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11월 18일, 을사오적을 탄생시킨 을사늑약 발표...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 발표와 함께 맞은 국치일...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서 발표를 기점으로 한 독립운동의 고조...
1919년 4월 13일, 상해임시정부의 수립 발표...
1919년 11월 조직된 의열단의 항일테러투쟁...
그리고 그 기세와 영향력이 커져만 가던 항일무장투쟁의 세력의 확장...
지금으로부터 80년 전 군국주의와 제국주의의 발톱을 세우던 일본의 치안당국에게 조선인의 독립운동의 활발함과 특히, 그 숫자가 늘어만 가는 재일조선인의 운동역량의 고양은 우려를 넘어선 공포감마저 갖게 하였다. 1920년의 일본 내무성 경부국 보안과 발행의 '조선인개황'을 보면 재일조선인의 상황에 대해 "조선인 유학생을 중심으로 한 '불령선인(不逞鮮人)'의 배일(排日)사상이 다이쇼(大正) 8년(1919년)의 독립소요가 발생한 이래 점점 심해져 가는 것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밝히고 있다.
당시의 재일조선인의 사상단체 및 노동단체의 성립과 운동 상황을 대략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21년 11월, 흑도회(黑濤會 - 도쿄거주 조선인 공산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 단체) 성립.
1922년 5월 1일, 도쿄의 메이데이 집회에 조선인들 참가.
1922년 11월, 흑도회의 분할로 공산주의자 조직인 북성회(北星會), 무정부주의자 조직인 '흑우회(黑友會)가 조직됨. 또 '동경조선노동동맹회'가 성립.
1923년 3월 1일, 동경 경시청 조선인 거주지역 일대를 감시.
1923년 5월 1일, 메이데이 집회에 경시청은 일본 사회주의자와 조선인의 참가를 금지하고 참가한 조선인은 경찰관들에 의해 폭행 당하고 검거됨.
1923년 5월 14일, 내무성 경보국장은 각 지방장관 앞으로 보낸 '조선인 노동자 모집에 관한 건 의명(依命) 통첨'을 통해, 재일조선인 노동자가 늘어나 "종종 사회운동 및 노동운동에 참가하여 단체행동에 나서는 경향이 특히 두드러졌다"고 경고.
조선인의 반일 감정과 반제국주의 움직임이 높아가면서 조직적이고 집단적인 운동 지형이 확대되어 가는 와중에 발생한 것이 일본에서 표현하는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 우리가 알고 있는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이다.
관동대지진은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44초, 사가미만을 진원지로 하는 진도 7.9의 대지진이 일본 관동 일대를 강타, 그 여진이 5일 동안 계속되었고 그 회수는 936회로 피해는 관동 전역을 넘어, 시즈오카현, 야마나시현까지 미치게 되었다. 12만 6천여 호의 완전 파괴, 44만 7천여 호의 소실, 사망자 9만 9천여 명의 피해가 발생했다.
지진의 발생은 모든 이에게 불행이었다. 자연의 재앙이었으며 그로 인한 무고한 피해는 일반 민중들이 고스란히 안아야 했다. 일반 민중에는 다수의 일본 시민이 포함되었으며, 살기 위해 현해탄을 건너야 했던 조선인들 역시 재앙의 피해자가 되었다.
그러나 조선인에게는 자연 재앙이 전부가 아니었다.
지진이 잦아들 무렵, 일본 경찰을 위시한 관(官-일본 제국주의 정부라는 표현이 더 맞을 수 있다.)과 시민의 합작으로 대규모 무차별적인 조선인 학살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인이 방화했다!', '조선인이 폭행했다!', '불령선인이 우물에 독약을 던졌다', '재앙은 조선인의 폭동이었다'고 하는 유언비어가 도쿄와 요코하마에서 이미 9월1일 저녁때에 발생하여 관동전역과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유언비어의 발생과 전파에 따라 관동 일대에서 조선인 학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학살의 와중에는 중국인과 일본인 학살도 여러 차례 일어났다. 이러한 학살의 와중에 죽어간 조선인의 숫자는 6,000명 이상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 사법성이 조사한 숫자는 230여 명에 불과하지만 '관동지방이재조선동포위문단'의 조사에 따르면 동경 1,781명, 사이타마현 488명 등 6,661명으로 보고되어 있다. 이 숫자는 양심적인 일본인 지식인과 학살 관계자의 증언으로 그 사실을 인정받고 있는 수치이다.
