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이대 정외과, 정치사상학회 초대 회장) 선생님께서
내일 음력 나라 연 날(개천절)을 앞두고 코리아글로브에
또 귀중한 글을 보내주셔서 아래에 전재합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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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연호 법제화의 민족사 및 문명사적 의미”
- 양 승 태(이화여대 정외과)
I.
안녕하십니까.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정치학을 가르치고 있는 양승태입니다.
오늘 우리 한민족과 대한민국을 사랑하시고, 아울러 민족 및 국가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는 현재의 국가생활을 걱정하시는 여러 선생님들 앞에서 저의 소견을 피력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어 영광입니다.
오늘 여러 선생님들께 드릴 말씀의 요체는 작년에 출간된 저의 졸저 <대한민국이란 무엇인가> 제 2부 7~9장에 수록되어 있으며, 그 곳에 제시된 핵심적인 내용에 변한 것은 없습니다. 즉, 단기연호의 부활은 국가정체성의 핵심적 요소인 주체적인 역사의식의 확립을 위해 역사적 당위로 요구된다든 것입니다. 물론 국가정체성과 단기연호의 관계라는 주제에는 그 책에서 해명된 문제들 이외에도 새롭게 파악되고 해명되어야 할 좀 더 세밀한 이론적 및 실천적인 문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국가정체성 개념은 지극히 심오하고 포괄적이기 때문에 저 자신 언제나 새로운 문제들을 끊임없이 제기하면서 그 해결에 고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오늘의 이 자리를 특히 단기연호 사용의 법제화라는 실천적이면서 동시에 이론적인 문제에 대해서 저의 생각을 개진하는 기회로 삼고자 합니다.
단기연호의 법제화가 실천적이면서 이론적인 이유는 그것에 대한 반대자들이 존재하고, 그 반대자들은 나름대로 ‘합리적’인 논변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존재는 단기연호를 법제화하는 과정에서 극복되어야 할 정치⁃사회적 현실이기 때문에 실천적인 문제입니다. 단기연호 부활의 반대자들은 그것을 ‘시대착오적인 국수주의의 미몽에 빠지고 세계화 추세에 역행하는 한가한 사람들의 비합리적 행동’ 정도로 치지도외시하는 태도가 있음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것은 단기연호 부활을 추진하는 사람들에게는 불편한 진실입니다. 그러나 불편한 진실을 편하게 볼 줄 알아야 불편한 현실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또한 반대론자들은 바로 나름대로의 합리적 논변이나 주장을 가진 정치⁃사회적 세력입니다. 따라서 어떠한 형태나 수준이든 주장과 주장 사이의 대립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이론적 문제이기도 합니다. 하버마스(Jürgen Habermas)란 독일 학자가 사회과학에서 필연적으로 제기되는 이론과 실천의 문제를 소통(communication) 개념으로 해명하려는 시도는 이 단기연호의 문제에도 적용될 수 있음은 물론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떠한 사회운동도 ‘씩씩한’ 행동만으로 그 목표가 실현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대자들의 논변에 대해 이론적 우월성을 확립하고, 그 우월성이 사회적으로 인정되고 전파되어 정치적 힘과 권위를 얻게 되면서 특정한 사회운동의 목표는 성취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논의의 초점이 되어야 할 것은 반대론자 논변의 근저에 있는 나름대로의 문명사적 관점입니다.
단기연호의 법제화와 관련된 이론과 실천의 문제들 가운데 가장 근원적인 것은 단기연호의 민족사적 의미와 더불어 문명사적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점에서 단기연호 찬성론자와 반대론자 사이 대립의 요체가 있습니다. 그런데 단기연호의 사용의 민족사적 당위성은 직관 차원에서라도 수긍이 갈 수 있는데, 문명사적 당위성은 언뜻 이해가 안 될 수 있습니다. 두 차원의 당위성에 대한 설명을 효율적으로 시작하기 위해서는 최근 <국학신문>9월호에 보도된 저에 대한 인터뷰 기사 내용에 대해서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기사 가운데는 인터뷰 과정에서 잘못 전달된 내용이 두 가지 있습니다. 그 둘은 모두 박정희 전 대통령과 관련된 내용인데, 바로 그가 단기연호 폐지의 주역이라는 시실이 중요합니다. 이 기회를 빌려 사소한 문제지만 보도내용도 정정하고 그것을 통해 오늘 드릴 말씀의 출발점을 찾고자 합니다.
II.
<국학신문>에 게재된 저의 인터뷰 기사는 박 전 대통령이 단기연호를 폐지한 이유가 그것이 ‘민족주의적’이기 때문이고, 그러한 의미에서 그의 ‘역사의식 부재’가 비판받아야 한다고 제가 주장한 것으로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단기연호가 민족주의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국수주의적’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폐지한 것이고, 그러한 점에서 그는 역사의식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역사의식이 ‘부족했다’는 것이 실제 제가 인터뷰에서 지적한 내용입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복잡하면서도 드라마틱한 삶의 행로나 정치적 공과 문제를 떠나 한국 현대사에서 획기적인 인물임은 분명합니다. 사실 ‘박정희 연구’는 한국 현대사 흐름의 실체를 파악하는데 필수불가결 하며, 그에 대한 제대로 된 연구는 범상한 수준의 지성 능력 이상을 요구합니다. 특히 그에 대해서 민주와 독재의 이분법으로 재단하는 수준에서는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어쨌든 오늘 드릴 말씀과 관련하여 주목할 사실은 그가 왜 그토록 ‘손쉽게’ 단기연호를 폐지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사실이 주목되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 ‘손쉬운’ 결정의 바탕을 이루는 박 전 대통령 나름대로의 신념에서 오늘까지도 이어지는 단기연호에 대한 사회적 다수의 무관심이나 반대의 정신적 원천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먼저 그 ‘손쉬움’의 의미에 대해서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졸저 <대한민국이란 무엇인가> 8장에서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존재와 시간>을 인용하면서 일반인들의 시간 개념을 설명한 바 있습니다. 즉, 시간이란 말은 즉각 시계를 연상시키고, 그것을 통해서 시간 개념을 알 수 있다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계는 시간을 측정하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지 시간 자체는 아닙니다. 현재 시계를 제작하는데 기초가 되는 시간의식을 체계화한 서양의 그레고리 달력(the Gregorian calendar)이 확립된 것은 400여년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시간 측정의 방식은 무한할 수 있습니다. 하루의 시간은 무한한 방식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루의 시작과 끝을 일출부터 다음 일출 또는 정오에서 다음 정오로 파악할 수 있고, 낮의 시간을 나누는 방식과 밤의 그것을 나누는 방식은 다를 수 있고, 밤은 하루에서 제외할 수도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사람들에게는 하루를 12시간으로 나누는 것으로 충분했으며, 분⁃초의 시간단위란 현대인들을 제외하고는 인류의 삶에서 오래 동안 실제적으로 무의미했던 것입니다. 현대인들에게는 ‘한심하고’ ‘느려터지고’ ‘굼뜬’ 삶으로 보이겠지만, 봄이 되면 식물에 싹이 트고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는 등 구체적인 자연물의 주기적 변화에서 시간을 측정하는 원시인들에게는 그러한 척도가 자연을 이해하고 그들의 삶의 유지에 충분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현대 물리학을 통해 정립된 시간 개념을 간략히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물체와 에너지의 존재를 떠난 순수한 시간과 공간은 존재할 수 없으며, 물체 및 공간적 변화라는 사건들의 결과를 떠나 시간은 존재할 수 없고 측정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뉴턴 물리학이 기초한 절대적인 시간 및 절대적인 공간에 대한 부정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물리학적 시간 이해를 떠나, 사물의 변화를 인식하려는 인간의 정신활동을 떠나 시간문제를 논의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 사회과학적으로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시간의식을 떠나 시간을 운위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이 사회과학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시간의식을 떠나 다른 동물과 구분되는 인간성 자체, 인간의 사회적 삶, 나아가 국가생활의 본령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시간의식은 개인 차원에서는 자아의식 및 자아정체성의 원초적 형태이고, 사회라는 공통된 삶의 공간장(space field) 형성에 필수적이며, 역사의식의 형태로 발전하여 자아정체성을 완성하고 국가정체성을 형성하면서 국가생활을 유지하게 하는 근원적인 요소인 것입니다. 인류역사에서 4대문명의 등장과 괘를 같이 하는 역법의 등장 자체가 집단적인 시간의식 형성의 한 표현이며, 그러한 집단적인 시간의식의 정립 위에서 정치권력 중심의 역사의식의 표현이자 역사학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왕 ~년’ ‘~집정관 ~년’ 식의 연대표기 방식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앞에서 언급한 졸저에서 피아제(Jean Piaget)의 발달심리학 연구 결과, 특히 ‘대상 영속성(object permanence)’ 개념을 토대로 시간의식의 형성과 자아의식의 형성은 병행함을 설명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피아제는 시간의식의 형성과 자아의식의 관계에 대한 연구에 그쳤고, 시간의식의 발전이 필연적으로 역사의식으로 이행함을 이해하지 못했음도 지적한 바 있습니다. 왜 시간의식의 형성과 병행하는 인간의 자아의식 및 자아 정체성은 필연적으로 역사의식의 형성 및 이에 따른 국가정체성의 형성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는지 또한 저의 졸저 4~5장에서 자세하게 설명한 바 있습니다. 그 핵심은 간단히 말하여 자아정체성은 순간적인 쾌락이나 욕망에서 찾을 수는 없다는 것이며, 그것들을 초월한 영속적이고 보편적인 가치나 이념에 대한 추구를 떠나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추구는 주권의 이름으로 배타적 경계를 가지고, 세대를 통해 생명을 이어가며, 경제 및 사회⁃문화적 분업 활동을 보장하고 실현시키는 국가생활을 떠나 이루어질 수 없음도 설명하였습니다. 다시 말하여 그와 같은 국가생활의 시간적 연속성, 그리고 세대로 이어지는 국가생활을 통해 실현되는 보편적인 가치와 이념의 영속성을 표현하는 것이 국가차원의 역사의식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의 문제는 역사의식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어떠한 내용이나 수준의 역사의식인가에 있습니다. 연호라는 역사의식의 표상이 중요성을 갖는 이유는 그러한 문제에서 찾을 수 있으며, 단기연호를 폐지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역사의식의 문제도 이러한 맥락에서 해명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일단 ‘~왕 ~년’ ‘~집정관 ~년’ 식의 연대표기 방식에 대해 다시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권력의 변화 자체를 역사적 흐름의 핵심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조야한 역사의식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한편으로 정치권력의 변화가 역사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에 대한 인식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연호의 한 형태일 수도 있지만, 적극적으로 보편적인 가치나 이상을 표출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연호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서양에서는 1582년 그레고리우스 13세에 의해 현재의 서기연호가 정립되기 전까지 그러한 수준의 시간의식 및 역사의식 밖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현재 서기가 이슬람 국가와 불교 국가들을 제외하고 세계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실제로 현재 서양의 언어에서는 연호에 상응하는 말이 없습니다. 연호는 현재 영어로 ‘year-appelation’으로 번역되고 있지만, 일반인들은 물론이고 서양 학자들 대부분도 이 영어 어휘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서 서양에는 연호란 개념 자체가 정립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중세시대 기독교가 유일한 절대적인 종교가 되었기 때문에 현재의 서양인들은 서기를 연대에 대한 ‘하나의’ 측정 방식이 아니라 당연하고 절대적인 연대표기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즉 AD(Anno Domini)의 의미는 마치 예수의 탄생이 그 이후의 역사가 그 이전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의미입니다. 이에 따라 개별적인 국가권력은 그것이 표상하는 절대적인 시간⁃공간의 질서에 종속되어 있다는 관념이 그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관념의 존재에서 그들이 서기의 사용을 다른 국가나 민족들에게 강요하는 태도의 근원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동아시아의 시간관은 서양의 그것과 대비됩니다. 그리고 그와 같이 대비되는 시간관의 핵심에 서양인들에게는 생소한 연호의 개념이 있습니다.
