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초국가 협력 리더십’을 원한다

by 최배근 posted Aug 19, 2011
세계는 ‘초국가 협력 리더십’을 원한다

세계경제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진입하고 있다. 세계경제라는 주식회사의 대주주에서 ‘최다 소액주주’로 전락한 미국이 만들어내는 세계경제의 불확실성이나 유로존의 재정위기 모두 ‘초국가 협력 리더십’ 없이는 해결이 불가능하다. 금융위기에 대한 미국의 대응은 기축통화 지위의 유지와 양립할 수 없는 달러 프린트라는 ‘모르핀’에 의존하였다. 그 결과가 신용등급의 강등이다. 경기 둔화 상황에서 ‘증세 없는 재정지출 삭감’이라는 초라한 정치 리더십을 보여준 미국 정치권이 오히려 신용평가사에 분풀이를 하고 있지만, <비즈니스위크>의 지적대로 사실 AA+ 등급도 과분하다.


미국의 신용등급 강등은 한 시대가 막을 내리는 상징적 사건이다. 정확히 40년 전 미국은 경상수지 적자로 ‘금태환 정지’를 선언함으로써 자신이 만든 고정환율제(브레턴우즈 체제)를 스스로 붕괴시켰다. 브레턴우즈 체제가 미국 중심의 세계경제질서였다는 점에서 이 체제의 종언은 ‘다극체제 개막’의 출발점이었다. 그럼에도 미국은 세계금융질서에 불안정성을 떠넘기면서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를 연장시켜 왔다. 그런데 미국 신용등급의 강등으로 이제 기축통화 지위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초국가 안전자산’의 지위를 상실한 것이다. 달러와 미국 경제가 기준과 중심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미국이 글로벌 경제의 대주주에서 ‘최대 소액주주’로 전락했음을 의미하고, 이는 ‘다극체제의 일상화’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시장이 불안정해질 때 도피할 안전지대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경우 시장은 극도의 불확실성에 내몰릴 수밖에 없게 된다. 미국의 신용등급이 강등되자 불확실성이 글로벌 금융시장을 뒤덮은 이유이다. 금융위기 이후 투자자들의 의사결정에서 리스크와 더불어 불확실성에 대한 회피가 크게 증가했다는 점에서 향후 금융시장은 불안정성이 일상화될 수밖에 없다. 시장의 안정성 확보를 위한 초국가 협력이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된 반면, 일상화된 다극체제에 필요한 ‘초국가 협력 리더십’은 빈곤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앞으로도 글로벌 금융시장의 불안정성이 해결되기 쉽지 않다는 점이다. 20세기를 미국의 시대로 만들었던 혁신과 금융 등 미국 시스템이 고장났기 때문이다. 이제 금융이 성장을 주도할 수 없는 가운데 실리콘 모델과 벤처 모델로 괜찮은 일자리를 만들 수 없는 상황에 미국 사회는 절망하고 있다. 재정 투입 1조2000억달러, 통화 공급 2조3000억달러, 제로금리 등 동원 가능한 모든 수단을 활용했음에도 고실업과 주택가격 하락이 지속되고, 금융위기의 원인 중 하나인 소득불평등이 위기 이전보다 악화되는 이유이다. 여기에 모기지나 고용에 연계된 사회보장 등 사회시스템도 작동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정치권은 비난할 대상과 희생양을 찾는 데 혈안일 뿐이다. 한마디로 총체적 난국이다. 그 결과 ‘기회의 평등’이라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갈 수 있는, ‘계급 없는 미국’의 건설이라는 ‘미국식 사회계약’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선진국일수록 개별 시스템은 상호 연관되어 있기에 미국의 문제를 금융시스템으로 국한하는 사고로는 현재의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금융위기를 국가부채 위기로 치환시킨 미국이 국내총생산(GDP) 대비 부채 비율을 현 수준으로 유지하려면 앞으로 75년간 매년 국내총생산의 8.3%(1조2000억달러)에 달하는 재정지출 감축이나 그만큼의 세금 인상, 혹은 둘의 조합이 필요하다는 미국 의회예산국의 계산은 국가부채가 사실상 해결 불가능하다는 선고나 다름없다.

불확실성의 또다른 축인 유로존 문제 역시 하나의 몸에 여러 개의 머리를 갖고 있으면서 ‘초국가 협력 리더십’이 빈곤하다는 점이다. 즉 스스로는 해결 불가능한 그리스 부채의 해결, 스페인과 이탈리아 등으로의 위기 확산 차단, 국가부채 위기의 은행 위기로의 전염 차단 등에 필요한 ‘초국가 협력 리더십’의 빈곤이 유로존의 구조적 불확실성이다.

이 모두가 미국 사회 내부의 평가들이다. 그런데도 미국 시스템에 대한 믿음이 골수까지 스며들어 있는 우리 사회의 대다수 엘리트들은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거라는 근거 없는 기대를 유포한다. 새로운 시대의 전개로 지금까지의 사고와 사회운영 원리에 대한 근본적이고 총체적인 재검토를 하지 않는 한 ‘침몰하는 타이타닉’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 한겨레신문 8월 20일자(토요일) 시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