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와 헌법개정

by 최배근 posted Jul 04, 2005

이분법 체계의 ‘87년 헌법’

지난해 총선 이후 수면 위로 떠올랐던 헌법 개정 논의가 내년 지자체 선거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진행될 것 같다. 일부에서 지적하듯이 헌법 개정은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접근할 간단한 문제가 아니고, 무엇보다 정확한 진단 없는 처방책은 약보다 독이 될 위험이 크기에 헌법 개정은 신중해야 한다. 헌법 개정은 공동체의 장래와 그 구성원의 삶과 직결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지금 개헌문제가 제기되는 것은 그동안의 경험으로 보아 현행 헌법이 지니고 있는 법리적 모순을 더 이상 지속시킬 수 없다는 공감대 때문이다.

이러한 법리적 모순은 현행 헌법이 개헌 당시 시간에 쫓겨 정치권의 타협에 의해서만 처리된 것도 있고, 시대 변화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데서 비롯한 것이다. 그 결과, 예를 들어 헌법 3조의 영토조항은 우리 사회를 ‘친통일’ 대 ‘반통일’ 혹은 ‘보수’와 ‘혁신’으로 분열시키는 주요 쟁점의 하나가 되고 있고, 양 진영 모두 영토조항의 개정에 대한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는 실정이다.

무엇보다 여야 합의에 의해 1987년 10월 29일 개정된 현행 헌법은 현재 우리 사회의 화두가 되고 있는 ‘87년 체제’의 상징성을 갖는다. 그런데 87년 체제는 권위주의 등 낡은 질서를 해체시켰다는 긍정적 평가가 가능한 반면, 그 해체가 새로운 시스템의 마련 없이 진행되었다는 부정적 평가도 피할 수 없다.

현행 헌법도 87년 6월 항쟁 이후 당대의 과제인 권위주의 종식과 장기집권 방지에만 초점을 맞추다보니 권위주의 해체 이후의 사회, 즉 다원화 사회에 조응할 수 있는 정치사회협약으로서 내용을 갖추지 못하였다. 예를 들어, 국민국가주의, 양성 구분 등에 기초해 있는 헌법체계에서 배제된 사람들의 권리가 문제되고 있다. 현행 헌법은 모든 것을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으로 구분하는 이분법을 채택하고 있다. 이처럼 ‘87년 헌법’은 분리와 배제를 특징으로 하는 근대의 산물로서 다원화가 강화되고 있는 우리 사회를 끌고 가는데 어려움을 보이고 있다.

경제와 헌법 개정 논의

근대의 시각으로 구성된 ‘87년 헌법’에서 경제를 바라보는 시각 또한 제조업의 논리에 충실하다. 다시 말해 개정 당시 ‘87년 헌법’은 경제의 서비스화(탈제조업) 및 지식기반경제의 도래를 준비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우리 사회 일부에서 경제문제와 관련된 헌법 개정 논의는 이러한 갭을 메우려는 시도라기보다는 과거 회귀적이다.

경제문제와 관련하여 논란이 되고 있는 대표적 헌법 조항은 119조다. 예를 들어, 일부에서 119조 1항(‘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과 2항(‘국가는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의 양립가능성 문제를 제기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기본적으로 경제이론의 무지에서 비롯한 것이다.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의 주장을 몇 가지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1항이 원칙이고 2항이 예외 조항이기에 정부의 시장개입 당연시나 시장개입 확대 주장은 문제라고 주장하나 2항은 포괄적 의미의 시장실패로 해석이 가능하다.

둘째, 2항이 각종 관치적 평등 조치('평등주의를 표방한 관치개혁')의 근거로 활용되어 80년대 후반 경제성장 정체의 원인으로 주장하는데 80년대 후반 경제성장의 정체는 근거가 없다. 실질 GDP 성장률을 보면 1987-89년간 연평균 9.5%, 1990-96년간 연평균 7.9%를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셋째, 헌법 제126조(‘국방상 또는 국민경제상 긴절한 필요로 인하여 법률이 정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영기업을 국유 또는 공유로 이전하거나 그 경영을 통제 또는 관리할 수 없다’)를 근거로 민간기업 활동에 관한 정부 개입은 위헌적인 월권행위라 주장하나 “국민경제상 긴절한 필요”에 대한 해석은 119조 2항과 기본적으로 차이가 없다.

