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이 시대 한국정치에서 파퓰리즘의 의미”

by KG posted Jun 27, 2011
고맙게도 양승태 선생님께서 귀한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정치사상학회 초대 회장)

아래에 그 서신과 함께 주요내용 그리고 사족을 덧붙인 뒤,
A4 16장의 논문을 무단으로 ^^ 전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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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서
코리아글로브가 여전히 열성적으로 노력하고 계신 줄 압니다.
참고로 제가 최근에 '굿 소사이어티' 에서 발표한
파퓰리즘에 관한 글을 첨부로 보내드립니다.
저는 그 글에서 파퓰리즘의 어리석음과 혼란에서 국가생활의 중심을 잡는
'교양시민집단(Bildungsbuergertum)'의 존재에 대해 언급한 바 있습니다.
'코리아글로브' 가 그러한 역할을 계속 수행하길 기대합니다.
건투를 빕니다.

- 양 승 태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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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퓰리즘은 민주주의의 또 다른 얼굴일 뿐이다.

- 결국 민주주의는 유감스럽지만 거의 필연으로 파퓰리즘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다.

- 나름대로 탁월한 교양⁃문화를 갖춘 시민집단이 존재했던 아테네나 독일의 경우에도 그러했는데,…

‘왜소한’ 파퓰리즘 정치의 지속 속에서는 나라에 언제 어떠한 돌발 상황이 발생하면서 파시즘 또는 볼셰비즘의 대두와 같이 국가 전체를 비이성의 광란으로 몰아갈 수도 있는 ‘거대한’ 파퓰리즘의 등장으로 이어질지 그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는 것이다.

- 현재의 한국은 경제로는 발전했을지라도 아직도 교양⁃문화의 측면에서 후진국임을 자각하는데서 한국정치의 파퓰리즘 극복 노력은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다. 전통사회의 유교식 교양⁃문화의 쇠퇴에 따른 정신의 공백을 새롭게 형성된 교양⁃문화가 메우지 못하는 정신의 빈곤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존경받고 권위를 갖는 지식인층 및 교양⁃문화를 갖춘 시민집단이 부재하는 사회 상황에서, 그리고 한 사회의 지배층이 교양⁃문화를 선도하지 못하고 사치스런 향락이나 고급 상품 소비의 주체로만 부각되면서 오직 속물 가치의 과점이 그들이 누리는 사회 우월성의 지표로 내세워질 때, 그러한 노력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 그와 같이 바람직하지 않은 필연성을 피하기 위한 궁극의 방안은 인간 바깥의 제도나 법이 아니라 바로 ‘populus’, 즉 ‘사람들’ 자체에서 찾아야 한다. 그 방안은 파퓰리즘이란, 본질에서 ‘어리석음’에 의한 국가 통치라는 사실과 아울러, 다수의 국민들이나 대중들 또한 고정된 성품이나 고착된 관념에 절대 지배받는 인간 집단이 아니라 교육과 문화를 통해 그 정신 내용이 고양되고 순화될 수 있는 존재라는 가능성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 이와 관련하여 그러한 시민집단을 양성할 일차적 책임이 있는 한국의 지식인 집단이 과연 그들에게 부과된 국가의 책무를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지부터 반문할 필요가 있다. 대학교육의 빈곤 속에서 한 국가 국민의 교육⁃문화의 개화를 기대할 수는 없으며, 학문 권위의 부재 속에서는 국가의 논제가 제기될 때 권위 있는 판단을 제시하면서 현실 정치인과 국민들의 정신을 이끌면서 파퓰리즘의 등장을 방지할 수 있는 정신 주체의 실종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로 한국의 지식인들이 한국정치에서 파퓰리즘을 대두하게 만든 궁극의 ‘원흉’일 수도 있는데, 정말 그러한가?

<사족>
외람되지만, 코리아글로브의 존재목적 또한 위와 다르지 않습니다. 불가피하게 추락의 운명을 겪을 수밖에 없는 민주주의를 지속가능하게 위해서는, 그 나라의 역사와 전통을 꿰고 있으면서 인류사의 진운을 이해하고 그에 기여하려는 소명을 지닌, ‘드러나지 않으면서 존경을 받는’ 집단(선비든 뭐라 부르든)의 양성이 전제라고 보았습니다. 물론 코리아글로브가 곧 그는 아니며, 그와 같은 ‘큰사람’들의 집단 출현에 끝자리라도 맡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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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한국정치에서 파퓰리즘의 의미”

                                                    - 양 승 태(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I.

  파퓰리즘(populism) 또는 그 말의 번역어로서 대중영합주의란 말이 한국정치의 수사로 등장한지 그런대로 꽤 시간이 지났다.1) 그것은 대체로 김대중 정부의 등장과 더불어 건국 후 오래 동안 한국정치를 주도했던 보수 세력이 권력의 객체가 되면서 집권당의 정책을 비판적으로 규정하기 위한 어휘로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그 사용 빈도 및 비판의 강도는 노무현 정권의 집권기간 동안 더욱 증가하고 높아진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는 그 말이 여야의 구분 차원을 넘어 집권당의 정책을 비판하기 위한 수사로도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제 파퓰리즘이란 말은 서구 정치에서와 같이 한국정치에서도 분명히 종래의 좌파-우파식의 정치적 편 가름 수준의 정치적 수사 차원을 넘어 정책에 대한 일반적인 성격 규정의 언어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2)

  그런데 현실의 정치인들이란 일반적으로 스스로 사용하고 있는 정치적 수사나 언어들의 의미에 대한 깊은 탐구는 차치하고 그것들을 명확하게 규정하고 사용하는 언어 습관이 체화된 인물들은 아니다. 그리고 파퓰리즘이란 말이나 대중영합주의란 말 자체의 의미가 실제로는 직관적인 느낌과는 달리 자명하지도 않다. 앞으로의 논의를 통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되겠지만, 파퓰리즘이란 말 자체에 필연적으로 도덕적 폄하나 가치 비하의 요소가 있는 것은 아니다.3) 일단 그 말은 대체로 의회나 기존의 언론기관 등 제도화된 정치과정을 벗어나 국가 구성원 다수의 비합리적인 정서 또는 일시적 감정에의 직접적인 호소 -합리적 판단이나 법적 규범 또는 전통적인 가치에 대한 호소가 아니라- 및 그에 다른 대중운동의 조직화에 의한 정권장악이나 정책결정을 의미한다. 또한 한 국가에서 다수란 일반적으로 소수의 권력자들이나 지배자들 또는 기득권자들과 대비되는 사람들에 대한 총칭이므로, 파퓰리즘은 소수의 ‘그들’과 구분된 다수의 ‘우리’ 민중을 통치의 주체로 부각시키고 그들을 위한 정책의 추구를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다.4) 그리고 파퓰리즘이라는 말의 바로 그러한 일상적인 의미 자체가 민주주의와 파퓰리즘 사이의 관계 문제를 제기한다.


각주 ↓>----------------------------------------------------

1) 영어 populism은 ‘대중영합주의’ 이외에 ‘민중주의’로도 번역될 수 있다. 앞으로 이 글을 통해서 설명되겠지만, 희랍어 ‘demos’가 어원인 ‘democracy’란 말과 라틴어 ‘populus’가 어원인 ‘populism’이란 말의 의미는 적어도 어원 차원에서는 같다. 어원 면에서 동일한 의미를 갖는 두 말이 현대의 세계에서 다른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에 이 시대 정신사 이해의 요체가 있다.

2) 유럽 정치에서도 ‘우파 파퓰리즘(right-wing populism)’이란 말이 2000년대 들어 프랑스의 르팽(Jean-Marie Le Pen)과 네덜란드에서 리스트(Pim Fortuyn List) 등의 정치인들이 선거를 통해 부상하면서 자주 사용되기 시작했다. 독일의 ‘신나치주의자’나 오스트리아의 ‘자유당(FPŐ)’ 등이 소수파로서 무시될 수 있는 세력이었던 반면, 그들의 부각은 지금까지 의회민주주의 체제 내에서 유지되어온 ‘보수-진보’ 세력 사이의 균형을 통한 ‘합의의 틀(the consensual framework)’ 자체를 무너뜨릴 수 있는 가능성이 그 체제 안에서 배태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에 관해서는 Mouffe(2005)참조, 그런데 무페가 간과한 점이 있다. 현재 금융위기를 겪고 있는 그리스, 스페인, 이탈리아 등의 경우가 보여주듯이, 유럽에서 의회민주주의 체제의 운영 자체가 파퓰리즘으로 변질될 수 있으며, 그러한 ‘왜소한’ 파퓰리즘이 파시즘과 같은 ‘거대한’ 파퓰리즘 등장을 정당화하는 구실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이 문제는 이 글을 맺는 부분에서 다시 언급될 것이다.  

3) 한 국가 정치문화의 성격에 따라 파퓰리즘이란 말 자체가 긍정적인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 실제로 이성형은 라틴아메리카에서 파퓰리즘이 그리 경멸적인 용어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그것이 정치적 통합이나 민족주의 정체성을 발전시키는 순기능을 수행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서병훈 2008, 33 참조.

4) 파퓰리즘의 핵심적 요소로서 ‘그들’과 ‘우리’의 대비법에 대한 소개 및 기존의 파퓰리즘 연구와 관련된 쟁점들을 간략하게 정리한 논문으로는 Panizza(2005) 참조.  

