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곁으로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섰다.
어머니 당신은 죽음을 어떤 마음으로 맞고 계실까? 어느 책에서 읽었다. 죽음을 앞 둔 사람의 마음을. 분노, 두려움, 좌절, 체념…. 평소에도 내색이 없으신 분이시라 그 마음을 좀처럼 들어다 볼 수 없다.
추측해본다. 두려우실 게다. 분노도 일어나실 게다. 좌절도 체념도, 무수한 심정이 복잡하게 마음을 어지럽히실 게다. 그 마음 헤아리지도 못하는 나는 불효자다.
병실에 누워계신 어머니의 얼굴에 외로움이 보인다. 아마 어머니, 당신께서는 외로운 게 아니실까? 입원한 사실을 알고도 병문안조차 없던 남동생에게 밤늦은 시간에 전화를 거셨다고 들었다. 전화를 받고 그제야 병실을 찾았던 외숙부에게 남모를 미움도 생긴다. 외가 쪽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전화 한 통 없는 친가 쪽에겐 아무런 미움도 기대도 없다. 어차피 친구보다 못한 관계였지 않았던가?
죽음을 앞두고 어머니께선 외로우신가 보다. 그리움에 가까운 외로움이라기보다 두려움에 가까운 외로움, 그 외로움이 당신의 외로움이다.
항암주사를 맞고 난 뒤로는 어머님의 얼굴에 외로움이 자주 깃든다. 체념 섞인 무표정한 얼굴에 깃든 외로움을 직면한다는 건 고통스럽다. 어머니 곁에 앉아 말벗이나 해드리며 외로움을 조금이나마 달래드리고 싶건만, 죽음을 마주하기가 싫다. 두렵다. 어머니께서 세상을 등진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싫다. 두렵다.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어머니보다 살아갈 날이 많은 내가 더 두렵다. 내가 더 무섭다. 두려움에 휩싸인 난, 어머니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까?
죽음을 기억할 ‘나이’도 안 된 어린시절,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그때 난 아버지의 ‘죽음’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래서인지 아버지의 ‘죽음’이 쉽게 잊혀졌다. 아버지는 제사 때나 얘기되던 얄팍하게 기억되던 존재였을 뿐이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로 할머니를 떠나보낸 기억이 있다. 그때도 ‘죽음’은 내 삶과 동떨어진 다른 세계이었다. 나에게 죽음은 기억되어야 할 그 무엇이 아니었다. 가급적이면 잊고 지워야 할 두려움이었다. 그래서 철저히 잊었고, 지웠다.
잊고 지운다고 그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난 건 아니었다. 두려워도 무서워도, 그리고 전율하면서도 우리들의 죽음을 만나야 하고, 결국은 죽음으로 귀성(歸省)해야 한다. 벗어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죽음은 슬픈 것은 아니다. 그것은 존재 그 자체다. 죽음은 의식의 창설자이다. 그래서 죽음은 정치적 자각의 터전이기도 한 것이다”고 <순수한 전쟁>에서 폴 비릴로 말했다. 생물학적으로 죽음은 자연스러움 그 자체이다. 인간의 비극은 아마 죽음을 인식했기 때문에 생기지 않았을까?
그래도 내게 생명을 주신 어머니의 죽음을 당당해 대면할 자신은 없다. 그만큼 죽음을 직면(直面)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닌가 보다. 어렵지만 어머니, 당신의 죽음을 내 삶 안으로 받아들여 기억하고 싶다. 죽음과 삶이 분리된 현실에서 죽음을 삶 속으로 가져온다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 아직 모른다. 다만 어머니의 죽음을 매개로 죽음과 공존하며, 죽음을 기억하는 삶을 개척하고 싶을 따름이다.
이렇게 말하지만, 과연 죽음을 어떻게 기억할 수 있을까? 두려워서, 죽음의 그림자가 낀 당신의 얼굴도 뵐 용기조차 없는 이 불효자가 어떻게 당신의 죽음을 기억할 수 있단 말인가?
어머니의 죽음을 앞둔 지금, 나의 모든 ‘성찰’이 무너진다. 나의 모든 ‘합리성’이 흐려진다. 현실의 고통과 두려움 앞에서 유약하기 짝이 없는 성찰과 합리성으로 세상을 잘도 조롱하면서 살았구나. 모든 성찰은 이성의 사기였다.
