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옆 만화방
-갤러리 페이크-
미술관 옆에 동물원이 있다 하길래, 동물원에 갈 요량으로 미술관을 찾았다. 미술에 무뢰한이다 보니 미술관을 제껴 두고 동물원부터 찾았다. 암만 찾아도 동물원은 안 보이고 꽤 큼직한 만화방만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만화방 문을 여니 퀴퀴한 책 냄새가 먼저 반겼다. 이런 저런 만화를 고르다가 문득 마음이 바뀌어 만화방에서 나왔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미술관은 한 번쯤 둘러볼 마음으로 미술관 문을 조심스레 밀쳤다.
-미술관에서 수다-
E. H. 곰브리치는 미술(Art)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곰브리치의 주장이 옳다면, 자라오면서 보고 듣고 만졌던 많은 미술품들은 무엇이고. 수많은 미술관에서 폼 잡고 미술을 감상하던 사람들은 무얼 보고 있었던 걸까? 그리고 고호, 고갱, 이중섭, 박수근은 도대체 누구였는지 아리송하고 궁금해진다.
미술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과연 미술(Art)이란 무엇인가? 사실 우리들이 부르는 미술이라는 말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전혀 다른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들을 안다면 인간의 모든 표현행위를 미술이라 불러도 괜찮을 것이다.
과연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술작품에서 무엇을 보길 원할까? 사람들은 그들의 현실생활에서 보고자하는 것을 그림 속에서도 보기를 원한다. 하지만 소재를 ‘실물과 똑같이’ 재현한다고 위대한 미술작품은 아니다. 한 작품이 가지고 있는 위대함, 즉 아름다움은 그 소재가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 속에 있는 게 아니다. 위대한 작품은 위대한 진실성을 담고 있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미술이 어렵다고 한다. 뭘 그렸는지, 뭘 표현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도 투덜거린다. 그러나 이해가 안 된다고 미술을 공격할 이유는 없다.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을 보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듯이 사물을 보이는 대로 묘사하지 않고 다르게 변형시켜서 묘사하거나 때로는 왜곡시키기도 한다. 미키마우스는 실제 쥐를 닮지 않았지만 그걸 보고 쥐가 아니라고 투덜거리는 사람은 전혀 없다.
만화에 익숙한 사람들은 미술가들이 아름다움을 찾기 위해, 표현의 진실을 찾기 위해 의도적으로 현실을 왜곡시키는 것에 대해 익숙하다. 그런 만화를 보면서 어떤 독자도 현실과 똑 같이 그리지 않았다고 비난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피카소의 목탄소묘 <수탉>을 보며 닭과 똑같지 않다고 비난해선 안 된다. 피카소가 <수탉>을 통해 표현하고 싶었던 진실은 결코 닭의 모습을 화폭에 재현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수탉의 공격성, 뻔뻔스러움과 우둔함을 표현하고 싶었다. 그는 풍자화법에 의지했고, 그의 풍자화법은 무척이나 설득력을 가졌다.
우리는 익숙한 것만 보려하는 습성이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풍경은 스스로 관찰의 경험으로서 익숙하게 된 풍경이 아니라 학습된 익숙함일 뿐이다.
미술시간, 아이들이 자연풍경을 그린다. 모든 아이들의 그림엔 하늘은 엷게 파랗고, 숲과 나무는 초록색이고 바다는 짙푸르다. 모두 똑같다. 그런데 과연 나무와 숲은 초록색으로만 보일까? 아이들이 그린 그림의 색깔은 관찰된 색이 아니라 학습된 색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초록색 풀과 푸른 하늘에 관해서 지금까지 들어왔던 것을 다 잊어버리려고 한다면. 더불어 외계인이 우중 여행 중 지구에 들러 지구의 모든 색을 처음 대하는 것처럼 본다면, 우리는 주위의 사물들이 엄청나게 놀라운 다른 색채들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위대한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데 있어서 제일 큰 장애물은 개인적인 습관이나 편견을 버리지 않으려는 태도이다. 편견과 습관을 버리더라도 현대미술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현대미술을 바로 보려면 고호의 미술세계를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고호는 정확한 묘사에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목적에만 들어맞으면 사물의 형태를 과장하거나 심지어 변화시키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자연의 모방’이라는 그림의 목적을 의도적으로 버림으로써 미술사에 있어서 중요한 첫발을 내딛었다. 그러나 고흐가 예언했던 대로 사랑, 존경, 두려움 따위를 표현하기 위해 사물의 외형을 변형시키는 미술은 사람들의 이해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었다.