동아시아에서 최초의 연호 사용은 한무제(漢武帝) 당시 동중서(董仲舒)의 제안에 의해 사용된 건원(建元) 연호가 최초라고 합니다. 동중서가 그러한 연호 사용을 제안한 명확한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만 대체로 추정할 수는 있습니다. 동중서는 천(天)과 인(人)의 감응 및 합일을 추구한다는 소위 일통론(一統論)을 중심으로 중국역사에서 최초로 유학을 통치이데올로기로 체계화하고 현실 정치에서 작동시킨 인물입니다. 따라서 그는 한무제의 재위 원년을 건원 1년으로 표기함으로써 그가 구축한 새로운 국가질서의 태동에 역사적 대전환의 의미를 부여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시작된 연호의 사용은 따라서 역사의 새로운 전환점을 표상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제정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새로운 연호의 제정은 왕조가 바뀔 때는 물론이고 동일한 왕의 치세 기간에도 반란의 진압 등 정치적 대사건이 있은 후 ‘정치적 국면 전환용’으로 새로운 연호를 제정하는 경우도 많았던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광개토대왕이 ‘영락(永樂)’이란 연호를 처음 사용한 이후 특정 왕의 정책적 목적이나 재위 기간을 상징하는 다양한 연호가 사용되었습니다. 후삼국 시대에 궁예가 여러 연호를 바꾸어 사용했다는 사실은 그의 정치적 역정과 관련하여 흥미롭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중국에 대한 사대정책과 일관되게 중국연호를 사용하였고, 갑오경장에 이르러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여 대한제국시대에 광무(光武)와 융희(隆熙) 연호를 사용했음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일본은 왕의 별칭을 연호로 채택하면서, 명치유신 이후에도 明治-大正-昭和에 이어 현재에도 平成 연호를 서기와 더불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왕조의 연속성과 국가의 역사적 연속성은 일치한다는 나름대로의 역사의식 및 국가관 또는 통치이념이 반영된 결과일 것입니다.
비록 단순화에 따르는 위험은 있지만, 서양인들의 사고에는 연호 개념이 부재 한다는 사실과 동아시아 삼국에서의 적극적인 연호 사용에 함축된 시간의식 및 역사의식의 차이는 결국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서양인들에게 시간과 공간은 기독교적 신으로부터 절대적으로 주어진 질서이며, 이에 따라 개인은 물론이고 국가 권력도 그것에 운명적으로 순응할 수밖에 없다는 관념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시간관이 반드시 국가권력의 행사를 겸허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주목하여야 합니다. 그것은 또한 자신들이 속한 시⁃공간의 질서가 절대적이라는 생각이 확장되어, ‘기독교적 질서=절대적 질서=서구 질서’라는 등식에 대한 믿음으로 쉽게 변형되고, 이에 따라 ‘서양문명=문명자체’라는 오만한 관념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러한 세계관 및 역사관이 십자군운동이나 19세기 서양 제국주의의 기저에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연호의 존재로 표상되는 동아시아의 세계관 및 역사관은 서양과 대비됩니다. 그것에는 국가권력은 천하라는 시⁃공간의 질서를 새롭게 결정할 수 있다는 관념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한편으로 불변의 자연 질서에 대한 세속적 국가권력의 오만함으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중국정치사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皇帝=天子’라는 지배적인 관념은 황제의 행위 및 정책결정을 천명(天命) 질서의 수행으로 간주하는 관념을 정착시킨 것도 사실입니다. 앞에서 언급된 동중서의 정치사상도 그러한 통치 질서의 확립에 기여한 것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새롭게 시작된 지배질서를 새롭게 시작된 시⁃공간의 질서로 정당화 하는 이데올로기적 기능도 수행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연호의 등장은 또한 새로운 시간의식 및 역사의식의 형성을 통해 새로운 정치적 이상을 구현하는 새로운 국가체제 및 정치⁃사회적 질서의 확립을 촉진 할 수도 있습니다. 당시의 국제정치적 상황에서의 실현 가능성 여부나 통치자 고종의 강력한 의지 여부를 떠나, 대한제국 시대 광무 연호의 사용은 오래 동안 조선을 지배했던 중화질서로부터의 탈피와 독립을 상징함은 분명하며 나름대로 정치적 효과가 있었음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어쨌든 여기에 연호의 개념이 부재한 서양의 기독교적 세계관과 연호의 사용이 일상화 되었던 유교적 세계관 사이에 존재하는 역설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절대적인 시⁃공간 질서 관념에 기초한 신 중심의 세계관 및 운명론 속에서 이 세계를 인간의 행동으로 자유롭게 변혁할 수 있다는 독단과 오만의 태도가 배태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시⁃공간 질서를 인간이 결정할 수 있다는 인간 중심의 유교적 세계관에서는 -특히 그 지배질서가 부패하고 퇴락할 경우- 이 세계에 대한 무력감과 현실 도피의 태도가 지배적인 경향으로 나타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역사적 필연과 우연이 병행한 결과이겠으나, 19세기 중반에 동아시아에서 발생한 문명충돌에는 그러한 역설이 실제로 구현된 성격이 있습니다. 서구의 경우 근대에 이르러 헬레니즘 전통의 합리성이 부활하여 이룩된 과학문명의 발달로 서구문명의 기술력이 처음으로 동양문명의 그것을 추월한 상황이 전개되었음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스스로의 시⁃공간 질서가 절대적이란 관념에 기초한 기독교 문명은 타 문명이 속한 시⁃공간의 질서를 무시하고 그것을 자신의 질서에 종속시키려는 독단과 오만의 문명론을 발전시켰던 것입니다. 반면에 동아시아 세계의 경우 왕정 및 봉건질서의 오래된 구조적인 부패 및 이에 따른 문명의 침체는 기존의 지배질서 및 국가생활에 대한 체념과 도피의 정신적 분위기가 지배함에 따라 스스로의 독자적인 시⁃공간 질서의 존재성 자체에 대한 확신도 잃어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19세기 중반 소위 ‘서세동점’ 또는 ‘Western Impact’로 이해되는 이 동아시아 지역에 발생한 문명충돌의 상황에 함축된 시⁃공간 질서와 관련된 문제의 핵심이자 연호의 사용 여부와 관련된 유교문명과 서양문명 사이에 존재하는 역사의식 차이의 핵심입니다. 또한 그것이 현재 서기 연호가 동아시아에서도 보편적으로 사용되게 된 정신사 및 문명사적 배경인 것입니다. 고유 연호의 폐지와 서기 사용의 보편화란 결국 문명충돌의 결과 동아시아의 시⁃공간 질서가 서양의 시⁃공간 질서에 편입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문명충돌은 아직까지도 현재진행형의 사건이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바로 그러한 사실 속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단기연호를 폐지한 정신사 및 문명사적 배경이 이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역설적이지만 바로 그러한 사실 속에서 단기연호의 연호로서의 탁월성과 더불어 그것이 새롭게 부활되어 법제화 되어야 한다는 민족사 및 문명사적 소명의 근거도 찾을 수 있습니다.
III.
