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김정일’체제의 정권진화와 개발독재체제
- 수령독재체제에서 개발독재체제로 나아가야 -
조 민 (통일정책연구센터 선임연구위원)
핵무기와 2400만 인민의 목줄
북한의 김정일 시대가 막을 내렸다. ‘당 중앙’(1970년대 중반~1980년대 초반),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친지동’ 1980년대 중반~1990년대 중반), 그리고 ‘장군님’(집권기)으로 불렸던 김정일은 1941년 2월16일 소련 원동 접경마을 뱌츠코예에서 태어났다. 김일성은 회고록을 통해 그해 남(南)야영(B야영구 뱌츠코예)에서 이른 봄날 기념사진을 찍으면서 동지들과 함께 보낸 정겨운 한때를 회상하였다.
“내가 일생에서 개별적으로 녀전우와 함께 사진을 찍은 것은 그것이 처음일 것입니다. 나와 김정숙에게 있어서는 결혼사진이나 다름없었습니다. … 나나 정숙이로서는 결혼 후 처음으로 맞는 잊을 수 없는 봄이었습니다. 나는 그 봄을 영원히 기념하고 싶어 사진뒤면에 타향에서 봄을 맞으면서 1941. 3. 1 B야영구에서라는 글을 써놓았습니다.”(『세기와 더불어』(계승본) 8, 조선노동당출판사 1998, pp. 172~173).
북한은 김정일의 출생년도를 1942년으로 공식화하여 김일성 출생년도 1912년의 끝자리와 맞추었다. 그와 함께 출생지를 백두산 밀영으로 바꿔 민족 성산(聖山)의 거룩한 이미지를 분칠하면서 온갖 ‘탄생설화’를 조작해냈다. 테러와 도발의 총지휘자였던 김정일은 2011년 12월 17일 즈음(?), 또다시 ‘사망지 미상’의 방식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에 애도를 표한다는 것은 정상적인 심성을 가진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그의 죽음에 조문을 주저하는 것은 미래를 내다
보지 않는 근시안적 행위가 된다.
김정은 세습 후계자는 한 손에는 핵무기, 다른 한 손에는 2천 4백만 인민의 목줄을 넘겨받았다. 2년 남짓 권력 이양의 압축적 수습 기간을 거친 후계자가 과연 절대 권력자의 빈 공간을 장악할 수 있을까? 김정일 유고 상황에서 위기 국면을 맞이한 북한 통치층은 ‘운명공동체’ 의식 속에서 젊은 ‘영도자’를 중심으로 결속력을 과시하고 있다. 단기적 측면에서 김정은 체제는 ‘위기상황’에서 기인한 구심력이 작동하게 되면서 내부 동요가 나타날 가능성은 그다지 높지 않다. 그러나 머잖은 시기에 국정운영 과정에서 정치세력의 분화와 재편이 개시되면서 ‘포스트 김정일’체제의 안정성 여부가 시험대에 오를 수 있다. 문제의 핵심은 후계자가 움켜진 핵무기와 인민의 목줄을 과연 어떻게 풀어 나아갈 것인가 하는 데에 집약된다.
북한체제의 변화 방향, 정권진화
핵문제 해결과 북한의 개혁․개방을 위해서는 북한 정권 자체의 속성이 변화되지 않으면 안 된다. 북한체제를 변화시키기 위한 ‘정권교체(Regime Change)’는 사실상 불가능하며, 제재를 통한 대북정책은 외부로부터의 제재에 최후까지 버틸 수 있는 응집력을 지닌 북한체제에는 그다지 유용하지 않은 전략이었다. 따라서 정권교체 방식보다는 ‘정권진화(Regime Evolution)’ 방안이 훨씬 합리적이며 현실 가능한 방도이다. 정권진화는 해당 국가 내부에서 변화의 세력이 성장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며, 이를 위해 국제사회는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병행하면서 지원․협력 모드로 접근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정권진화는 군사적인 물리력보다는 정치적․경제적 협상을 비롯한 외교적 수단을 통해 간접적이고 점진적인 변화를 추구한다.
