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령독재 후계세습의 향방

by 조민 posted Oct 21, 2010
민주화운동 시기, 한국의 대표적인 저항 시인 김남주는 ‘각주(脚註)’라는 시에서 헤겔과 마르크스가 자유를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각주 붙이는 것을 잊어버렸다고 했다. “식민지 사회에서는 단 한 사람도 자유롭지 못하다고”

  나는 지금 김남주 시인의 시에 새로운 각주를 덧붙이고 싶다. “우리 반쪽의 조국 북한에서는 단 한 사람만이 자유롭다고……” 바로 그 자유는 금수산 기념궁전에서 영생불멸하시는 ‘위대한 수령’, 그의 2대 후계자인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 그리고 3대 후계자인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 ‘김정은 대장’만이 향유하는 자유다. 그렇다. ‘우리 반쪽의 조국’ 북한에서는 현세와 영계에 영원히 살아계시는 수령님의 유일한 핏줄만이 오로지 자유롭다! 북한 최초의 찬송가인 ‘김일성장군의 노래’ 중 “오늘도 자유조선 꽃다발 위에... 민주의 새 조선엔 위대한 태양”이라는 가사처럼 ‘자유조선’ ‘새 조선’을 만끽하는 존재는 김씨(金氏) 왕조 수립 이래 지금까지 오로지 극소수의 ‘만경대 혈통’ 뿐이다. 오로지!

항일의 ‘백두전통’과 특권 세습

북한은 제3차 당대표자회 개최를 통해 다시 한 번 체제정비와 더불어 3대 세습을 확정했다. 금번 후계세습 과정은 혈통을 핵으로 하면서 항일 빨치산 2세대 중심으로 권력축이 이동했으며, 세습 후계자의 후견세력을 당 중심 기구에 포진시켰다. 특히, 권력층 포진에 ‘혁명가유자녀교육의 전당’으로 1947년에 창립된 만경대혁명학원 출신의 진출이 두드려져 보이는데, 만경대혁명학원은 북한 최고의 엘리트 배출 코스로 군부의 지휘관을 대량 배출하면서 일찍부터 북한 집권세력 인맥의 본산으로 떠올랐다. 금번 당대표자회를 통해 권력 요직을 차지한 새로운 인물들 가운데는 군부 출신이 아닌 경우에도 주로 만경대혁명학원 출신의 혁명 2세대가 많다.  

  북한의 정치세력은 셋으로 나눌 수 있다. 이는 김일성 가계 중심의 이른바 ‘핏줄’로 이어지는 권력의 핵, 권력 핵을 둘러싸고 소규모 동심원을 그리는 혁명 2세대, 그리고 다음 동심원에 해당하는 권력층으로서 당ㆍ정ㆍ군의 요직을 차지한 부류이다. 핵을 에워싼 동심원에는 과거 항일투쟁의 역사를 독점한 ‘만주파’가 포진하고 있다. 이들은 항일의 ‘백두전통’을 치켜든 항일투사들과 그들의 자녀 및 추종자들로 이루어진다. 본래 김일성은 만주파의 일원으로 만주파를 지지 배경으로 독재 권력을 구축했으나, 그 후 수령독재를 굳히는 과정에서 김일성 가계 핏줄을 중심으로 만주파와 차별화를 시도하였다. 다음 동심원은 혁명 제2세대와 함께 전쟁과 전후 건설과정에서 주력군으로 등장한 ‘새세대’ 집단을 말한다.

  김정일의 최측근들은 모두 북한의 특권기관을 장악하고 수령체제를 보위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이들이 북한의 특권기관인 중앙당 각 부서, 국방위원회, 인민무력부․총참모부․총정치국, 국가안전보위부, 인민보안부, 제2경제위원회, 청년동맹 등의 중앙권력기관들을 장악하고 있다. 북한 권력체제는 ‘핏줄 세력’을 정점으로 피라미드 구조를 이루고 있는데, 극소수의 ‘혈통’은 호위사령부 등 막강한 친위대를 거느리며 해외 보유자산도 거대하다. ‘만경대 혈통’을 자랑하는 신격화된 핏줄은 끊임없이 우상화를 통해 신화를 만들어내면서 충복들을 거느린 2천 3백만 주민의 신령한 주인이 된다.