넷째, 공정거래위원회의 '시장개혁 로드맵'(출자총액제한, 금융ㆍ보험사의 의결권 축소, 계좌추적권 재도입 등)은 위헌 소지가 있다고 주장하나 이에 대해 공정위를 비롯해 일부 시민단체가 주장하듯이 이러한 개혁조치들이 시장자율기능 강화에 목적이 있다는 주장을 무시하기 어렵다.

다섯째, 현 정부의 부동산정책이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이념과 위배된다고 하나 이 주장 역시 시장경제에 대한 이해의 차이에서 비롯한다. 예를 들어, 밀톤 프리드만(Milton Friedman) 같은 시장주의자들조차 토지가치에 부과되는 보유세가 가장 나은 세금이며 이를 제대로 부과하는 것은 효율성과 정의, 그리고 세입 확보 등의 측면에서 바람직하다 주장하였다.

마지막으로 현재 우리 경제에서 질적 성장이 정체된 것은 법치가 정착되지 못한데서 비롯했다고 주장하나 법치가 확립되지 못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외국에서 수입한 우리의 헌법이 우리 사회의 비공식적 규범체계와 조응하지 못한데서 비롯하는 것이다.

‘87년 헌법’과 새로운 경제 사이의 갭 메우기

다른 부문들과 마찬가지로 현행 헌법은 새로운 경제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헌법 개정 논의를 보면 시장의 개념이 지나치게 과잉 해석되는 느낌이다. 시장은 우상이 아니라 하나의 제도에 불과하다. 시장경제의 원리 또한 경제 문제로 희소성을 전제하고, 경제 목표로 희소한 자원에서 최대의 효과 획득, 즉 효율성을 추구하고, 그 수단으로 경쟁의 원리를, 그리고 경쟁을 제대로 작동시키기 위한 보조수단으로 사유재산권을 정당화시킨다.

반면, 서비스경제와 지식기반경제의 특징은 경제적 가치가 무형자산으로 이동했다는 점과 다양성을 지적한다. 즉 무형재는 제조업의 유형재와 달리 비경합성과 불가분성을 기본특징으로 한다. 즉 무형재는 풍부성을 특징으로 하기에 희소성의 제약을 받지 않고, 집합적으로 가치가 창출되기에 경쟁과 사유보다는 협력과 공유가 보다 효율적이다. 예를 들어, 전통산업과 달리 상대적으로 고위험-고수익을 특성으로 하는 지식정보산업(예로 최근의 벤처기업)은 사유보다 공유가 유리하다. ‘리스크 분산’설이 주장하듯이 이익의 보장이 불확실할 때는 나눔이 독점보다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유재산권 중심의 법체계는 다양한 재산권의 공존이 필요한 지식기반경제의 발전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괴리를 해소하기 위해서 재산권은 기본권보다 경제조항으로 이동시키고 다양한 재산권이 공존할 수 있는 헌법 구성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생활수단으로서의 재산과 생산수단으로서의 재산의 구별은 이론적으로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시장경제의 원리는 가격 중심의 이론체계, 수요와 공급의 이분법체계에 기초하고 있는 반면, 지식기반경제에서는 가격의 중심적 역할이 크게 약화되었고 수요와 공급의 구분이 어렵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거래 유형으로서 기존의 시장 및 기업(위계조직)과 더불어 네트워크가 새로운 거래 유형으로서 그 비중이 크게 증대하였다. 시장이라는 특정의 거래 유형을 중심으로 구성된 헌법으로는 다양한 거래 유형의 공존과 발전을 허용하기 어렵다. 즉 사회의 다른 부문에서 지적되듯이 경제와 관련해서도 다양성/다중성/관계를 중시하는 헌법 구성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 현실과 법 사이에 갭이 발생하고 그 결과 법이 사회진보에 걸림돌이 된다면 지식정보사회의 선두주자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최배근 운영위원장(건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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