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네는 너무나 많은 악법을 갖고 있다.
법이란 사회구성원의 함의이며 구체화된 가치체이며 기준률이다.
도올이 말했던가...우리나라는 해방이 되지 않았다고,
아니, 해방된 적이 없다고....
일제 치하에서 우리는 PUBLIC의 가치, 공적인 개념을 잊고 살았다.
왜냐하면, 울타리 친 담장 밖으로 고개를 내미는 순간, 일제의 구둣발에 채여 목숨을 부지하기 조차
어려웠기 때문이다. 일제의 강압은 고려 조선을 이어오면서 확대된 공익의 테두리, 공적인 가치를
사치로 만들어 버렸다.
내 자식, 내 가족, 내 아들...이것들만 챙기기에도 벅찬 나날...
우리는 집 담장 밖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끔직하게도 무관심하게 된 것이다.
졸렬한 개인주의!!
이것이 우리를 옭아매어서,
졸렬한 지역주의와 학벌만능, 내 울타리 속의 식구들만 챙겨야 나의 승리가 보장된다는
졸렬의 악순환을 낳는다.
우리는 인간의 참모습에 기초한 법을 가질 역사적인 경험이 전무하였다.
헬레니즘, 르네상스, 단테의 신곡, 데카르트의 합리론, 시민혁명...
별로 잘 나지도 않은 서구 역사가 가진, 길면 3, 4백년 정도인 인본의 역사,
그 소중한 경험은 하나도 쌓아올리지 못한 채 이식당한 식민적 가치....
해방공간...
우리의 법 체계는 바로 이러한 식민적 가치 위에 이식된 서구적 휴머니즘이 대원칙이었다.
하지만, 1945년 이후 60여년 동안
우리는 휴머니즘과 합리에 천착하기 보단
이데올로기와 폭압과 맞섬 민주와 반민주의 대결에 주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한틈의 여유도 없었던 60년... 그 갈등과 애증의 역사 속에서 탄생한 법들이다.
집시법....표현의 자유라는 인본적 대원칙 앞에 그 이름을 휘날리는 넝마이다.
국보법....사상의 자유라는 인본적 대원칙 앞에 그 이름을 휘날리는 쓰레기이다.
선거법....선거의 자유라는 대위절차의 대원칙 앞에 오물을 뒤집어 쓴 사생아이다.
교육법....교육을 받을 권리를 보기 좋게 제어하고 통제하는 수단이다.
국회법....초등학교 학급회의 수준보다도 못한 모순의 덩어리이다.
공무원법..공무원에게 사상의 자유는 영원히 없는가? 정치적 의사의 자유는 없는가?
건축법...건물 하나 지으려면 도장을 몇개나 받아야 되는가?
이 법안들이 현재의 이 얼굴들을 하고 있는 역사적 이유가 있다.
당연히 집권 세력이 민초들을 제어하고 통제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에 반하는 세력들이 이전의 집권세력들을 쓸어내면서 방어적으로 고치고 수정한 결과이다. 건물 짓기 위해 도장을 수십개 받아야 할 때가 있었다. 공무원이 조금만 방심하면 건축업자들이 타인의 사유재산을 침해하면서 사익만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규제를 마련했는데, 그것이 결과적으로는 공무원과 업자들의 결탁 원인이 돼 버렸다.
집시법이 우리에게 지금 화살이 되어 우리의 등을 겨눌 줄이야...우리는 해가 떨어지면 우리의 정당한 정치적 의사를 허락을 받아서 표현해야 한다. 우리의 정당한 정치적 의사는 일개 경찰서장의 자의적 판단 앞에 무력하다. 선거 기간 동안 우리는 우리의 정당한 정치적 의사를 공개하지 못한다. 선거기간 동안 가장 자유롭게 개진되고 표현되어야 하는 데도 우리는 우리의 발목을 묶고 있는 이 쓰레기법들로 인해 정치적 의사표현을 제약당하고 만다. 패러디 사진 한장으로 대학생이 구속된다. 무엇으로 우리의 의사를 표현하나? 피켓을 들 수도 없다. 모이지도 못하게 한다. 소리도 못지르게 한다. 교수는 정당가입이 허용되는데, 교사는 정치적 맹인이 되라 한다. 입 다물고 있다가 선거날 표만 찍으란다.
난 민주당원이요...라는 소리조차 못 지르게 한다. 그래놓고 백성들은 정치에 무관심하단다.
앞서도 지적했듯이 이렇게 된 까닭이 있다. 이승만이 박정희가 전두환이 노태우가 김영삼이 재집권하기 위해 공무원들을 수족처럼 부리고 이용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공공연히 공무원 조직을 선거에 동원했다. 야당은 이를 피로써 막았고, 그래서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은 탄생하게 된다.
우리는 이제 이러한 법들이 우리의 올바른 정치적 의식에 족쇄를 채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역사는 진보한다. 진보라는 것은 낡은 것을 딛고 일어선다.
