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 오케스트라 선율을 타는가
뉴욕 필, 쇼스타코비치를 기억해야!
뉴욕 필하모닉 평양 공연(2.26)으로 한반도에 오케스트라 외교가 펼쳐진다. 평양 공연 프로그램은 북한과 미국의 국가, 거쉬인의 ‘파리의 미국인’, 드보르작의 ‘신세계 교향곡’, 바그너 오페라 ‘로엔그린’ 3막 서곡 등으로 짜졌다.
재즈풍의 유연한 멜로디와 발랄한 리듬의 ‘파리의 미국인’은 파리의 경쾌한 풍경을 그대로 느끼게 한다면, 유려하면서도 웅혼 장쾌한 선율의 ‘신세계’는 미국의 약동하는 힘과 당당한 권위의 팡파르로 울려 퍼져 평양 청중의 넋을 뺏을지 모른다. 마무리로 뉴욕 필은 ‘로엔그린’의 환상적이고 감미로운 선율로 야별(夜別)를 고한다.
뉴욕 필 평양공연 선곡에 아쉬움이 없지 않다. 뉴욕 필은 쇼스타코비치(D. Shostakovich)를 잊었다. 아직도 사회개조, 사상개조, 인간개조를 부르짖는 국가에서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제5번 ‘혁명’이 ‘선군혁명’의 수도 평양에서 울려 퍼질 수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빨갱이 음악’의 대명사였던 쇼스타코비치 5번 교향곡은 박정희 정권 말기 청와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울에서 연주되었다. 당시 방한 공연을 이끌었던 뉴욕 필의 번스타인이 한국 정부가 레퍼토리 교체를 요구한다면 공연을 취소하겠다는 으름장을 놓자, 이에 청와대가 굴복하여 마침내 ‘빨갱이 음악’이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남한에서 연주될 수 있었다.
레닌그라드에서 1937년에 초연된 교향곡 ‘혁명’은 스탈린과 당의 요구에 부응한 작품이지만, 쇼스타코비치의 예술혼은 폭압적 혁명과 스탈린주의를 한껏 비꼬았다. 군화에 짓밟히는 어린이의 절규, 강제노동수용소, 신음, 숙청 등의 메타포를 선율에 실어 공포정치 속에서도 살아있는 인간의 의지를 묘사했다. 그야말로 ‘비극적 낙관주의’의 백미라고나 할까. 그럼에도 당시 소련 공산당은 교향곡 5번을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완벽히 구현한 혁명예술로 극구 찬양했는데, 이쯤되면 블랙 코미디에 가깝다. 뉴욕 필은 잊었지만, 언젠가는 이 곡이 ‘혁명의 수도’ 평양에서 꼭 한 번 연주되었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북핵, '신고'문제 고비를 넘겨야
‘2․13 합의’로 북한 핵시설 ‘불능화’와 핵 프로그램 ‘신고’ 문제에 합의하였고, ‘10․3 합의’(9․19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제2단계조치)로 합의 이행 시한을 지난해 연말까지로 못 박았다. 현재 불능화는 되돌리기 힘든 수준으로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지만, 신고 문제는 이미 합의 시한이 훌쩍 지난 지금에도 북․미 간 이견이 좀처럼 좁혀지지 않고 있다.
신고는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완전하고 정확한’ 신고를 한다면, 북한은 핵폐기의 ‘전략적 결단’을 내렸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은 아직 그러한 결단을 고려할 단계에 전혀 근접하지 않았다고 여긴다.
미국이 요구하는 신고 바스켓에 담을 사안은 세 가지이다. △우라늄농축 프로그램(UEP) △시리아와의 핵 커넥션 △플루토늄 총량 및 사용내역 등으로 압축된다.
