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실업=청년노숙, ?

by 이윤주원 posted Nov 25, 2003
청년들이 좌절하고 있다.

청년들은 학문의 장에서 갈고 닦은 능력을 실전에 써먹으며 커가야 한다. 그러나 끝도 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한국경제는 청년들에게 기회를 박탈했다. 올해 3/4분기 누적성장률 2.6%는 능력을 갖춘 청년들에게는 절망적인 수치였다.

10월말 기준으로 청년실업률이 7%에 달한다하니, 그들이 느끼는 절망감이란 말로다 표현하지 못할 것이다. 더구나 한국의 실업률 계산법은 일주일에 하루만 일해도 취업상태로 보기 때문에 실제 실업률은 10% 이상을 상회할 것이라고 판단된다.

청년실업, 이 구조적인 문제(일자리 감소, 경제침체, 학력차별 등)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세대간의 갈등은 물론 계층간의 갈등도 점차 깊어질 것이다. 그만큼 청년실업이 우리사회의 중심 키워드로 떠오르고 있다. 청년실업이 중심 키워드이다 보니, 청년실업을 넘어 ‘청년 노숙자’란 조어까지 언론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조선일보 10월 15일자를 보면 ‘청년 노숙자 늘어난다’는 타이틀의 기사를 볼 수 있고, 11월 14일 MBC의 주부대상 시사프로그램인 ‘아주 특별한 아침’에서도 ‘늘어나는 청년 노숙자’란 꼭지를 다뤘다. 조선일보 기사를 인용해보자.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 13일 오후 8시, 지하철 서울역 지하도.…초점 없이 퀭한 눈, 시커멓게 얼룩진 피부, 너저분한 옷차림으로 한눈에 노숙자임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들 사이에, 단정한 얼굴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노숙 경력 3달이 채 안 된 ‘신입’들. 쪼그린 양 무릎 속에 얼굴을 파묻고 배식받은 밥을 열심히 먹던 신모(27)씨도 그 중 하나였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지 모르겠어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직장을 알아보고는 있는데 갈수록 이 생활에 젖어 ‘될 대로 되라’는 생각도 들고….”

서울 소재 S대학 경영학과 2학년을 중퇴한 신씨는 여러 곳에 이력서를 넣었지만 면접 한번 보지 못했다. 부모가 이혼하며 할머니 손에서 자란 그는 어려운 형편 때문에 대학공부를 중도하차했다. 조금씩 모아뒀던 돈이 바닥나며 자취방을 떠났고, 길거리로 나앉은 지는 3개월째.

신씨는 낮에는 남산·용산 도서관 등에서 신문과 책을 읽고, 인터넷을 통해 취업정보를 얻거나 이력서를 넣는다고 했다. 도서관 보관함에는 면접에 대비, 양복 한벌까지 비치해두고 있지만 아직 한 번도 써먹지 못했다며 씁쓰레한 웃음을 지었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서울 소재 대학까지 다녔던 청년이 서울역 지하도에서 비참한 몰골로 산다는 것은. 사회로 첫발을 내딛어야 할 청년이 서울역 지하도로 첫발을 내딛은 것을 보면 말이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경제를 살리는 길뿐이다.

그러나 과연 경제가 살아나더라도 노숙 문제가 해결될까? 언론에서 이야기하는 청년노숙이 광범위하게 실재하는 것일까? 궁금한 것이 하나, 둘이 아니다.

홈리스 지원 활동가 입장에서 보면, 언론은 예나 지금이나 노숙의 구조적인 원인을 건드리지 않는다. 경제상황의 악화가 도시의 취약계층을 노숙으로 끌어내리는 동기이기는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결코 아니다. 도시의 저소득계층이 적절한 비용으로 감당한 수 없는 주거 비용과 빈곤으로 인한 가족해체가 노숙의 구조적이며 직접적인 원인이다.

기사의 주인공인 신씨의 가족력을 보면 어릴 때 이혼한 부모와 할머니 밑에서 경제적으로 빈곤하게 자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신씨의 노숙은 가족해체와 고질적인 빈곤이 근본원인이고, 현재 심각하게 겪는 경제침체는 다만 동기였을 뿐이다.

한국의 청년들이 부모로부터 경제적인 독립을 하는 시기는 대략 20대 중반부터 30대 초반 사이일 것이다. 따라서 경제상황이 아무리 나빠진다 하더라도 든든한 울타리인 부모가 경제적으로 붕괴하지 않는 한 청년들이 노숙까지 전락할 위험은 별로 없다. 한국사회에서 자식을 거둬줄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이 조금이라도 있는 부모라면 거리에서 잠을 자는 자식을 두고 맘 편할 부모들은 아무도 없다.

만약 청년 노숙자들이 기사처럼 눈에 띠게 늘어났다면, 도시빈민과 중산층의 가족해체가 엄청난 사회문제로 떠올랐을 것이다. 물론 우리사회는 가족해체와 주거불안의 가능성이 항상 존재한다. 지금도 집값을 올라가고 있고, 빈곤이 심화되면서 가족의 해체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한국경제가 좋아진다 하더라도 상대적으로 비싼 집값과 빈곤의 세습으로 ‘홈리스’ 문제는 심화될 것이다.

11월 중순, 청년노숙 문제가 심각하다고 해서 야간에 거리로 나가봤다. 얼마나 많은 청년들이 좌절하고 방황할까 생각하니 마음이 무척 무거웠다. 저녁 9쯤 되었나, 서울역 지하도를 찾아보니 술 취해 널브러진 50여명의 홈리스들 중에서 청년노숙자는 보이지 않았다. 을지로 입구 지하도에서도, 을지로 1가 구 브랭땅 백화점 지하도에서도 젊은 노숙자가 간혹 보이긴 했으나, 언론에서 호들갑떠는 것처럼 그다지 많아보이지는 않았다.

그날따라 없나 싶어서 3일 뒤에 다시 나가 봐도 예나 지금이나 홈리스들의 연령대는 비슷했다. 그래도 불안한 마음에 서울역 근처에 소재한 드롭인 센터 실무자에게 “언론에서 떠드는 것처럼 청년 노숙자가 많냐”고 물어봤다. 그러나 그 실무자는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냐”면서 “언론에서 호들갑떠는 것은 청년실업이 심각하니까 지레짐작으로 청년 노숙자도 늘 것이라고 생각한 채 떠든 게 아니냐”며 언론의 경박함에 일침을 가했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청년실업이 심각하다. 그러나 청년실업이 청년노숙으로 빠르게 이어지지는 않는다. 청년실업의 심각함은 청년들이 홈리스로 전락하기 때문이 아니라, 기회의 상실에서 오는 분노가 국민통합을 저해하고 세대와 계층간의 갈등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이대로 청년실업이 고착된다면 빈익빈(貧益貧) 부익부(富益富)의 사회로 가는 것을 아무도 막을 수 없다. 계층간의 신분 상승기회를 막고 빈곤을 세습시키는 사회가 어떻게 국제사회에서 리더십을 갖고 국익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인가? 바로 이러한 지점을 언론이 다루어야 한다.

한국 언론이 엘로우 페이퍼가 아니라면 더 이상 청년실업=청년노숙이라는 성찰적이지 못한 공식을 접어야 한다. 경기침체에 의한 실업도 노숙의 이유는 될 수 있지만, 노숙의 구조적인 원인은 주거와 가족해체, 빈곤의 세습화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