핵문제 해결의 가닥을 잡으면서, 인민의 삶의 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개혁․개방이 추진되기 위해서는 북한 정권의 변화, 즉 정권진화 방안 이외의 다른 길은 없다. 독재정권과 대화와 협상을 거부하면 그들을 더욱 폐쇄적으로 만들어 내부 통제를 한층 강화시키게 된다. 그러나 핵문제를 비롯한 한반도 평화 구축을 위해 ‘인내 있는’ 대북 협상 속에서 정치적․경제적 협력이 이루어지면 북한은 통제를 완화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압박과 제재를 통해 독재정권을 고립․봉쇄시키는 것이 아닌 ‘통합’을 통해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통합전략은 북한 정권의 행태를 변화시키면서 궁극적으로 체제의 속성까지 바꾸는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선군정치에서 선민정치, 선경정치로
북한의 정권진화는 선군(先軍)정치가 ‘선민(先民)정치’, ‘선경(先經)정치’로 바뀌는 상황을 의미한다.
선군정치는 군을 국가통치의 제일원리로 내세웠을 뿐만 아니라, 군의 위상과 역할을 이데올로기적 수준으로 치켜세운 ‘선군사상’으로까지 고양시켰다. 김일성 시대에는 김일성 개인의 카리스마로 군을 앞세울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김정일 통치시대에는 당의 무능과 부패, 인민 대중의 충성심 약화 등으로 통치기반으로 믿을 수 있는 집단은 군밖에는 없다는 판단 하에 군부를 한층 우대하고 군부를 통치의 최후 보루로 삼았다. 여기서 군의 위상과 역할을 특별히 우대하는 선군정치 논리가 제기되었던 것이다.
수령체제를 무력으로 뒷받침하는 군부가 국가의 골간이 된 체제에서 경제회복을 위한 개혁․개방 정책이나 주민의 삶의 문제 해결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총칼로 수령을 보위한다”는 수령옹호주의는 대외관계에서 평화보다는 호전적이고 비타협적인 맹동주의를 충성의 잣대로 삼아 합리적이고 타협적인 대외관계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대내적으로는 주민통제의 최후보루로서 군이 동원가능한 모든 자원에 대한 독점적 특권을 보유한 채 국가의 정상적인 자원 활용과 배분을 가로막았다. 이러한 선군정치는 인민의 삶을 중시하는 ‘선민정치’로, 경제회생과 경제발전 논리를 강조하는 ‘선경정치’로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수령독재체제에서 개발독재체제로
‘포스트-김정일’체제는 수령독재체제에서 개발독재체제로 나아가야 한다. 수령독재체제에서는 본격적인 개혁․개방이 어렵다. 선군정치 하에서는 정권안보 논리가 최우선이 되며, 경제 논리는 군사안보 논리에 밀리면서 주민 생활과 인권 문제 등은 도외시될 수밖에 없다. 그와 달리 개발독재체제는 개혁․개방정책을 추진할 수 있다. 안보와 경제발전 논리의 병행이 가능하며, 점차적으로 안보 논리보다 경제 논리가 주도하는 사회로 변화하게 된다.
개발독재는 개발도상국에서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독재를 말한다. 중남미와 아프리카, 최근의 중앙아시아 국가들에서는 ‘개발 없는’ 독재와 부패가 일반화된 사례도 적지 않다. 개발독재는 경제발전과 국가번영을 앞세워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고 유보하면서 산업화와 근대화 목표를 추진해 나가는 독재체제로 한국, 대만,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 아시아 국가들에서 긍정적인 선례를 남겼다. 현재 이러한 나라들이 중국과 더불어 세계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맡고 있는 현실에 비춰보면 개도국의 개발독재는 어느 면에서 ‘필요악’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체제는 궁극적으로 인류의 문명사적 규범에 부응하는 체제로 전환되어야 하지만, 경제 문제 해결과 인민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시킬 수 있는 ‘개발을 위한 독재’는 잠정적으로 용인되어야 한다. ‘개발 없는 독재’와 ‘인민의 삶에 무책임한 독재’는 더욱 더 위험하고 존재 가치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북한이 체제를 유지하면서 한걸음 앞으로 나가갈 수 있는 방향은 개발독재 방식이며, 이는 북한 수령독재체제와 근친성을 지니기에 비록 모험적이나마 북한의 선택을 기대해 볼 수 있다. 개발독재는 경제성장과 국가번영의 기치아래 독재를 정당화하는 사상과 이론체계를 갖추어야 하며, 그와 함께 강력한 리더십을 기반으로 유능하고 의욕적인 관료 등의 추진세력이 필요하다. 북한은 사상, 리더십, 추진세력 등의 측면에서 개발독재 추진을 가능케 할 당․관료기구가 정비되어 있고 경제개발을 위한 효율적인 동원체제가 구비되어 있다.
