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을(甲乙)정변
올해가 갑신년이다. 탄핵안을 통과시키고 이를 주도한 야당의 한 의원이 탄핵안을 갑신정변에 비유하면서 “120년 전 갑신정변은 김옥균이 일본으로 도망치며 3일 천하로 끝났지만, 2004년 갑신정변은 노무현 정부의 탄핵으로 결말이 났다.”고 했다고 한다. 정변은 정변이니 갑신년에 일어난 정변이라 부르는 것이야 어렵지 않은 일이지만, 이 정변이 120년 전의 그 개혁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지는 심히 의심스럽다. 오히려 결국 3일 천하에 그치고만 김옥균의 전철을 두 야당이 밟지 않을까 싶다.
나라의 운명을 둘러싸고 갑신정변이 있었다면, 회사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가끔 갑을정변이 일어난다.
회사의 모든 거래에는 갑과 을이 존재한다. 거래를 주도하는 갑은 그 대상인 을에 대해 일반적으로 많은 결정권을 가진다. 예를 들어 회사의 구매담당은 판매회사의 영업사원에 대해 우월한 지위를 가지게 된다. 구매 수량, 금액, 시기 등에 대한 결정권이 갑에게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을은 갑에게 50만원을 초과하지 않은 범위의 접대비를 지출하면서 접대를 하게 된다. 50만원을 초과할 경우 접대 대상과 목적을 적시해야 하기 때문에 오히려 갑에게 더 큰 누가 될 수 있다. 이것은 갑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산업자원부에서 발간되는 사내지에 실린 한 기업체 임원의 칼럼은 을의 처량함에 대해 정부기관의 “갑님”들께 이렇게 호소하고 있다.
“갑은 장모님의 회갑연 청첩장을 을에게 쉬이 보낼 수 있으나 을은 갑에게 가친의 부고도 재삼 망설여야 한다. 고스톱을 치려면 우선 을의 지갑이 갑의 것보다 최소한 몇배 이상 두둑해야 하고 을은 계속 잃어 도 웃으면서(고스톱에서 돈 잃으면 부처님도 성질낸다는 말이 있으나) 계속 쳐야하고 결과는 을이 절대 딸 수 없다는 것을 처음부터 갑과 을이 서로 알고 치는 것이다. 을은 갑이 후배라고 해서 함부로 경칭을 생략하면 안 된다. 을은 갑에게 한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 하고 갑은 을에게 한 약속 사실을 잊을 수도 있다.”(산업자원가족 80호 중에서, 1998년)
하지만 이 권력은 사람 개인의 능력이나 인격, 지위에 관계없이 갑과 을, 어느 자리에 있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안하무인의 갑을 상대하고 난 뒤 을의 담당자는 입술을 씹으며 다짐한다. 언젠가 내가 갑이 되면 그만 두지 않으리라.
그 상상은 가끔 현실로 실현된다. 갑과 을이 뒤바뀌는 것이다. 하는 일도 같고 사람도 그 사람인데 명함에 새겨진 회사명이 달라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입장이 정반대가 된다. 정부기관에서 갑의 역할을 수행하던 분들이 공직을 그만두고 을의 입장에서 공공기관을 상대해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역지사지(易地思之)라고 했다. 갑을의 처지가 변하듯 여야의 처지도 바뀐다. 혹여 갑의 지위라는 사소한 권력을 휘둘러 일신의 영달을 꾀하려는 유혹이 있다면 혹시 을의 처지가 될 수도 있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 공평하고 무사해야 할 일이다. 국회의 다수당이 꼭 새겨들었으면 해서 하는 이야기다.
* 참여사회 4월호에 실릴 글입니다.
올해가 갑신년이다. 탄핵안을 통과시키고 이를 주도한 야당의 한 의원이 탄핵안을 갑신정변에 비유하면서 “120년 전 갑신정변은 김옥균이 일본으로 도망치며 3일 천하로 끝났지만, 2004년 갑신정변은 노무현 정부의 탄핵으로 결말이 났다.”고 했다고 한다. 정변은 정변이니 갑신년에 일어난 정변이라 부르는 것이야 어렵지 않은 일이지만, 이 정변이 120년 전의 그 개혁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지는 심히 의심스럽다. 오히려 결국 3일 천하에 그치고만 김옥균의 전철을 두 야당이 밟지 않을까 싶다.
나라의 운명을 둘러싸고 갑신정변이 있었다면, 회사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가끔 갑을정변이 일어난다.
회사의 모든 거래에는 갑과 을이 존재한다. 거래를 주도하는 갑은 그 대상인 을에 대해 일반적으로 많은 결정권을 가진다. 예를 들어 회사의 구매담당은 판매회사의 영업사원에 대해 우월한 지위를 가지게 된다. 구매 수량, 금액, 시기 등에 대한 결정권이 갑에게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을은 갑에게 50만원을 초과하지 않은 범위의 접대비를 지출하면서 접대를 하게 된다. 50만원을 초과할 경우 접대 대상과 목적을 적시해야 하기 때문에 오히려 갑에게 더 큰 누가 될 수 있다. 이것은 갑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산업자원부에서 발간되는 사내지에 실린 한 기업체 임원의 칼럼은 을의 처량함에 대해 정부기관의 “갑님”들께 이렇게 호소하고 있다.
“갑은 장모님의 회갑연 청첩장을 을에게 쉬이 보낼 수 있으나 을은 갑에게 가친의 부고도 재삼 망설여야 한다. 고스톱을 치려면 우선 을의 지갑이 갑의 것보다 최소한 몇배 이상 두둑해야 하고 을은 계속 잃어 도 웃으면서(고스톱에서 돈 잃으면 부처님도 성질낸다는 말이 있으나) 계속 쳐야하고 결과는 을이 절대 딸 수 없다는 것을 처음부터 갑과 을이 서로 알고 치는 것이다. 을은 갑이 후배라고 해서 함부로 경칭을 생략하면 안 된다. 을은 갑에게 한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 하고 갑은 을에게 한 약속 사실을 잊을 수도 있다.”(산업자원가족 80호 중에서, 1998년)
하지만 이 권력은 사람 개인의 능력이나 인격, 지위에 관계없이 갑과 을, 어느 자리에 있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안하무인의 갑을 상대하고 난 뒤 을의 담당자는 입술을 씹으며 다짐한다. 언젠가 내가 갑이 되면 그만 두지 않으리라.
그 상상은 가끔 현실로 실현된다. 갑과 을이 뒤바뀌는 것이다. 하는 일도 같고 사람도 그 사람인데 명함에 새겨진 회사명이 달라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입장이 정반대가 된다. 정부기관에서 갑의 역할을 수행하던 분들이 공직을 그만두고 을의 입장에서 공공기관을 상대해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역지사지(易地思之)라고 했다. 갑을의 처지가 변하듯 여야의 처지도 바뀐다. 혹여 갑의 지위라는 사소한 권력을 휘둘러 일신의 영달을 꾀하려는 유혹이 있다면 혹시 을의 처지가 될 수도 있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 공평하고 무사해야 할 일이다. 국회의 다수당이 꼭 새겨들었으면 해서 하는 이야기다.
* 참여사회 4월호에 실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