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혁명, 그 두 번째 이야기

by KG posted Jun 05, 2006
결말이 뻔하던 선거가 끝났다. 애초부터 여당이 고전을 면치 못하리란 것은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든 짐작한 바다.

싸늘한 민심, 너무나도 차갑게 얼어붙은 혐오가 여당의 입과 국민의 귀를 꽁꽁 틀어막았다. 그들이 무슨 말을 해도, 설령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국민들은 믿기는커녕 아예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런 판국에 그 허다한 쇼가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5.31 결과는 제2의 탄핵이다

가히 제2의 탄핵인 셈이다. 여당의 인사들이 눈을 감고 가슴에 손을 얹고 차분히 불과 두 해 전의 사건을 되돌아본다면 오늘 그들에게 이토록 황망한 결과가 자업자득이란 점을 능히 깨우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대통령은 급전직하하는 여론에도 아랑곳 않고 치킨게임을 즐겼다. 헌정중단이란 초유의 사태를 배수진 삼아 분단국의 국가원수로서는 차마 못할 재신임의 승부수를 던졌다. 그럼에도 그토록 위험한 대통령을 탄핵한 야당세력을, 오히려 국민들은 두둔하기는커녕 17대 총선에서 국민들의 손으로 직접 심판하고 갈아 치워버렸다.

당시에도 야당세력은 민의를 이해하지 못해 무척 허둥댔다. 왜 우리의 우국충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무능하기 짝이 없는 계몽군주를 선택할까. 국민들이 여의도 리멤버1219 행사장에 친히 나와 시민혁명을 선동한 대통령의 언술에 동의한다는 말인가. 그러나 그들은 어리석었다. 국민들은 설사 대통령이 문제가 많을뿐더러 국민을 가르치려 드는 무능한 계몽군주라 할지라도 그 처결은 국민들의 손으로 하겠다는 것이다. 왜 의회권력이 국민의 신성한 주권을 가로채고 직접 대통령을 심판하려 하는가, 그 진의보다 그 속내를 더 괘씸하게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도 무서운 주인의식이 한국 민주주의 신화의 비밀이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아시아 최고의 민주주의 국가의 국민들답게, 그 누군가 주문하던, 눈먼 시민혁명의 카드를 폐기하고 스스로 매우 ‘질서 있는 시민혁명’을 연출해냈으며 그 공전의 드라마 이름이 2004년 총선에서의 야당심판인 것이다.

대통령과 여당이 자초한 두 번째 시민혁명

그럼에도 대통령은 그 교훈을 까맣게 잊어버린 모양이다. 국민들이 얼마나 민주주의의 수준이 높고 주인의식이 강한 시민인지, 그래서 대통령의 오류를 용인해준 것이 아니라 제대로 하라고 모든 힘을 실어주었다는 점을, 머잖아 그 엄정한 평가가 야당심판 이상으로 냉혹하게 내려질 것이란 점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그 동안 대통령의 오류는 더욱더 커져만 갔고 여당은 아무 견제도 하지 못했다. 5천만도 아니 되는 작은 분단국가를 민주-반민주, 개혁-반개혁으로 조각낸 것도 부족해서 수도권과 비수도권, 강남과 비강남 나아가 친미-반미, 친평양-반평양으로 더더욱 잘게 쪼개었다. 세계의 지탄을 받는 지상지옥(至上地獄) 북한의 세력교체에는 침묵하면서, 막상 민주주의 선진국인 대한민국에서 국민들의 손을 거치지 않고 자신들이 ‘어리석은 국민들’을 직접 가르치려 하고 참주선동으로 세력교체(Regime Change)를 공공연히 추진한 것이다.



결국 대통령은 제2의 탄핵을 자초했다. 국민을 계몽의 대상으로 보고 국민의 주권을 제 뜻대로 대행해 사회 전반의 세력교체를 추진하려 한 대통령에게 두 해 만에 국민들은 다시 회초리를 든 것이다.

그럼에도 대통령과 여당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왜 수도이전이라는 선물을 주었는데도 충청도민의 압도적 지지를 받지 못하는지, 왜 형편없는 단체장들 밑에서 신음하면서도 지방권력 교체라는 신성한 소명을 받은 자신들을 국민들이 선택하지 않는지 그들은 도무지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

아직도 20세기를 살고 있는 87체제의 적자들

그러하니 여전히 입만 열면 여당은 민주세력 평화세력이요 야당은 수구세력이라 떠든다. 이젠 그런 말만 해도 국민들이 고개를 돌리는데 지금도 反한나라당 연대를 선동하고 있다. 끝까지 자신들은 선(善)이고 자신들을 따르지 않는 이들은 악(惡)이라는 지극히 단순한 인식론은 어찌 그렇게도 그 지지층에서 미워하는 부시 대통령과 바이블 벨트의 역사인식을 빼닮았는지 모른다.

선거가 끝났으니 이제는 제발 민의를 제대로 이해하고 환골탈태하기를 바란다. 20세기 낡은 이념의 교과서로 백성을 가르치려 들지 말고, 이제부터 21세기 세계시민인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제대로 배우고 초심으로 돌아가 처음부터 정치를 다시 시작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 바람이 수용될 가능성은 작아 보인다. 왜냐하면 그들은 87체제의 적자(嫡子)이기 때문이다. 민주-반민주의 도식과 연북통일의 열망으로 가득 찬 세계관을 바꾸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은, 건재를 과시하던 개발연대의 정치세력이 97년의 환란을 거치고 재탄생은커녕 순식간에 몰락한 점을 봐도 여실하다.

벌써 그들의 일각에서는 반성은커녕 민주평화세력의 재집결을 이야기한다. 대선이 끝나자마자 펼쳐진 배신의 계절에 그들 스스로 반개혁으로 매도하고 순장해버렸던 사람들을 다시 끌어 모아서 재집권의 통일전선을 만들자는 것이며, 2300만 인민의 적이 되어버린 한 사내와의 거래를 평화라 부르고 민족통일의 지름길이라 선전하는 연북의 통일전선을 구축하자는 것이다.

포스트87 비전 실천할 집단이 절실하다

결국 87체제는 이들에 의해 극적으로 붕괴하게 될 것이다. 무너져가는 체제에 아무런 의혹도 없을뿐더러 어떻게든 지탱해보려는 21세기 위정척사파들에게 새로운 기회는 오지 않을 것이며, 국민들 또한 그들과 함께 몰락의 길을 걸을 생각이 추호도 없기 때문이다. 불미스런 정치테러는 다만 그 전조에 지나지 않는다.

대연정이든 양극화든 개헌이든 연방제통일 논의든, 추후 벌어질 수많은 시나리오를 국민들은 이미 직감하고 있다. 대통령과 여당이 그 예정된 길대로 간다면 스스로 몰락을 재촉할 것이다. 다만 아직 우리 국민들에게 그 후의 시나리오는 준비되어 있지 않다.

이제 그 미래를 준비할 때이다. 포스트 노를 넘어 포스트87 그리고 IMF와 대량아사라는 97년의 이중충격을 체제 내화할 수 있는 비전과 계획이 절실하다. 나아가 그를 위임할 수 있는 집단을 구성해나가야 한다. 국민의 현명하고 조화로운 선택, 제2의 탄핵과 제2의 ‘질서 있는 시민혁명’이 아름다운 결실을 맺는가 여부는 이에 달려있다. 지혜가 절실한 계절이 왔다.

* 이글은 Wfocus.net 에도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