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으로 얼룩진 불교

by 이윤주원 posted Aug 07, 2003
지우고 싶은 시간

1-1. 폭력은 야만이다. 그 어떤 명분과 미사여구도 폭력이 야만임을 부정하진 못한다. 부처님께서도 폭력은 삼가고 경계해야 할 수행자들의 금기라고 이르셨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한국불교 근현대사는 폭력을 빼고 나면 기록해야 할 그 무엇도 남지 않은 역사가 되고 만다. 차마 되돌아보기 부끄러운 역사, 되새기기 고통스러운 지우고 싶은 시간일 뿐이다.

폭력으로 얼룩진 조계종 분규의 역사적 연원은 일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는 1911년 친일세력을 중심으로 ‘사찰령’을 제정한 뒤 전국의 사찰을 31본사와 이에 딸린 말사 체제로 바꾸어 주지를 총독부가 임명하고 재산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주지의 전횡이 본격적으로 이뤄지기 시작했다.

현재의 조계종은 1954년 비구․대처 분규를 기점으로 새로 태어났다. 1954년 비구․대처 분규는 이승만 정권의 개입으로 일제하 친일에 적극 가담한 대처승들의 기득권을 흔드는 사건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대처승은 사찰에서 물러나고 독신승만이 절을 지키라”는 정화유시를 발표하면서 이른바 ‘불교정화운동’(태고종에서는 법난으로 규정)이 시작됐다. 그러나 한마디로 대처승이 차지하고 있던 절을 비구승들이 폭력과 공권력으로 뺏는 싸움이었다.

비구․대처 분규 과정에서 수많은 폭력배들이 양쪽에 의해 동원되었다. ‘불교정화’라는 명분은 외피外皮였을 뿐이었다. 비구나 대처 모두에게 정화과정은 처절하고 피비린내 나는 생존권 싸움이었다. 더구나 싸움이 길어지면서 동원됐던 ‘주먹’들이 그대로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은 채 절에 눌러앉기도 했다. 불교와 주먹의 질기고 질긴 인연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오죽했으면 불교정화운동을 주도했던 청담스님은 당신이 입적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로 정화운동에 참여한 제자들을 참다운 선승으로 만드는 일이라고 했을까?

1954년 이후, 조계종 종권 다툼에 앞장서온 승려들의 대부분이 바로 이 때 출가했던 승려들이다. 이들은 선禪보다 먼저 싸움鬪을 배웠던, 수행보다 탐욕에 눈이 멀었던 시대의 기형아였다.

1-2. 1998년은 한국불교가 부처님의 얼굴에 똥칠을 한 해로 불자들의 뇌리腦裏에 깊게 새겨졌을 것이다. 98년 종단 사태는 월주스님의 총무원장 3선 출마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시작되었다.

대화와 성찰은 찾아 볼 수 없고 대립과 갈등, 미움, 분노만이 지배했던 시간들이었다. 한겨레신문 1998/12/23일자 기사를 보라. 종단 분규의 결과가 얼마나 추악하고 처참했는지. 부처님도 돌아앉아 눈물을 흘렸던 그날의 기억을….

화염병...최루액...아수라장 / 경찰투입...조계사의 ‘6시간 공방’  

조계종 총무원 청사 점거사태가 23일 경찰력 투입으로 마무리됐다. 경찰이 총무원 청사 진입을 시도하자 정화개혁회의 승려들이 거세게 맞서면서 화염병과 최루액이 난무하는 공방전이 벌어졌다. 조계사는 순식간에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생략)  
오전 9시30분께 갑자기 총무원 청사 안에서 불이나 청사가 검은 연기에 휩싸였다. 정회회의 승려들이 지른 불이었다. 경찰은 물대포를 쏘아 불을 껐다. 10시께 고가사다리를 이용한 경찰 특공대원들의 청사 5층 진입이 시작됐다. 그러나 고가사다리가 제대로 걸리지 않아 난간에서 미끄러지면서 경찰 5명이 10m 아래로 떨어지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경찰이 양동작전을 펼쳐 5층과 1층으로 동시에 진입하자 격렬하게 맞서던 승려들은 저항을 포기했다. 오전 10시15분 경찰이 청사 전체를 장악했다. 승려들은 경찰의 연행이 시작되자 힘없이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청사 밖으로 나왔다.…(생략)

왜였을까? 먹물들인 옷을 입고 머리 깎은 뒤부터는 분노를 여의고 폭력을 버리기로 맹세한 그들이 왜 그랬을까? 부처님도 돌아앉아 눈물을 흘리게 만든 이 처참한 폭력의 원인은 무엇일까?

98년 종단분규의 이해당사자들은 전혀 자정의 의지도 역량도 없어 보였다. 이들은 불행하게도 스스로 해결을 하지 못하고 종단분규를 사법 심판대로 끌고 갔다. 1998/12/23일의 공권력 투입은 분규 당사자들의 어리석음이 부른 참화였다. 법원의 판결에서 “분쟁이 폭력적 양상을 띠어 자치적 해결 가능성이 희박한 만큼 사법적으로 해결할 필요가 절실하다”고 지적했듯이, 98년 종단분규는 폭력을 몰아내기 위해 출세간이 세간에게 의지한 슬픈 사건이었다.