1840년 발발한 아편전쟁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전개된 동아시아 지역의 문명충돌은 물론 지극히 광범위하고 복잡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으며, 그 사이에 그에 대한 방대한 연구가 축적되어 있습니다. 다만 서구 문명의 충격에 대한 동아시아 각국의 이념적 대응을 간략하게 정리할 수는 있습니다. 한국의 경우 잘 알려져 있듯이 그것은 위정척사(衛正斥邪)론, 동도서기(東道西器)론, 문명개화(文明開化)론 등의 형태로 나타났으며,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도 각 이념에 상응하는 비슷한 이념적 대응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의 역사적 진행과정에서 결국 승리한 것은 문명개화의 이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구 문명의 도입이 확산되고 심화되면서, 서구인들이 예절도 없는 금수(禽獸)들도 아니고 정신적 도는 없이 물질적 기술만 있는 사람들도 아니라는 사실이 판명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전자의 두 이념은 점차 이념으로서의 설득력을 잃고 사라져 간 것입니다. 반면에 서구문물과 학문의 적극적인 도입을 통한 근대화를 추구한 문명개화론은 -한국을 합병한 일본의 강제에 의한 영향도 있지만- 해방 후 현재까지 이어지는 국가생활의 근간을 이루는 이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문명개화론은 아직도 국가생활의 기본적인 목표로 유효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명개화론의 핵심은 서구 문물이 절대적으로 탁월하기 때문에 무조건 모방과 추종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물론 지금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근대 한국사에서 문명개화론의 효시인 유길준(兪吉濬) 선생이 오래 전 ‘개화의 병신’이라는 극단적인 표현까지 사용하면서 개화의 바람 속에서 서구문물을 무조건 숭배하는 인간들을 비판한 바 있음이 환기되어야 합니다. 물론 그러한 일방적 모방이나 추종의 태도가 문명개화의 요체도 아니고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것의 요체는 일단 서구 문명이 좀 더 발달된 문명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그것에 대해 학문, 과학기술, 문화, 정치⁃사회적 질서 등 여러 면에서 배우고 참고하여 우리 것으로 만드는 노력에 있을 것입니다.
저 자신 대학원 시절 서구정치사상을 전공한 사람이고 계속 연구하면서 서구 사상이나 문화의 심원함에 아직도 찬탄을 금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서구 문물 모두가 동양이나 우리의 그것보다 우월한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문화상대주의의 이름으로 이러이러한 점은 서양이 우월하고 이러이러한 점은 동양이 우월하다는 식의 진단으로 그치는 태도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문명의 본질에 대한 몰각을 의미합니다. 역사상 출현한 문명들이란 인간이 좀 더 좋고 훌륭한 삶의 내용 및 질서를 형상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입니다. 따라서 문명화의 본질은 결코 이미 기존의 문명들의 요소들을 적당히 취합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상적인 삶의 내용 및 질서를 향한 노력 자체에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민족에게 문명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스스로가 갖고 있는 고유한 문명을 다른 문명들로부터 배우고 발전시키면서 그러한 이상의 실현을 얼마나 진지하게 추구하고 있느냐의 문제일 것입니다. 여기서 단기연호와 관련된 문명사적 문제의 요체를 발견할 수 있으며, 박정희 전 대통령의 단기연호 폐지의 문명사적 의미와 더불어 단기연호의 본질에 대한 인식의 문제 및 역사의식의 한계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의 문명을 다른 문명과의 교류를 통해서 자주적으로 발전시킨다는 것, 그것은 사실 결코 쉬운 과업이 아닙니다. 많은 민족들이 다른 문명과 접하여 그것을 주체적으로 소화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면서 타 문명에 흡수되어 사라졌습니다. 특히 고립된 민족적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역사적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고립에 집착하다 스스로의 문명을 퇴화 또는 소멸시키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다시 말하여 스스로의 문명을 발전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하고 ‘순수하게’ 보존하려는 노력이 오히려 그 문명 생활을 독단적으로 만들고 화석화시켜 그 문명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민족성 자체를 사라지게 만드는 경우도 많습니다. 역사적으로 사라진 문명들에는 모두 그러한 역사적 경험들이 존재합니다. 이 시대에는 극단적인 이슬람 근본주의가 후자에 해당될 수 있습니다. 훌륭한 이슬람문명을 ‘순수하게’ 보존한다는 노력이 이슬람문명 자체를 소멸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문명사적 우를 범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됩니다. 현재 북한의 고립주의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다른 문명을 자기 것으로 소화하면서 스스로의 문명을 주체적으로 발전시키는 데는 자기 것 가운데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되는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 자신의 언어 즉 모국어이고, 다른 하나는 고유의 시간의식 및 역사의식입니다. 그 둘은 다른 문명과 문화를 받아들이고 소화하는 행위 자체를 가능하고 의미 있게 만드는 존재, 즉 한 민족이나 국가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바로 다른 문명이 유입되는 문명충돌 및 서세동점의 역사적 상황에서 우리에게는 다행히 민족 정체성의 유지 및 민족적 삶의 영속이라는 절대적 당위의 실현에 역사의식과 모국어의 절대적 중요성을 자각한 선각자들이 계십니다. 바로 박은식 선생, 주시경 선생, 신채호 선생, 안재홍 선생, 정인보 선생 등이 그분들입니다. 각각의 정치사상 및 지적 관심 영역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분들은 결국 유길준 선생이 미완으로 남겨 논 과업을 추구한 분들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문명개화를 추구하되 민족의 정체성 및 주체성을 잃지 않으려는 구체적인 방안의 핵심을 바로 우리말의 보존 및 발전과 역사의식의 고양을 통해 찾고 그것을 실현하려 일생을 바치신 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역사의식 고양 노력의 핵심에 단기연호의 사용이 있습니다. 그 분들의 그러한 노력이 나철(羅喆) 선생의 대종교 운동과 결합하여 바로 일제강점기에 이미 종교의 차이를 떠나 단기연호 사용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게 만든 역사 및 정신사적 배경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역사 및 정신사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건국 후 어렵지 않게 단가연호의 법제화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史實)에 관해서는 저 자신 앞에서 언급한 졸저에서도 설명하였지만, 특히 이 자리에 모이신 분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이 발견됩니다. 그 단기연호를 폐지한 박정희 전 대통령은 연호의 사용 문제만 제외하고는 기본적으로 -사상의 깊이나 지적 포괄성 또는 체계성의 차이를 떠나- 그들 선각자의 사상을 공유한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박 전 대통령은 잘 알려져 있듯이 일본군 경력, 좌익에의 가담 등 복잡한 인생행로를 거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바로 19세기 중반 서세동점 이후 발생한 한국 근대사상의 중심 사조인 문명개화, 즉 근대화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열정과 더불어 나름대로 민족주의 의식도 투철한 인물입니다. 이 점은 그의 대표적인 저작으로서 1963년 9월에 출간된 <國家와 革命과 나>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에는 한편으로 ‘혁명정부’의 지도자로서 2년여 동안 국가통치를 직접 담당하며 겪었던 복잡한 국가 현실에 대한 소회, ‘혁명공약’과는 달리 민정에 참여하는 자신의 입장에 대한 정당화를 통한 간접적 방식의 대통령 출마선언이라는 정치적 의도, 감정적으로는 일소(一掃)하고 싶지만 정치적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구정치인들에 대한 복합적인 심경 등이 피력되어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에는 그 특유의 강기(剛氣)어린 문장을 통해 나름대로의 체계성을 가지고 진술된 근대화 및 민족중흥의 이상, 이와 더불어 경제개발계획이나 사회질서의 확립 등 그러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구체적인 정책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그와 같은 이상과 정책의 제시는 비록 격정의 언어로 표출되었지만 세계사 및 민족사의 흐름에 대한 나름대로의 성찰이 그 바탕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 나름의 역사의식입니다.
