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적인 한파였다. 30년간 서울살이를 하는 동안 몇 번 겪지 못했던 추위였다.
못 먹고살던 예전 겨울은 으레 추웠다. 그러나 산업화는 물질의 풍요만 우리에게 준 것이 아니라, 겨울의 혹독함도 잊게 했다. 석유문명시대의 도시 서울에서, 겨울은 눈과 크리스마스로 상징되는 낭만 그 이상의 무엇이 아니었다. 그러나 자연은 위대했다. 서울의 얄팍한 석유문명을 비웃듯이 동장군의 무서운 칼날이 우리를 겨누고 있었다.
민족 최대의 명절과 더불어 시작된 매서운 한파는 수도관을 터트리는 것은 물론 사람의 생명도 앗아갔다. 쪽방이라도 있는 사람이야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지는 않았지만 거리의 홈리스들은 다르다. 그들에게 있어 겨울철 노숙은 생명을 건 도박이다. 자칫 잠깐 방심해서 실수라도 하면 그날로 염라대왕을 만나야만 한다.
지난 1월 24일 롯데백화점 앞 지하도에서 숨진 채 발견된 30대의 홈리스도 추위를 이기려고 마신 술 때문에 거리에서 싸늘한 주검이 되었다. 또한 부산 부전동 대현지하상가 내 화장실에서 주검으로 발견된 고씨(남▪67)도 추운 날씨 때문에 지병과 폐렴이 악화돼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듯 겨울철 노숙은 죽음의 사신을 앞에서 벌이는 도박이다.
동장군의 사나운 기세가 한풀 꺾인 뒤 회현역 지하도를 찾았다. 우리는 그들의 안부가 궁금했다. 혹시 얼어 죽지는 않았는지, 병원으로 실려 가지는 않았는지, 모든 게 궁금했다.
회현역 지하도에 도착하자마자 할배에게 물어보았다. 죽은 사람은 없는지, 병원에 간 사람은 없는지. 다행스럽게도 회현역의 홈리스들에게는 큰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지하도에서 한뎃잠을 자던 그들의 얼굴에는 짙은 피로감이 엿보였다. 피로감의 원인은 이번 한파가 워낙 대단했기에 추위를 이기느라고 모든 힘을 다 쓴 탓일 것이다.
짙은 피로감으로 표정들이 밝지는 않았지만 다들 건강해보였다. 죽음의 위협과 싸운 사람들 치고는 그리 어두운 표정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의 밝음도 보였다. 회현역 지하도에서 노숙을 해오던 정준하(남▪68)씨도 지독했던 이번 추위를 이겨낸 주역이었다. 더구나 정씨는 심한 당료로 투병을 하고 있었다. 한달전만 해도 62킬로그램이 넘었던 그였는데, 간신히 추위를 이기고 체중을 달아보니 56킬로그램밖에 안 나갔다고 한다. 병도 병이지만 서슬이 시퍼런 동장군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고행하던 고타마 싯타르타처럼 광대뼈가 드러난 얼굴에 앙상한 뼈마디가 보이는 정씨는 전사였다. 동장군에 맞서 싸운 가난한 전사였다. 정씨뿐만 아니다. 모든 거리 홈리스는 전사이다. 한파를 이겨낸 전사들이다.
그러나 많은 시민들은 한겨울에 노숙하는 홈리스들을 보고 비난하듯이 한마디를 툭 던진다. 저치들은 지들이 좋아서 저러는 거야. 도와줄 가치도 없다니까! 얼마나 게으른지 몰라. 그렇게 말하면 죄의식이 사라질까 그러는지 참 쉽게도 내던진다.
아무리 그래도 이것만은 알아야 한다. 이 세상에 거리의 한뎃잠이 편하고 좋아서 선택한 사람은 별로 없다. 부처님과 그 제자들이나 거지성자 페더 노이야르나 자발적으로 거리 노숙을 선택할 뿐이다. 무소유를 주장하는 한국불교의 수행자들도 거리 노숙은 하지 않는 것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한여름 노숙도 힘든데, 한겨울 노숙이야 더할 말이 있으랴.
거리 홈리스, 그들은 전사다. 그러나 그들이 의도적으로 거리 노숙을 선택하진 않았다. 어느 미친X이 생명을 걸고 도박을 하겠는가. 홈리스들도 생명을 건 도박을 즐기지는 않는다. 그들은 거리로 내몰렸기 때문에 강요에 의한 도박을 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