어차피 ‘주먹’으로 빼앗은 종권…

2-1. 94년 철옹성 같던 서의현 총무원장 체제를 무너뜨린 종단개혁운동은 밑으로부터 분출된 혁명이었다. 더 이상 서의현 체제를 용인할 수 없다던 개혁세력들이 불자들의 마음을 움직여 이뤄 낸 승리였다. 대학생부터 노老보살까지 조계사에서 쏟아 낸 울분과 절규, 개혁의 열망이 얼마였던가. 이루다 헤아릴 수 없는 열정들이 개혁의 에너지가 되어 서의현 체제를 몰아내고 개혁종단을 출범시켰다.

그러나 개혁종단은 대중들의 열망을 외면하고 4부대중의 종단이 아닌 비구 중심의 종단으로 회귀回歸하면서 보수세력과 손을 잡았다. 개혁종단의 가장 큰 정책적 과제였던 ‘사찰운영위원회법’조차도 의지를 갖고 추진하지 않아 유명무실하게 사문화하지 않았던가. ‘자비의 대중화’를 외쳤지만 빈곤한 대중에게 자비는 말장난에 불과했다. 점점 개혁종단은 불자들의 마음으로부터 떠나버린 ‘그들만의 종단’이 되고 말았다.

94년 종단개혁운동은 혁명이었다. 불자들의 열망이 모였던. 그러나 그 방법은 전혀 불교적이지 않았다. 대결의 논리였고, 투쟁의 논리였다. 대화와 성찰이 행동의 동기가 아니었다. 종권을 빼앗긴 입장에서 보면 어차피 ‘주먹’으로 빼앗긴 종권일 뿐이었다. 인류의 역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개혁세력과 보수세력의 폭력을 동반한 전형적인 싸움일 뿐이었다. 냉정하게 말해, 94년 당시 종단개혁세력이 승리했기 때문에 ‘정의’로 기록되었을 뿐이다. 시대와 대중이 원하는 변화의 방향을 읽고 그 방향에 순응했기 때문에 역사의 승자로 기록될 수 있었다.

만약에 졌다면, 아마 대부분의 개혁진영에 섰던 승려들이 파문을 당했을 것이다. 당시 서의현 체제에 기생하여 기득권을 누리던 세력이 당한 것처럼….

98년 종단 분규를 주도했던 정화개혁회의 쪽에 섰던 승려들은 94년 종단개혁 주체들이 썼던 방법론을 빌려왔다. 철저하게 94년을 학습하고 98년에 재현한 것이다. 그들은 98/11/11일, 월주 스님의 3선 출마를 반대하는 승려대회를 개최한 뒤 총무원 청사를 점거하고 정화개혁회의를 출범시켰다. 94년 종단개혁 주체들이 써먹었던 방법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물론 결과론적으로 보면, 정화개혁회의 쪽 승려들은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했고, 불자들의 공감을 얻는데 실패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정화개혁회의 쪽 승려들의 실패가 아니다. 폭력의 학습과 학습의 결과로서 폭력의 재현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분명 한국불교는 1954년 시작된 비구․대처 분규 이래 폭력을 반복적으로 학습하면서 실전에 써먹어왔다. 한국불교에서 폭력은 살아있는 생명체로서 바퀴가 앞에 패인 자국을 따르듯이 윤회해왔던 것이다. 이 뿌리 깊게 자라는 폭력의 자양분은 과연 무엇일까?

돈이다. 한국불교의 역사에서 성쇠盛衰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겠으나, 오늘날 조계종단에는 엄청난 액수의 종단재산이 있다. 분쟁의 원인은 항상 여기에 있다. 승려 또한 깨달음을 이루지 못한 존재이기에, 눈앞에서 번쩍이는 재화를 보면 그 마음을 잡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닐께다.

문제는 돈이다. 항상 폭력의 뒷그늘에는 돈의 음모가 숨겨져 있다. 간혹 명예 같은 가치 때문에 다툼이 일어날 수 있고, 다른 사람을 미워하며 질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진흙탕에서 뒹구는 돼지처럼 지저분한 채 그토록 오래 싸우지는 않는다. 돈이 걸려 있으면 달라진다. 고귀한 이상도, 고결한 이념도 다 땅바닥에 던져버리고 위선의 가면도 벗어 던진 채 진흙탕 속으로 뛰어 들어간다.

종단 분규도 항상 ‘정화’를 내세웠지만 그 이면에는 돈이 걸려 있음을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비와 무소유라는 가면을 썼던 승려들이 분규만 일어나면 그 가면을 쉽게 벗어던지는 것이다. 어설프게 싸움에 임하면 진다는 생각에, 어차피 버린 몸 확실하게 지키거나 빼앗는다는 신념으로 임한다.      