그 역사의식의 한 축은 “퇴영(退嬰)과 조잡(粗雜)과 침체(沈滯)의 연쇄사(連鎖史)”라는 극단적인 어휘로 규정된 과거의 민족사에 대한 절망감입니다. 그러나 그 역사의식의 다른 한 축은 바로 ‘민족중흥’이란 표어에 집약되어 있듯이 새로운 민족사를 창출하여 새로운 세계사적 민족으로 도약할 수 있다는 자신감입니다. 그 자신감은 한편으로 -비록 근대 세계사의 흐름에 대한 거칠고 단순화된 인식은 있으나- 명치유신의 일본, 손문의 중국, 케말 파샤의 터키, 나세르 이집트의 근대화 성공 사례에 고무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감의 핵심에는 그 자신 특유의 민족주의적 이상과 민족사의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습니다. ‘좌절과 절망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광개토대왕, 세종대왕, 이순신 등의 인물로 표상되는 민족사의 흐름에 간헐적으로 나타난 자주정신이 그러한 이상이며, 그러한 자주정신의 구현을 뒷받침하는 패기와 지혜와 헌신의 이상이 그의 시대에 새롭게 구현될 수 있다는 희망을 그는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민족주의적 이상과 더불어 토착적인 것에 대한 박 전 대통령의 애착이 표현된 일상적인 예로서 그의 막걸리 사랑을 들 수 있습니다. 아울러 비록 체계적인 언어학적 인식과 깊은 통찰이 수반된 것은 아닌 것 같지만, 민족문화의 정수로서 한글에 대한 그 나름의 애착도 있습니다. 비록 대통령으로서 적절한 행동이었는지 여부는 의문의 대상이지만, 한글에 대한 애착은 광화문 현판을 스스로 한글로 정서한 행위 속에 나타나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1) 단기연호 폐지의 주역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그러한 역사의식에서 바로 그 폐지의 역사적 아이러니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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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담이지만 한양 천도 당시 건립된 광화문의 현판글씨가 복원될 수 없다면, 단아함은 있지만 웅혼의 기운이 없는 현재의 현판글씨를 왜 굳이 고집하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저로서는 이 시대 최고의 명필이 한글로, 그리고 좀 더 바람직하게는 ‘광화문’의 의미를 순 우리말로 바꾼 이름으로, 현판을 제작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특히 순 우리글 서체를 통해 우리 민족의 웅혼과 청명의 기운이 나타났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또한 민족 및 국가정체성의 새로운 정립 속에서 문명사적 발전을 추구한다는 역사적 결단의 표징인 단기연호의 법제화와 조화를 이룬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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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졸저에서도 설명되었지만, 단기연호 폐지의 배경에는 단순히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의지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것에는 휴전 후 이 땅에 일제강점기의 왜색문화를 대체하여 새롭게 몰아닥친 미국적 세계관과 문화의 영향도 있으며, 미국에 국가안보를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국제정치적 환경도 있습니다. 그러나 단기연호 폐지가 박 전 대통령의 결단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그의 그러한 결단이 결코 미국문화에 대한 일방적인 동경이나 민족적 주체성을 상실한데 연유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는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나름대로의 민족주의자입니다. 그의 일본군 복무가 그 문제에 대한 이해를 복잡하게 만들지만, 그의 언행에는 경제건설에 매진하는 태도와 더불어 미국적 자본주의문화를 혐오하는 태도도 자주 발견됩니다. 그 자신 농민의 아들로서, 서구인들이 부러워하는 그린벨트의 설치에는 무분별한 도시화를 억제하고 소박한 농촌문화를 보존하기 위한 의도가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는 ‘민족중흥의 근대화’와 ‘신화적이고 국수주의적인’ 단기연호는 양립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신념을 가지고 단기연호를 폐지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사실에 그의 역사의식의 부족함이 있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서기 연호가 자신의 역사적 소명이자 자신의 전 통치역량을 동원하여 실현시켜야 할 민족중흥의 근대화와 조화를 이루는 시간측정 방식 정도로 믿었던 것 같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그와 같이 손쉽게 단기연호를 폐지하고 서기연호로 대체한 것입니다. 문제는 그가 만일 연호의 본질을 제대로 알았다면 그와 같은 결정을 쉽게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여 그는 서기연호의 도입을 낡은 시계를 새 시계로 바꾸는 정도로 밖에 이해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는 단기연호의 폐지와 서기연호의 일방적 도입이 바로 자신의 역사의식과 배치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진 않은 것입니다. 그의 역사의식은 근본적으로 신채호 선생 등 단기연호 주창자들과 공유하는 것이고, 5천년의 민족사적 연속성을 강조하는 그의 역사의식은 바로 단기연호가 표상하는 역사의식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만일 그가 연호의 본질을 이해했다면 그러한 결정은 결코 내릴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단기연호 사용의 주창자들과 역사의식은 공유하면서 그것의 상징인 단기연호는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폐지했다는 사실에 그의 단기연호 폐지의 아이러니가 있고, 또한 그의 역사의식의 부족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 부족함의 의미를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설명은 바로 단기연호 부활의 민족사 및 문명사적 소명을 새롭게 확인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IV.
만일 단기연호 폐지론자의 믿음대로 단기연호가 국가발전에 저해가 되고, 역사적 근거가 없으며, 비합리적인 신화와 폐쇄적인 국수주의의 산물이라면 당연히 폐지되어야 하고 새롭게 부활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이 대한민국의 문명사적 발전에 장애가 되는 요소라면 부활시켜서는 결코 안 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아직도 새롭게 구명되고 설명되어야 문제가 무한히 많지만, 단기연호의 역사적 근거인 고조선의 존재는 일단 지금까지의 고대사 연구를 통해 충분히 입증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단기연호의 또 다른 근거인 단군신화에는 물론 신화적 요소가 있습니다. 그러나 ‘신화=비합리성’이라는 등식은 신화의 본질에 대한 서양 18세기 신화학 수준의 이해에 불과합니다. 모든 민족의 탄생에는 필연적으로 신화적 요소가 개입될 수밖에 없으며, 그 신화의 ‘이성적’ 가치는 어떠한 보편적인 요소가 그 신화에 잠재되어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다른 민족의 신화는 이성적 종교이고 우리의 것은 비이성적 주술이라는 생각 자체가 무지의 표현이자 외래문화에 대한 맹목적 숭상의 결과일 뿐입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환기되어야 할 것은 민족의 시원은 바로 신화적 요소가 있기 때문에 민족사적 출발의 의의를 갖는다는 사실입니다. 소위 합리적으로 파악되고 역사적으로 설명되는 국가나 민족의 시원은 진정한 의미에서 시원이 못됩니다.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설명되는 민족의 시원은 바로 그 이전 시기의 역사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 민족적 시원이 못됩니다. 또한 민족의 형성이란 결국 한 무리의 인간들이 집단적 정체성을 형성한 데서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정체성의 형성이 어떤 형태나 내용이든 신화라는 초월적인 요소에 기반을 두지 않을 경우, 그것을 구성하는 인간들 각각이 또 다른 집단의 구성원을 전제로 할 수밖에 없으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최초의 집단적 정체성의 형성이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구 소련이나 미국 또는 중국과 같이, 각각 민족사적 시원이 다름에 따라 각각 다른 -그 다름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역사의식을 갖는 민족들로 구성된 복합민족 국가가 끊임없는 국가정체성 위기를 겪게 됨은 필연입니다. 그것은 국민 전체에 정신적 동질성을 부여하는 역사의식이 통일되지 못한데 기인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이면서 신화적인 시원에서 출발하여 영원히 존속되어야 할 한민족, 그 가장 근본적인 민족사적 당위의 표상이 바로 단기연호입니다. 우리 한민족의 역사에는 박 전 대통령이 한탄한 바와 같이 ‘퇴영과 조잡과 침체’의 시기가 있을 수도 있고, 오랜 기간 외국에 정치적으로 종속되거나 외래문명에 동화되어 일시적으로 주체성을 잃은 시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환란과 시련은 민족사의 영원성 차원에서는 결국 일회성의 사건이 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언젠간은 극복될 수 있고 극복 가능하다는 절대적인 민족사적 당위의 표상이 바로 단기연호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국가와 민족의 신화적 시원에서 출발하는 연호는 세계적으로 단기연호 밖에 없다는 사실도 우리에게 크나큰 자부심을 주는 부분입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단기 연호에는 중국사에서 자주 발견되는 바와 같이 정치적 국면전환용으로 새로운 연호를 제정하려는 권력자의 의도를 미연에 방지하는 정치적 실용성도 있습니다. 그런데 단기연호의 심원함은 그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단군신화는 신화로서 애타도록 짧다는 문학적 아쉬움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에는 절묘한 세계관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저는 졸저에서 웅녀의 신화는 낮은 차원의 존재가 고통스러운 자기 변혁의 과정을 통해 높은 차원의 존재가 된다는 심오한 세계관적 통찰이 있음을 지적하였습니다. 별도의 신화 해석학적 논의가 필요하지만, 백수의 왕인 호랑이 대신에 ‘미련한’ 곰이 인간이 되었다는 설정도 단순히 토템신앙의 차원을 넘어 인간성에 대한 심오한 성찰이 있습니다. 그러한 통찰과 성찰 이외에도 그것은 세계의 어떤 건국신화에 비추어도 부족하지 않을 보편적인 요소가 잠재되어 있습니다. 일단 세계 어떤 민족도 그 국가의 신적 기원과 더불어 근본적인 통치 이념의 제시와 함께 구체적인 통치체제까지 언급된 건국신화, 다시 말하여 국가체제의 구색을 갖춘 형태의 건국신화는 없습니다. 대부분 민족의 건국신화는 건국영웅의 신화적 탄생이나 신이 부과하는 도덕률의 제시로 그칩니다. 플라톤의 대화편 <프로타고라스(Protagoras)>에 제시된 아테네의 건국신화는 공동체적 정의의 관념이 탄생하게 배경에 대한 신화적 설명으로 그칩니다. 이스라엘인들은 그들의 역사 전체를 자신들 민족 신의 개입으로 설명하는 특이함이 있지만, 일단 그들 건국신화의 요체인 모세의 십계명은 공동체 생활을 위한 도덕률일 수는 있어도 정치이념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 부족함은 그 후 신화적 성격을 벗어난 <신명기(Deuteronomy ;말 그대로는 ‘제2의 법’)>를 통해 보완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단기연호는 참으로 절묘하고 심원한 역사의식의 표상인 것입니다.
만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연호 자체에 내포된 국가정체성의 의미를 이해했고, 단기연호가 표상하는 역사의식이 바로 자신의 그것과 상통함을 깨달았다면, 그는 결코 단기연호를 그와 같이 손쉽게 폐지하지는 아니했으리라는 것이 저의 견해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역사의 아이러니이자 착오입니다. 이제 그러한 현대사의 오류를 시정할 때입니다. 단기연호의 부활은 지금까지 설명 드린 바와 같이 이 시대 우리들에게 부과된 민족사적 소명이자 문명사적 소명입니다. 이 시대는 동아시아 지역에서 문명충돌이 일어난 지 150여년이 지난 시기입니다. 이제는 서양문물의 일방적 수입이나 모방에서 벗어나 우리의 건국신화에 잠재된 고유하고 소중한 세계관 및 정치사상에 기초하여 그것들을 우리 것으로 만들면서 좀 더 발전되고 좀 더 보편적인 새로운 문명을 창출할 민족사 및 문명사적 소명이 이 시대의 한국인들에게 부여되어 있습니다. 서기의 사용과 병행하는 단기연호 사용의 법제화는 그와 같은 민족사 및 문명사적 소명의 상징이자 그러한 소명의 실현을 향한 첫걸음이라고 -결코 완성이 아니라- 할 것입니다.
