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ㆍ미간 신뢰 구축이 ‘자주’의 길이다

by 최배근 posted Dec 05, 2005
2004년 6월에 있었던 3차회담(6월23일~26일) 이후 미국의 ‘선핵폐기’ 주장과 북한의 ‘핵의 평화적 이용권 보장’ 주장이 팽팽히 맞선 가운데, 북핵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이 1년 넘도록 진전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6자회담 자체는 지속되어야 한다는 6개국의 기본입장, 일정한 합의를 도출하지 못할 경우 더 이상의 6자회담은 없을 것이라는 긴박성, 미국의 전략적 유연성 및 북한의 실리주의적 선택, 그리고 한국과 중국의 적극적 중재노력 등의 결과로 지난 9월 19일 4차 6자회담에서 ‘베이징 공동선언’이라는 대타협이 도출되었다.

다시 꼬이기 시작하는 6자회담

그러나 대북 금융제재 문제를 둘러싼 북한과 미국 사이의 공방이 갈 길이 먼 북핵 6자회담의 발목을 잡는 모양새를 보이고 있다. 미국 정부는 지난 9월 16일 북한이 마카오에 있는 중국계 은행인 ‘방코 델타 아시아(BDA)’를 통해 위조달러 지폐를 유통시키고 마약 등의 불법 국제거래 대금을 세탁하는 등 자금 조달과 융통을 해 온 것으로 드러났다고 발표했다. 이어 애국법 제311조에 따라 이 은행을 ‘돈세탁 우려’ 대상으로 지정하고 자국 금융기관들이 이 은행과 일체의 직ㆍ간접 거래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한편 다른 나라들에 대해서도 해당 은행의 불법 금융 활동에 유의토록 통보했다. 이로 인해 마카오 시장에서는 BDA가 망할 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팽배하면서 예금 인출이 줄을 이었고 마카오 은행감독기구가 은행 구제 차원에서 모든 거래를 동결시켰고 물론 북한 기업의 계좌도 막혔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11월 9일~11일 열렸던 제5차 1단계 6자회담에서 북측이 미국의 금융제재를 거론하면서 명백한 경제봉쇄라고 강하게 반발하고 나서자 미국은 “그 문제를 브리핑해줄 수 있다”고 답했고, 한국을 비롯한 관련국들은 “가급적 가장 빠른 시일”에 2단계 5차 6자회담을 갖기로 했다. 11월 11일 북한의 6자회담 수석대표인인 김계관 외무성 부상이 "조(북)미 쌍방은 앞으로 회담을 열어 금융제재 문제를 논의하기로 했다"고 주중 북한대사관에서 기자들에게 발표했던 북ㆍ미 금융분야 회담이 당초 12월 9일 뉴욕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무산됐다. 북한은 지난 12월 2일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외무성 대변인의 발언 형식으로 자국 금융제재와 관련해 “미화 위조 주장은 근거가 없는 것으로 이에 바탕을 둔 금융제재는 모략소동이며, 따라서 금융제재 해제는 ‘9ㆍ19 공동성명’의 이행을 위한 필수적인 요구이고, 합의대로 6자회담 단장급 회의를 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숀 매코맥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12월 1일(현지시간) 북한의 위조 달러지폐 제작ㆍ유통 문제와 관련, 12월 9일 예정됐던 북미 접촉에 북한이 불참키로 한 사실을 확인하고 “우리의 (접촉)제안은 아직 유효"하고, 이 접촉이 북핵 6자회담과 무관한 것이며 미국이 위폐 문제를 갖고 “협상하자”고 제안한 적도 없으며 위폐 방지를 위해 미 애국법 301조에 따른 조치를 취한 데 대해 북한 측에 “설명(briefing)해 주기” 위한 것일 뿐이고, 따라서 힐 차관보나 조셉 디트라니 대북협상 대사가 아니라 미 재무부 당국자들이 나설 것이라는 입장을 보였다.

‘금융제재-위조지폐’ 문제는 협상력 극대화를 위한 북ㆍ미간 줄다리기

이처럼 북ㆍ미간의 ‘금융제재(북한쪽 주장)-위조지폐(미국쪽 주장)’ 문제가 불거지면서, 그  냉기류의 틈을 비집고 미국과 일본 내에서 대북 강경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형국이어서 5차 2단계 6자회담 진전의 모멘텀을 갖자는 차원에서 염두에 뒀던 연내 ‘제주도 모임’의 무산 가능성은 물론, 내년 1월로 기대했던 제5차 2단계 6자회담이 예정대로 열릴지도 불투명하다는 우려 섞인 전망이 나오고 있다. 물론, 북ㆍ미간의 ‘협상이 무산’된 것도 아니고 북한 역시 ‘6자회담 거부를 통보’한 것도 아니 상태에서 여전히 회담 개최를 촉구하고 있으며, 한ㆍ중간에 “올해 안에 제주도에서 6자회담 당사국 비공식회의 개최를 추진하기로 합의”하는 등 회담의 ‘불씨 살리기’가 진행되고 있다.