각주 ↑>----------------------------------------------------


  물론 파퓰리즘과 민주주의는 분명히 다른 말이다. 그리고 한 언어에서 각기 다른 어휘(언어학 용어로 기표; signifiant)는 각각 다른 의미(기의; signifié)를 가질 때 -그 의미의 다름이 지극히 지엽적이거나 사소할지라도- 혼란스런 언어가 되지 않는다면, 현재 한국인들이 사용하는 위의 두 다른 어휘도 다른 의미를 가져야 한다는 언어학적 당위성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과연 어떻게 구분되어야 하고, 지식인들을 포함하여 한국인들의 언어생활은 그것을 과연 제대로 구분하고 있으며, 그러한 구분이 과연 현재의 한국인들이 국가생활을 포함한 스스로의 공동체적 삶 및 정신생활을 제대로 이해하면서 새롭게 발전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는지 여부에 있다. 여기서 일단 파퓰리즘과 민주주의의 관계의 문제를 접할 때 즉각적으로 제기될 수 있는 의문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할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국가에서는 일반적으로 ‘민’ 또는 ‘국민’이 통치의 주체임이 헌법으로 규정되어 있다. 따라서 소수의 권력층이나 지배층의 인사들이 자신들만을 위한다거나 소수의 특권층만을 위하는 정책을 추구한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경우는 민주주의체제의 이념적 구조상 실제적으로 발생할 수 없다. 반대로 파퓰리즘의 표현이라고 비난의 대상이 되는 정책을 추구하는 정당이나 고위 공무원들이 스스로의 행위를 파퓰리즘이라고 규정하는 경우는 대체로 없다는 사실 또한 중요하다. 그러한 정책들은 바로 국가와 국민을 위한다거나 또는 인권, 평등, 복지 등 보편적인 이념의 이름으로 정당화함이 상례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와 파퓰리즘의 구분은 직관적인 느낌과는 달리 그리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현재 한국정치를 지배하는 대표적인 정치적 수사의 의미가 불분명함을 의미한다. 아울러 그것은 한국인의 언어 관념이 혼란스럽다는 징표가 될 수도 있으며, 파퓰리즘으로 표상되는 정치적 행위나 정책의 핵심적 목표나 의도가 무엇인지 불분명하게 만드는 정치적 혼란을 의미할 수도 있다. 오직 확실한 점은 현재의 한국인들의 언어습관에서 민주주의는 ‘좋은 것’, 파퓰리즘은 ‘나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사실에서 파퓰리즘에 대한 논의는 시작되어야 한다.

  현대에 출현한 다양한 언어철학의 흐름들이 대체로 수렴되는 결론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5) 언어란 고정된 의미를 가지면서 단순히 특정 사물이나 현상에 각각 상응하는 기호나 소리가 아니며, 언어사용의 주체인 인간들의 일상적인 삶을 통해서 끊임없이 생성되고 변화하는 하나의 행위이며, 이에 따라 그러한 언어행위가 발생하는 역사 및 정신사적 맥락이나 구조를 떠나서 한 어휘의 -감각적인 사물이나 행위를 지칭하는 단어이든 고도의 추상적인 학술적 개념이나 형이상학적 이념이든- 진정한 의미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언어의 본질이 그러할 진데, 언제나 정략적 목적에 따른 복선이 깔려있고 정치적 유⁃불리의 상황에 따라 ‘자유자재로’ 그 의미를 ‘적절히’ 변형이나 윤색 또는 왜곡시키기가 다반사인 현실 정치에서 통용되는 언어나 정치적 수사는 바로 그와 같은 언어행위를 낳게 한 역사 및 정신사적 상황을 파악하지 않고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점은 민주주의나 민주화란 말과 더불어 이 글의 주제인 파퓰리즘이란 말도 물론 예외가 될 수 없다.6) 현재 한국인의 언어습관에서 파퓰리즘이 ‘나쁜 것’으로 인지되고 있다면 어떤 의미에서 왜 그러한지에 대한 탐구 및 그러한 인지의 타당성 여부에 대한 검토는 바로 이 시대 한국인들의 정신세계와 한국정치의 실상, 특히 어떠한 역사적 및 정신사적 배경과 맥락 속에서 어떠한 성격의 권력다툼이 정치인들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가 하는 구체적인 정치적 상황과의 연관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각주 ↓>----------------------------------------------------

5) 대표적으로 Wittgenstein(1953), Austin(1962), Foucaulr(2002), Gadamer(1982) 참조. 방대하고 복잡한 설명을 필요로 하지만, 소위 ‘언어게임(Sprachspiel)’이나 ‘발화행위(speech act)’ 또는 ‘담론(discourse)’ 등의 개념을 통해 개진된 주장들이 그것이다.

6) 한국 정치에서 민주화의 개념적 의미에 대해서는 필자도 나름대로 자세하게 검토한 바 있다. 양승태 2007, 특히 3~4장 참조.

각주 ↑>----------------------------------------------------


  그와 같이 접근할 경우 논의의 출발점은 한국에서 파퓰리즘이란 한국의 학계가 스스로 창안한 용어는 아니라 외래의 학술용어로서 외국 학계가 창안한 개념이 수입되어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상품을 수입할 경우 수입품 자체가 불량품은 아닌지 여부나 그것이 원래의 용도에 맞게 제대로 사용되고 있는지 여부를 제대로 알려면 그 수입품의 생산과정을 먼저 파악하여야 하고, 외래의 생물이 유입되어 토착화되는 과정에 있을 경우 그 변화된 성격을 이해하려면 원래의 종부터 먼저 제대로 파악하여야 한다. 같은 차원에서 파퓰리즘이란 외래 학술용어의 기원, 특히 그것이 최초로 출현할 당시 어떠한 정치적 행위나 태도 또는 정책이나 이념을 지칭하거나 분석하는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했는지 그 연구의 역사를 개관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논의는 필연적으로 그 용어의 어원인 ‘populus’란 말에 함축된 정치사 및 정치사상사적 의미에 대해 설명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그러한 개관과 설명이 각각 다음 II장과 III장을 구성한다. 그러한 개관과 설명은 필연적으로 한국정치에서 파퓰리즘을 극복할 방안에 대한 모색을 요구하며, 그러한 모색을 위한 논의가 이 글을 맺게 될 것이다.


II.
  
  ‘populism’이란 영어 단어가 기록된 최초의 문헌은 영국 출신 역사학 교수인 골드윈 스미스(Goldwin Smith; 1823~1910)가 1893년 <19th Century>란 잡지 7월호에 기고한 글이라고 하며, 그 말은 다음의 문장에 등장한다. 7)
“The politicians have been compelled in some degree to pander to populism.”
그런데 ‘populism’이라는 말의 등장 이전에 1891년 미국에서 결성되어 짧은 기간 존속했던 ‘인민당(People's Party)’을 지칭하는 말로서 ‘populist’라는 말이 사용되었음이 1892년에 출간된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으므로, 8) 스미스는 그 말을 단지 ‘ism’의 형태로 변형시킴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어쨌든 -기고된 글 전체를 접할 수 없기 때문에 속단할 수는 없으나- 이 문장은 플라톤이 <국가> 제6권에서(Politeia, 492d~493e) 당시 아테네의 민주정체에서 정치인들이나 지식인 또는 교육자들이 보여주는 행태들을 비판하는 내용을 연상시킨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즉 민주정의 대중들(hoi polloi)을 거대하고(megalos) 막강한(ischyros) 짐승들(thremmatos)에 비유하면서, 당대의 정치인들이나 소피스트 등의 교육자 또는 지식인들이 그러한 대중들의 욕구에 추종하고 그들을 즐겁게 하는 것이 좋은 것이고 그들을 짜증나게 하는 것이 나쁜 것이라고 부르는 등의 아첨을 하고 있다는 비판이 그것이다. 스미스의 문장에서도 파퓰리즘이란 그러한 대중의 존재를 추상화된 이념의 형태로 치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플라톤 식의 ‘과격한’ 비유는 아니라도, 스미스 또한 파퓰리즘이란 말로서 대중민주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19세기 말 서구 정치사의 상황에서 당대의 정치인들이란 구조적으로 그들의 권력이나 지위를 결정하는 일반 대중의 욕구에 아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역사 및 정치적 상황의 실체에 대한 스미스 자신의 이해 내용이 무엇인지의 문제를 떠나서, 현대사에서 파퓰리즘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 좀 더 깊이 의미를 검토할 필요가 있는 말이 위의 인용문에서 ‘아첨하다(pander)’이다.

  아첨이란 말은 칭송이나 찬양 또는 충고라는 말과는 의미가 다르다. 그 단어는 대체로 대상이 되는 개인이나 집단의 진정한 인격적 위상이나 능력 또는 특정 행적의 실상과는 배치되게 왜곡 또는 과장하거나 윤색하는 경우를 지칭할 것이다. 그런데 어떤 언사가 아첨이나 칭송으로 자동적으로 구분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것은 바로 그 언사의 대상이 되는 개인이나 집단이라는 존재 및 능력의 실체를 진정으로 반영하는지 여부, 또는 그러한 개인이나 집단이 수행한 행위의 실제적 의미가 무엇이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실제로 현대 정치사의 맥락에서 파퓰리즘이란 말의 의미도 한 국가의 특정 시점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사람들의 집단적 성격이나 인격적 위상 또는 정치⁃사회적 직능이 무엇이고, 그것을 현실 정치인들이나 -대중 운동가나 혁명가를 포함하여- 지식인들이 어떻게 파악하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짐을 알 수 있다.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파퓰리즘에 관한 현대 정치학의 논의들을 개관할 필요가 있다.  