오랜 시간 저의 소견을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일 음력 나라 연 날(개천절)을 앞두고 코리아글로브에
또 귀중한 글을 보내주셔서 아래에 전재합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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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연호 법제화의 민족사 및 문명사적 의미”
- 양 승 태(이화여대 정외과)
I.
안녕하십니까.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정치학을 가르치고 있는 양승태입니다.
오늘 우리 한민족과 대한민국을 사랑하시고, 아울러 민족 및 국가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는 현재의 국가생활을 걱정하시는 여러 선생님들 앞에서 저의 소견을 피력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어 영광입니다.
오늘 여러 선생님들께 드릴 말씀의 요체는 작년에 출간된 저의 졸저 <대한민국이란 무엇인가> 제 2부 7~9장에 수록되어 있으며, 그 곳에 제시된 핵심적인 내용에 변한 것은 없습니다. 즉, 단기연호의 부활은 국가정체성의 핵심적 요소인 주체적인 역사의식의 확립을 위해 역사적 당위로 요구된다든 것입니다. 물론 국가정체성과 단기연호의 관계라는 주제에는 그 책에서 해명된 문제들 이외에도 새롭게 파악되고 해명되어야 할 좀 더 세밀한 이론적 및 실천적인 문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국가정체성 개념은 지극히 심오하고 포괄적이기 때문에 저 자신 언제나 새로운 문제들을 끊임없이 제기하면서 그 해결에 고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오늘의 이 자리를 특히 단기연호 사용의 법제화라는 실천적이면서 동시에 이론적인 문제에 대해서 저의 생각을 개진하는 기회로 삼고자 합니다.
단기연호의 법제화가 실천적이면서 이론적인 이유는 그것에 대한 반대자들이 존재하고, 그 반대자들은 나름대로 ‘합리적’인 논변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존재는 단기연호를 법제화하는 과정에서 극복되어야 할 정치⁃사회적 현실이기 때문에 실천적인 문제입니다. 단기연호 부활의 반대자들은 그것을 ‘시대착오적인 국수주의의 미몽에 빠지고 세계화 추세에 역행하는 한가한 사람들의 비합리적 행동’ 정도로 치지도외시하는 태도가 있음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것은 단기연호 부활을 추진하는 사람들에게는 불편한 진실입니다. 그러나 불편한 진실을 편하게 볼 줄 알아야 불편한 현실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또한 반대론자들은 바로 나름대로의 합리적 논변이나 주장을 가진 정치⁃사회적 세력입니다. 따라서 어떠한 형태나 수준이든 주장과 주장 사이의 대립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이론적 문제이기도 합니다. 하버마스(Jürgen Habermas)란 독일 학자가 사회과학에서 필연적으로 제기되는 이론과 실천의 문제를 소통(communication) 개념으로 해명하려는 시도는 이 단기연호의 문제에도 적용될 수 있음은 물론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떠한 사회운동도 ‘씩씩한’ 행동만으로 그 목표가 실현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대자들의 논변에 대해 이론적 우월성을 확립하고, 그 우월성이 사회적으로 인정되고 전파되어 정치적 힘과 권위를 얻게 되면서 특정한 사회운동의 목표는 성취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논의의 초점이 되어야 할 것은 반대론자 논변의 근저에 있는 나름대로의 문명사적 관점입니다.
단기연호의 법제화와 관련된 이론과 실천의 문제들 가운데 가장 근원적인 것은 단기연호의 민족사적 의미와 더불어 문명사적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점에서 단기연호 찬성론자와 반대론자 사이 대립의 요체가 있습니다. 그런데 단기연호의 사용의 민족사적 당위성은 직관 차원에서라도 수긍이 갈 수 있는데, 문명사적 당위성은 언뜻 이해가 안 될 수 있습니다. 두 차원의 당위성에 대한 설명을 효율적으로 시작하기 위해서는 최근 <국학신문>9월호에 보도된 저에 대한 인터뷰 기사 내용에 대해서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기사 가운데는 인터뷰 과정에서 잘못 전달된 내용이 두 가지 있습니다. 그 둘은 모두 박정희 전 대통령과 관련된 내용인데, 바로 그가 단기연호 폐지의 주역이라는 시실이 중요합니다. 이 기회를 빌려 사소한 문제지만 보도내용도 정정하고 그것을 통해 오늘 드릴 말씀의 출발점을 찾고자 합니다.
II.
<국학신문>에 게재된 저의 인터뷰 기사는 박 전 대통령이 단기연호를 폐지한 이유가 그것이 ‘민족주의적’이기 때문이고, 그러한 의미에서 그의 ‘역사의식 부재’가 비판받아야 한다고 제가 주장한 것으로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단기연호가 민족주의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국수주의적’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폐지한 것이고, 그러한 점에서 그는 역사의식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역사의식이 ‘부족했다’는 것이 실제 제가 인터뷰에서 지적한 내용입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복잡하면서도 드라마틱한 삶의 행로나 정치적 공과 문제를 떠나 한국 현대사에서 획기적인 인물임은 분명합니다. 사실 ‘박정희 연구’는 한국 현대사 흐름의 실체를 파악하는데 필수불가결 하며, 그에 대한 제대로 된 연구는 범상한 수준의 지성 능력 이상을 요구합니다. 특히 그에 대해서 민주와 독재의 이분법으로 재단하는 수준에서는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어쨌든 오늘 드릴 말씀과 관련하여 주목할 사실은 그가 왜 그토록 ‘손쉽게’ 단기연호를 폐지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사실이 주목되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 ‘손쉬운’ 결정의 바탕을 이루는 박 전 대통령 나름대로의 신념에서 오늘까지도 이어지는 단기연호에 대한 사회적 다수의 무관심이나 반대의 정신적 원천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먼저 그 ‘손쉬움’의 의미에 대해서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졸저 <대한민국이란 무엇인가> 8장에서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존재와 시간>을 인용하면서 일반인들의 시간 개념을 설명한 바 있습니다. 즉, 시간이란 말은 즉각 시계를 연상시키고, 그것을 통해서 시간 개념을 알 수 있다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계는 시간을 측정하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지 시간 자체는 아닙니다. 현재 시계를 제작하는데 기초가 되는 시간의식을 체계화한 서양의 그레고리 달력(the Gregorian calendar)이 확립된 것은 400여년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시간 측정의 방식은 무한할 수 있습니다. 하루의 시간은 무한한 방식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루의 시작과 끝을 일출부터 다음 일출 또는 정오에서 다음 정오로 파악할 수 있고, 낮의 시간을 나누는 방식과 밤의 그것을 나누는 방식은 다를 수 있고, 밤은 하루에서 제외할 수도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사람들에게는 하루를 12시간으로 나누는 것으로 충분했으며, 분⁃초의 시간단위란 현대인들을 제외하고는 인류의 삶에서 오래 동안 실제적으로 무의미했던 것입니다. 현대인들에게는 ‘한심하고’ ‘느려터지고’ ‘굼뜬’ 삶으로 보이겠지만, 봄이 되면 식물에 싹이 트고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는 등 구체적인 자연물의 주기적 변화에서 시간을 측정하는 원시인들에게는 그러한 척도가 자연을 이해하고 그들의 삶의 유지에 충분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현대 물리학을 통해 정립된 시간 개념을 간략히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물체와 에너지의 존재를 떠난 순수한 시간과 공간은 존재할 수 없으며, 물체 및 공간적 변화라는 사건들의 결과를 떠나 시간은 존재할 수 없고 측정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뉴턴 물리학이 기초한 절대적인 시간 및 절대적인 공간에 대한 부정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물리학적 시간 이해를 떠나, 사물의 변화를 인식하려는 인간의 정신활동을 떠나 시간문제를 논의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 사회과학적으로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시간의식을 떠나 시간을 운위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이 사회과학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시간의식을 떠나 다른 동물과 구분되는 인간성 자체, 인간의 사회적 삶, 나아가 국가생활의 본령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시간의식은 개인 차원에서는 자아의식 및 자아정체성의 원초적 형태이고, 사회라는 공통된 삶의 공간장(space field) 형성에 필수적이며, 역사의식의 형태로 발전하여 자아정체성을 완성하고 국가정체성을 형성하면서 국가생활을 유지하게 하는 근원적인 요소인 것입니다. 인류역사에서 4대문명의 등장과 괘를 같이 하는 역법의 등장 자체가 집단적인 시간의식 형성의 한 표현이며, 그러한 집단적인 시간의식의 정립 위에서 정치권력 중심의 역사의식의 표현이자 역사학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왕 ~년’ ‘~집정관 ~년’ 식의 연대표기 방식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앞에서 언급한 졸저에서 피아제(Jean Piaget)의 발달심리학 연구 결과, 특히 ‘대상 영속성(object permanence)’ 개념을 토대로 시간의식의 형성과 자아의식의 형성은 병행함을 설명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피아제는 시간의식의 형성과 자아의식의 관계에 대한 연구에 그쳤고, 시간의식의 발전이 필연적으로 역사의식으로 이행함을 이해하지 못했음도 지적한 바 있습니다. 왜 시간의식의 형성과 병행하는 인간의 자아의식 및 자아 정체성은 필연적으로 역사의식의 형성 및 이에 따른 국가정체성의 형성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는지 또한 저의 졸저 4~5장에서 자세하게 설명한 바 있습니다. 그 핵심은 간단히 말하여 자아정체성은 순간적인 쾌락이나 욕망에서 찾을 수는 없다는 것이며, 그것들을 초월한 영속적이고 보편적인 가치나 이념에 대한 추구를 떠나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추구는 주권의 이름으로 배타적 경계를 가지고, 세대를 통해 생명을 이어가며, 경제 및 사회⁃문화적 분업 활동을 보장하고 실현시키는 국가생활을 떠나 이루어질 수 없음도 설명하였습니다. 다시 말하여 그와 같은 국가생활의 시간적 연속성, 그리고 세대로 이어지는 국가생활을 통해 실현되는 보편적인 가치와 이념의 영속성을 표현하는 것이 국가차원의 역사의식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의 문제는 역사의식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어떠한 내용이나 수준의 역사의식인가에 있습니다. 연호라는 역사의식의 표상이 중요성을 갖는 이유는 그러한 문제에서 찾을 수 있으며, 단기연호를 폐지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역사의식의 문제도 이러한 맥락에서 해명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일단 ‘~왕 ~년’ ‘~집정관 ~년’ 식의 연대표기 방식에 대해 다시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권력의 변화 자체를 역사적 흐름의 핵심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조야한 역사의식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한편으로 정치권력의 변화가 역사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에 대한 인식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연호의 한 형태일 수도 있지만, 적극적으로 보편적인 가치나 이상을 표출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연호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서양에서는 1582년 그레고리우스 13세에 의해 현재의 서기연호가 정립되기 전까지 그러한 수준의 시간의식 및 역사의식 밖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현재 서기가 이슬람 국가와 불교 국가들을 제외하고 세계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실제로 현재 서양의 언어에서는 연호에 상응하는 말이 없습니다. 연호는 현재 영어로 ‘year-appelation’으로 번역되고 있지만, 일반인들은 물론이고 서양 학자들 대부분도 이 영어 어휘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서 서양에는 연호란 개념 자체가 정립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중세시대 기독교가 유일한 절대적인 종교가 되었기 때문에 현재의 서양인들은 서기를 연대에 대한 ‘하나의’ 측정 방식이 아니라 당연하고 절대적인 연대표기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즉 AD(Anno Domini)의 의미는 마치 예수의 탄생이 그 이후의 역사가 그 이전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의미입니다. 이에 따라 개별적인 국가권력은 그것이 표상하는 절대적인 시간⁃공간의 질서에 종속되어 있다는 관념이 그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관념의 존재에서 그들이 서기의 사용을 다른 국가나 민족들에게 강요하는 태도의 근원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동아시아의 시간관은 서양의 그것과 대비됩니다. 그리고 그와 같이 대비되는 시간관의 핵심에 서양인들에게는 생소한 연호의 개념이 있습니다.
