕망의 도구일까? 지식에 굶주린 지식인들의 배고픈 허영을 채워 주는 군것질거리일까?

20대의 단호함이 망설임으로 바뀐 지금, 지식에 대해 점점 혼란스러워진다. 어두움을 밝혀 주던 앎(지식)이 학습된 생각이나 관념임을 알게 된 뒤부터는 더 이상 그것은 꿈을 일궈 주는 도구가 아니었다.

배고픈 거렁뱅이가 허겁지겁 구걸한 밥을 먹듯이, 나를 비롯한 세상 사람들은 허겁지겁 지식을 소비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앎(지식)은 아마 소유의식으로 가득 찬 욕망을 뒷받침하는 도구일 뿐이다. 1등 서울대와 꼴등 지방대로 순위 매겨진 대학간의 등급을 봐도 앎(지식)이 빛이자 길이라고 애써 주장하기가 힘들다. 순순한 학문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야 할 대학이 이 모양이니 다른 예는 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될 성싶다.

앎(지식)은 생존의 도구 이상의 의미는 상실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도'가 너무 지나치다. 앎(지식)의 차이가 계층의 차이로, 더 나아가 계급의 차이로 드러난다.

이제 앎(지식)은 삶의 빛이 아니다. 불평등의 근원일 뿐이다. 과거에 삶을 윤택하게 하기 위한 최소한의 도구였을지라도.

우리가 배운 앎(지식)은, 소유의식으로 가득 찬 욕망의 도구이다. 뽐내기 위한 허영이다. 군림하고자 하는 권위의식이다.

묻겠다. 이런 앎(지식)이 인류의 삶을 윤택하게 해줄 수 있을까? 인간의 이성을 자유의 길로 이끌어 줄 수 있을까? 불평등에 저항하고 정의롭지 못함에 항거하는 깨어 있는 이성으로 성숙시켜 줄 수 있을까? 생명을 사랑하고 중생의 아픔에 함께 슬퍼해 주는 자비로운 인간으로 키워 줄 수 있을까?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부처님이 나라는 견해-성인이라는 견해-중생이라는 견해-수명이라는 견해를 말하였다'(내가 모든 생명들을 제도하면 성인들의 여러 경지를 얻고, 모든 생명들에게 보시를 베풀면 보시를 베푼 복덕이 나의 미래에 이어진다는 이런 생각들이 나오는 견해를 부처님이 말하였다) 한다면 네 뜻에 어떠하냐? 이 사람은 나의 말한바 뜻을 이해했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 사람은 여래께서 말씀하신 뜻을 알지 못합니다.”
<한글 금강경 중에서 여운 역>


부처님의 가르침은 참 수미일관해서 좋다. 부처님은 마음속에 탐욕이 있는 것이 아니라, 법을 실천하고자 하는 불자들의 의식 속에 탐욕과 권위의식이 숨어 있다고 가르치고 계신다.

학습된 생각으로써 법, 관념으로써 법은 탐욕과 권위의식의 산물일 뿐이다. 우리들이 배우고 가르치는 지식도 학습된 생각이고 관념이다.

오늘도 난, 금강경을 읽으면서 앎(지식)이 손짓하는 욕망의 유혹과 힘든 싸움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