일본 사법성의 조사 수치는 80년 5월의 광주항쟁 당시의 학살자들이 학살을 은폐하려 했던 행태를 보는 듯해 씁쓸함을 넘어선 분노를 느끼게 한다.
일본 정부의 이같은 은폐, 왜곡의 의도와 진행은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무엇보다 명확한 배경은 유언비어 유포를 주동한 세력이다. 유언비어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관과 민중의 조직적인 헛소문 퍼뜨리기라는 것은 명백하다. 그 사실은 일반 민중의 방범대 격인 자경단(自警團)에 의한 학살 이외에 군대에 의한 학살이 공공연히 자행되었다는데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군대에 의한 학살은 철저히 은폐되어 그 수를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유언비어의 확산과 그에 따른 학살에 대한 관의 책임은 그 어떤 책임에도 앞선다.
그 이유는 일본 민중은 근본적으로 국가주의적 교육을 받으며, 관의 발언에 대해서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데 있다. 관의 의도적인 유언비어 전파가 없었다면 그토록 빠르고 광범위한 확산은 없었을 것이다.
관의 유언비어 유포는 곳곳에서 확인된다.
도쿄에서는 9월1일 저녁때에 경찰관들이 소문을 퍼뜨렸다. 이것은 도쿄의 초등학생의 작문과 1923년 10월 28일자 '호치(報知)신문' 석간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치안당국의 중추부인 내무성 경보국의 지령에 근거하는 행동이 아니고 개개 경찰서의 판단에 의한 행동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내무성 경보국장이 9월 2일에 "도쿄시내에서 조선인이 폭탄을 들고 석유를 부어 방화를 하고 있다. 이미 도쿄에서는 일부 계엄령을 선포했으니 각지에서도 선인에 대하여 엄중한 감시와 단속을 하라"는 전국 지방장관 앞으로 보내는 전문이 작성되고, 이 전문은 후나바시 해군무선송신소로부터 3일 아침에 타전되었다. 또, 역시 9월 2일에 사이타마현 내무부장은 내무성으로부터 전해져 온 지방과장의 보고에 근거하여 "이번의 지진에 즈음하여 도쿄에서 불령선인의 만동이 있어, 또 과격한 사상을 갖고 있는 자들과 손을 잡을 우려가 있으니, 정촌(町村) 당국자는 재향군인분회, 소방단, 청년단이 일치, 협력하여 경계하고 유사시에 대비하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리기에 이른다. 그 결과 사이타마현에서는 자경단(自警團)의 조직이 증가하면서 수많은 조선인이 학살되게 된다.(자경단은 지주나 마을 원로 등이 주도하여 조직하였으며 일본도, 죽창, 곤봉 등의 무기를 사용하여 조선인 학살에 앞장섰다. 일부 지역의 자경단은 경찰서를 습격, 경찰서에 수용된 조선인들을 학살하기도 한다.)
일본정부는 재일조선인들의 폭동설 유포와 학살에 대한 은폐를 위한 치밀한 공작에 들어갔다. 1923년 9월 5일 '임시진재구호사무국' 경비부에 모인 관료들은 "조선인이 폭행한, 또 폭행하려고 한 사실을 극력 수사하여 긍정하도록 노력할 것" 즉 조선인 폭동을 날조할 것을 결정하게 된다. 또한 10월 20일 사법성은 지진 중의 조선인의 '범죄'를 발표하는데, 발표된 조선인 '범죄자' 139명 중 120명은 이름이 불분명한 자, 소재가 불분명한 자, 도망자, 사망자 등이어서 범죄의 증거가 전혀 없었다. 그리고 3명은 조사, 예심, 공판 중에 있는 자로 범죄자가 아니었다. 나머지 16명은 절도나 횡령 등을 한 자였다. 소수의 범죄가 있었다고 해도 일반 일본인 범죄의 유형이나 수에 크게 다를 바 없는 것으로 정치성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조선인 폭동'은 완전 날조였던 것이다.
일본정부의 은폐 행위는 학살자의 재판에서도 나타났다.