역사에는 비약이 없다. 다만 북한이 짧은 시간 내에 남한과의 경제수준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서는 남한의 경제성장 유형인 압축 성장의 과정이 필요하다. 북한이 당장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논리는 그야말로 북한의 현실을 외면한 비약적인 발상으로, 흡수통일론의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한국의 역할, 안보협력 및 개발협력
북한이 개발독재체제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한국의 협력이 필요하다. 즉, 한국의 안보협력과 개발협력이 중요하다. 북한체제의 변화는 정권안보 자체가 크게 문제되지 않는 단계에서 기대할 수 있다. 따라서 북한의 정권진화를 위한 대북 안보협력은 불가피하다. 이를 위해 북핵 현실을 과감히 인정하면서 기존의 평화체제 논의보다 훨씬 담대하고 포괄적인 접근, 즉 새로운 ‘평화체제 이니셔티브’(Peace Regime Initiative)를 확립해야 한다.
한국은 이제 주변 강대국에 마냥 휘둘리는 약소국이 아니며, 더 이상 세계사의 피동적(被動的) 존재가 아니다. 분단과 전쟁은 강대국 패권정치의 소산이었다면, 이제 평화와 통일은 우리의 의지와 역량으로 이루어내야 한다. 북핵 문제 해결 방향과 한반도 평화체제의 단초를 마련한 국제적 합의문인「9․19 공동성명」의 취지를 되살려 우리가 보다 적극적으로 ‘한반도 평화 이니셔티브’를 제시해야 할 때다.
다른 한편 대북 개발협력이 절실하다. 개발협력은 한국의 ‘전략적 실용주의’가 빛을 발할 수 있는 부문이다. 개발협력과 관련하여 2007년 10월의 남북정상선언의 합의 내용을 되돌아볼 수 있다.
비록 당시 남북 양측은 이 합의에 대해 상이한 전략적 목표를 가졌었지만, 합의 사안의 실행이야말로 남북이 함께 가야할 길이라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대북 개발협력으로 공동프로젝트가 가동된다면 남북관계는 ‘윈-윈’ 모드로 전환되는 계기가 된다. 개인 사이에서나 나라 사이에서나 강자는 약자의 자존심을 살려줄 줄 알아야 한다. 민족 미래의 목표를 확신한다면, 북한의 탈규범적이고 간혹 상도(常度)를 벗어난 행위를 포용하고 인내할 필요가 있다.
북한의 정권진화를 위한 전략적 목표 위에서 대북 안보․개발협력을 추진한다면 이념적인 안보 논쟁이나 소모적인 ‘퍼주기’ 논쟁이 야기될 까닭이 없고, 국민적 동의와 지지 위에서 ‘통 큰’ 대북․통일정책의 추진이 가능해진다. 북한 또한 국제사회의 개발지원 방식의 대북협력을 바라고 있으며, 개발협력은 반드시 북한의 대외개방을 촉진시킨다. 한국의 안보․개발협력은 북한의 정권진화를 이끌 수 있으며, 북한이 개발독재체제로 나아간다면 남북한 공생의 미래를 기약할 수 있다.
- 수령독재체제에서 개발독재체제로 나아가야 -
조 민 (통일정책연구센터 선임연구위원)
핵무기와 2400만 인민의 목줄
북한의 김정일 시대가 막을 내렸다. ‘당 중앙’(1970년대 중반~1980년대 초반),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친지동’ 1980년대 중반~1990년대 중반), 그리고 ‘장군님’(집권기)으로 불렸던 김정일은 1941년 2월16일 소련 원동 접경마을 뱌츠코예에서 태어났다. 김일성은 회고록을 통해 그해 남(南)야영(B야영구 뱌츠코예)에서 이른 봄날 기념사진을 찍으면서 동지들과 함께 보낸 정겨운 한때를 회상하였다.