뭉크는 고호의 문제의식에서 한 발 더 나아간다. 뭉크의 석판화 <비명>을 보면 갑작스런 정신적 동요가 우리의 모든 감각적 인상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를 표현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모든 선들이 이 판화의 유일한 초점인 소리 지르고 있는 얼굴을 향해 흐르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장면 전체가 그 비명소리의 고통과 흥분에 가담하고 있는 것 같다. 소리를 지르고 있는 사람은 만화처럼 왜곡되어 있다. 둥그렇게 뜬 눈, 홀쭉한 빰은 죽은 사람을 연상시킨다. 무언가 끔직한 일이 벌어졌음에 틀림없다. 더구나 비명 소리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그의 판화는 더욱 불안감을 자아낸다.
이런 미술을 표현주의 미술이라 부른다. 표현주의 미술에 대해 사람들이 당황하게 되는 이유는 아마도 자연의 형태를 왜곡시켰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결과가 아름다움과 멀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덧붙여 표현주의 미술만이 현대미술의 전부는 아니다. 현대미술은 단순하게 분류할 수가 없다. 우리가 사는 시대가 더욱 복잡해졌기에 현대미술도 이런 복잡한 문제들에 대응하다보니 복잡해지고 어려워졌다.
-미술관 옆 만화방에서 수다-
미술관을 관람하면서 ‘미술’ 감상의 어려움을 느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미술관에서 난 아는 만큼만 보고 나왔다. 미술관을 나오자마자 옆에 있던 만화방에 들어갔다.
만화는 항상 ‘표현주의적’이다. 특히 캐리커처가 대표적이다. 만화가는 그가 조롱하려는 인물을 닮게 그리고 나서 그 인물에 대해 느낀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그것을 왜곡한다. 자연에 대한 이러한 왜곡이 유머의 기치 아래 이루어지는 한 아무도 이를 어렵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표현주의 미술도 이러한 의미로 볼 때, 진지한 만화정도밖에 안 될 것이다. 그렇다고 만화가 진지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애석하게도 만화는 그 가치에 비해 대접을 덜 받는다. 특히 한국은 심하다. 한국에서 만화는 애들이나 보는 질 낮은 그림책 대접밖에는 못 받는다. 그래서인지 대다수의 어른들은 만화를 결코 사서 읽지 않는다. 가끔 만화방에 가거나 대여점에서 빌려 읽을 뿐.
어찌됐건 만화방에 들어가 이모저모 살피면서 만화책들을 뒤적거려보았다. 한동안 눈에 띄는 만화는 안 보였다. 흥미를 잃고 만화방을 나가려는 순간 한 질의 만화가 책꽂이에 꽂혀있는 게 아니던가. 미술관에 들렀던 길이라 평소엔 그냥 스쳐지나갔을 법한 만화 <갤러리 페이크>가 눈에 화악---하고 들어왔다.
<갤러리 페이크>를 간단히 소개하지면 TV 쇼 <진품명품>과 영화 <인디애나 존스>를 섞어 놓은 만화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나 만화에 대한 일반인들의 익숙한 편견인 ‘그래봤자 애들 만화지. 뭐!’라고 생각하면 큰 코 다친다. <갤러리 페이크>는 만화는 유치하고 미술은 고상하다는 이분법적 가치관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만화의 세계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이 만화의 수준 높은 전문성은 읽는 독자로 하여금 의외의 지적 즐거움을 준다. 그래서 만화를 단순히 머리나 식히는 그림책이라고 생각한다면, <갤러리 페이크>를 집어 드는 순간 짜증과 후회부터 밀려올 것이다. 말풍선에 글이 무척 많은데다, 맛을 깊이 보기 위해서는 작가의 설명을 꼼꼼히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미술에 무뢰한들에게는 어려운 용어들이 많다. 그리고 인문과학서적인 아니기 때문에 각주가 자세히 붙어 잇지도 않다. 어떨 의미로는 참 불친절한 텍스트일 것이다. 대부분의 만화가 그렇지만.
