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일본’(the Next Japan)이 될 가능성이 있는 후보군이 확대되고 있다. 비즈니스위크가 미국의 ‘제2의 일본’ 가능성을, 파이낸셜타임스가 영국의 ‘잃어버린 10년’ 가능성을 거론하더니, 일본은행 부총재는 미국과 더불어 유럽의 피그스(PIIGS), 다수의 동유럽 국가, 한국을 비롯한 일부 아시아 국가들을 ‘제2의 일본’ 후보군으로 확대시켰다.
물론 많은 이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미국은 일본과 달리 기업부문의 과잉문제가 없고, 금년 들어 완만한 물가 상승세를 유지하고 있으며, 특히 장기적 성장잠재력을 결정하는 인구구조가 일본보다 양호하기 때문에 장기불황에 빠질 가능성이 낮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과잉문제를 낳는 가계부문이 미국 경제의 70%를 차지하고 기업투자는 10~12%에 불과하다보니 가계부문의 회복없이는 기업투자 회복은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또한 완만한 물가 상승세가 유지되는 이유도 공격적인 통화완화 정책 및 장기간 제로금리 유지 선언 덕분인데, 연준(Fed)이 금융산업의 인질이 되는 ‘이자율 함정’에 빠지고 있다는 점을 간과한다.
게다가 이민정책으로 미국의 총 인구가 여전히 증가하고 있지만 ‘유엔의 세계인구 전망’에 따르면 부양해야 할 인구 1인당 노동인구(15~60세) 규모가 2007년에 이미 정점을 지났다는 점이다. 오히려 일본과 미국 간의 근본적인 차이는 일본 문제가 일본시스템과 외래시스템의 충돌에서 비롯된 것인 반면, 미국 문제는 전통적인 금융(공식세계)의 규모를 능가했던 그림자금융(비공식세계)에서 보듯이 스스로 자신을 파괴시킨 미국시스템 자체의 문제였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이야말로 ‘제2 일본’의 유력한 후보다. 일본은 1960~1974년간 연평균 8.9%로 성장하다가 74~1989년간은 4%로 하락했다. 일본 지식인들은 성장 둔화의 원인으로 ‘일본 기적’을 만들어낸 ‘관계의존적 네트워크 시스템’과 금융자유화 이후 외부에서 유입된 ‘개인화된 시스템’ 간의 충돌로 이해한다. 금융위기 예측으로 유명한 시카고대의 라구람 라잔 교수도 위기를 유발하는 단층의 하나로 ‘(금융)시스템 간의 충돌’을 지적했다.
일본경제는 90년대 자산버블 붕괴와 인구구조 변화가 맞물리면서 성장률이 연평균 1.5%로 추락하고, 2000년대에는 다시 0.6%로 하락했다. 너무 유사한 패턴이 한국 경제에서 발견된다. 1971~1991년간 한국은 연평균 9.4%로 성장했다. 그런데 자본시장을 개방하고 OECD 가입을 추진하며 개방을 가속화한 1992~1997년간은 7.1%, 외환위기 이후 2000년대에는 4.6%로 하락했다. 한국과 일본의 차이는 일본이 90년대 자산버블과 인구구조 변화가 맞물려 진행된 반면, 한국은 외환위기 이후에도 ‘인구 보너스’가 진행됐다는 점이다. 그런데 ‘인구 보너스’가 일할 사람은 줄어들고 부양해야 할 비노동인구가 늘어나는 ‘인구 오너스’로 최근 전환됐다. 핵심노동력(25~49세)이 2009년부터 감소하기 시작했고, 비노동인구 1인당 노동인구(15~60세) 규모도 2010년부터 하락세로 전환했다. 또한 베이비붐 세대의 마지막 주자(63년생)가 인생에서 지출을 가장 많이 하는 40대 말을 지나고 있다. 즉 인구요인에서 경기순환의 정점과 주택시장의 붐이 끝났다는 얘기다.
‘인구 오너스’와 더불어 가계부채의 구조조정은 내수의 장기 침체로 작용하고, 이는 다시 주택시장 침체라는 악순환 고리를 만들고 있다. 게다가 미국·유럽·일본 등 선진국 경제의 장기 저성장 진입으로 수출 역시 장기 둔화가 불가피하다. 사실 외환위기 같은 갑작스러운 충격보다 서서히 가라앉는 무기력증이 더 위험하다. 사회 침몰이 사회구성원 간에 차별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영향을 덜 받는 상층부는 시스템 전환에 소극적이거나 이를 거부한다. 지난 20년간 중산층이 11.7%포인트나 감소하고, 저소득층이 두 배 가까이 늘어나도 시대 추세라며 외면하듯이 말이다. 시스템의 전환은 공동체 사활이 걸린 사안으로 차기 정부의 최우선 과제여야 한다.
* 경향신문 <경제와 세상> 12월 8일자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