불교의 지고지순한 가치는 분명 무소유無所有다. 법정스님은 ‘무소유’라는 수필 한 편으로 자본주의에 찌든 현대인에게 샘물 맛을 주는 수필가의 반열에 올랐고, 한국불교도 그 덕을 톡톡히 봤다. 더구나 소유욕에 뿌리를 둔 사유재산의 끝없는 확장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유일하게 대립할 수 있는 사상이 불교의 무소유 사상이 아닌가. 그런데 오늘의 불교는 무소유를 버리고 자본주의와 동거同居를 택했다. 더 나아가 자본주의의 첨병이 되어 간다. 조계종 사태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다.
  
2-2. 조계종 폭력 사태의 본질이 ‘돈’에 얽히고설킨 일이라 해도 쉽게 이해할 수 없다. 정화개혁회의 쪽은 그렇다고 쳐도 명분과 힘의 우위에 섰던 총무원 측은 왜, 공권력을 요청하는 극단적인 해결방식을 택했을까?

슬프게도 98년 종단 사태를 불러온 동기는 성찰과 대화가 아니었다. 권력에 대한 탐욕, 명예에 대한 탐욕, 재화에 대한 탐욕이 행동의 동기였다. 정화개혁회의 쪽은 ‘정화’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도저히 드러나는 ‘욕망의 칼’은 감출 수가 없었다. 정화개혁회의 쪽만 몰아 부칠 일이 아니다. 분명 정화개혁회의에 명분을 준 쪽은 월주스님의 3선 출마를 은근히 부추긴 총무원 쪽이었다. 총무원 쪽도 분명 권력에 대한 탐욕, 명예에 대한 탐욕, 재화에 대한 탐욕이 행동의 동기가 됐음을 누가 쉽게 부정할 수 있을까?

양비론을 펼치려는 게 아니다. 거듭되는 종단 분규를 반복해온 한국불교의 한계를 말하고 싶어서이다. 한국불교는 최근에서야 폭력에 대한 자기반성과 성찰을 시작했을 뿐, 그 전까지만 해도 우리 불교 안에 감춰진 폭력의 실체를 들여다 볼 생각조차 못했었다. 자비문중이라고 불렸던 불교가 왜 자기 안에 감춰진 폭력의 실체를 성찰하여 뿌리 뽑지 못했을까?

살다보면 많은 갈등과 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경우가 있다. 이 때 상대방이 대화를 받아들이는 개인이나 집단이라면 갈등과 분쟁의 원인이 되었던 ‘그 무엇’을 나눠서 책임질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아주 드물다. 대부분은 극단적인 대립으로 치닫고 만다. 갈등을 조정하다보면 가장 쉬운 해결방식이 힘(폭력)에 의한 방식이다. 갈등의 주체들은 서로의 허물을 덮고 양보와 대화를 통한 상생의 길을 애써 외면하려 한다. 특히 참회가 필요한 자리임에서도 끝까지 참회를 거부하는 개인이나 집단을 만난다면, 우리는 쉽게 힘으로 해결하려는 방식을 쓰고자 하는 유혹을 받는다.

분쟁과 갈등에 익숙한 현실을 살다보면, 대화와 성찰이 행동의 동기가 되는 개인이나 집단을 만나기보다, 소유욕에 뿌리를 둔 탐․진․치가 행동의 동기가 되는 개인이나 집단을 만나게 되는 경우가 더 많다. 이럴 경우 우리는 절망이라는 벽에 부딪치게 된다. 더 이상 어찌하지 못하는 물신物神과 이기利己의 벽 앞에서 폭력의 칼을 빼들곤 한다.

도법스님은 또다른 폭력사태를 막고 원칙을 세우는 차원에서 읍참마속泣斬馬謖하는 심정으로 공권력 투입을 허락했을 것이다. 그 길이 비록 폭력의 길일지라도 더 이상 해결할 방법이 없기에, 누구라도 그 길을 택했을 것이다. 더구나 당시로서는 정화개혁회의 쪽에서 동화사를 비롯한 주요 교구본사의 강제 접수가 시작되던 때였기에, 그 절박함은 더했을 것이다. 잘못하면 총무원에 국한된 폭력사태가 전국 주요사찰에서 재현될 위기였다. 그러나 현실은 상황을 정당화시킬지라도 폭력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수행자들의 참회는 필요하지 않을까? 어찌되었든 수행자의 입장에서 폭력을 분쟁해결의 도구로 썼다는 것은 부처님의 계율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폭력은 야만시대의 산물이지만 현실에서 가장 큰 힘을 갖고 있다. 그래서 쉽게 폭력의 유혹에 흔들리는 것 같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종류의 갈등과 분쟁 더 나아가 전쟁까지도 폭력이 아니라 비폭력, 대화와 성찰의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꿈을 꾼다. 비록 꿈일 수 있겠지만, 이 길만이 평화와 해탈의 길이며 부처님이 걸으신 길이기 때문이라고 나 자신에게 다짐한다.

상상해 본다. 만약에, 월주스님이 3선 논란이 벌어지던 바로 그 순간에 다 벗어던지고 산문으로 향했다면 조계종의 승풍은 크게 진작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