악법은 폐기되고, 선법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인본의 가치가 다시 이식되고, 그 위에 합리와 원칙이 바로 서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졸렬한 이기주의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 우리네 의식이
이제는 세계를 향해, 인간을 향해, 나 아닌 타인을 향해, 우리라는 공동체를 향해 바로 서야 한다.
공동체에 필요한 도덕률이 서 있지 않기 때문에 미주알고주알 법으로 명문화하려 한다.
내가 음주운전을 하면 그로 인해 타인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배려가 몸에 배어있지 않기 때문에 음주단속법이 마련될 수 밖에 없다. 그리되면, 법에 있는 것은 지키고, 법이 없으므로 죄가 없음이 되어 버린다. 법은 가치를 포함하고 있기는 하나, 가치를 포용할 수는 없다. 공중화장실에서 담배를 피는 것이 그 화장실을 이용하는 어린애들에겐 정말 치명적임을 우리의 내재 가치가 담보하지 못하기 때문에 제재를 가한다. 우리 자신의 마음 속엔 애들 하나쯤 콜록대는 것이 뭐가 그리 대수랴...하는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는 비약하면 어린이들은 이유없이 죽여도 혹은 죽어도 된다는 뜻에 다름아니다. 집에 돌아가면 우리는 베란다에서 담배를 핀다. 자신의 아이는 소중하고, 마누라의 눈총이 싫기 때문이다. 내 아이는 살아야 하고, 타인의 아이는 죽어도 좋다??? 이것이 바로 무너져 가는 우리를 힘겹게 지탱하고 있는 이중적 가치구조 혹은 졸렬한 이기주의가 아닌가!
우리 자신이 도덕률에 익숙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성장의 지름길이다.
그것이 바로 한단계 발전했다라고 스스로에게 말할 수 있는 테제이다.
나 하나가 사는 것이 아닌 '우리'가 살아가는 것에 삶의 진실을 담을 수 있어야 한다.
나의 행위가 혹은 내 자식의 행위가 혹은 내 조직의 행위로 인하여
타자가 힘들어 하고, 아파하며, 곤란에 빠지며, 불쾌해 하지는 않는가....
그러한 의식이 내 사고의 전면에 나서지 않는 한,
우리는 뫼비우스의 띠 어느 모퉁이에서 돌아도 돌아도 그자리에서 맴돌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졸렬한 이기주의의 역사적 굴레를 떨쳐버릴 것인가
아니면,
이때까지 그랬듯이 알고는 있는데 살짝 묻어서 편하게 기존가치에 편승할 것인가...
판단은 자유다. 하지만, 역사는 진보한다!!
중암 윤정훈
법이란 사회구성원의 함의이며 구체화된 가치체이며 기준률이다.
도올이 말했던가...우리나라는 해방이 되지 않았다고,
아니, 해방된 적이 없다고....
일제 치하에서 우리는 PUBLIC의 가치, 공적인 개념을 잊고 살았다.
왜냐하면, 울타리 친 담장 밖으로 고개를 내미는 순간, 일제의 구둣발에 채여 목숨을 부지하기 조차
어려웠기 때문이다. 일제의 강압은 고려 조선을 이어오면서 확대된 공익의 테두리, 공적인 가치를
사치로 만들어 버렸다.
내 자식, 내 가족, 내 아들...이것들만 챙기기에도 벅찬 나날...
우리는 집 담장 밖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끔직하게도 무관심하게 된 것이다.
졸렬한 개인주의!!
이것이 우리를 옭아매어서,
졸렬한 지역주의와 학벌만능, 내 울타리 속의 식구들만 챙겨야 나의 승리가 보장된다는
졸렬의 악순환을 낳는다.
우리는 인간의 참모습에 기초한 법을 가질 역사적인 경험이 전무하였다.
헬레니즘, 르네상스, 단테의 신곡, 데카르트의 합리론, 시민혁명...
별로 잘 나지도 않은 서구 역사가 가진, 길면 3, 4백년 정도인 인본의 역사,
그 소중한 경험은 하나도 쌓아올리지 못한 채 이식당한 식민적 가치....
해방공간...
우리의 법 체계는 바로 이러한 식민적 가치 위에 이식된 서구적 휴머니즘이 대원칙이었다.
하지만, 1945년 이후 60여년 동안
우리는 휴머니즘과 합리에 천착하기 보단
이데올로기와 폭압과 맞섬 민주와 반민주의 대결에 주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한틈의 여유도 없었던 60년... 그 갈등과 애증의 역사 속에서 탄생한 법들이다.
집시법....표현의 자유라는 인본적 대원칙 앞에 그 이름을 휘날리는 넝마이다.
국보법....사상의 자유라는 인본적 대원칙 앞에 그 이름을 휘날리는 쓰레기이다.
선거법....선거의 자유라는 대위절차의 대원칙 앞에 오물을 뒤집어 쓴 사생아이다.
교육법....교육을 받을 권리를 보기 좋게 제어하고 통제하는 수단이다.
국회법....초등학교 학급회의 수준보다도 못한 모순의 덩어리이다.
