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즈미의 압승과 동아시아의 미래

by 조민 posted Sep 16, 2005
고이즈미(小泉純一郞) 총리가 이끄는 일본 자민당이 지난 9월 11일 실시된 총선에서 중의원을 완전 장악하는 압승을 거뒀다. 전체 480석 가운데, 296석을 차지한 것이다. 자민당이 단독으로 과반의석을 얻기는 1990년 이래 15년만이며, 특히 1996년 소선거구제가 도입된 이후 실시된 선거에서는 처음이다. 이로써 31석을 얻은 공명당과 합친 연립여당은 개헌발의선인 320석을 넘는 327석을 획득, 일본 정치권의 개헌추진이 더욱 탄력을 받게 됐다.

사실 이번 총선은 자민당의 승리라기보다는 고이즈미 총리의 승리하고 할 수 있다. ‘우정민영화=개혁’ 기치를 내걸고 ‘자민당=개혁, 야당=반개혁’의 구도를 연출함으로써, 연금, 사회보장, 야스쿠니 신사참배, 이라크 파병, 헌법개정 등 다양한 정치 현안을 다룬 야당을 상대로 압승을 거둔 것이다. 특히 자민당 내 우정민영화 법안 반란파 37명을 겨냥, 명망가와 지명도 높은 여성 등 이른바 '자객 후보'를 내세워 일반 유권자들에게 "파벌정치만 일삼던 자민당이 뭔가 바뀌는 것 아니냐"는 인상을 심어주는 데 성공했다.

고이즈미 개혁신당

이른바 자민당 장기 집권체제인 ‘1955년 체제’가 지속되어온 일본 정치는 집단주의와 연고주의로 이어져오면서 당에 대한 헌신과 충성보다는 계파 위주의 파벌정치로 나타났다. 그러나 2001년 파벌정치의 연고주의와 권력게임을 깨고 등장한 고이즈미 총리가 자민당 내의 이단자로, ‘헨진(変人)’ ‘괴짜’ ‘독불장군’으로 불리면서도 오래된 낡은 질서를 깨고 대내외적으로 소신에 찬 독특한 정치 행보를 보임으로써 일본 국민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이번 결과를 두고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은 “상당수 유권자가 자민당이 아닌 사실상 ‘고이즈미 개혁신당’에 표를 던진다는 기분으로 자민당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고이즈미의 개혁 이미지가 만들어 낸 '고이즈미의, 고이즈미에 의한, 고이즈미를 위한' 선거가 된 것이다.  

선거의 핵심 쟁점이었던 우정민영화 사업 역시 자민당의 최대 표밭과 자금줄 역할을 해온 직원 28만 명의 우체국 조직을 해체하는 것으로, 이는 당내 유력 파벌들은 물론 정경유착의 표본이었던 거대 공기업에 일대 혁신을 초래하게 될 개혁조치라고 할 수 있다. 유권자들은 일본 정치의 고질병인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고 비효율적이고 공룡화 된 공기업에 메스를 가하겠다는 고이즈미의 개혁 의지에 손을 들어 준 것이다.




한편, 이번 선거의 압승으로 고이즈미 총리는 반대파가 ´독재자´라고 부를 만큼 매사에 독선적인 정치스타일과 리더십이 한층 강화돼 문자 그대로 ´대통령형 총리´가 될 가능성이 높다. 자민당 내부적으로는 명망가 위주의 신진을 대거 공천, 파벌과 이익집단이 당정의 의사결정구조에 영향을 미치는 구태정치를 일소하고 국가 정책결정 과정의 투명성 확보와 정치 체질의 수술이 기대된다. 또 우정민영화는 국철 분할ㆍ민영화, 도로공단 민영화, NTT 민영화 등 일련의 민영화 정책의 정점을 찍으면서 ´작은 정부´를 구현하고 정ㆍ관ㆍ업계의 유착 고리를 잘라냄으로써 정치ㆍ행정개혁 전반에까지 나아갈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할 것으로 전망된다.

현실화되는 동아시아의 신냉전

그러나, 개혁에 대한 일본 국민의 기대감에도 불구하고 고이즈미 총리의 압승을 바라보는 동아시아 주변국의 시선은 기대감보다는 불안감이 앞선다고 할 수 있다. 대외적으로 이라크에 주둔하고 있는 자위대의 파병 재연장을 강행하고, 개헌을 통한 보통국가화에 박차를 가할 것이다. 오는 11월 자민당 창당 50주년 기념대회에서 전력 보유와 교전 포기를 골자로 한 헌법 9조를 고치는 개헌초안을 발표하여 개헌을 공론화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또 종래의 ´미국 추종´을 강화할 것이다. 미국과의 미사일방어(MD)체제 구축에도 속도를 붙여 공동 기술연구를 개발단계로 이행하고, 주일미군 재편계획도 마무리하여 미국과의 군사일체화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군사대국으로서의 도약을 꾀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고 있다. MD체제는 우주, 해양, 해저 등에서 미사일 방어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최첨단 Hi-Tech로 현 단계의 군사과학 기술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한국이 배재된 채, 미국과 일본 중심으로 MD체제가 추진될 경우 한국의 첨단 과학기술 분야에서의 낙후를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대(對)아시아 강공 정책을 펼쳐 자칫 한국, 중국과 거듭된 외교마찰을 일으킬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포함한 역사ㆍ영토 분쟁이 정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고이즈미식 강경외교가 지속될 경우, 동아시아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차원의 긴장이 조성될 것은 자명하다. 납치자 문제를 둘러싼 대북한 압박도 강화될 것이며, 일본내 보수우익세력의 결집 또한 두드러질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중국과의 세력대결 구도를 촉진시킬 가능성이 있다. 동아시아협력의 장밋빛 미래가 자칫 말잔치로 끝나고 신냉전의 먹구름이 몰려올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