<갤러리 페이크>는 만화로 보는 미술입문서다. 미술작품들이라는 소재로 만화적 상상력이 충분히 펼쳐진 만화지만 미술학도나 미술사학자, 미술평론가들이 읽기에도 부족함이 없는 작품이기도 하다. 미술평론가 윤범모씨는 이 만화를 읽고 쓴 추천의 글에서 한마디로 유능한 미술사학자 혹은 미술기자가 들려주는 자상한 미술이야기 같다고 밝혔다.
미술기자가 들려주는 자상한 미술이야기 같은 만화 <갤러리 페이크>. 일본과 한국에서 이 만화만큼 출판되자마자 뜨거운 환영을 받은 만화는 드물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중들에게는 철저히 외면당했다. 척박한 토양을 자진 한국에선 <드레곤 볼>이나 <슬램덩크>는 읽힐지라도 교양과 전문성 그리고 재미를 갖춘 이 만화가 뿌리내리기엔 어려웠나보다. 이 만화말고도 일본에서 나온 훌륭한 만화들 중에 한국에서 버림받은 만화들이 꽤 많이 있다. 어느 장르나 ‘저주받은 걸작’들이 있는 법.
<갤러리 페이크>의 아쉬움은 만화 소재로 쓰인 위대한 작품들을 제대로 감상 할 수 없다는 점이다. 출판만화의 질은 위대한 미술품들의 색을 표현할 길이 없고, 인류의 문화유산인 미술품들을 도판으로 출판하려면 그 비용이 너무 비싸 구입에 부담스럽다. 만약 만화의 소재로 쓰인 그 작품들을 만화와 같이 볼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었을 텐데.
-갤러리 페이크-
미술관 옆에 동물원이 있다 하길래, 동물원에 갈 요량으로 미술관을 찾았다. 미술에 무뢰한이다 보니 미술관을 제껴 두고 동물원부터 찾았다. 암만 찾아도 동물원은 안 보이고 꽤 큼직한 만화방만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만화방 문을 여니 퀴퀴한 책 냄새가 먼저 반겼다. 이런 저런 만화를 고르다가 문득 마음이 바뀌어 만화방에서 나왔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미술관은 한 번쯤 둘러볼 마음으로 미술관 문을 조심스레 밀쳤다.
-미술관에서 수다-
E. H. 곰브리치는 미술(Art)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곰브리치의 주장이 옳다면, 자라오면서 보고 듣고 만졌던 많은 미술품들은 무엇이고. 수많은 미술관에서 폼 잡고 미술을 감상하던 사람들은 무얼 보고 있었던 걸까? 그리고 고호, 고갱, 이중섭, 박수근은 도대체 누구였는지 아리송하고 궁금해진다.
미술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과연 미술(Art)이란 무엇인가? 사실 우리들이 부르는 미술이라는 말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전혀 다른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들을 안다면 인간의 모든 표현행위를 미술이라 불러도 괜찮을 것이다.
과연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술작품에서 무엇을 보길 원할까? 사람들은 그들의 현실생활에서 보고자하는 것을 그림 속에서도 보기를 원한다. 하지만 소재를 ‘실물과 똑같이’ 재현한다고 위대한 미술작품은 아니다. 한 작품이 가지고 있는 위대함, 즉 아름다움은 그 소재가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 속에 있는 게 아니다. 위대한 작품은 위대한 진실성을 담고 있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미술이 어렵다고 한다. 뭘 그렸는지, 뭘 표현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도 투덜거린다. 그러나 이해가 안 된다고 미술을 공격할 이유는 없다.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을 보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듯이 사물을 보이는 대로 묘사하지 않고 다르게 변형시켜서 묘사하거나 때로는 왜곡시키기도 한다. 미키마우스는 실제 쥐를 닮지 않았지만 그걸 보고 쥐가 아니라고 투덜거리는 사람은 전혀 없다.