1923년 9월 11일 '임시진재구호사무국' 사법위원회는 학살한 자를 검거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학살자 전원의 검거가 아닌 "범죄의 증거가 현저한 자만을 검거하고, 경찰에 대해 반항한 자에 대해 엄히 검거한다"는 결정이었다. 그 결정에 따라 389명 검거에 실형은 118명에 불과했다. 118명의 실형자중에 54명은 일본인을 학살한 자들로 조선인 학살자들에 대한 처벌은 30%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일본정부의 사건 은폐와 왜곡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조선인 학살 희생자가 매장되었던 곳의 유골 발굴이 일본 지식인과 시민단체의 노력으로 여러차례 이루어 졌지만 진전을 볼 수 없었다. 이는 발굴에 참여한 일본인 지식인의 말에 의하면 "정확한 증거를 제시할 수는 없지만 경찰에서 몰래 유골을 파내어 이장했다"는 의견을 밝히고 있다. 또, 희생자 매장에 관여했던 일본인의 "몇명의 조선인이 죽었는지 알지 못하게 처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라는 증언도 있다. 이러한 은폐속에서 여성학계와 단체를 중심으로 당시 조선인 여성들을 나체로 희롱하고 심지어 임산부까지 성학대를 한 후 학살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올해는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지 80주년이 되는 해이다.
대재앙이 있었고 그를 잊지 말자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자연재해인 지진에 의한 피해와 그로 인한 사회의 불안을 조선인의 폭동으로 몰아 잔인하게 학살한 일본이라는 국가권력과 사회가 있었고, 80년의 세월동안 오로지 은폐와 왜곡만이 존재했음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식민지배를 벗어나기 위한 조선인의 독립운동을 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날조를 통해 권력을 이용했다는 데에 분노를 금할 수 없다.
많이 늦었지만 이제라도 역사를 바로잡고 억울하게 희생된 영혼들을 위로해야 한다.
가해자는 과거의 잘못에 대해 진심으로 반성하고 사실을 규명해야 할 것이고 피해자는 지난 세월의 고통을 당당히 얘기하고 당연한 권리를 요구해야 한다.
바로 잡히지 않고 묻혀진 역사는 언제라도 반복될 수 있다.
※ 지진 피해 및 학살자 수, 재판 결과 등은 지난 6월말, 일본 도쿄에서 있었던 '재일조선인-한국-일본 합동워크샵'에서 발제된 일본인 야마다 쇼지 교수의 관련자료를 참고함.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 발표와 함께 맞은 국치일...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서 발표를 기점으로 한 독립운동의 고조...
1919년 4월 13일, 상해임시정부의 수립 발표...
1919년 11월 조직된 의열단의 항일테러투쟁...
그리고 그 기세와 영향력이 커져만 가던 항일무장투쟁의 세력의 확장...
지금으로부터 80년 전 군국주의와 제국주의의 발톱을 세우던 일본의 치안당국에게 조선인의 독립운동의 활발함과 특히, 그 숫자가 늘어만 가는 재일조선인의 운동역량의 고양은 우려를 넘어선 공포감마저 갖게 하였다. 1920년의 일본 내무성 경부국 보안과 발행의 '조선인개황'을 보면 재일조선인의 상황에 대해 "조선인 유학생을 중심으로 한 '불령선인(不逞鮮人)'의 배일(排日)사상이 다이쇼(大正) 8년(1919년)의 독립소요가 발생한 이래 점점 심해져 가는 것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밝히고 있다.
당시의 재일조선인의 사상단체 및 노동단체의 성립과 운동 상황을 대략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21년 11월, 흑도회(黑濤會 - 도쿄거주 조선인 공산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 단체) 성립.
1922년 5월 1일, 도쿄의 메이데이 집회에 조선인들 참가.
1922년 11월, 흑도회의 분할로 공산주의자 조직인 북성회(北星會), 무정부주의자 조직인 '흑우회(黑友會)가 조직됨. 또 '동경조선노동동맹회'가 성립.
1923년 3월 1일, 동경 경시청 조선인 거주지역 일대를 감시.
1923년 5월 1일, 메이데이 집회에 경시청은 일본 사회주의자와 조선인의 참가를 금지하고 참가한 조선인은 경찰관들에 의해 폭행 당하고 검거됨.
1923년 5월 14일, 내무성 경보국장은 각 지방장관 앞으로 보낸 '조선인 노동자 모집에 관한 건 의명(依命) 통첨'을 통해, 재일조선인 노동자가 늘어나 "종종 사회운동 및 노동운동에 참가하여 단체행동에 나서는 경향이 특히 두드러졌다"고 경고.