동아시아에서 최초의 연호 사용은 한무제(漢武帝) 당시 동중서(董仲舒)의 제안에 의해 사용된 건원(建元) 연호가 최초라고 합니다. 동중서가 그러한 연호 사용을 제안한 명확한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만 대체로 추정할 수는 있습니다. 동중서는 천(天)과 인(人)의 감응 및 합일을 추구한다는 소위 일통론(一統論)을 중심으로 중국역사에서 최초로 유학을 통치이데올로기로 체계화하고 현실 정치에서 작동시킨 인물입니다. 따라서 그는 한무제의 재위 원년을 건원 1년으로 표기함으로써 그가 구축한 새로운 국가질서의 태동에 역사적 대전환의 의미를 부여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시작된 연호의 사용은 따라서 역사의 새로운 전환점을 표상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제정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새로운 연호의 제정은 왕조가 바뀔 때는 물론이고 동일한 왕의 치세 기간에도 반란의 진압 등 정치적 대사건이 있은 후 ‘정치적 국면 전환용’으로 새로운 연호를 제정하는 경우도 많았던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광개토대왕이 ‘영락(永樂)’이란 연호를 처음 사용한 이후 특정 왕의 정책적 목적이나 재위 기간을 상징하는 다양한 연호가 사용되었습니다. 후삼국 시대에 궁예가 여러 연호를 바꾸어 사용했다는 사실은 그의 정치적 역정과 관련하여 흥미롭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중국에 대한 사대정책과 일관되게 중국연호를 사용하였고, 갑오경장에 이르러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여 대한제국시대에 광무(光武)와 융희(隆熙) 연호를 사용했음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일본은 왕의 별칭을 연호로 채택하면서, 명치유신 이후에도 明治-大正-昭和에 이어 현재에도 平成 연호를 서기와 더불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왕조의 연속성과 국가의 역사적 연속성은 일치한다는 나름대로의 역사의식 및 국가관 또는 통치이념이 반영된 결과일 것입니다.
비록 단순화에 따르는 위험은 있지만, 서양인들의 사고에는 연호 개념이 부재 한다는 사실과 동아시아 삼국에서의 적극적인 연호 사용에 함축된 시간의식 및 역사의식의 차이는 결국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서양인들에게 시간과 공간은 기독교적 신으로부터 절대적으로 주어진 질서이며, 이에 따라 개인은 물론이고 국가 권력도 그것에 운명적으로 순응할 수밖에 없다는 관념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시간관이 반드시 국가권력의 행사를 겸허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주목하여야 합니다. 그것은 또한 자신들이 속한 시⁃공간의 질서가 절대적이라는 생각이 확장되어, ‘기독교적 질서=절대적 질서=서구 질서’라는 등식에 대한 믿음으로 쉽게 변형되고, 이에 따라 ‘서양문명=문명자체’라는 오만한 관념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러한 세계관 및 역사관이 십자군운동이나 19세기 서양 제국주의의 기저에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연호의 존재로 표상되는 동아시아의 세계관 및 역사관은 서양과 대비됩니다. 그것에는 국가권력은 천하라는 시⁃공간의 질서를 새롭게 결정할 수 있다는 관념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한편으로 불변의 자연 질서에 대한 세속적 국가권력의 오만함으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중국정치사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皇帝=天子’라는 지배적인 관념은 황제의 행위 및 정책결정을 천명(天命) 질서의 수행으로 간주하는 관념을 정착시킨 것도 사실입니다. 앞에서 언급된 동중서의 정치사상도 그러한 통치 질서의 확립에 기여한 것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새롭게 시작된 지배질서를 새롭게 시작된 시⁃공간의 질서로 정당화 하는 이데올로기적 기능도 수행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연호의 등장은 또한 새로운 시간의식 및 역사의식의 형성을 통해 새로운 정치적 이상을 구현하는 새로운 국가체제 및 정치⁃사회적 질서의 확립을 촉진 할 수도 있습니다. 당시의 국제정치적 상황에서의 실현 가능성 여부나 통치자 고종의 강력한 의지 여부를 떠나, 대한제국 시대 광무 연호의 사용은 오래 동안 조선을 지배했던 중화질서로부터의 탈피와 독립을 상징함은 분명하며 나름대로 정치적 효과가 있었음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어쨌든 여기에 연호의 개념이 부재한 서양의 기독교적 세계관과 연호의 사용이 일상화 되었던 유교적 세계관 사이에 존재하는 역설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절대적인 시⁃공간 질서 관념에 기초한 신 중심의 세계관 및 운명론 속에서 이 세계를 인간의 행동으로 자유롭게 변혁할 수 있다는 독단과 오만의 태도가 배태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시⁃공간 질서를 인간이 결정할 수 있다는 인간 중심의 유교적 세계관에서는 -특히 그 지배질서가 부패하고 퇴락할 경우- 이 세계에 대한 무력감과 현실 도피의 태도가 지배적인 경향으로 나타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역사적 필연과 우연이 병행한 결과이겠으나, 19세기 중반에 동아시아에서 발생한 문명충돌에는 그러한 역설이 실제로 구현된 성격이 있습니다. 서구의 경우 근대에 이르러 헬레니즘 전통의 합리성이 부활하여 이룩된 과학문명의 발달로 서구문명의 기술력이 처음으로 동양문명의 그것을 추월한 상황이 전개되었음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스스로의 시⁃공간 질서가 절대적이란 관념에 기초한 기독교 문명은 타 문명이 속한 시⁃공간의 질서를 무시하고 그것을 자신의 질서에 종속시키려는 독단과 오만의 문명론을 발전시켰던 것입니다. 반면에 동아시아 세계의 경우 왕정 및 봉건질서의 오래된 구조적인 부패 및 이에 따른 문명의 침체는 기존의 지배질서 및 국가생활에 대한 체념과 도피의 정신적 분위기가 지배함에 따라 스스로의 독자적인 시⁃공간 질서의 존재성 자체에 대한 확신도 잃어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19세기 중반 소위 ‘서세동점’ 또는 ‘Western Impact’로 이해되는 이 동아시아 지역에 발생한 문명충돌의 상황에 함축된 시⁃공간 질서와 관련된 문제의 핵심이자 연호의 사용 여부와 관련된 유교문명과 서양문명 사이에 존재하는 역사의식 차이의 핵심입니다. 또한 그것이 현재 서기 연호가 동아시아에서도 보편적으로 사용되게 된 정신사 및 문명사적 배경인 것입니다. 고유 연호의 폐지와 서기 사용의 보편화란 결국 문명충돌의 결과 동아시아의 시⁃공간 질서가 서양의 시⁃공간 질서에 편입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문명충돌은 아직까지도 현재진행형의 사건이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바로 그러한 사실 속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단기연호를 폐지한 정신사 및 문명사적 배경이 이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역설적이지만 바로 그러한 사실 속에서 단기연호의 연호로서의 탁월성과 더불어 그것이 새롭게 부활되어 법제화 되어야 한다는 민족사 및 문명사적 소명의 근거도 찾을 수 있습니다.
III.