첫째, 우라늄농축 프로그램 문제부터 짚어보자. 2002년 10월 북한이 비밀리에 고농축우라늄 핵개발 프로그램(HEU) 가동 정보 제시에 대한 북한의 ‘시인’ 문제로 제네바 북․미기본합의(1994.10)가 파기되면서 제2차 북핵 위기가 초래되었다. 2007년 미국은 HEU에 대한 정보 판단을 ‘중간 단계의 확신’으로 하향 조정하여 UEP로 명칭을 변경했다. 미국은 북한의 UEP 존재에 대해서는 확신하면서도, 우라늄 농축의 규모와 진전 수준 등에 대한 명확한 정보나 증거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북한의 솔직한 설명과 해명을 요구해왔다. 이에 북한은 UEP 존재 자체를 완강하게 부인하면서, 문제의 알루미늄관은 핵농축과 무관하고 또한 이를 입증하기 위해 알루미늄관 샘플까지 제공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워싱턴포스트가 북한이 미국 측에 제출한 알루미늄관 샘플에서 핵농축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보도(2007.12.21)하여, UEP 문제에 대한 의혹이 수그러들 수 없게 되었다. 금년 초 북한은 외무성 대변인 담화(1.4,중통)를 통해 “지난 11월 핵신고서를 미측에 통보했으며, 우라늄 농축관련 군사시설까지 참관시키며 알루미늄관이 관련 없음을 해명”했다고 밝히는 가운데, 미측에 신고 의무를 이행했다고 주장하고 나선 점이 주목된다.
둘째, 북한-시리아 간 핵협력설은 지난 해 9월 언론 보도를 통해 불거지자 새로운 신고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미국 내 대북 강경론자들은 시리아 핵이전설을 강력히 제기하면서, 이 문제는 확산방지 차원에서 신고 조치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북․시리아 커넥션설은 미국 여론을 한층 악화시켜 국무부의 북․미 협상 자체에 대한 비판과 함께 대북 의혹을 증폭시켜 테러지원국 리스트 해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북한은 시리아 핵협력 의혹을 “사실무근”이라고 일축하고 있다. 북한 입장을 대변하는 조선신보(2.12)는 핵협력설이 미국 언론을 중심으로 돌연히 부상했으나, 직후에 열린 6자회담에서도 이 문제는 큰 장애요인으로 되지 않았다고 지적하면서, “10․3 합의문건에 핵무기와 기술, 지식을 이전하지 않는다는 공약을 명문화”한 것으로 “사실상 문제는 해결됐다”고 주장했다. 말하자면 핵거래설에 대해 “현재 안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안 할 것”이라고 강조하면서도 과거의 핵협력설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하고 있는 셈이다.
셋째, 미국은 플루토늄 신고 시 총량, 핵실험 사용량, 핵무기 수 등을 포함하여 검증 문제까지도 밝힐 것을 기대하고 있다. 북한은 현재 플루토늄 총량 30㎏을 제시하였다. 이는 지금까지 40㎏~50㎏까지 확보한 것으로 추정한 총량에 미치지는 못하나 추정치의 오차범위로 볼 수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북-미, 윈윈(Win-Win) 접점은 어디에
신고 문제로 인한 교착국면의 타결은 가능하며, 가까운 시일 내에 이루어질 수 있다. 사실 ‘완전한’(complete) 신고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요구로, 정치적 술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완전한’ 신고는 북․미 간 정치적으로 풀어야 할 타협의 대상이다. 양측은 ‘신고 가능한’ 형태를 모색해야 한다. 즉, 신고의 대상, 내용, 방식 등에서 접점을 찾아야 한다. 타협의 방향은 미 국무부로서는 의회와 조야를 설득할 수 있는 수준에서, 북한으로서는 ‘고백외교’(confession diplomacy)의 실패의 재판(再版)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는 수준에서 합의점을
찾을 수 있다. 여기엔 물론 타협안 도출의 시한 문제도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할 중요한 변수임이 틀림없다.
우선 타협안의 시한으로 미국의 테러지원국 명단 연례 발표 시점인 4월 말과 연계될 수 있다. 그런데 미 국무부의 연례 명단 발표 시점 한 달 반 전인 3월 중순까지 의회 통보가 완료되어야 하기 때문에, 3월 초순 정도에 국무부 차원에서 테러지원국 명단 제외 결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북․미 간 타협점을 마련해야 할 시한을 역산하면 최대한 늦춰 잡아도 3월 초 안에는 결판나야 한다.
