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사회 10월호]배우고 때로 익히는 즐거움

by 이왕재 posted Sep 17, 2003
이런저런 사정으로 고향에 내려가지 않게 되었더니 추석 연휴 5일이 선물처럼 눈앞에 떡하지 펼쳐졌다. 이 금쪽 같은 시간을 어떻게 쓸 것인가 궁리 끝에 최근에 눈여겨 보아 둔 경제학 관련 신간을 독파하기로 마음먹었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하드코어(?)에 도전하는 것이다. 언젠가 이해했던 것이 분명한 공식들이 새삼스럽게 낯설게 보였다. 수요 공급을 넘어 이윤율과 가격이론을 지나 경기변동에 필립스 곡선까지 이르게 되었을 때 나는 ‘때로 익히지’ 못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었다. 얼마전 친구와 토론 중에 국민소득이 높아진다고 삶의 질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논지의 주장을 폈다가, 이것이 우기는 것만으로는 설득력을 갖지를 못해 시작한 일이 여기까지 이른 것이었지만, 이미 내친 걸음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굳은 머리를 엉덩이로 대신해서 독파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교양을 쌓는 일이든 업무에 관련한 전문 지식을 익히는 일이든, 정보를 수집하여 분석하고 판단하는 일이든 작게는 회사일에서 크게는 나라살림에 이르기까지 배움과 때로 익힘 없이는 한걸음도 나아가기 힘든 법이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부족함을 허세로 감추고 세상의 이치를 모두 깨달은 듯 설쳐대는 우를 범하며 살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지난 달부터 배우기 시작한 중국어 클래스의 여덟 명을 둘러보니 내가 3등이다. 중국어 발음과 성조, 단어와 글자를 익히는 것은 만만치 않았지만 더 힘들었던 것은 배우는 학생의 위치에 있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주로 지시하고 판단했던 내가 이십대 중반의 강사 앞에서 방금 배운 단어를 발음하지 못하고 쩔쩔매는 학생의 모습이 되어야 했다.  배움이란 부족함을 인정하고 부끄러움을 무릅쓰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고작 서른을 지나 마흔에 이르는 나이가 되었을 때, 인생 전체에서 겨우 절반을 헉헉거리고 넘었을 그 나이에 우리는 가장 오만해 진다. 나의 판단은 항상 옳고, 나의 견해는 항상 정의이다. 내가 제일 똑똑하며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진 이들은 바보이다. 외롭게 정의로운 나는 불의와 오류에 가득찬 세계에서 꿋꿋이 버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주변의 사람들과 세상의 일로부터 늘 배우고 익힐 수 있다면 직장과 가정은 새로운 활력과 긴장의 공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김대리는 나보다 문서 작성에 능수능란하고, 김차장은 엑셀로 재무예측 시나리오를 작성하는 데에는 도가 텄다. 실무 추진에 있어서 꼼꼼하기 이를 데 없는 최과장 덕에 회사 제품 발표회 정도는 별탈 없이 진행된다. 박부장님의 아내 사랑은 남다르고, 윤주임의 박학다식함에 나는 혀를 내두른다. 이들이 내 일과 삶의 스승이 될 수는 없는 것일까?

'리더십 대가들의 학장'이라 불리는 워렌 베니스는 “성공하는 리더의 조건”으로 학습에 대한 열망과  끝없는 호기심을 꼽으며 이렇게 말한다. “세상의 변화에 발맞추어 끊임없이 자신을 업그레이드하는 학습에 대한 열의는 주변에 전파된다. 또한 유능한 리더의 입에서 '감탄사'가 자주 나온다. 그들에게 세상은 훌륭한 학습의 장소이기 때문에 항상 '왜'를 묻는다. 그들은 '인생이란 여행이다'는 경구처럼 순간순간 세상을 호기심을 갖고 바라본다. 그들에게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여정 그 자체를 즐기는 일이다.”

서른 번하고도 여러 번을 더 맞이하게 되는 이 가을에 배우고 때로 익히는 즐거움에 빠져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