이제 다시 시작하련다. 어머니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2003/10/07
어머니 당신은 죽음을 어떤 마음으로 맞고 계실까? 어느 책에서 읽었다. 죽음을 앞 둔 사람의 마음을. 분노, 두려움, 좌절, 체념…. 평소에도 내색이 없으신 분이시라 그 마음을 좀처럼 들어다 볼 수 없다.
추측해본다. 두려우실 게다. 분노도 일어나실 게다. 좌절도 체념도, 무수한 심정이 복잡하게 마음을 어지럽히실 게다. 그 마음 헤아리지도 못하는 나는 불효자다.
병실에 누워계신 어머니의 얼굴에 외로움이 보인다. 아마 어머니, 당신께서는 외로운 게 아니실까? 입원한 사실을 알고도 병문안조차 없던 남동생에게 밤늦은 시간에 전화를 거셨다고 들었다. 전화를 받고 그제야 병실을 찾았던 외숙부에게 남모를 미움도 생긴다. 외가 쪽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전화 한 통 없는 친가 쪽에겐 아무런 미움도 기대도 없다. 어차피 친구보다 못한 관계였지 않았던가?
죽음을 앞두고 어머니께선 외로우신가 보다. 그리움에 가까운 외로움이라기보다 두려움에 가까운 외로움, 그 외로움이 당신의 외로움이다.
항암주사를 맞고 난 뒤로는 어머님의 얼굴에 외로움이 자주 깃든다. 체념 섞인 무표정한 얼굴에 깃든 외로움을 직면한다는 건 고통스럽다. 어머니 곁에 앉아 말벗이나 해드리며 외로움을 조금이나마 달래드리고 싶건만, 죽음을 마주하기가 싫다. 두렵다. 어머니께서 세상을 등진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싫다. 두렵다.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어머니보다 살아갈 날이 많은 내가 더 두렵다. 내가 더 무섭다. 두려움에 휩싸인 난, 어머니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까?
죽음을 기억할 ‘나이’도 안 된 어린시절,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그때 난 아버지의 ‘죽음’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래서인지 아버지의 ‘죽음’이 쉽게 잊혀졌다. 아버지는 제사 때나 얘기되던 얄팍하게 기억되던 존재였을 뿐이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로 할머니를 떠나보낸 기억이 있다. 그때도 ‘죽음’은 내 삶과 동떨어진 다른 세계이었다. 나에게 죽음은 기억되어야 할 그 무엇이 아니었다. 가급적이면 잊고 지워야 할 두려움이었다. 그래서 철저히 잊었고, 지웠다.
잊고 지운다고 그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난 건 아니었다. 두려워도 무서워도, 그리고 전율하면서도 우리들의 죽음을 만나야 하고, 결국은 죽음으로 귀성(歸省)해야 한다. 벗어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죽음은 슬픈 것은 아니다. 그것은 존재 그 자체다. 죽음은 의식의 창설자이다. 그래서 죽음은 정치적 자각의 터전이기도 한 것이다”고 <순수한 전쟁>에서 폴 비릴로 말했다. 생물학적으로 죽음은 자연스러움 그 자체이다. 인간의 비극은 아마 죽음을 인식했기 때문에 생기지 않았을까?
그래도 내게 생명을 주신 어머니의 죽음을 당당해 대면할 자신은 없다. 그만큼 죽음을 직면(直面)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닌가 보다. 어렵지만 어머니, 당신의 죽음을 내 삶 안으로 받아들여 기억하고 싶다. 죽음과 삶이 분리된 현실에서 죽음을 삶 속으로 가져온다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 아직 모른다. 다만 어머니의 죽음을 매개로 죽음과 공존하며, 죽음을 기억하는 삶을 개척하고 싶을 따름이다.
이렇게 말하지만, 과연 죽음을 어떻게 기억할 수 있을까? 두려워서, 죽음의 그림자가 낀 당신의 얼굴도 뵐 용기조차 없는 이 불효자가 어떻게 당신의 죽음을 기억할 수 있단 말인가?
어머니의 죽음을 앞둔 지금, 나의 모든 ‘성찰’이 무너진다. 나의 모든 ‘합리성’이 흐려진다. 현실의 고통과 두려움 앞에서 유약하기 짝이 없는 성찰과 합리성으로 세상을 잘도 조롱하면서 살았구나. 모든 성찰은 이성의 사기였다.
이제 다시 시작하련다. 어머니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2003/1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