만화에 익숙한 사람들은 미술가들이 아름다움을 찾기 위해, 표현의 진실을 찾기 위해 의도적으로 현실을 왜곡시키는 것에 대해 익숙하다. 그런 만화를 보면서 어떤 독자도 현실과 똑 같이 그리지 않았다고 비난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피카소의 목탄소묘 <수탉>을 보며 닭과 똑같지 않다고 비난해선 안 된다. 피카소가 <수탉>을 통해 표현하고 싶었던 진실은 결코 닭의 모습을 화폭에 재현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수탉의 공격성, 뻔뻔스러움과 우둔함을 표현하고 싶었다. 그는 풍자화법에 의지했고, 그의 풍자화법은 무척이나 설득력을 가졌다.
우리는 익숙한 것만 보려하는 습성이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풍경은 스스로 관찰의 경험으로서 익숙하게 된 풍경이 아니라 학습된 익숙함일 뿐이다.
미술시간, 아이들이 자연풍경을 그린다. 모든 아이들의 그림엔 하늘은 엷게 파랗고, 숲과 나무는 초록색이고 바다는 짙푸르다. 모두 똑같다. 그런데 과연 나무와 숲은 초록색으로만 보일까? 아이들이 그린 그림의 색깔은 관찰된 색이 아니라 학습된 색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초록색 풀과 푸른 하늘에 관해서 지금까지 들어왔던 것을 다 잊어버리려고 한다면. 더불어 외계인이 우중 여행 중 지구에 들러 지구의 모든 색을 처음 대하는 것처럼 본다면, 우리는 주위의 사물들이 엄청나게 놀라운 다른 색채들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위대한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데 있어서 제일 큰 장애물은 개인적인 습관이나 편견을 버리지 않으려는 태도이다. 편견과 습관을 버리더라도 현대미술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현대미술을 바로 보려면 고호의 미술세계를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고호는 정확한 묘사에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목적에만 들어맞으면 사물의 형태를 과장하거나 심지어 변화시키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자연의 모방’이라는 그림의 목적을 의도적으로 버림으로써 미술사에 있어서 중요한 첫발을 내딛었다. 그러나 고흐가 예언했던 대로 사랑, 존경, 두려움 따위를 표현하기 위해 사물의 외형을 변형시키는 미술은 사람들의 이해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었다.
뭉크는 고호의 문제의식에서 한 발 더 나아간다. 뭉크의 석판화 <비명>을 보면 갑작스런 정신적 동요가 우리의 모든 감각적 인상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를 표현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모든 선들이 이 판화의 유일한 초점인 소리 지르고 있는 얼굴을 향해 흐르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장면 전체가 그 비명소리의 고통과 흥분에 가담하고 있는 것 같다. 소리를 지르고 있는 사람은 만화처럼 왜곡되어 있다. 둥그렇게 뜬 눈, 홀쭉한 빰은 죽은 사람을 연상시킨다. 무언가 끔직한 일이 벌어졌음에 틀림없다. 더구나 비명 소리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그의 판화는 더욱 불안감을 자아낸다.
이런 미술을 표현주의 미술이라 부른다. 표현주의 미술에 대해 사람들이 당황하게 되는 이유는 아마도 자연의 형태를 왜곡시켰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결과가 아름다움과 멀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덧붙여 표현주의 미술만이 현대미술의 전부는 아니다. 현대미술은 단순하게 분류할 수가 없다. 우리가 사는 시대가 더욱 복잡해졌기에 현대미술도 이런 복잡한 문제들에 대응하다보니 복잡해지고 어려워졌다.
-미술관 옆 만화방에서 수다-
미술관을 관람하면서 ‘미술’ 감상의 어려움을 느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미술관에서 난 아는 만큼만 보고 나왔다. 미술관을 나오자마자 옆에 있던 만화방에 들어갔다.