조선인의 반일 감정과 반제국주의 움직임이 높아가면서 조직적이고 집단적인 운동 지형이 확대되어 가는 와중에 발생한 것이 일본에서 표현하는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 우리가 알고 있는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이다.
관동대지진은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44초, 사가미만을 진원지로 하는 진도 7.9의 대지진이 일본 관동 일대를 강타, 그 여진이 5일 동안 계속되었고 그 회수는 936회로 피해는 관동 전역을 넘어, 시즈오카현, 야마나시현까지 미치게 되었다. 12만 6천여 호의 완전 파괴, 44만 7천여 호의 소실, 사망자 9만 9천여 명의 피해가 발생했다.
지진의 발생은 모든 이에게 불행이었다. 자연의 재앙이었으며 그로 인한 무고한 피해는 일반 민중들이 고스란히 안아야 했다. 일반 민중에는 다수의 일본 시민이 포함되었으며, 살기 위해 현해탄을 건너야 했던 조선인들 역시 재앙의 피해자가 되었다.
그러나 조선인에게는 자연 재앙이 전부가 아니었다.
지진이 잦아들 무렵, 일본 경찰을 위시한 관(官-일본 제국주의 정부라는 표현이 더 맞을 수 있다.)과 시민의 합작으로 대규모 무차별적인 조선인 학살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인이 방화했다!', '조선인이 폭행했다!', '불령선인이 우물에 독약을 던졌다', '재앙은 조선인의 폭동이었다'고 하는 유언비어가 도쿄와 요코하마에서 이미 9월1일 저녁때에 발생하여 관동전역과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유언비어의 발생과 전파에 따라 관동 일대에서 조선인 학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학살의 와중에는 중국인과 일본인 학살도 여러 차례 일어났다. 이러한 학살의 와중에 죽어간 조선인의 숫자는 6,000명 이상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 사법성이 조사한 숫자는 230여 명에 불과하지만 '관동지방이재조선동포위문단'의 조사에 따르면 동경 1,781명, 사이타마현 488명 등 6,661명으로 보고되어 있다. 이 숫자는 양심적인 일본인 지식인과 학살 관계자의 증언으로 그 사실을 인정받고 있는 수치이다.
일본 사법성의 조사 수치는 80년 5월의 광주항쟁 당시의 학살자들이 학살을 은폐하려 했던 행태를 보는 듯해 씁쓸함을 넘어선 분노를 느끼게 한다.
일본 정부의 이같은 은폐, 왜곡의 의도와 진행은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무엇보다 명확한 배경은 유언비어 유포를 주동한 세력이다. 유언비어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관과 민중의 조직적인 헛소문 퍼뜨리기라는 것은 명백하다. 그 사실은 일반 민중의 방범대 격인 자경단(自警團)에 의한 학살 이외에 군대에 의한 학살이 공공연히 자행되었다는데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군대에 의한 학살은 철저히 은폐되어 그 수를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유언비어의 확산과 그에 따른 학살에 대한 관의 책임은 그 어떤 책임에도 앞선다.
그 이유는 일본 민중은 근본적으로 국가주의적 교육을 받으며, 관의 발언에 대해서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데 있다. 관의 의도적인 유언비어 전파가 없었다면 그토록 빠르고 광범위한 확산은 없었을 것이다.
관의 유언비어 유포는 곳곳에서 확인된다.
도쿄에서는 9월1일 저녁때에 경찰관들이 소문을 퍼뜨렸다. 이것은 도쿄의 초등학생의 작문과 1923년 10월 28일자 '호치(報知)신문' 석간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치안당국의 중추부인 내무성 경보국의 지령에 근거하는 행동이 아니고 개개 경찰서의 판단에 의한 행동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내무성 경보국장이 9월 2일에 "도쿄시내에서 조선인이 폭탄을 들고 석유를 부어 방화를 하고 있다. 이미 도쿄에서는 일부 계엄령을 선포했으니 각지에서도 선인에 대하여 엄중한 감시와 단속을 하라"는 전국 지방장관 앞으로 보내는 전문이 작성되고, 이 전문은 후나바시 해군무선송신소로부터 3일 아침에 타전되었다. 또, 역시 9월 2일에 사이타마현 내무부장은 내무성으로부터 전해져 온 지방과장의 보고에 근거하여 "이번의 지진에 즈음하여 도쿄에서 불령선인의 만동이 있어, 또 과격한 사상을 갖고 있는 자들과 손을 잡을 우려가 있으니, 정촌(町村) 당국자는 재향군인분회, 소방단, 청년단이 일치, 협력하여 경계하고 유사시에 대비하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리기에 이른다. 그 결과 사이타마현에서는 자경단(自警團)의 조직이 증가하면서 수많은 조선인이 학살되게 된다.(자경단은 지주나 마을 원로 등이 주도하여 조직하였으며 일본도, 죽창, 곤봉 등의 무기를 사용하여 조선인 학살에 앞장섰다. 일부 지역의 자경단은 경찰서를 습격, 경찰서에 수용된 조선인들을 학살하기도 한다.)