1840년 발발한 아편전쟁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전개된 동아시아 지역의 문명충돌은 물론 지극히 광범위하고 복잡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으며, 그 사이에 그에 대한 방대한 연구가 축적되어 있습니다. 다만 서구 문명의 충격에 대한 동아시아 각국의 이념적 대응을 간략하게 정리할 수는 있습니다. 한국의 경우 잘 알려져 있듯이 그것은 위정척사(衛正斥邪)론, 동도서기(東道西器)론, 문명개화(文明開化)론 등의 형태로 나타났으며,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도 각 이념에 상응하는 비슷한 이념적 대응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의 역사적 진행과정에서 결국 승리한 것은 문명개화의 이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구 문명의 도입이 확산되고 심화되면서, 서구인들이 예절도 없는 금수(禽獸)들도 아니고 정신적 도는 없이 물질적 기술만 있는 사람들도 아니라는 사실이 판명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전자의 두 이념은 점차 이념으로서의 설득력을 잃고 사라져 간 것입니다. 반면에 서구문물과 학문의 적극적인 도입을 통한 근대화를 추구한 문명개화론은 -한국을 합병한 일본의 강제에 의한 영향도 있지만- 해방 후 현재까지 이어지는 국가생활의 근간을 이루는 이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문명개화론은 아직도 국가생활의 기본적인 목표로 유효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명개화론의 핵심은 서구 문물이 절대적으로 탁월하기 때문에 무조건 모방과 추종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물론 지금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근대 한국사에서 문명개화론의 효시인 유길준(兪吉濬) 선생이 오래 전 ‘개화의 병신’이라는 극단적인 표현까지 사용하면서 개화의 바람 속에서 서구문물을 무조건 숭배하는 인간들을 비판한 바 있음이 환기되어야 합니다. 물론 그러한 일방적 모방이나 추종의 태도가 문명개화의 요체도 아니고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것의 요체는 일단 서구 문명이 좀 더 발달된 문명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그것에 대해 학문, 과학기술, 문화, 정치⁃사회적 질서 등 여러 면에서 배우고 참고하여 우리 것으로 만드는 노력에 있을 것입니다.
저 자신 대학원 시절 서구정치사상을 전공한 사람이고 계속 연구하면서 서구 사상이나 문화의 심원함에 아직도 찬탄을 금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서구 문물 모두가 동양이나 우리의 그것보다 우월한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문화상대주의의 이름으로 이러이러한 점은 서양이 우월하고 이러이러한 점은 동양이 우월하다는 식의 진단으로 그치는 태도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문명의 본질에 대한 몰각을 의미합니다. 역사상 출현한 문명들이란 인간이 좀 더 좋고 훌륭한 삶의 내용 및 질서를 형상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입니다. 따라서 문명화의 본질은 결코 이미 기존의 문명들의 요소들을 적당히 취합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상적인 삶의 내용 및 질서를 향한 노력 자체에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민족에게 문명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스스로가 갖고 있는 고유한 문명을 다른 문명들로부터 배우고 발전시키면서 그러한 이상의 실현을 얼마나 진지하게 추구하고 있느냐의 문제일 것입니다. 여기서 단기연호와 관련된 문명사적 문제의 요체를 발견할 수 있으며, 박정희 전 대통령의 단기연호 폐지의 문명사적 의미와 더불어 단기연호의 본질에 대한 인식의 문제 및 역사의식의 한계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의 문명을 다른 문명과의 교류를 통해서 자주적으로 발전시킨다는 것, 그것은 사실 결코 쉬운 과업이 아닙니다. 많은 민족들이 다른 문명과 접하여 그것을 주체적으로 소화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면서 타 문명에 흡수되어 사라졌습니다. 특히 고립된 민족적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역사적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고립에 집착하다 스스로의 문명을 퇴화 또는 소멸시키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다시 말하여 스스로의 문명을 발전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하고 ‘순수하게’ 보존하려는 노력이 오히려 그 문명 생활을 독단적으로 만들고 화석화시켜 그 문명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민족성 자체를 사라지게 만드는 경우도 많습니다. 역사적으로 사라진 문명들에는 모두 그러한 역사적 경험들이 존재합니다. 이 시대에는 극단적인 이슬람 근본주의가 후자에 해당될 수 있습니다. 훌륭한 이슬람문명을 ‘순수하게’ 보존한다는 노력이 이슬람문명 자체를 소멸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문명사적 우를 범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됩니다. 현재 북한의 고립주의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다른 문명을 자기 것으로 소화하면서 스스로의 문명을 주체적으로 발전시키는 데는 자기 것 가운데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되는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 자신의 언어 즉 모국어이고, 다른 하나는 고유의 시간의식 및 역사의식입니다. 그 둘은 다른 문명과 문화를 받아들이고 소화하는 행위 자체를 가능하고 의미 있게 만드는 존재, 즉 한 민족이나 국가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바로 다른 문명이 유입되는 문명충돌 및 서세동점의 역사적 상황에서 우리에게는 다행히 민족 정체성의 유지 및 민족적 삶의 영속이라는 절대적 당위의 실현에 역사의식과 모국어의 절대적 중요성을 자각한 선각자들이 계십니다. 바로 박은식 선생, 주시경 선생, 신채호 선생, 안재홍 선생, 정인보 선생 등이 그분들입니다. 각각의 정치사상 및 지적 관심 영역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분들은 결국 유길준 선생이 미완으로 남겨 논 과업을 추구한 분들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문명개화를 추구하되 민족의 정체성 및 주체성을 잃지 않으려는 구체적인 방안의 핵심을 바로 우리말의 보존 및 발전과 역사의식의 고양을 통해 찾고 그것을 실현하려 일생을 바치신 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역사의식 고양 노력의 핵심에 단기연호의 사용이 있습니다. 그 분들의 그러한 노력이 나철(羅喆) 선생의 대종교 운동과 결합하여 바로 일제강점기에 이미 종교의 차이를 떠나 단기연호 사용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게 만든 역사 및 정신사적 배경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역사 및 정신사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건국 후 어렵지 않게 단가연호의 법제화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史實)에 관해서는 저 자신 앞에서 언급한 졸저에서도 설명하였지만, 특히 이 자리에 모이신 분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이 발견됩니다. 그 단기연호를 폐지한 박정희 전 대통령은 연호의 사용 문제만 제외하고는 기본적으로 -사상의 깊이나 지적 포괄성 또는 체계성의 차이를 떠나- 그들 선각자의 사상을 공유한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박 전 대통령은 잘 알려져 있듯이 일본군 경력, 좌익에의 가담 등 복잡한 인생행로를 거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바로 19세기 중반 서세동점 이후 발생한 한국 근대사상의 중심 사조인 문명개화, 즉 근대화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열정과 더불어 나름대로 민족주의 의식도 투철한 인물입니다. 이 점은 그의 대표적인 저작으로서 1963년 9월에 출간된 <國家와 革命과 나>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에는 한편으로 ‘혁명정부’의 지도자로서 2년여 동안 국가통치를 직접 담당하며 겪었던 복잡한 국가 현실에 대한 소회, ‘혁명공약’과는 달리 민정에 참여하는 자신의 입장에 대한 정당화를 통한 간접적 방식의 대통령 출마선언이라는 정치적 의도, 감정적으로는 일소(一掃)하고 싶지만 정치적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구정치인들에 대한 복합적인 심경 등이 피력되어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에는 그 특유의 강기(剛氣)어린 문장을 통해 나름대로의 체계성을 가지고 진술된 근대화 및 민족중흥의 이상, 이와 더불어 경제개발계획이나 사회질서의 확립 등 그러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구체적인 정책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그와 같은 이상과 정책의 제시는 비록 격정의 언어로 표출되었지만 세계사 및 민족사의 흐름에 대한 나름대로의 성찰이 그 바탕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 나름의 역사의식입니다.