  현대 정치학에서 파퓰리즘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초반부터이다. 9) 위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이미 19세기 말에 파퓰리즘이란 말 및 운동이 등장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오랜 시간이 지나 학문적인 관심사로 떠오른 이유, 즉 그와 같은 학문적 공백 기간의 지성사적 의미를 체계적으로 밝히기 위해서는 별도의 방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다만 여기서도 다음 두 가지 기본적 이유를 추정 차원에서라도 제시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하나는 20세기 정치사의 근본 흐름과 연관된다. 20세기 정치사의 대부분은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의 대립구도 속에서 국제정치적으로는 소위 냉전체제가 지속되었다. 따라서 양 진영에 속하지 않아 정치적 중요성이 부각되지도 않은 파퓰리즘은 주로 현실정치의 이슈들이 주요 관심사인 많은 정치학자들의 연구 시야에서 벗어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지적 상황에서 1970년대 초반 파퓰리즘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왜 그러한 상황이 전개되었는지 그것의 정치사 및 지성사적 배경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추정이 가능하다.  

  1970년대 초반의 시기에는 학계에서나 대중매체에서 일반적으로 파퓰리즘의 원조 격으로 간주되는 아르헨티나의 페론(Juan Perón; 1895~1974)이 오랜 기간 스페인 등에서의 망명생활을 마치고 1973년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으로 화려하게 복귀한 정치적 상황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그 시기는 미국을 비롯한 당시 서구의 국가들에서도 대중들의 직접적인 정치참여 운동이 활발해지는 시기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즉 종전까지 서구의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다수의 국민들은 생업에 전념하는 가운데 근대 민주주의제도가 부여하는 시민적 자유를 소극적으로 향유하는 가운데 영향력 있는 또는 나름대로 신뢰할만한 대중매체들에 의한 여론형성의 주도에 순응하면서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에 만족하는 수준에서 정치참여가 이루어졌다고 불 수 있다. 이에 비해 60년대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 미국의 흑인민권운동이나 월남전 반대 운동을 포함하여 유럽에서 소위 ‘68 혁명’으로 규정되는 학생들의 주도에 의한 반체제 운동의 확산은 대중들이 가두 투쟁이나 시민단체의 결성 또는 시민단체가 주도하는 정치 및 사회 운동에 가담하는 방식의 정치참여가 70년대 들어서는 일상화되고 제도화되는 시기인 것이다. 10) 특히 월남전 반대 운동은 -월남전 자체의 정당성 문제나 반대 운동의 정책적 및 이념적 타당성 문제를 떠나- 미국 역사에서 대중운동이 대외 전쟁의 효율적 수행에 결정적인 장애 요인으로 등장하거나 정책 당국의 의지와 다르게 전쟁을 종식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예라고 할 것이며, 이에 따라 정치학자를 포함하여 지식인들 일반에게 종전의 ‘애국’ 전쟁들과는 구분되는 미국 역사상 획기적인 사건으로 각인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시기에 의회나 기존의 언론기관 등 제도화된 정치과정이나 소통과정을 벗어나 대중들에 대한 직접적인 정서적 호소 또는 대중운동의 조직화에 의한 정권장악 및 정책결정 방식의 원조 격인 페론의 권좌복귀에서 당시의 정치학자들은 새롭게 전개되는 서구 정치의 원형을 발견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에 따라 19세기 후반 미국 정치에서 등장했던 파퓰리즘 및 파퓰리스트란 말이 20세기 후반의 정치현상을 설명하는 학술 용어로 부활하게 되었으며, 일단 그러한 개념적 시각에 기초하여 정치사를 돌이켜 볼 때 19세기 말 미국의 ‘인민당’ 보다 앞서 1860 및 70년대 러시아의 나로드니크 운동(Narodnichestvo) 운동에서 그 역사적 기원을 찾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11)  


각주 ↓>----------------------------------------------------

7) 이하 어원에 관한 논의는 참조.

8) 에는 이 말이 1892년 발간된 란 잡지에 최초로 등장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미국 정치사 및 정신사 연구 차원에서는 별도의 세밀한 검토를 필요로 하지만, 이 글의 논지를 설명하는데 참고가 되므로 여기서 1892년 네브래스카(Nebraska)주 오마하(Omaha)에서 개최되었던 인민당의 창당선언문 가운데 일부를 소개할 필요가 있다.
   “현재 미국은 도덕적·정치적·경제적으로 파탄 상태에 직면해 있다. 선거는 부패했고, 도덕은 땅에 떨어졌다. 수백만 인민이 땀 흘려 거둔 수확을 극소수 부자가 챙겨가고 있다. 도시 노동자들은 자기 보호를 위한 권리를 박탈당했다. 우리 포퓰리스트들은 민주주의의 뿌리를 재건함으로써 미국의 원래 모습을 되찾을 것이다. … 우리는 미국 헌법이 지향하는 정신과 동일한 목표를 추구한다.”(서병훈 2008, 53~54에서 재인용)
   이 선언문에서 주목할 점은 19세기 미국의 파퓰리즘도 민주주의의 ‘진정한 복원’을 내세웠다는 사실이다. 그와 같은 주장이 제기되고 짧은 기간이나마 상당수 미국 국민들의 호응과 주목을 받게 된 이유는 남북전쟁 이후 전개된 정치⁃사회적 상황과 관련 있다. 즉, 그것은 남부와 북부의 백인 지배층 사이의 대립이 남북전쟁이라는 폭력수단에 의거해 점차 완화되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산업자본가 및 대토지 소유주라는 지배계층과 소규모 농장주 및 산업 근로자라는 피지배계층 사이의 대립으로 변화하는 정치⁃사회사적 전환과정의 한 표현인 것이다. 인민당 결성의 직접적 계기는 농산물의 운송을 독점한 철도회사의 횡포였음은 잘 열려져 있다. 인민당 등장과 관련된 사회사적 배경에 대한 서술로는 안윤모(2006, 특히 2~3장) 및 McMath, Jr.(1992) 참조.

9) 현대 정치학에서 파퓰리즘 연구에 대한 간략한 소개로는 서병훈(2008, 16~19) 참조.

10) 미국 정치학에서 맥퍼슨(C. B. Macpherson)과 피트킨(Hannah Pitkin)으로 대표되는 참여 민주주의론이 학문적 ‘유행’을 타는 시기도 그러한 정치사적 흐름과 일치한다. 노무현 정권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모토로 내세운 ‘참여정부’는 서구 국가의 그러한 경향이 30여년의 시차를 두고 모방 및 재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양승태 2007, 특히 제 2장 참조.

11) 러시아어로는 ‘Narodnichestvo’이다. 일반적으로 ‘인민 속으로’를 의미하는 ‘브나르도 운동’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이 러시아어는 영어 people이나 독일어 Volk에 해당한 러시아어 narod에서 파생한 말로서 말 그대로는 "Peopleism"으로 번역될 수도 있으나, 그 번역어가 영어의 어감으로 어색하여 populism이란 말이 일반적인 번역어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현대 정치학의 파퓰리즘 연구가들은 러시아의 그 운동을 파퓰리즘의 출발로 간주하는데 대체로 합의를 이룬 것으로 보인다. 이에 관해서는 Taggart 2000, 48 참조. 앞으로 설명되겠지만 문제는 그러한 ‘학문적 합의’가 바로 학문적으로 그리 큰 의미가 없다는 점이다.

각주 ↑>----------------------------------------------------


  그와 같은 지성사적 설명의 타당성 여부를 떠나 여기서 강조되어야 할 점이 있다. 대중들의 조직화나 그들에 대한 직접적인 호소를 통해 정치⁃사회적 변화를 추구했던 모든 운동들, 예를 들어 19세기 러시아의 나르도니키 운동가들, 19세기 미국의 인민당 지도자들, 페론과 그의 추종자들, 1960~70년대 서구의 학생운동가들, 이들보다 순화되고 점진적인 형태의 개혁을 추구한 80년대 이후의 시민운동, 그리고 한국에서 1980년대의 ‘민중민주주의’ 운동가들이나 노무현 정권의 ‘참여정부’ 인사 등등, 그들 모두가 스스로를 민주주의와는 구분되면서 조악한 의미를 갖는 파퓰리스트로 규정한 경우는 없다는 점이다. 그 기본적인 이유는 민주주의가 하나의 정치체제가 아니라 이상적인 정치체제와 동일시되는 현대의 정신적 상황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파퓰리즘 운동으로 규정되는 모든 운동들이 파퓰리즘을 공식적인 이념으로 표방한 경우는 거의 없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러시아의 나르도니키 운동가들이나 미국의 인민당 지도자들의 행동이나 정책은 모두 순박하지만 무력한 다수의 농민들이나 근로자들을 착취로부터 해방시키거나 지배층의 횡포로부터 보호한다는 나름대로의 인간애나 정의감 속에서 추구되었던 것이며, 페론의 정책은 파퓰리즘이나 페론이즘의 이름으로서가 아니라 ‘사회정의(Justicialista)’의 이름으로 추구된 것이다. 12) 또한 6~70년대 서구의 학생운동은 원색적인 계급투쟁의 차원을 넘어 부패하고 위선적이고 인간들을 소외시키는 자본주의 질서의 타도나 수정을 통해서 진정한 인간 해방을 실현한다는 나름대로 새롭게 해석한 마르크스주의의 이상을 표방한 것이며, 80년대 이후의 시민운동은 자유로운 담론문화의 실현을 통해 억압적이고 관료체제로 경직된 국가권력을 견제하면서 사회적 정의의 실현을 담보한다는 나름대로의 도덕적 이상의 표명이었다. 80년대 한국의 민중민주주의는 부패하지 않으면서 억압받고 소외된 노동자-농민-여성 등 소위 민중이 통치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그 당위성의 근거에 대해서 민중민주주의자들이 체계적인 설명을 제시한 것 같지는 않다- 나름대로의 민주정치의 주체에 대한 해석의 결과이며, 노무현 정권의 참여민주주의도 다수 국민의 ‘올바른’ 소리를 국정에 반영하고 국민의 적극적인 정치참여를 통해 민주화를 완성시킨다는 나름대로의 이념적 기획의 표현인 것이다.