일본정부는 재일조선인들의 폭동설 유포와 학살에 대한 은폐를 위한 치밀한 공작에 들어갔다. 1923년 9월 5일 '임시진재구호사무국' 경비부에 모인 관료들은 "조선인이 폭행한, 또 폭행하려고 한 사실을 극력 수사하여 긍정하도록 노력할 것" 즉 조선인 폭동을 날조할 것을 결정하게 된다. 또한 10월 20일 사법성은 지진 중의 조선인의 '범죄'를 발표하는데, 발표된 조선인 '범죄자' 139명 중 120명은 이름이 불분명한 자, 소재가 불분명한 자, 도망자, 사망자 등이어서 범죄의 증거가 전혀 없었다. 그리고 3명은 조사, 예심, 공판 중에 있는 자로 범죄자가 아니었다. 나머지 16명은 절도나 횡령 등을 한 자였다. 소수의 범죄가 있었다고 해도 일반 일본인 범죄의 유형이나 수에 크게 다를 바 없는 것으로 정치성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조선인 폭동'은 완전 날조였던 것이다.
일본정부의 은폐 행위는 학살자의 재판에서도 나타났다.
1923년 9월 11일 '임시진재구호사무국' 사법위원회는 학살한 자를 검거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학살자 전원의 검거가 아닌 "범죄의 증거가 현저한 자만을 검거하고, 경찰에 대해 반항한 자에 대해 엄히 검거한다"는 결정이었다. 그 결정에 따라 389명 검거에 실형은 118명에 불과했다. 118명의 실형자중에 54명은 일본인을 학살한 자들로 조선인 학살자들에 대한 처벌은 30%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일본정부의 사건 은폐와 왜곡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조선인 학살 희생자가 매장되었던 곳의 유골 발굴이 일본 지식인과 시민단체의 노력으로 여러차례 이루어 졌지만 진전을 볼 수 없었다. 이는 발굴에 참여한 일본인 지식인의 말에 의하면 "정확한 증거를 제시할 수는 없지만 경찰에서 몰래 유골을 파내어 이장했다"는 의견을 밝히고 있다. 또, 희생자 매장에 관여했던 일본인의 "몇명의 조선인이 죽었는지 알지 못하게 처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라는 증언도 있다. 이러한 은폐속에서 여성학계와 단체를 중심으로 당시 조선인 여성들을 나체로 희롱하고 심지어 임산부까지 성학대를 한 후 학살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올해는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지 80주년이 되는 해이다.
대재앙이 있었고 그를 잊지 말자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자연재해인 지진에 의한 피해와 그로 인한 사회의 불안을 조선인의 폭동으로 몰아 잔인하게 학살한 일본이라는 국가권력과 사회가 있었고, 80년의 세월동안 오로지 은폐와 왜곡만이 존재했음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식민지배를 벗어나기 위한 조선인의 독립운동을 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날조를 통해 권력을 이용했다는 데에 분노를 금할 수 없다.
많이 늦었지만 이제라도 역사를 바로잡고 억울하게 희생된 영혼들을 위로해야 한다.
가해자는 과거의 잘못에 대해 진심으로 반성하고 사실을 규명해야 할 것이고 피해자는 지난 세월의 고통을 당당히 얘기하고 당연한 권리를 요구해야 한다.
바로 잡히지 않고 묻혀진 역사는 언제라도 반복될 수 있다.
※ 지진 피해 및 학살자 수, 재판 결과 등은 지난 6월말, 일본 도쿄에서 있었던 '재일조선인-한국-일본 합동워크샵'에서 발제된 일본인 야마다 쇼지 교수의 관련자료를 참고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