두말 할 필요 없이 결정적인 문제는 신고의 대상, 방식, 내용이다. 우선 신고 대상은 미국 측 입장을 고려하여 세 사안 모두를 대상으로 삼을 수밖에 없으며, 북한은 이를 수용해야 한다. 다음으로, 신고 방식에서 북한 입장과 국무부의 기대를 서로 조화시킬 수 있는 접점은, 다름 아닌 ‘두 개의 문건’을 마련하는 데 있다. 하나는 공개 합의문 형태로, 다른 하나는 비공개 문건 또는 ‘비망록’(memorandum 혹은 footnote) 형태로 나눠서 접근하는 방안이다.
공개문건은 플루토늄의 총량과 그리고 검증 문제에 대한 합의를 담을 수 있다. 플루토늄은 현재와 미래의 명백한 위험 실체로, 플루토늄 문제야말로 신고의 핵심 사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북한이 제시한 플루토늄 총량 30㎏ 주장을 받아들이되 검증․사찰의 수용과 방식에 합의할 필요가 있다. 이는 플루토늄 부분에서 한 단계 진전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UEP와 시리아 커넥션 문제는 비공개 문건 또는 비공개 비망록을 통해 접근하는 방안이 현실적이다. 북한의 자존심과 고백외교의 우려를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이 비공개 합의방식이다. 이 경우 합의도출은 비록 비공개 문건이라고 하더라도 두 사안에 대해 어느 정도의 내용을 담을 것인가에 달려 있다. 국무부는 그동안 북측에 수차례에 걸쳐 모범 답안을 제시했으나, 북한은 모범답안 내용을 그대로 받아 적기를 거부했다. 여기서 양측의 입장이 적절히 조율될 필요가 있다
UEP의 경우, 북한은 미 측이 합당한 증거를 제시한 ‘팩트’에 대해서만 사실 관계를 간략히 해명하는 방식이바람직하다. 그리고 시리아 커넥션의 경우, 미국이 ‘6자회담 이전의 행위를 더 이상 문제 삼지 않는다’는 확약 위에서 최소한의 수준에서 ‘과거 활동’을 해명하고 양해를 구하는 방안이 기대된다.
북핵, 오케스트라 선율을 타는가
북핵 교착국면이 타결되느냐, 그렇잖으면 또 다시 악순환 구조 속에 빠지느냐 하는 문제는 오로지 북한의 판단과 결단에 달려 있다. 국무부의 라이스-힐은 북한의 비협조와 미국 내 대북 강경파의 비판 속에서 그야말로 샌드위치 신세에 처해 있다. 그렇다고 북한이 결코 라이스와 힐의 곤혹스런 입장을 즐길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지금의 미국 국무부 팀만큼 북한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배려하는 사람들은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
물론 북한이 핵문제 타결을 외교적 성과(legacy)로 삼으려는 부시 행정부의 입장을 활용하여 더 많은 대가를 챙기려고 ‘치킨게임’을 벌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북한은 의회와 조야의 다양한 비판을 무릅쓰고라도 타협점을 도출하려는 국무부의 ‘워싱턴 스트레스’를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 시간은 마냥 북한편이 아니다. 신고 문제에 대한 조율을 하루빨리 매듭지어야 한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뉴욕 필 평양 공연이 ‘예술의 향연’을 넘어 ‘평화의 향연’이 되기를 바란다. 그날 김정일 위원장과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의 포옹 장면으로 김정일 위원장의 8년 만의 화려한 ‘컴백’ 장면의 연출을 기대한다. 그날까지 주저하고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면, 뉴욕 필은 그에게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들려주는 것도 좋겠다.
* 조민 / 운영위원,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위 원고는 평화재단의 평화논평(제36호)와 통일연구원 온라인 시리즈에 공동게재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