당 체제 정비와 권력구도 개편

당 체제 정비는 우선 북한 통치 엘리트들의 집합체인 당 중앙위원회 위원 124명 인선으로 시작되었다. 그와 함께 그동안 유명무실했던 정치국, 비서국 그리고 당중앙군사위원회 등의 조직과 기구를 정비함으로써 북한의 권력지형을 새롭게 선보였다. 그러나 정치국을 비롯한 도표상의 조직ㆍ기구표는 상설 회의체가 아니며, 특히 김정일 체제 아래서 회의 개최를 기대할 필요는 없다. 당 최고 의사결정 기구인 정치국의 경우 상무위원조차 네 명 모두 ‘핫바지’ 들러리에 불과하며, 다만 후계자가 포진한 당 중앙군사위의 위상과 역할이 주목된다.

  북한의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각은 중국공산당의 권력기구를 의식한 측면도 있다. 김정은의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 위상은 중국의 ‘차기 대권’을 거머쥐는 관문인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자리에 조응된다. 즉, 김정은 ‘조선노동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과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 부주석’ 위상의 동격화 효과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금년 10월 중순 공산당 제17기 중앙위원회 제5차 전체회의에서 최대의 하이라이트는 시진핑(習近平) 국가부주석의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으로의 선임 여부라고 할 수 있다.

  당 중앙군사위원회로 권력 중심이 이동한 것은 분명하다. 그동안 북한 최고권력기구로 주목받았던 국방위원회 위원들 가운데 대부분이 중앙군사위 위원 자리를 꿰찼다. 새로운 권력 중심 세력의 형성 과정에서 북한 군부 최고 실력자로 급부상한 리영호가 주목된다. 그는 인민군 차수, 인민군 총참모장, 당 정치국 상무위원, 그리고 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 자리까지 꿰차 일약 ‘핏줄’을 제외한 최고위급 인물로 부상하였다. 리영호는 2003년 9월 상장으로 평양방어사령관을 맡았다가 2007년 4월 창군 75돌 열병식 지휘관을 맡아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 후 2009년 2월 대장으로 진급하여 인민군 총참모장을 맡았다가 이번에 인민군 차수로 김정은과 나란히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에 선임되어 군부 최고 실세로 부상하였다. 그는 포병 지휘관 출신으로 전략통으로 알려져 있으며 남북한 ‘비대칭 전략’의 일환으로 핵보유를 강력히 주장해왔다. 국방위원회 위원도 아니었던 그가 최근 김정은의 군사 부문 ‘과외 선생’ 역할을 맡음으로써 최측근이 되었고, 이번에 후계자의 군권 장악의 후견인이자 조언자 역할을 부여받았다.  

  그와 달리 오극렬(1931년)이 금번 인사에서 소외당함으로써 향후 그의 거취에 관심이 쏠린다. 전 노동당 작전부장으로 지난해 2월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자리를 차지한 그는  1985년부터 지금까지 인민군 대장 자리를 지켜오면서 김정일에게 직언을 할 수 있는 극소수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혔다. 오극렬의 추락은 그가 후계 옹립에 적극적으로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서지 않았거나, 후계자가 평소 다루기 쉽지 않은 ‘불편한 존재’로 여겼기 때문에 배제 당했다고 볼 수 있다. 이미 지난 7월 오극렬의 위상 추락은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인 장성택에게 외자 유치권을 빼앗김으로써 감지되기 시작했다. 오극렬 측은 조선국제상회를 설립해 외자 유치 이권을 본격적으로 챙겨왔는데, 지난 6월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자리에 오른 장성택이 조선대풍그룹(김양건 이사장, 박철수 총재)을 설립해 오극렬 측이 먼저 착수한 이권을 빼앗았다. 이번 권력구도가 후계자가 주도한 그림이라면 승승장구하던 장성택의 ‘주춤’은 후계자의 견제에 걸린 것으로 보인다.  

안정이냐, 후폭풍이냐?