  1990년대 들어서는 서구 국가에서 집권한 진보 정당의 정책으로 새롭게 형성된 노조나 지방권력 등 ‘기득권’ 층의 이익에 도전하는 보수주의 정당들의 정책 및 보수주의 정치인들이 대중매체를 동원하여 대 국민 설득에 나서는 태도에 대해서 진보 진영의 정치인들이나 시민단체들이 ‘신자유주의적 파퓰리즘’이란 용어로 공격하는 상황도 전개되고, 그러한 상황은 한국에도 전이되어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현재의 이명박 정부의 정책에 대해서 우파 파퓰리즘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한 것이다. 물론 그러한 ‘보수주의적 파퓰리즘’의 정책들 또한 파퓰리즘의 이름으로서가 아니라 자유나 복지의 이념 또는 국가이익의 명분으로 추구되었던 것이다.

  파퓰리즘이란 말의 사용과 관련된 그와 같은 개념적 혼란 상황을 고려할 때 파퓰리즘을 연구한 서구의 정치학자들이 대체로 도달한 결론은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 즉, 파퓰리즘이란 용어에는 상충되는 수많은 다른 의미들이 하나의 말에 포괄되어 있는 등 하나의 개념으로서 근본적으로 애매하고 모순되기 때문에, 파퓰리즘이 무엇인지 보편적인 정의를 내림은 물론이고 일반화된 묘사도 어렵다는 것이다. 13) 다시 말해서 -진지한 사회과학 연구자들이라면 자주 체험하듯이- 파퓰리즘이란 현상을 처음 접했을 때는 직관적으로 그 연구 대상의 실체가 자명하고 그 구체적인 성격이 분명한 것 같았지만, 막상 세밀하게 연구하면서 그 실체를 깊이 검토하다 보니 무엇을 연구했는지 모르게 되고 연구 대상 자체가 실종되는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다른 경우에도 그러하지만 파퓰리즘 연구와 관련된 그와 같은 학문적 궁경을 벗어나기 위한 유일하고 효율적인 방법은 다시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미 오래 전에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이 “시장의 우상(idola fori)”이란 개념으로 갈파했듯이, 하나의 언어로 표상되는 고정된 의미의 체계는 이 세계에 대한 고정 관념을 낳으면서 그것에 대한 자유로운 이해를 방해할 수 있으며, 특정한 어휘의 의미에 대한 고착된 이해나 선입견은 바로 사회과학의 이름으로 그 언어로 표현되는 대상이나 현상의 실체를 왜곡시킬 수 있는 것이다. 파퓰리즘을 포함하여 모든 학문 용어에는 실제로 ‘시장의 우상’의 위험이 상존한다. 따라서 그러한 우상화의 위험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파퓰리즘이라는 용어나 개념 이전에 파퓰리즘이라는 말 자체로 돌아가, 그 용어의 핵심인 ‘populus’란 말 자체의 원초적 의미가 무엇이고, 공간적 및 시간적 전파과정, 즉 다른 사회⁃문화적 경계를 넘고 역사적 변화라는 시대적 경계를 넘는 과정을 통해서 어떠한 의미의 변용을 보여주었으며, 그러한 의미의 변용 속에서도 불변의 영속적인 요소가 있다면 무엇인지 설명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곧 ‘populus’란 말에 함축된 정치사 및 정치사상사적 의미에 대한 탐구를 의미한다. 이 시대 한국 정치에 있어 파퓰리즘의 의미도 그러한 노력을 통해서 밝혀지게 된다.


III.

  영어 ‘populism’은 ‘popul-’이란 어간에서 파생한 수많은 어휘들 가운데 하나이며, 이 어간의 원천은 라틴어 ‘populus’이다. 이 라틴어는 기본적으로 집합적인 인간들에 대한 통칭으로서 ‘사람들’을 -‘homo’나 ‘vir’와 구분된- 의미하며, 문맥에 따라 ‘인민(people)’이나 ‘민중’ 또는 ‘공중(general public)’ 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 마을, 도시, 국가, 제국 등 한 공동체를 구성하는 ‘사람들’ 전체를 지칭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 구성원들 중에서 소수 엘리트들이나 지배층 인사들을 제외한 얼굴 없는 다수의 나머지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 ‘사람들’의 정치·사회적 성격은 물론 역사 및 문화적 배경에 따라 무한한 변용이 가능하며, 따라서 우리말의 인민이나 공중 등과 같이 이 포풀루스란 말도 결코 고정된 의미나 개념 내용을 갖는 것은 아니다. 14) 한 공동체의 공간적 경계 내에서 사는 같은 사람들이라도 그들 각각이 인종, 종교, 직능, 신분 등이 무엇이냐에 따라 특정 집단의 인간들은 그 구성원의 자격을 박탈당할 수 있는 것이다.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물활론의 신앙이나 신인동형론의 종교가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특정 인간 집단들은 배제되어도 특정 동물이나 신들은 그 구성원 집단에 포함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포괄과 배제의 기준이 무엇이냐에 따라 그 공동체의 구성원이 달라지며, 그 기준은 한 국가 또는 한 시대를 지배하는 세계관이나 인간관 또는 지배구조나 사회체제의 성격에 따라 달라지고 시대에 따라 그 의미가 변화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서양 고대세계에서 정치참여의 범위가 최대로 확대되었던 아테네의 민주정체나 로마의 공화정의 경우에서도 미성년과 외국인 그리고 여성과 노예를 제외시키는 것이 당연시 되었다. 반면에 중세의 기독교적 보편주의는 적어도 이념적으로는 -물론 실제적으로는 기독교도라는 포괄적이면서도 배타적인 기준과 더불어 지배체제의 운영에 있어서는 엄격한 신분제적 위계질서를 토대로- 그러한 구분을 넘어 말 그대로 보편적인 인류공동체 이상의 실현을 목표로 제시한 바 있다. 그리고 그러한 기독교적 보편주의의 이념적 기초를 제공했던 고대 스토아철학의 변용이라고 할 수 있는 근대 서구 계몽주의를 통해 표방된 만민평등의 이념을 바탕으로 성립된 현대 민주주의 체제에서도 실제적으로는 다양한 형태의 법이나 관습을 토대로 차별성의 기준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15)


각주 ↓>----------------------------------------------------

12) 그의 정당 명칭인 ‘Partido Justicialista(사회정의당; 현재의 아르헨티나 집권당의 명칭이기도 하다)’에서 유추할 수 있다. ‘Justicialista’는 스페인어 ‘justicia social; social justice’의 축약어이다.

13) 이에 관해서 간단한 정리로는 서병훈(2008, 17~18), Panizza(2005, 1~2) 참조.

14) 로마시대에 ‘populus’란 말은 한편으로는 로마제국에 속한 인민 전체를 지칭하기도 하지만, 경우에 따라 여성이나 노예 또는 하층민(plebs)등 통치행위에 참여하지 않는 구성원들을 제외한 시민집단을 지칭하기도 한다. ‘plebs’란 말은 희랍어에서 ‘평민(commoner)’을 의미하는 ‘plēthos(이 말 자체는 ‘majority’ 즉 상대적 다수를 의미하며, 지배체제의 일반적 속성 상 평민들이란 수적으로 많다는 사실에서 유래했을 것이다)’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앞으로 설명되겠지만, 희랍어에서 ‘dēmos’와 ‘plēthos’의 관계는 라틴어에서 ‘populus’와 ‘plebs’의 관계와 유사하다고 할 것이며, 라틴어 및 영어와 마찬가지로 희랍어에서도 ‘plēthos’와 유사한 말로 ‘군중(vulgus; crowd)’ 또는 ‘폭민(turba; mob)’에 해당하는 ‘ochlos’, ‘대중(multitudo; multitude)’에 해당하는 ‘hoi polloi’등의 어휘가 있다. 비슷하면서도 각각 다른 어휘들의 존재는 국가생활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인간의 일반적인  성격이 언어적 표상으로 나타난 결과라고 할 것이다.

15) 프랑스 혁명 초기 시민들을 일정 금액 이상의 세금 납부 여부에 따라 ‘능동적 시민(citoyen actif)’과 ‘수동적 시민(citoyen passif)’으로 분류한 것은 그러한 관념의 근대적 변용이다. 그런데 동일한 국가의 구성원이라도 그 자질이나 기능 면에서 다를 수 있으며, 그 다름에 따라 통치에의 참여 여부나 직능이 달라야 한다는 생각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사상에서 기원하는 오래된 관념이다. 동양 정치사상에서 ‘군자-소인’의 구분도 그러한 관념의 다른 표현이라고 할 것이다. 서양 정치사상사에서 시민권 이론에 대한 간략한 서술로는 Beiner 1968, 그 가운데 특히 Pocock의 논문 참조.

