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 앞 잔디광장과 병든 노숙인

by 希言 posted May 10, 2004
시청 앞 잔디광장과 병든 노숙인


서울시청 잔디광장에 나가보면 희한한 구호를 듣게 된다. “잔디는 살아도 노숙인은 못사는 서울, Hi-Seoul" 한 노숙인 인권단체가 절규하는 외침이다. 도대체 무슨 사건이 일어났기에 이런 구호를 외치는 것일까?  

지난 4월 26일 서울시는 “중증질환자 노숙인의 무분별한 의료구호비 사용으로 과다지출이 문제가 돼 새로운 노숙인 의료구호방안을 시행한다”는 명목으로 노숙인 의료구호비 지급제한 방침을 개별 노숙인 쉼터에 통보해왔다. 청천벽력(靑天霹靂)같은 소식이었다. 서울시가 과연 노숙인들의 질병 현황을 알고나 벌인 일인지 의심스러웠다.

노숙인의 의료지원은 1997년부터 현재까지 의료보호체계에 포함되지 못한 채 독립적인 의료구호비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의료지원시스템은 노숙인들의 입원진료시 발생하는 과다한 비용을 책정된 예산이 감당 못하는 문제를 발생시키고 있다. 2001년도에도 예산 책정된 의료구호비가 모자라 추경예산으로 위기를 넘겼던 기억이 떠오른다.

현 노숙인 의료지원시스템이 근본적인 한계가 있는데도 서울시와 보건복지부는 이 문제에 대해 수수방관(袖手傍觀)으로 초지일관(初志一貫)하고 있다. 그래놓고서 한다는 소리가 노숙인들의 도덕적 해이가 이번 사태의 본질이라는 주장을 일삼는다. 서울시 관계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의료지원을 받는 대상자 중 상당수는 실제 노숙인이 아닌데도 노숙인에게 적용되는 혜택을 받아 예산이 무분별하게 과다집행 됐다”고 근거도 없이 소설을 쓰고 있다. 서울시 관계자의 주장이 옳다면 근거자료를 제시해야 할 것이다.

노숙인 의료구호비 부족의 이유는 서울시의 과장(誇張)과 악의(惡意)가 섞인 주장인 “노숙인의 도덕적 해이”가 아니라, ‘의료지원체계의 비공식성’ 때문이다.

우선 임시적인 의료구호 예산으로 의료서비스 제공의 지속성을 보장할 수는 없다. 서울시와 보건복지부에서 노숙인 의료구호비 예산 책정시 전문가의 참여를 보장하기 않기 때문에 예산 추정 자체가 부정확하다. 전문가가 참여한다고 해도 1년 동안 노숙인들이 얼만큼 어디가 아플지 예측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데, 행정관료의 책상에서 노숙인 의료구호비 예산안 과연 나올 수 있겠는가?

둘째, 비공식적인 의료지원체계는 의료기관에서 노숙인에 대한 차별과 서비스 거부가 상존할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다. 노숙인들이 가장 가기 싫어하는 의료기관이 바로 보건소다. 그 이유를 물어보면 불친절하다는 대답이 가장 많이 나온다. 환자가 의료기관에서 느끼는 불친절은 여러 가지 형태이겠지만, 크게 보면 차별과 서비스 거부로 나눠진다. 그만큼 의료서비스의 질에서 환자에 대한 친절이 의료행위에 중요한 요소라는 뜻이다. 그런데도 노숙인들이 ‘노숙자’라는 딱지 때문에 받는 차별이 싫어서 국가가 제공하는 의료서비스를 자의적으로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셋째, 현 노숙인 의료서비스 체계는 질병환자 치료에만 국한된 비효율적 예산 집행으로 질병예방기능을 갖지 못하고 있다. 2000년도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에서 조사한 <희망의 집(노숙인 쉼터) 입소자들의 건강상태 및 의료이용실태>를 보면 노숙인 쉼터 실무자들은 ▲입소인들의 정기 건강검진 ▲환자와 의료인간의 정기 건강상담 ▲입소인들 전체에 대한 보건․위생 교육 등 치료기능보다 예방기능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고, 예방시스템을 요구했다. 물론 아직까지 깜깜 무소식이다.

넷째, 서울시는 의료구호비 부족을 핑계로 쉼터 거주 노숙인들을 건강보험에 가입시켜 건강보험 재정에 노숙인 의료구호예산의 적자분을 떠넘기고 있다. 그러나 이는 결과적으로 노숙인 개인에게 의료비를 떠넘기는 방식이다.

다섯째, 의료사각지대에 놓인 거리노숙인들은 의료구호비 지급제한 방침 때문에 더욱 곤란에 빠지게 됐다. 1998년부터 2001년까지 연도별 노숙인 사망자수를 보면, ▲1998년 479명 사망 ▲1999년 467명 사망 ▲2000년 413명 사망 ▲2001년 313명 사망했다. 이런 현실을 개선하고자 서울역 근처에 거리노숙인 의료서비스 센터를 만들었으나, 거리노숙인들이 갖고 있는 질환의 규모나 심각성에 비해 진료소가 너무 부족하다. 또한 거리진료소에서 소요되는 비용도 의료구호비로 충당한다.    
  
노숙인 의료구호비 부족 사태는 결코 ‘노숙인의 도덕적 해이’ 때문이 아니다. 비공식적 의료지원체계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의료구호비 부족사태는 되풀이 될 것이다. 과오(過誤)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노숙인의 형편없는 의료지원체계를 개혁해야 한다.

우선 노숙인 의료관련 정책 결정의 비전문성으로 예산부족사태가 발생했기 때문에 정부와 민간(전문가)의 파트너쉽을 복구하여 예측 가능하고 합리적인 의료구호비를 책정해야 한다. 또한 거리의 현장 진료소 증설 및 지원 확대, 노숙인 지정 의료기관의 확대가 단기적으로 해결해야할 과제이다.

더 나아가 의료급여의 확대가 전제되지 않고서는 근본적인 해결을 도모할 수가 없다. 현재 노숙인은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하 국기법) 수급권자가 아니다. 따라서 2005년 노숙인 및 부랑인 복지 시행규칙이 통과되더라도 의료급여(의료보호) 체계로 편입될 가능성은 적다. 따라서 노숙인 복지 활동가들은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여 노숙인이 국기법 수급권자로 인정받게 해야 한다.

그러나 국기법이 개정되어 노숙인들도 의료급여 혜택을 받는다하더라도, 거리노숙인들은 제외될 확률이 높다. 노숙인 쉼터에 입소하지 않는 한 주거가 불확실하여 수급권 신청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장 의료서비스 시스템의 확대 및 강화는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서울 시청 앞 잔디광장 조성비가 40억원이라고 한다. 그런데 노숙인 의료구호비가 달랑 12억 4천 500만원이라니…. 개만도 못한 인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