금번 권력구도의 특징은 선군정치에 부합한 형태로 군부 인물이 당 요직을 거의 차지함으로써 당과 군의 분화가 뚜렷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특히 군부 인물로서 원래 농구 선수 출신으로 뚜렷한 경력도 없었으나 이번에 대장 계급을 달고 인민군 부총참모장으로 열병식을 지휘한 최부일의 경우처럼 농구로 김부자를 구워삶아 출세한 인물도 있다. 또한 김일성과 빨치산 활동을 함께 했던 최현의 아들로 북한 권력층에서 방탕ㆍ타락의 대명사였던 최용해 등 권력 이양기에 재빠른 변신 능력을 가진 인물이나 맹목적 추종형 군 인사들이 대거 발탁된 점이 돋보인다. 말하자면 이는 세습후계자를 중심으로 특권세력을 물갈이한 구도라 하겠다.

  북한은 당대표자회를 개최하여 ‘밀어붙이기 식’ 후계구도를 추진하였다. 후계자론의 핵심인 ‘혁명 전통 계승’의 정당성과 명분은 내동댕이쳐졌다. 혁명전통 계승과 혈통계승은 분명 다르다. 그런 점에서 후계자의 군권 장악은 결코 순탄치 않을 것이며, 혁명 2세대에 대한 후속 인사 사업은 북한 내부 갈등이 점화되는 계기로 나타날 수 있다. 지금까지 북한에는 어떠한 파벌도 없었다. 그러나 이제부터 본격적인 후계구축 과정에서 파벌 형성이 예상된다. 북한의 정치적 안정은 김정일 후견의 지속성 시한과 세습후계자의 권력 장악 역량에 달려 있지만, 후폭풍 없는 안정화 코스는 속단하기 힘들다.    

강성대국으로 가는 길은 멀기만 한데…

2012년 ‘강성대국의 문을 여는 해’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북한 경제의 회복이 절실하다. 북한의 경제회복 전략 방향은 ‘자립경제노선 및 특구외자유치’에 맞추어져 있다. 이는 식량증산과 외자 유치 두 방향에서의 성패에 달려 있다. 우선 인민경제 부문이 문제다. 북한은 ‘2․8 비날론 공장 복구’, ‘남흥비료공장 및 흥남비료공장 가동으로 쌀 생산 목표 달성’, 그리고 (코크 사용 없는) ‘주체적 제철법에 의한 철강 증산’ 등을 자립적 민족경제 건설의 세 기둥으로 내세우고 있다. 이 세 기둥만 정상적으로 돌아가면 “이밥에 고깃국에 비단옷”으로 인민경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어느 ‘기둥’ 하나도 충분한 전력공급 없이는 정상화될 수 없다. 그럼에도 인민경제 부문은 당 정치국 상무위원이자 내각 총리인 최영림과 당 계획재정부 홍석형(전 함북 당위원회 책임비서, 당 정치국 위원, 벽초 홍명희 손자) 부장 두 사람 몫이 되었다. 당장 최영림 내각 총리에게 경제 문제는 일임하면서 후계구도 안착에 전념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다.

  다음으로 외자 유치는 장성택의 손에 맡겨져 있는 셈인데, 획기적인 진전이 쉽지 않지만 중국의 창지투(長吉圖) 프로젝트와 연계된 동해안 출구전략인 나진항 개발 요구를 북한이 적극 수용한다면 중국의 투자 자본을 어느 정도 끌어들일 수 있다. 그러나 김정일 위원장 특유의 주저함과 거의 권력본능에 가까운 대중(對中)견제 의식으로 괄목할 만한 진전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누가 경제 문제를 떠맡더라도 풀어갈 길이 있겠는가? 강성대국의 길은 요원한데, 수령독재의 후계세습의 길은 잘 다져질 수 있을 지 우리의 관심을 끈다.

  황장엽 전 조선노동당 비서는 “오래동안 허위와 기만으로 가득 찬 사회에서 살아왔다…”고 술회했다. “허위와 기만에 가득 찬” ‘우리 반쪽의 조국’에서 단행된 3대 세습은 ‘문명사회에 대한 조롱이자 조선(한)민족에 대한 모욕’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