각주 ↑>----------------------------------------------------


  결국 포풀루스란 말(기표) 자체가 본원적인 중요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 각 정치 공동체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성격이 무엇이고, 그것은 정치체제의 변화를 포함하여 어떠한 역사 및 정신사적 변화를 통해 형성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나타났는지 파악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점은 고대 로마의 포풀루스나 희랍에서 ‘데모스(dēmos)’로 불리는 인간 집단의 경우는 물론이고, 동양에서 서양의 정치학 용어가 소개되기 이전 언어들인 ‘백성’, ‘민초’ 등의 이름으로 지칭되는 피지배 집단의 경우에도 해당된다. 그러한 말들은 소속된 언어만 다를 뿐 근본적으로 동일한 의미세계를 공유한 말들이다. 그것들은 모두 한 국가 구성원 전체 또는 소수의 권력 또는 지배 집단을 구성하는 사람들을 제외한 다수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들인 것이다. 따라서 현재는 ‘democracy=민주주의’의 번역 등식이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지만, 오직 의미의 세계만을 기초로 조어를 한다면 영어로 ‘democracy’ 대신에 ‘populocracy’란 말이 -비록 어원이 다른 두 말의 결합이지만- 사용되지 못할 이유는 없으며, ‘민중주의’와 함께 ‘백성주의’나 ‘민초주의’라는 용어가 사용되지 못할 이유도 전혀 없는 것이다. 16) 그리고 본디 ‘주의’란 의미가 없는 ‘democracy’란 말이 민주‘주의’로 번역되어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참작할 경우, ‘populocracy’란 말 또한 ‘populism’이란 말로 치환될 수 있으므로, ‘파퓰리즘=민주주의’의 등식도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말 자체로는 파퓰리즘이 민주주의와 구분될 이유는 전혀 없다. 중요한 점은 어떠한 역사 및 정신사적 변화 때문에 국가 공동체의 구성원 전체 또는 피지배층을 지칭하는 말이나 그들이 통치의 주체로 등장하는 정치체제가 가치비하의 의미를 갖게 되었는지 그 변화의 실체를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데모스의 경우가 검토의 대상으로 등장할 필요가 있다. 문제의 근원적인 해결은 언제나 그 기원으로 돌아가는 데서 시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데모스는 잘 알려져 있듯이 민주주의라는 말의 어원을 구성하고, 데모스의 지배를 의미하는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현대 민주주의의 역사적 원형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이 말의 의미 및 그것으로 지칭되는 집단의 정치⁃사회적 성격의 역사적 변화 과정 또한 로마 공화정에서 파풀루스의 정치적 역할을 통해 재현됨을 발견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것이 인간성과 국가생활의 관계가 무엇인가 문제의 해명에 실마리를 제공해 줄 뿐만 아니라, 바로 파퓰리즘과 민주주의의 관계의 본질이 무엇인지 밝혀준다는 점이다. 방대한 역사적 그리고 정신사 및 정치사상사적 논의와 설명을 필요로 하지만, 이 글의 한정된 목적에 맞추어 데모스의 의미 변화와 관련된 서양 고대의 관련된 사실(史實)들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7)

  호메로스의 작품에서도 등장하는 ‘데모스’란 말은 본디 통치의 중심지 혹은 성채를 뜻하는 ‘polis’와 구분되어 농경 중심의 시골지역을 지칭하며, 그와 같은 지역의 명칭이 점차 그곳에 사는 사람들인 ‘시골사람’도 함께 지칭하게 되었다. 그러한 시골사람은 성채 안에서 통치행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시민(politēs)’과 대비되며, 아테네의 민주화란 그 시골사람들을 전통적으로 귀족의 권한이자 의무였던 시민계층으로 포섭하는 과정, 즉 평민들에게 귀족과 동등한 권리를 갖고 통치에 참여하는 기회 및 권한을 확대하는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한 과정이 아테네 정치사에서 솔론-클레이스테네스-페리클레스로 이어지는 정치개혁에 해당하며, 그 개혁의 목표는 ‘시민=시골사람=정치인’ 등식의 성립과정, 다시 말해서 여성과 노예와 외국인과 미성년을 제외한 도시국가의 구성원 모두가 시민집단(politeuma)으로서 통치에 참여하는 직접민주주의의 확대 및 심화 과정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인류의 정치사에서 언제나 그러하듯이 -경제⁃사회적 배경의 차이에 기인한 시간적 여유나 여가의 차이 및 지적 능력이나 정신적 성향의 차이에 따라- 직접민주주의가 최고조에 달한 페리클레스 시대에도 정책이나 법안을 심의하는 심의기관(boulē)이나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민회(ekklēsia) 또는 재판정(hēliaia)에서 집단적 담론이나 토의를 능동적으로 주도하는 사람과 타인의 논의에 수동적으로 부화뇌동하는 사람은 구분되기 마련이었다.

  따라서 직접민주주의라는 제도적인 외양 속에서도 업무수행 능력이나 연설 및 토의 능력의 차이에 따라 시민집단 내부에 소수와 다수의 분화는 일어나게 마련이다. 즉, 국가정책의 결정과정에 직접적⁃능동적으로 관여하는 소수의 정치인(politikos)들과 간접적⁃수동적으로 참여하는 다수의 시민들로 나누어지게 됨이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전자가 정치가이자 엘리트 또는 지배 계층이라면, 후자는 민주주의 정치체제에서 통치의 주체이자 동시에 객체인 데모스인 것이다. ‘데모스가 통치한다’는 민주정체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그와 같은 시민집단의 분화, 즉 국가 공동체 구성원 전체가 통치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그 구성원 전체는 다시 통치행위의 적극적 주체와 소극적 주체로 필연적으로 분화될 수밖에 없는 역설 속에 고대와 현대를 막론하고 시대를 초월한 파퓰리즘의 본령이 있는 것이다. 즉, 다수이기 때문에 통치의 주체로서 공직자를 선출하는 권한이 부여되어 있는 막강한 존재이지만 스스로는 정책을 입안하거나 입안된 정책을 체계적으로 검토 및 비판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이 부족 또는 결여된 존재, 토론과 연설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을 합리적 또는 비합리적으로 설득할 수 있는 언어 능력이 부족 또는 결여된 존재, 그러한 존재인 데모스가 통치의 궁극적 주체로 등장하면서 다양한 국가적 및 정치⁃사회적 문제들을 야기하는 민주정치의 역동적인 현실 속에서 파퓰리즘의 본령이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18) 말 그대로는 파퓰리즘이란 민주주의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지만, 그 내용이나 성격이 무엇이든 다수의 비합리적 정서에 따라 결정되는 잘못된 국가 운영이나 잘못된 정책결정으로서의 파퓰리즘이란 바로 민주정치에서 언제나 나타날 수 있는 데모스 자신 또는 그 정치 지도자들의 도덕적⁃지적 능력이나 자질의 퇴화 현상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인류가 문명시대에 들어선 이후에는 인간의 도덕적⁃지적 능력이란 특정 시기에만 유별나게 탁월하거나 열등한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비록 특정한 시기에 그러한 능력 면에서 기존의 한계를 뛰어 넘는,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 철학자로 부를 수 있는, 천재적인 사고자의 출현이란 하늘의 섭리에 속한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능력 면에서 탁월한 인간과 부족한 인간들의 분포란 어느 시대나 비슷하게 마련이며, 부족한 자의 탁월한 자에 대한 복종이 인간 세계에 일반적인 현상이지 그 반대가 일반적인 현상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왜 그러한 퇴화 현상이 발생하며, 그 현상의 실체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 문제 또한 또 다른 방대한 논의를 필요로 하지만, 19) 아테네의 정치사 맥락에서 파퓰리스트에 해당하는 ‘데마고그(demagogue; 희랍어로 demagogos)’의 출현을 중심으로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아테네에서 소위 데마고그로 불리는 정치인들의 출현은 페리클레스라는 탁월한 정치가가 역병으로 죽은 이후인 것으로 대체로 서양사 교과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그 희랍어 자체는 ‘데모스의 지도자(agōgos)’를 의미한다. 20) 다시 말해서 이 말이 처음부터 ‘대중 선동가 또는 대중들의 의사나 욕구에 부화뇌동하거나 영합이나 아부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표면상의 의미만으로는 오히려 현대의 히틀러나 카다피 또는 김정일의 직함에 해당된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민주정치 체제에서는 연설을 통해 대중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능력이란 바로 정치권력의 획득에 필수적이므로, 정치인이라면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그러한 능력의 부족함이 원망의 대상이지 그것의 충일함이란 아무리 과도해도 지나치지 않는 정치적 자산인 것이다. 따라서 ‘데모스의 지도자’는 고대 아테네에서도 정치인의 목표이지 결코 기피의 대상이 아닌 것이며, 적어도 클레이스테네스의 민주화 개혁 이후에는 페리클레스의 생전과 사후의 차이를 떠나 정치인들 모두가 ‘데모스의 지도자’를 지향했다고 할 수 있다. 21) 그리고 서양사 교과서에서 클레온(Kleōn)이 데마고그의 대표적인 정치인으로 단죄되는 주된 이유는 일단 아리스토파네스(Arisophanēs)와 투키디데스(Thoukydidēs)의 문학적 및 역사적 평가와 -언제나 후세의 판단에 영속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아울러 그가 평민 출신으로서 페리클레스 등 귀족 출신 정치인들을 견제하면서 ‘데모스의 지도자’로 부각된 사실에 기인한다. 그리고 그의 정치적 행적에는 분명히 후대의 시각에서 파퓰리즘으로 규정될 수 있는 요소들이 -특히 당시 국제정치적 환경이나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국력이나 전쟁수행 능력 등을 고려할 때 그가 추구한 대 스파르타 강경책이- 많음도 사실이다. 그러나 아테네의 국가체제와는 양립할 수 없기 때문에 타협은 있을 수 없다는 나름대로의 정치적 신념에서 추구한 대 스파르타 강경책, 해군력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된 전쟁 상황에서 주로 육체노동자들인 테테스(thetēs) 계층이 담당하는 병과인 노수(rower)들의 수당을 인상한 정책 등은 당시의 상황에서나 현재의 시각에서도 대중영합주의 보다는 민주주의의 수호자나 인도주의의 실현자 또는 공정성 이념 및 복지정책의 추구자로 평가될 수 있는 여지도 있는 것이다.