사실 어렵게 만들어진 ‘9ㆍ19 공동성명’의 내용을 보면 합의 내용을 구체화하는 협상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이 따를 것으로 예상됐었다. 이런 점에서 북ㆍ미간의 ‘금융제재-위조지폐’ 문제는 상호 불신 속에서 회담을 진행하는 북ㆍ미가 서로 협상력을 극대화하려는 줄다리기라 할 수 있다. 미국이 위폐 사건을 공개한 9월 16일은 ‘9ㆍ19 공동성명’이 채택되기 3일 전이었고 마카오 위폐 사건은 11월 초순의 5차회담 때까지 집중 거론됐다. 그런데 미국 정부 당국은 애국법 제311조에 따라 BDA 은행을 돈세탁 ‘우려 대상’으로 지정하고 자국 금융기관에 대해 주의를 경고함으로써 마카오 금융시장의 마비상태를 초래했음에도 불구하고 국제관례상 요구되는 뚜렷한 근거를 밝히지 않고 있다. 지난 10월 7일 션 갈렌드 북아일랜드 노동당 당수가 체포됨으로써 북한이 100달러짜리 `슈퍼노트' 제작에 관여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는 미국의 주장 역시 마찬가지이다. 미국 측은 위폐사건은 세계 기축통화인 달러의 신뢰도를 떨어뜨릴 뿐더러 심지어 안보를 위협하는 중대범죄로 인식하고 있으며, 따라서 철저한 조사를 통해 ‘심판대’에 세워야 한다는 원칙적인 입장만을 고수하고 있는 상태이다.

한편, ‘9ㆍ19 공동성명’을 저울질 해본다면 북한에게 유리하며 따라서 그 이행방안 협의가 지연될수록 북한에게 득이 될 것은 없다는 평가가 대세이다. 그렇다면 북한이 그 직후 열린 제5차 1단계 회담에서 걸림돌로 작용할 게 뻔 한 금융제재 문제를 거론하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6자회담 수석대표급의 북ㆍ미 양자회담을 해야 한다는 ‘무리한’ 주장을 한 배경으로 북한이 ‘후폭풍’을 우려한 것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즉 앞으로 경제발전을 위해 IMF,  IBRD, ADB 등의 국제금융기구 가입을 통한 차관 도입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불법 위폐 사건에 오르내릴 경우 이로 인해 향후 6자회담 과정에서도 큰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는 계산을 했음 직하다. 따라서 차제에 이를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핵폐기에 따른 상응조치, 나아가 미국과 일본과의 관계정상화 논의에도 `후환'을 없앨 수 있다는 속내가 비친다.

한ㆍ미간 신뢰회복으로 “북핵문제 이후의 북한문제”에 대한 입장 차이를 해결해야

한국과 중국은 ‘금융제재-위조지폐’ 문제와 관련하여 ‘제주도 6자회담 당사국 비공식회의 합의’ 과정에서 “사실과 국제법적 규범에 입각해서 6자를 진전시키는 방향으로 조기에 해결돼야 한다는 원칙”을 분명히 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사실과 국제법적 규범’은 위폐 문제와 관련해 미국이 충족시킬 조건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사실 위폐 문제를 제기한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위폐문제를 북핵 문제보다 우선시 할 수는 없다. 게다가 위폐문제로 6자회담이 좌초할 경우 미국은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물론, 현재 북ㆍ미간에 접촉 수준과 방식에 이견을 보이고 있는 ‘금융제재-위조지폐’ 문제도 궁극적으로 해결 방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근본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이와 유사한 암초는 계속 반복될 가능성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유엔인권선언 57주년 기념일인 12월 8일부터 사흘간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북한인권국제대회가 그렇다. 북한민주화운동본부 등 국내 인권단체들이 주최하는 형식이지만 미 행정부가 대거 예산을 지원했다. 미 국무부는 지난 4월 인권단체인 프리덤하우스에 1년간 북한 관련 인권대회를 개최할 비용으로 197만 달러(약 20억원)를 지원했고, 이는 지난 7월 워싱턴에서 열린 북한인권대회 비용 및 이번 서울 대회의 해외인사 초청 비용으로 사용된다. 이번 행사는 12월 13일 남북장관급 회담을 앞두고 북의 심기를 상당히 자극할 것으로 보여 남북관계에도 파장이 예상된다. 준비위원회 측은 "남북관계를 고려해 북한 인권 문제를 뒤로 미룰 수는 없다"는 입장이지만, 북한인권결의안이 유엔에 제출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한반도 남측 서울에서 개최되는 이번 대회는 북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다.