공무원법..공무원에게 사상의 자유는 영원히 없는가? 정치적 의사의 자유는 없는가?
건축법...건물 하나 지으려면 도장을 몇개나 받아야 되는가?
이 법안들이 현재의 이 얼굴들을 하고 있는 역사적 이유가 있다.
당연히 집권 세력이 민초들을 제어하고 통제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에 반하는 세력들이 이전의 집권세력들을 쓸어내면서 방어적으로 고치고 수정한 결과이다. 건물 짓기 위해 도장을 수십개 받아야 할 때가 있었다. 공무원이 조금만 방심하면 건축업자들이 타인의 사유재산을 침해하면서 사익만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규제를 마련했는데, 그것이 결과적으로는 공무원과 업자들의 결탁 원인이 돼 버렸다.
집시법이 우리에게 지금 화살이 되어 우리의 등을 겨눌 줄이야...우리는 해가 떨어지면 우리의 정당한 정치적 의사를 허락을 받아서 표현해야 한다. 우리의 정당한 정치적 의사는 일개 경찰서장의 자의적 판단 앞에 무력하다. 선거 기간 동안 우리는 우리의 정당한 정치적 의사를 공개하지 못한다. 선거기간 동안 가장 자유롭게 개진되고 표현되어야 하는 데도 우리는 우리의 발목을 묶고 있는 이 쓰레기법들로 인해 정치적 의사표현을 제약당하고 만다. 패러디 사진 한장으로 대학생이 구속된다. 무엇으로 우리의 의사를 표현하나? 피켓을 들 수도 없다. 모이지도 못하게 한다. 소리도 못지르게 한다. 교수는 정당가입이 허용되는데, 교사는 정치적 맹인이 되라 한다. 입 다물고 있다가 선거날 표만 찍으란다.
난 민주당원이요...라는 소리조차 못 지르게 한다. 그래놓고 백성들은 정치에 무관심하단다.
앞서도 지적했듯이 이렇게 된 까닭이 있다. 이승만이 박정희가 전두환이 노태우가 김영삼이 재집권하기 위해 공무원들을 수족처럼 부리고 이용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공공연히 공무원 조직을 선거에 동원했다. 야당은 이를 피로써 막았고, 그래서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은 탄생하게 된다.
우리는 이제 이러한 법들이 우리의 올바른 정치적 의식에 족쇄를 채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역사는 진보한다. 진보라는 것은 낡은 것을 딛고 일어선다.
악법은 폐기되고, 선법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인본의 가치가 다시 이식되고, 그 위에 합리와 원칙이 바로 서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졸렬한 이기주의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 우리네 의식이
이제는 세계를 향해, 인간을 향해, 나 아닌 타인을 향해, 우리라는 공동체를 향해 바로 서야 한다.
공동체에 필요한 도덕률이 서 있지 않기 때문에 미주알고주알 법으로 명문화하려 한다.
내가 음주운전을 하면 그로 인해 타인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배려가 몸에 배어있지 않기 때문에 음주단속법이 마련될 수 밖에 없다. 그리되면, 법에 있는 것은 지키고, 법이 없으므로 죄가 없음이 되어 버린다. 법은 가치를 포함하고 있기는 하나, 가치를 포용할 수는 없다. 공중화장실에서 담배를 피는 것이 그 화장실을 이용하는 어린애들에겐 정말 치명적임을 우리의 내재 가치가 담보하지 못하기 때문에 제재를 가한다. 우리 자신의 마음 속엔 애들 하나쯤 콜록대는 것이 뭐가 그리 대수랴...하는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는 비약하면 어린이들은 이유없이 죽여도 혹은 죽어도 된다는 뜻에 다름아니다. 집에 돌아가면 우리는 베란다에서 담배를 핀다. 자신의 아이는 소중하고, 마누라의 눈총이 싫기 때문이다. 내 아이는 살아야 하고, 타인의 아이는 죽어도 좋다??? 이것이 바로 무너져 가는 우리를 힘겹게 지탱하고 있는 이중적 가치구조 혹은 졸렬한 이기주의가 아닌가!
우리 자신이 도덕률에 익숙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성장의 지름길이다.
그것이 바로 한단계 발전했다라고 스스로에게 말할 수 있는 테제이다.
나 하나가 사는 것이 아닌 '우리'가 살아가는 것에 삶의 진실을 담을 수 있어야 한다.
나의 행위가 혹은 내 자식의 행위가 혹은 내 조직의 행위로 인하여
타자가 힘들어 하고, 아파하며, 곤란에 빠지며, 불쾌해 하지는 않는가....
그러한 의식이 내 사고의 전면에 나서지 않는 한,
우리는 뫼비우스의 띠 어느 모퉁이에서 돌아도 돌아도 그자리에서 맴돌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졸렬한 이기주의의 역사적 굴레를 떨쳐버릴 것인가
아니면,
이때까지 그랬듯이 알고는 있는데 살짝 묻어서 편하게 기존가치에 편승할 것인가...
판단은 자유다. 하지만, 역사는 진보한다!!
중암 윤정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