만화는 항상 ‘표현주의적’이다. 특히 캐리커처가 대표적이다. 만화가는 그가 조롱하려는 인물을 닮게 그리고 나서 그 인물에 대해 느낀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그것을 왜곡한다. 자연에 대한 이러한 왜곡이 유머의 기치 아래 이루어지는 한 아무도 이를 어렵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표현주의 미술도 이러한 의미로 볼 때, 진지한 만화정도밖에 안 될 것이다. 그렇다고 만화가 진지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애석하게도 만화는 그 가치에 비해 대접을 덜 받는다. 특히 한국은 심하다. 한국에서 만화는 애들이나 보는 질 낮은 그림책 대접밖에는 못 받는다. 그래서인지 대다수의 어른들은 만화를 결코 사서 읽지 않는다. 가끔 만화방에 가거나 대여점에서 빌려 읽을 뿐.
어찌됐건 만화방에 들어가 이모저모 살피면서 만화책들을 뒤적거려보았다. 한동안 눈에 띄는 만화는 안 보였다. 흥미를 잃고 만화방을 나가려는 순간 한 질의 만화가 책꽂이에 꽂혀있는 게 아니던가. 미술관에 들렀던 길이라 평소엔 그냥 스쳐지나갔을 법한 만화 <갤러리 페이크>가 눈에 화악---하고 들어왔다.
<갤러리 페이크>를 간단히 소개하지면 TV 쇼 <진품명품>과 영화 <인디애나 존스>를 섞어 놓은 만화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나 만화에 대한 일반인들의 익숙한 편견인 ‘그래봤자 애들 만화지. 뭐!’라고 생각하면 큰 코 다친다. <갤러리 페이크>는 만화는 유치하고 미술은 고상하다는 이분법적 가치관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만화의 세계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이 만화의 수준 높은 전문성은 읽는 독자로 하여금 의외의 지적 즐거움을 준다. 그래서 만화를 단순히 머리나 식히는 그림책이라고 생각한다면, <갤러리 페이크>를 집어 드는 순간 짜증과 후회부터 밀려올 것이다. 말풍선에 글이 무척 많은데다, 맛을 깊이 보기 위해서는 작가의 설명을 꼼꼼히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미술에 무뢰한들에게는 어려운 용어들이 많다. 그리고 인문과학서적인 아니기 때문에 각주가 자세히 붙어 잇지도 않다. 어떨 의미로는 참 불친절한 텍스트일 것이다. 대부분의 만화가 그렇지만.
<갤러리 페이크>는 만화로 보는 미술입문서다. 미술작품들이라는 소재로 만화적 상상력이 충분히 펼쳐진 만화지만 미술학도나 미술사학자, 미술평론가들이 읽기에도 부족함이 없는 작품이기도 하다. 미술평론가 윤범모씨는 이 만화를 읽고 쓴 추천의 글에서 한마디로 유능한 미술사학자 혹은 미술기자가 들려주는 자상한 미술이야기 같다고 밝혔다.
미술기자가 들려주는 자상한 미술이야기 같은 만화 <갤러리 페이크>. 일본과 한국에서 이 만화만큼 출판되자마자 뜨거운 환영을 받은 만화는 드물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중들에게는 철저히 외면당했다. 척박한 토양을 자진 한국에선 <드레곤 볼>이나 <슬램덩크>는 읽힐지라도 교양과 전문성 그리고 재미를 갖춘 이 만화가 뿌리내리기엔 어려웠나보다. 이 만화말고도 일본에서 나온 훌륭한 만화들 중에 한국에서 버림받은 만화들이 꽤 많이 있다. 어느 장르나 ‘저주받은 걸작’들이 있는 법.
<갤러리 페이크>의 아쉬움은 만화 소재로 쓰인 위대한 작품들을 제대로 감상 할 수 없다는 점이다. 출판만화의 질은 위대한 미술품들의 색을 표현할 길이 없고, 인류의 문화유산인 미술품들을 도판으로 출판하려면 그 비용이 너무 비싸 구입에 부담스럽다. 만약 만화의 소재로 쓰인 그 작품들을 만화와 같이 볼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