각주 ↓>----------------------------------------------------

16) 참고로 부연하자면, ‘democracy’는 민주주의 대신에 ‘민중주의’, ‘인민주의’, 또는 서세동점기의 일본이나 한국에서와 같이 ‘공민주의’나 ‘합중주의’로도 번역될 수 있는 것이다.

17) 이하 ‘demos’란 말의 의미 변화와 연관된 정치⁃사회사 및 정신사적 변화에 관해서는 양승태(2006, 특히 제 5~6장) 및 그 책에 제시되고 검토된 문헌들 참조.

18) 이 글에서 자세히 논의할 수는 없지만 슘페터(Jeseph A. Schumpeter)나 다알(Robert A. Dahl) 등으로 대표되는 현대 엘리트 민주주의론의 근본적인 한계는 그러한 역설의 의미를 제대로 천착하지 못한데 있다. 즉 엘리트와 대중을 정책 생산자와 정책 소비자의 관계로 파악할 뿐, 그와 같은 엘리트와 대중 사이의 정치적 상호의존성이 각각의 성격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으며, 대중의 성격이 전통이나 사회구조적 성격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면서 엘리트들의 성격도 변화시킬 수 있으며, 그러한 상호의존성이 국가정책 나아가 국가의 성격 자체를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인식의 한계가 바로 엘리트 민주주의론에서 파퓰리즘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특히 슘페터의 경우 자본주의 생산구조의 분석이나 사회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 및 지식인의 역할에 대한 논의의 경우 파퓰리즘의 문제들이 ‘잠재적으로는’ 탁월하게 제기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Schumpeter 1976 참조)- 논의되지 못한 근본적인 이유라고 할 것이다.

19) 이 문제에 대한 필자 나름대로의 논구가 졸저 <앎과 잘남>(양승태 2006)이다.

20) 이 말은 본디 ‘이끈다’를 의미하지만, 그 의미가 전화하여 ‘인도하다’ ‘교육하다’의 의미도 갖는 동사 ‘agō’의 인칭명사이다. 참고로 그것의 추상명사형인 ‘agōgē’는 교육을 의미하기도 하며, 스파르타에서는 시민교육을 지칭하는 -아테네의 ‘paideia’와 대비되어- 말이기도 하다.

21) 참고로 페리클레스의 직함 가운데 하나였던 ‘prostatēs’는 적어도 어의만으로는 데마고그와 차이가 없다. 그 말 그대로는 ‘앞에(pro)’ ‘서있음(stasis)’을 의미하며, 어원상으로는 영어의 ‘president’와 함축된 의미가 비슷하다.(양승태 2006, 507) 참고로 이 희랍어는 해부학 용어로 남성의 전립선(영어로 prostate)도 의미한다.

각주 ↑>----------------------------------------------------


  그러므로 고대나 현대를 막론하고 그리고 그 국가 공동체의 구성원 전체가 데모스, 포풀루스, 백성, 민초, 국민, 인민, 민중 등 어떻게 불리든, 특정 정치인의 정책이나 행동이 파퓰리즘에 해당하는지 아니면 진정한 민주주의의 표현인지 또는 대중선동가인지 아니면 애국자나 국민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지도자인지 여부는 국가 구성원 다수에의 직접적이거나 비이성적인 호소 방식 자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최고 권력자나 정치인들이 통치자로서 권위가 있고 국가 구성원 다수가 그들의 정책결정을 신뢰하는 정치적 상황에서는 군중심리나 집단적인 정서에의 호소 자체가 불필요할 것이며, 극단적으로 그 다수가 전혀 합리적인 설득의 대상이 아니라 오직 선동적인 프로파간다를 통해서만 국가시책에 호응할 수 있는 존재일 경우에는 후자의 방식이 국가통치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합리적일 수 있다. 그리고 근대의 민주주의 헌법에서도 대체로 허용하고 있듯이, 국가의 존립과 관계된 비상사태나 국가체제의 혁명적 전환이 요구되는 역사적 상황에서는 -기존의 권력자에 의해 악용되는 경우가 많지만- 기존의 법이나 제도를 초월한 폭력적 행동도 민주정체에서 주권자인 국가 구성원 전체의 의사로 정당화될 수도 있는 것이다. 22)

  결국 민주주의냐 파퓰리즘이냐를 구분하는 궁극적인 기준은 국가생활을 통해 실현할 이상이나 목표가 무엇이고, 그것에 비추어 특정 시점에서 국가 전체적으로 추구해야 할 구체적이고 합당한 장⁃단기 정책이 무엇이냐의 문제로 귀착된다. 그러한 기준 자체가 없거나 그러한 기준에서 벗어나 다수 구성원들의 비합리적 욕구에 편승하거나 그들의 정서적인 충동을 자극하거나 부추기는 방식으로 권력을 장악하거나 정책을 추구할 때 민주주의는 파퓰리즘으로 변질되는 것이다. 그리고 한 국가 구성원 다수가 실제로 파퓰리즘의 선동에 지배받는지 여부는 다음의 요소들에 의존한다고 할 수 있다. 즉, 그들이 국가생활의 이상이나 목표에 대해 어느 수준의 이해를 하고 있고, 법의 지배에 대해 어느 정도의 경외감을 갖고 있으며, 전통적 가치나 규범에 대해 어느 정도의 경건한 태도를 갖고 있고, 그 국가의 지배층이 그들에 대해서 얼마나 도덕적⁃정신적인 권위가 있으며, 그 국가의 지식인 집단은 어떠한 내용 및 수준의 지성적 체계를 확립 및 발전시키면서 그들을 정신적으로 지도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정신적⁃도덕적⁃지적 권위는 물론 어느 날 갑자기 확립되거나 쇠락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국가 구성원 전체의 성격 및 행동방식을 결정하는 교육⁃문화의 수준이나 정신적 전통과 가치관에 기초하며, 그러한 전통 및 가치관을 변화시키는 사회⁃경제 체제의 변화 및 그것과 연관된 새로운 세계관이나 인간관의 등장에 따라 그러한 권위는 지속되거나 쇠퇴할 수 있는 것이다.

  단순화의 위험은 있지만, 소크라테스-플라톤의 이름으로 상징되는 정치철학의 출현과 그들의 지적 후예들인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현대의 사상가들로 이어지는 서양 정치사상사의 흐름 전체는 각 시대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제기되는 위의 문제들에 대한 체계적인 성찰 및 그것에 기초하여 당대의 정치현실에 대한 각 사상가 나름대로의 진단과 처방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철학적 성찰은 고대 세계에서는 플라톤에서와 같이 파퓰리즘의 출현을 민주정체의 필연적인 결말로 간주하여 민주정체 자체에 대한 전반적인 부정의 논리로 나타나기도 하였고, 23) 아리스토텔레스에서와 같이 민주정체에 대한 실천적인 대안으로 혼합정체가 제시되기도 하였으며, 그러한 혼합정체의 이상이 키케로를 통해서 공화정에 대한 옹호 논리로 나타나기도 한 것이다. 24) 프랑스혁명 이후 근대 서구 정치사는 한편으로 -콩도르세 등으로 대표되듯이- ‘people’로 표현되는 인류공동체 구성원 전체가 누구나 제대로 교육만 받으면 합리적인 행동을 한다는 계몽주의의 이성 및 평등 이념에 기초하여 추구된 선거권의 확대 등 국가구성원 전체의 정치주체화 과정이자, 동시에 -마르크스로 대변되듯이- 국가구성원을 계급으로 분리하면서 하나의 계급에 역사적 진보의 주체성을 독점시키려는 노력이 오래 동안 지속된 기간이기도 하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밀, 토크빌, 쇼펜하우어, 부르크하르트, 니체 등으로 대표되듯이- 인간성에 내재한 비이성적 또는 저열한 요소에 대한 인식의 확대 및 심화 과정으로서, 대중의 정치세력화에 대한 우려와 더불어 문명의 이름으로 진행된 야만성의 증대에 대한 혐오와 더불어 정치적⁃문화적 엘리트주의가 일부 지식인들과 보수적인 정치인들 사이에 확산된 시기였다. 그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점은 앞에서 언급된 현대 파퓰리즘의 원조 격인 페론이 정신적 지주로 삼았던 무솔리니의 파시즘이란 나치즘과 유사하게 대중 동원을 통하여 바로 대중들을 통제하기 위한 엘리트주의적 통치체제를 확립한 사례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정치사 및 정치사상사의 맥락에서 한국정치에서 파퓰리즘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해명, 그리고 그것의 극복이 어떻게 추구되어야 하는지 그 근본적인 해결책의 모색이 시도될 수 있을 것 같다.


IV.  
        