그 역사의식의 한 축은 “퇴영(退嬰)과 조잡(粗雜)과 침체(沈滯)의 연쇄사(連鎖史)”라는 극단적인 어휘로 규정된 과거의 민족사에 대한 절망감입니다. 그러나 그 역사의식의 다른 한 축은 바로 ‘민족중흥’이란 표어에 집약되어 있듯이 새로운 민족사를 창출하여 새로운 세계사적 민족으로 도약할 수 있다는 자신감입니다. 그 자신감은 한편으로 -비록 근대 세계사의 흐름에 대한 거칠고 단순화된 인식은 있으나- 명치유신의 일본, 손문의 중국, 케말 파샤의 터키, 나세르 이집트의 근대화 성공 사례에 고무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감의 핵심에는 그 자신 특유의 민족주의적 이상과 민족사의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습니다. ‘좌절과 절망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광개토대왕, 세종대왕, 이순신 등의 인물로 표상되는 민족사의 흐름에 간헐적으로 나타난 자주정신이 그러한 이상이며, 그러한 자주정신의 구현을 뒷받침하는 패기와 지혜와 헌신의 이상이 그의 시대에 새롭게 구현될 수 있다는 희망을 그는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민족주의적 이상과 더불어 토착적인 것에 대한 박 전 대통령의 애착이 표현된 일상적인 예로서 그의 막걸리 사랑을 들 수 있습니다. 아울러 비록 체계적인 언어학적 인식과 깊은 통찰이 수반된 것은 아닌 것 같지만, 민족문화의 정수로서 한글에 대한 그 나름의 애착도 있습니다. 비록 대통령으로서 적절한 행동이었는지 여부는 의문의 대상이지만, 한글에 대한 애착은 광화문 현판을 스스로 한글로 정서한 행위 속에 나타나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1) 단기연호 폐지의 주역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그러한 역사의식에서 바로 그 폐지의 역사적 아이러니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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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담이지만 한양 천도 당시 건립된 광화문의 현판글씨가 복원될 수 없다면, 단아함은 있지만 웅혼의 기운이 없는 현재의 현판글씨를 왜 굳이 고집하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저로서는 이 시대 최고의 명필이 한글로, 그리고 좀 더 바람직하게는 ‘광화문’의 의미를 순 우리말로 바꾼 이름으로, 현판을 제작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특히 순 우리글 서체를 통해 우리 민족의 웅혼과 청명의 기운이 나타났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또한 민족 및 국가정체성의 새로운 정립 속에서 문명사적 발전을 추구한다는 역사적 결단의 표징인 단기연호의 법제화와 조화를 이룬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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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졸저에서도 설명되었지만, 단기연호 폐지의 배경에는 단순히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의지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것에는 휴전 후 이 땅에 일제강점기의 왜색문화를 대체하여 새롭게 몰아닥친 미국적 세계관과 문화의 영향도 있으며, 미국에 국가안보를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국제정치적 환경도 있습니다. 그러나 단기연호 폐지가 박 전 대통령의 결단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그의 그러한 결단이 결코 미국문화에 대한 일방적인 동경이나 민족적 주체성을 상실한데 연유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는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나름대로의 민족주의자입니다. 그의 일본군 복무가 그 문제에 대한 이해를 복잡하게 만들지만, 그의 언행에는 경제건설에 매진하는 태도와 더불어 미국적 자본주의문화를 혐오하는 태도도 자주 발견됩니다. 그 자신 농민의 아들로서, 서구인들이 부러워하는 그린벨트의 설치에는 무분별한 도시화를 억제하고 소박한 농촌문화를 보존하기 위한 의도가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는 ‘민족중흥의 근대화’와 ‘신화적이고 국수주의적인’ 단기연호는 양립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신념을 가지고 단기연호를 폐지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사실에 그의 역사의식의 부족함이 있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서기 연호가 자신의 역사적 소명이자 자신의 전 통치역량을 동원하여 실현시켜야 할 민족중흥의 근대화와 조화를 이루는 시간측정 방식 정도로 믿었던 것 같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그와 같이 손쉽게 단기연호를 폐지하고 서기연호로 대체한 것입니다. 문제는 그가 만일 연호의 본질을 제대로 알았다면 그와 같은 결정을 쉽게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여 그는 서기연호의 도입을 낡은 시계를 새 시계로 바꾸는 정도로 밖에 이해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는 단기연호의 폐지와 서기연호의 일방적 도입이 바로 자신의 역사의식과 배치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진 않은 것입니다. 그의 역사의식은 근본적으로 신채호 선생 등 단기연호 주창자들과 공유하는 것이고, 5천년의 민족사적 연속성을 강조하는 그의 역사의식은 바로 단기연호가 표상하는 역사의식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만일 그가 연호의 본질을 이해했다면 그러한 결정은 결코 내릴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단기연호 사용의 주창자들과 역사의식은 공유하면서 그것의 상징인 단기연호는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폐지했다는 사실에 그의 단기연호 폐지의 아이러니가 있고, 또한 그의 역사의식의 부족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 부족함의 의미를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설명은 바로 단기연호 부활의 민족사 및 문명사적 소명을 새롭게 확인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IV.
만일 단기연호 폐지론자의 믿음대로 단기연호가 국가발전에 저해가 되고, 역사적 근거가 없으며, 비합리적인 신화와 폐쇄적인 국수주의의 산물이라면 당연히 폐지되어야 하고 새롭게 부활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이 대한민국의 문명사적 발전에 장애가 되는 요소라면 부활시켜서는 결코 안 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아직도 새롭게 구명되고 설명되어야 문제가 무한히 많지만, 단기연호의 역사적 근거인 고조선의 존재는 일단 지금까지의 고대사 연구를 통해 충분히 입증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단기연호의 또 다른 근거인 단군신화에는 물론 신화적 요소가 있습니다. 그러나 ‘신화=비합리성’이라는 등식은 신화의 본질에 대한 서양 18세기 신화학 수준의 이해에 불과합니다. 모든 민족의 탄생에는 필연적으로 신화적 요소가 개입될 수밖에 없으며, 그 신화의 ‘이성적’ 가치는 어떠한 보편적인 요소가 그 신화에 잠재되어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다른 민족의 신화는 이성적 종교이고 우리의 것은 비이성적 주술이라는 생각 자체가 무지의 표현이자 외래문화에 대한 맹목적 숭상의 결과일 뿐입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환기되어야 할 것은 민족의 시원은 바로 신화적 요소가 있기 때문에 민족사적 출발의 의의를 갖는다는 사실입니다. 소위 합리적으로 파악되고 역사적으로 설명되는 국가나 민족의 시원은 진정한 의미에서 시원이 못됩니다.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설명되는 민족의 시원은 바로 그 이전 시기의 역사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 민족적 시원이 못됩니다. 또한 민족의 형성이란 결국 한 무리의 인간들이 집단적 정체성을 형성한 데서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정체성의 형성이 어떤 형태나 내용이든 신화라는 초월적인 요소에 기반을 두지 않을 경우, 그것을 구성하는 인간들 각각이 또 다른 집단의 구성원을 전제로 할 수밖에 없으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최초의 집단적 정체성의 형성이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구 소련이나 미국 또는 중국과 같이, 각각 민족사적 시원이 다름에 따라 각각 다른 -그 다름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역사의식을 갖는 민족들로 구성된 복합민족 국가가 끊임없는 국가정체성 위기를 겪게 됨은 필연입니다. 그것은 국민 전체에 정신적 동질성을 부여하는 역사의식이 통일되지 못한데 기인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이면서 신화적인 시원에서 출발하여 영원히 존속되어야 할 한민족, 그 가장 근본적인 민족사적 당위의 표상이 바로 단기연호입니다. 우리 한민족의 역사에는 박 전 대통령이 한탄한 바와 같이 ‘퇴영과 조잡과 침체’의 시기가 있을 수도 있고, 오랜 기간 외국에 정치적으로 종속되거나 외래문명에 동화되어 일시적으로 주체성을 잃은 시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환란과 시련은 민족사의 영원성 차원에서는 결국 일회성의 사건이 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언젠간은 극복될 수 있고 극복 가능하다는 절대적인 민족사적 당위의 표상이 바로 단기연호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국가와 민족의 신화적 시원에서 출발하는 연호는 세계적으로 단기연호 밖에 없다는 사실도 우리에게 크나큰 자부심을 주는 부분입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단기 연호에는 중국사에서 자주 발견되는 바와 같이 정치적 국면전환용으로 새로운 연호를 제정하려는 권력자의 의도를 미연에 방지하는 정치적 실용성도 있습니다. 그런데 단기연호의 심원함은 그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단군신화는 신화로서 애타도록 짧다는 문학적 아쉬움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에는 절묘한 세계관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저는 졸저에서 웅녀의 신화는 낮은 차원의 존재가 고통스러운 자기 변혁의 과정을 통해 높은 차원의 존재가 된다는 심오한 세계관적 통찰이 있음을 지적하였습니다. 별도의 신화 해석학적 논의가 필요하지만, 백수의 왕인 호랑이 대신에 ‘미련한’ 곰이 인간이 되었다는 설정도 단순히 토템신앙의 차원을 넘어 인간성에 대한 심오한 성찰이 있습니다. 그러한 통찰과 성찰 이외에도 그것은 세계의 어떤 건국신화에 비추어도 부족하지 않을 보편적인 요소가 잠재되어 있습니다. 일단 세계 어떤 민족도 그 국가의 신적 기원과 더불어 근본적인 통치 이념의 제시와 함께 구체적인 통치체제까지 언급된 건국신화, 다시 말하여 국가체제의 구색을 갖춘 형태의 건국신화는 없습니다. 대부분 민족의 건국신화는 건국영웅의 신화적 탄생이나 신이 부과하는 도덕률의 제시로 그칩니다. 플라톤의 대화편 <프로타고라스(Protagoras)>에 제시된 아테네의 건국신화는 공동체적 정의의 관념이 탄생하게 배경에 대한 신화적 설명으로 그칩니다. 이스라엘인들은 그들의 역사 전체를 자신들 민족 신의 개입으로 설명하는 특이함이 있지만, 일단 그들 건국신화의 요체인 모세의 십계명은 공동체 생활을 위한 도덕률일 수는 있어도 정치이념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 부족함은 그 후 신화적 성격을 벗어난 <신명기(Deuteronomy ;말 그대로는 ‘제2의 법’)>를 통해 보완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단기연호는 참으로 절묘하고 심원한 역사의식의 표상인 것입니다.
만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연호 자체에 내포된 국가정체성의 의미를 이해했고, 단기연호가 표상하는 역사의식이 바로 자신의 그것과 상통함을 깨달았다면, 그는 결코 단기연호를 그와 같이 손쉽게 폐지하지는 아니했으리라는 것이 저의 견해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역사의 아이러니이자 착오입니다. 이제 그러한 현대사의 오류를 시정할 때입니다. 단기연호의 부활은 지금까지 설명 드린 바와 같이 이 시대 우리들에게 부과된 민족사적 소명이자 문명사적 소명입니다. 이 시대는 동아시아 지역에서 문명충돌이 일어난 지 150여년이 지난 시기입니다. 이제는 서양문물의 일방적 수입이나 모방에서 벗어나 우리의 건국신화에 잠재된 고유하고 소중한 세계관 및 정치사상에 기초하여 그것들을 우리 것으로 만들면서 좀 더 발전되고 좀 더 보편적인 새로운 문명을 창출할 민족사 및 문명사적 소명이 이 시대의 한국인들에게 부여되어 있습니다. 서기의 사용과 병행하는 단기연호 사용의 법제화는 그와 같은 민족사 및 문명사적 소명의 상징이자 그러한 소명의 실현을 향한 첫걸음이라고 -결코 완성이 아니라- 할 것입니다.
오랜 시간 저의 소견을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