이처럼 9ㆍ19선언을 통해 한반도 비핵화와 북ㆍ미 관계 정상화 그리고 한반도 평화체제 정착 등에 합의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 진전을 이루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북핵문제와 북한문제에 대한 인식 수준이 매우 빈곤하기 때문이다. 북의 생존전략인 핵문제가 미국의 군사적 패권 논리와 일본의 우경화를 부채질하고 이는 또 북한의 생존에 더욱 위협적인 환경을 조성하는 악순환 고리를 형성하고 있지만, 동시에 우리는 1994년 북한에 대한 공격을 검토하기도 했던 클린턴 정부가 이후 정책을 변경하여 북한의 체제를 보장하고 북미 관계를 정상화하려는 노력으로 그 결실을 거두기 직전까지 갔던 경험도 갖고 있다.

전자의 경우는 북핵 문제와 북한 문제가 현재의 6자회담 구도가 보여주듯이 단순한 한반도 문제가 아니라 동북아문제이자 나아가서는 국제문제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한반도 문제의 해결은 국제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북ㆍ미간 뚜렷한 힘의 비대칭성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강자인 미국이 상대방의 궤멸을 선호하는 한 한반도 위기는 재생산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러한 위기를 해소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북ㆍ미관계가 아니라 한ㆍ미관계였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부시 집권 후 최악이 된 북미 관계와 그로 인한 한반도 전쟁발발 위기 상황을 해소시킨 것은 한ㆍ미관계였다.

반미자주화 방식은 중ㆍ일 영향력만 키워

한ㆍ미관계의 핵심인 한ㆍ미동맹의 문제와 관련하여 일부에서는 한반도를 바라보는 양국의 시각과 전략 차이에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단순화시키면, 미국은 한반도정책의 초점을 전지구(글로벌)적 반테러정책 차원에서 북한 비핵화에 맞추고 있는데 비해, 한국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정전문제와 분단 해소, 곧 민족통일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북한을 역동적인 동아시아지역에 복귀시키려는 한국 외교의 목표와 북한 비핵화를 포함해서 동아시아지역에 대한 전략적 이익을 키우고, 영향력을 유지하며, 장기적으로 한ㆍ미동맹 관계를 더욱 굳건히 하는 길이 결코 상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한반도에서 분단체제가 지속되고, 게다가 남한에서 반미의 목소리가 커지는 상황이 북ㆍ미관계의 정상화를 통해 북한이 개방세계로 나오는 것보다 결코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중국의 입장에서 볼 때 북한이 남한에 의해 흡수되거나 개방세계로 나오는 경우가 현재 상황을 유지하는 것보다 도움이 되지 않는다. 현재의 분단 상황에서는 북한이 한반도에서 미ㆍ일 군사동맹에 대항하는 교두보 역할을 해주는 반면, 북한이 남한에 의해 흡수통일되거나 개방세계로 나올 경우에는 중국이 미국 혹은 미ㆍ일 군사동맹과 직접 부딪쳐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조적으로 미국은 한반도 문제 해결에 협력할 가능성이 중국보다 높다. 문제는 북한을 역동적인 동아시아지역에 복귀시키기 위해서는 미국의 적극적 협조가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장기적으로 한ㆍ미동맹 관계에 균열이 가지 않는다는 한ㆍ미간 신뢰관계가 전제되어야 한다. 지난 반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분단과 분단 이후 한국과 한반도에서 미국과 미군의 역할 및 경험에 대한 이미지 때문에 한ㆍ미관계가 반미의 수준으로 가서는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고 북한을 역동적인 동아시아지역에 복귀시키고 나아가 민족통일을 달성할 수 없다. 게다가 일본과 중국, 특히 한국에 전혀 아쉬울 게 없다는 식의 일본외교에 대한 지렛대 차원에서도 한ㆍ미간 신뢰관계의 구축은 불가피하다. 때문에 한반도 문제에서 중국과 일본의 영향력을 키우는 반미 자주화의 방식은 진정한 ‘자주의 길’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최배근 운영위원장(건국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