  논의의 편의상 지금까지 논의한 내용의 핵심을 정리하기로 하자. 파퓰리즘이라는 용어의 존재 여부 및 고대와 현대 세계라는 역사적 간격을 떠나, 파퓰리즘의 이름으로 제기되는 정치⁃사회적 문제의 근원은 결국 지극히 자명하다. 그것은 단적으로 말하여 민주주의와 다른 정치체제가 아니라 시대나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민주주의의 다른 얼굴일 뿐이다.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국가에서 정치적 지도층 도는 사회적 지배층의 도덕적 및 지적 권위가 확고하지 못하고, 그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면서 전통적인 가치관 및 법과 제도에 대한 신뢰가 약화되며, 그들의 일부가 대중들의 단기적이거나 충동적인 욕구에 부화뇌동하는 경우, 그것은 언제나 출현 가능한 민주정치의 퇴화 현상인 것이다. 그리고 민주정치의 퇴화 여부는 국가 구성원 다수의 인간들이 어떠한 성격의 지배체제나 사회구조에 살면서 어떠한 수준이나 성격의 인간성 및 자질을 -도덕적 품성을 위시하여 지식이나 교양⁃문화의 수준 또는 세계관이나 역사관의 성격 등- 소유한 집단인가의 문제로 귀착된다는 것이다. 25) 이와 같이 그 근원에 대한 인식에서부터 한국정치의 파퓰리즘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은 모색되어야 한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현실 정치에서 특정한 법률의 제정이나 정책의 시행과 관련하여 제기되는 파퓰리즘 문제는 일반적으로 상대 정파에 대한 공격 수단으로서 정치적 수사의 성격을 가지며, 현실정치에서 파퓰리즘의 이름으로 파퓰리즘적인 정책이 정당화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명박 정부 등장 직후 한 때 정국을 소란스럽게 했던 ‘소고기 촛불시위’를 예로 들어보자.  

  일단 과학적 근거에 대한 합리적인 논의 자체가 대중들의 흥분된 분위기 속에서 합리적인 논의가 봉쇄된 채 소고기의 수입 문제가 정권퇴진의 구호가 난무하는 시위로까지 이어진 사태는 파퓰리즘 운위 이전에 일종의 저급한 정치적 소극(笑劇)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소고기 수입 정책의 정당성 여부를 떠나서, 당시 시위에 참가했던 대중들이나 그것을 주동했던 인물들 그리고 그것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부화뇌동이 아니라면- 야당 정치인들 어느 누구도 이제는 더 이상 공개적으로 당시 행위를 자랑하거나 그것의 정당성을 지속적으로 주장하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가 그것이 결코 자랑할 만한 ‘민주화 운동’이 아니라는 반증일 것이다. 그것은 일부 정치인들이나 시민운동가들이 대중들의 일시적이고 충동적인 정서를 부추기거나 그것에 부화뇌동하여 이루어진 전형적인 파퓰리즘의 사례였음의 증언인 것이다. 그런데 불법적이고 폭력적인 시위가 벌어진 상황에서 대통령의 공개적인 사과가 표명되었다는 또 다른 희화적인 요소도 그러하지만, 당시의 시위 군중들이 소고기 수입을 국민 생명권의 수호나 국민주권의 행사라는 명분으로 ‘당당히’ 반대했다는 사실은 대중운동의 존재 자체나 대중적 정서에의 호소 방식 자체가 민주주의와는 구분되는 파퓰리즘의 존재를 증빙하지는 않는 것이다. 이 점은 현재 한국 정치에서 파퓰리즘 논쟁의 중심 화두로 등장하는 복지 문제의 경우에도 해당된다. 특정한 입법이나 정책은 바로 국민들의 복지를 증진한다는 명분에서 추진되지 그것을 파퓰리즘의 표현이라고 스스로 인정하는 정파들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입법이나 정책이 파퓰리즘에 해당하는지 여부는 일단 그것의 내용이 국가생활의 미치는 장·단기적인 영향에 대한 치밀하고 합리적인 검토 후에 결정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장·단기적인 영향에 대한 평가의 기준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국가생활의 궁극적인 목적, 그리고 복지, 평등, 자유, 정의, 인권 등 보편적인 이념들이 될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이념들에 대한 진정한 이해는 오랜 시간에 걸친 깊은 정치철학 성찰을 요구한다는 사실에 있다. 다시 말해서 그러한 이념들의 실현은 일상적인 정치적 구호나 수사 또는 선전문구의 형태로 내세우는 간단한 문장들을 소리 높이 외쳐댄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것이다. 예를 들어 무엇이 진정한 의미에서 복지인가는 고도의 정치철학 성찰을 요구하며, 사전적 낱말풀이 방식으로 결코 해명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영어 ‘well-being’ 또는 ‘well-faring’의 번역어이기도 하지만, 그 영어의 개념적 기원도 말 자체는 간단히 ‘좋은 삶’ 또는 ‘잘삶’을 의미하면서 오래 전에 고대 희랍인들이 윤리의 근본 개념으로 정립한 ‘euzein’ 또는 ‘eudamonia’이라는 이념에서 찾을 수 있는 심원한 이념이다. 26) 그것은 단순히 일방적인 욕구의 충족이 아니라 절제나 정의 등의 덕목을 떠나 생각할 수 없으며, 급식이나 등록금 등과 같이 지엽적인 정책적 논란으로 해결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와 같은 일방적인 주장 이전에 무엇이 과연 진정한 의미에서 복지이며, 특히 그것이 국가생활의 목표와 관련하여 필수적으로 제기되어야 할 정의나 자유 등 다른 이념들과의 관계는 어떻게 정립되는지 깊은 검토가 필요한 것이다.”(양승태 2011, 13)

  그러므로 정당들이나 ‘정치적’ 시민단체 등 한국의 정파들이 스스로 표방하는 정책이나 주장의 근거가 되는 이념들 자체의 의미에 대해서 좀 더 진지하게 천착하는 노력이 없이, 그리고 오직 권력획득의 수단인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한 목적만으로 유권자들의 일시적인 욕구에 편승하는 입법이나 정책들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내세우고 추진할 경우, 여야나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한국 정치는 파퓰리즘이라는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파퓰리즘의 정치가 최근 정치·사회적으로 논란이 되는 국가정체성 위기의 원천이기도 하다. 27) 왜냐하면 만일 국정운영이 이성적 판단은 물론이고 일관된 기준이 없이 다수의 일시적이고 가변적인 욕구에 부화뇌동하면서 이루어질 때, 그러한 국정운영의 무원칙성이 바로 국가정체성의 해체나 실종의 가장 확실한 징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파 간의 대립이 “국가생활을 통해 추구해야 할 보편적이고 영속적인 가치나 이념에 대한 나름대로의 진지한 모색 차원”에서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그러한 대립은 “오직 패거리 다툼의 연속으로서 그 패거리들의 인적 면모들만 사안에 따라 바뀐 채 국가적 에너지의 소모만 의미”하는 양상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양승태 2010, 19) 그것은 곧 저급한 형태의 파퓰리즘의 지속이자 그것을 향한 무한경쟁 이외의 다름이 아닌 것이다. 결국 실천적인 관건은 민주주의가 파퓰리즘으로 변질될 수 있는 가능성을 미리 차단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나 정책적 수단이 존재하는지 여부에 있을 것이다.

  일단 법치국가에서 법이란 그 내용의 도덕적 보편타당성 여부를 떠나 일관된 국가통치의 기준이 되는 규범체계의 존재를 의미하므로, ‘법대로’의 정신은 국가생활이 파퓰리즘에 의해 표류됨을 방지할 기본적인 정치로 생각될 수 있다. 물론 그러하다. 최고통치자인 대통령만 ‘우직하게’ ‘법대로’만 국가시책을 시행하더라도 국가생활에 혼란과 퇴보는 없는 것이다. 28) 다만 그것이 궁극적인 장치나 수단은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아무리 일시적이고 가변적인 성격의 것이라도, 다수의 선택에 의해 정치권력의 향방이 결정되는 민주주의 제도의 속성상 권력을 지향하는 정치인들이란 그 다수의 요구에 부응하거나 편승하려는 행태가 지배하게 됨은 필연적이며, 이에 따라 그들이 바로 끊임없이 헌법을 자의적으로 쉽게 해석하면서 ‘파퓰리즘적’ 입법을 시도함은 필연적이며, 이에 따라 법체계 자체가 혼란스럽게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입법행태를 막으려는 어떠한 새로운 입법이나 정책적 제안도 반 민주주의적 행위로서 ‘국민적 지탄’의 대상이 되는 또 다른 파퓰리즘 운동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민주주의는 유감스럽지만 거의 필연적으로 파퓰리즘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다. 그 점은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의 역사뿐만 아니라 20세기 후반 이후 서서히 진행되어 오다 최근의 금융 위기로 그 실체를 드러낸 서구 민주주의 여러 국가들의 역사 또한 증언하고 있다. 바로 현재의 파퓰리즘 담론의 존재 자체가 현재 한국의 민주주의 또한 서구 민주주의의 그러한 역사적 전철을 답습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민주주의가 파퓰리즘으로 변질되는 것은 막을 수 있는 방안은 전혀 없는가?

  자연현상과는 달리 사회현상에서는 물론 인간이 회피불가능한 절대적인 성격의 필연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그와 같이 바람직하지 않은 필연성을 피하기 위한 궁극적인 방안은 인간 외적인 제도나 법이 아니라 바로 ‘populus’, 즉 ‘사람들’ 자체에서 찾아야 한다. 그 방안은 파퓰리즘이란 본질적으로 ‘어리석음’에 의한 국가 통치라는 사실과 아울러, 다수의 국민들이나 대중들 또한 고정된 성품이나 고착된 관념에 절대적으로 지배받는 인간 집단이 아니라 교육과 문화를 통해 그 정신 내용이 고양되고 순화될 수 있는 존재라는 가능성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또한 국민적 교양⁃문화의 창달은 스스로 부패하지 않으면서 준법정신에 기초한 일관된 행동을 통해 국민들로 존경받을 수 있는 삶의 태도와 더불어 진정성 있는 언변을 갖추어 여론을 합리적이고 건전한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 지도층 및 그들을 뒷받침하는 교양⁃문화를 갖춘 시민집단의 양성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대 아테네에서 페리클레스가 소피스트교육의 장려 등 시민적 교양⁃문화의 증진을 위한 정책들을 추구한 이유도 그러한 점에서 찾을 수 있으며, 비록 민주주의가 정착된 시기는 아니지만 괴테 등 18세기 후반 독일 지식인들이 추구한 교양시민계급(Bildungsbürgertum)의 양성 운동이나 후쿠사와 유키치(福澤諭吉) 등 명치유신 일본의 지식인들이 추구한 문명화 이념의 핵심도 국가생활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루어지기 위한 궁극적인 원천은 그 국민의 정신적 자질에 있다는 공통된 인식에 있는 것이다.

  교양시민계급의 양성은 단순히 사회교육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 한국정치의 절박한 현안인 파퓰리즘을 궁극적으로 극복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심원한 국가관이나 역사의식을 갖춘 지도층의 형성은 아직 기대하기 어렵더라도, 적어도 인간성에 대한 폭넓은 소양을 갖춘 지성적 능력과 더불어 투철한 공인의식을 가진 지도층의 형성, 그리고 스스로 창조적인 정책을 제안하지는 않더라도 제시된 정책들에 대해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으면서 여론의 향방을 주도할 수 있는 교양 있는 시민집단의 존재는 비록 상당 기간이 소요되더라도 형성 가능하며, 그러한 지도층과 시민집단의 존재만이 언제나 파퓰리즘으로 변질될 수 있는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는 궁극적인 수단이자 최후의 인간적 보루인 것이다. 29)

  현재의 한국은 경제적으로는 발전했을지라도 아직도 교양⁃문화의 측면에서 후진국임을 자각하는데서 한국정치의 파퓰리즘 극복 노력은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다. 현재 한국에서는 전통적인 유교적 교양⁃문화의 쇠퇴에 따른 정신적 공백을 새롭게 형성된 교양⁃문화가 메우지 못하는 정신적 빈곤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정신적으로 권위를 갖는 지식인층 및 교양⁃문화를 갖춘 시민집단이 부재하는 사회적 상황에서, 그리고 한 사회의 지배층이 교양⁃문화를 선도하지 못하고 사치스런 향락이나 고급 상품 소비의 주체로만 부각되면서 오직 속물적 가치의 과점이 그들이 누리는 사회적 우월성의 지표로 내세워질 때, 그러한 노력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들의 정치적 주장은 국민 다수에게 진정한 설득력을 갖지 못하게 되며, 이에 따라 보수와 진보의 차이를 떠나 ‘왜소한’ -이 경우 표준말은 아니지만 ‘쫀쫀한’이란 순 우리말 어휘가 좀 더 어울릴 것 같다- 파퓰리즘의 정치는 지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소한’ 파퓰리즘 정치의 지속 속에서는 국가적으로 언제 어떠한 돌발적인 상황이 발생하면서 파시즘 또는 볼셰비즘의 대두와 같이 국가 전체를 비이성적 광란으로 몰아갈 수도 있는 ‘거대한’ 파퓰리즘의 등장으로 이어질지 그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는 것이다. 파퓰리즘에 내재한 위험성의 핵심은 대중들의 감정적 흥분 상태에서 나타날 수 있는 판단의 맹목성 또는 무사고성(無思考性)이며, 한 국가에서 정신적 균형추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건전한 교양⁃문화를 갖춘 시민 집단의 약화나 부재는 국가적 위기의 상황에서 대중들의 맹목성과 무사고성을 자극 및 선동하면서 권력을 장악하려는 정치집단의 등장을 용이하게 만드는 토양인 것이다. 파시즘이나 볼셰비즘은 바로 다수 국민들의 지지와 환호와 흥분 또는 수동적인 용인이나 체념 속에 등장했던 것이다.

  스스로의 민주정체와 평등의 이념을 그토록 자랑스러워했던 아테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반민주적 군사국가인 스파르타에 패했다. 현대사에서 바이마르공화국의 예가 보여주는 것은 의회민주주의의 붕궤가 의회민주주의 자체 속에 배태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나름대로 탁월한 교양⁃문화를 갖춘 시민집단이 존재했던 아테네나 독일의 경우에도 그러했는데, 현재의 한국의 상황은 과연 어떠한지 깊은 반성이 필요할 때이다. 이와 관련하여 그러한 시민집단을 양성할 일차적 책임이 있는 한국의 지식인 집단이 과연 그들에게 부과된 국가적 책무를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지부터 반문할 필요가 있다. 대학교육의 빈곤 속에서 한 국가 국민의 교육⁃문화의 개화를 기대할 수는 없으며, 학문적 권위의 부재 속에서는 국가적 논제가 제기될 때 권위 있는 판단을 제시하면서 현실 정치인과 국민들을 정신적으로 이끌면서 파퓰리즘의 등장을 방지할 수 있는 정신적 주체의 실종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로 한국의 지식인들이 한국정치에서 파퓰리즘을 대두하게 만든 궁극적인 ‘원흉’일 수도 있는데, 정말 그러한가?


각주 ↓>----------------------------------------------------

22) 이것이 슈미트(Carl Schmitt)의 유명한 “주권자는 비상사태를 결정하는 자이다(Souverän ist, wer über den Ausnahmszustand entscheidet)”라는(Schmitt 1985, 11) 명제의 핵심적 의미이기도 하다.

23) 즉 플라톤에게는 다수로서 막강하되 언제나 생각이나 태도나 가변적이기 때문에 일관된 행동을 기대할 수 없으며, 얼굴 없는 인간과 같이 주체성을 규정할 수 없기 때문에 부도덕하거나 책임 없는 행동을 쉽게 하지만 그것들에 대해서 책임도 물을 수 없는 인간 집단의 존재가 데모스의 핵심이며, 그러한 인간 집단의 존재는 플라톤으로 하여금 인간성 자체에 대한 깊은 통찰과 더불어 모범적인 국가체제 및 국가생활의 이상을 체계적으로 개진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24) 키케로의 정치사상은 그 구체적인 내용에 정치철학적으로 새로운 요소는 없고, 소규모 도시국가의 운영에서 제국통치로의 역사적 변환이 요구되는 시대에 과거 로마 공화정의 이상 또는 ‘좋았던 시절’에 대한 일종의 시대착오적 집착의 표현으로도 간주될 수 있다. 그런데 그의 저작들에도 바로 카이사르의 등장을 가능하게 한 로마 대중들(populus)의 다양한 성격에 대한 관찰을 발견할 수 있음은 흥미롭다. 즉 그들은 주권자로서 공민(general public)이지만, 출세나 명에의 원천이나 두려움의 대상으로서 정치가들을 지배할 수 있고, 사법적 집행 이전에 정치가들을 단죄할 수 있으며, 원로원을 공격할 수 있고, 사소한 루머나 사건 또는 변덕스러움이 거대한 행동을 촉발하거나 그것들을 통해서 통제도 가능한 군중이나 대중인 것이다. 키케로의 그러한 관찰에 관해서는 최근 독일의 언론학자가(Jackob 2007) 여론의 개념 차원에서 간결하게 정리한 바 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제정기에 들어 번영 속에서 부패와 타락이 시작되는 시대의 지식인인 세네카(Seneca)의 경우에 ‘populus’는 좀 더 다양한 의미를 나타낸다. 그 말은 일단 지혜(sapientia)와 강인함(constantia) 등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소수의 ‘큰 인물(magnus vir)’들과 -현대적 의미의 엘리트와는 어느 정도 구분되고 유학 전통에서 ‘군자’에 비견되는- 대비되어 공직이나 신분의 고위 여부를 떠나 일상적이고 세속적인 가치에 탐닉하는 ‘다수의 인간들(multitude)’, 또는 특정한 성격이나 행동의 일관된 지향점이 없이 일시적인 이해관계나 충동 또는 흥분에 따라 움직이는 대중(masses)이나 군중(crowd)을 의미한다. 또한 그것은 부패한 국가 권력이나 지배층의 횡포에 맞서 보호되어야 하고 정당한 국가 통치의 수혜자가 되어야 함과 동시에 계몽 또는 교화의 대상이 되어야 할 다수의 ‘착하면서 어리석은’ 민중이나 민초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 점은 비록 치밀한 철학적 논증 형식이 아닌 에세이 형태의 자유로운 사변 전개의 형식이지만 ‘자선’이 무엇인가를 다룬 세네카의 말년의 저작인 에 대표적으로 잘 나타나 있다.

25) 이와 관련하여 같은 서구 자본주의 및 민주주의 국가들이라도 그 학문 수준이나 국민들의 교양⁃문화 수준에 따라 복지정책이 반드시 파퓰리즘의 정치로 변질되지 않음은 독일의 경우가 잘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26) 이 말의 번역어로서 ‘행복’이나 ‘happiness’는 적절한 번역어가 되지 못한다.

27)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양승태 2010, 특히 ‘들어가는 말’ 및 제 1장의 논의 참조.

28) 이에 관해서는 필자가 다른 저작에서(양승태 2010, 10장 참조) 대통령의 직능과 관련하여 좀 더 자세하게 논구한 바 있다.

29) 이 점이 아테네 민주정의 전성기를 이끈 페리클레스가 유명한 ‘장례연설’에서 아테네 시민의 자부심 가운데 하나로 천명한 항목들 가운데 하나이다.(Thucydides, Historiai(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제2권-15장 참조) 즉 아테네 시민은 스스로가 정책을 창안하지는 않더라도 그것을 건전하게 심의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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