“내가 일생에서 개별적으로 녀전우와 함께 사진을 찍은 것은 그것이 처음일 것입니다. 나와 김정숙에게 있어서는 결혼사진이나 다름없었습니다. … 나나 정숙이로서는 결혼 후 처음으로 맞는 잊을 수 없는 봄이었습니다. 나는 그 봄을 영원히 기념하고 싶어 사진뒤면에 타향에서 봄을 맞으면서 1941. 3. 1 B야영구에서라는 글을 써놓았습니다.”(『세기와 더불어』(계승본) 8, 조선노동당출판사 1998, pp. 172~173).
북한은 김정일의 출생년도를 1942년으로 공식화하여 김일성 출생년도 1912년의 끝자리와 맞추었다. 그와 함께 출생지를 백두산 밀영으로 바꿔 민족 성산(聖山)의 거룩한 이미지를 분칠하면서 온갖 ‘탄생설화’를 조작해냈다. 테러와 도발의 총지휘자였던 김정일은 2011년 12월 17일 즈음(?), 또다시 ‘사망지 미상’의 방식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에 애도를 표한다는 것은 정상적인 심성을 가진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그의 죽음에 조문을 주저하는 것은 미래를 내다
보지 않는 근시안적 행위가 된다.
김정은 세습 후계자는 한 손에는 핵무기, 다른 한 손에는 2천 4백만 인민의 목줄을 넘겨받았다. 2년 남짓 권력 이양의 압축적 수습 기간을 거친 후계자가 과연 절대 권력자의 빈 공간을 장악할 수 있을까? 김정일 유고 상황에서 위기 국면을 맞이한 북한 통치층은 ‘운명공동체’ 의식 속에서 젊은 ‘영도자’를 중심으로 결속력을 과시하고 있다. 단기적 측면에서 김정은 체제는 ‘위기상황’에서 기인한 구심력이 작동하게 되면서 내부 동요가 나타날 가능성은 그다지 높지 않다. 그러나 머잖은 시기에 국정운영 과정에서 정치세력의 분화와 재편이 개시되면서 ‘포스트 김정일’체제의 안정성 여부가 시험대에 오를 수 있다. 문제의 핵심은 후계자가 움켜진 핵무기와 인민의 목줄을 과연 어떻게 풀어 나아갈 것인가 하는 데에 집약된다.
북한체제의 변화 방향, 정권진화
핵문제 해결과 북한의 개혁․개방을 위해서는 북한 정권 자체의 속성이 변화되지 않으면 안 된다. 북한체제를 변화시키기 위한 ‘정권교체(Regime Change)’는 사실상 불가능하며, 제재를 통한 대북정책은 외부로부터의 제재에 최후까지 버틸 수 있는 응집력을 지닌 북한체제에는 그다지 유용하지 않은 전략이었다. 따라서 정권교체 방식보다는 ‘정권진화(Regime Evolution)’ 방안이 훨씬 합리적이며 현실 가능한 방도이다. 정권진화는 해당 국가 내부에서 변화의 세력이 성장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며, 이를 위해 국제사회는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병행하면서 지원․협력 모드로 접근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정권진화는 군사적인 물리력보다는 정치적․경제적 협상을 비롯한 외교적 수단을 통해 간접적이고 점진적인 변화를 추구한다.
핵문제 해결의 가닥을 잡으면서, 인민의 삶의 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개혁․개방이 추진되기 위해서는 북한 정권의 변화, 즉 정권진화 방안 이외의 다른 길은 없다. 독재정권과 대화와 협상을 거부하면 그들을 더욱 폐쇄적으로 만들어 내부 통제를 한층 강화시키게 된다. 그러나 핵문제를 비롯한 한반도 평화 구축을 위해 ‘인내 있는’ 대북 협상 속에서 정치적․경제적 협력이 이루어지면 북한은 통제를 완화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압박과 제재를 통해 독재정권을 고립․봉쇄시키는 것이 아닌 ‘통합’을 통해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통합전략은 북한 정권의 행태를 변화시키면서 궁극적으로 체제의 속성까지 바꾸는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선군정치에서 선민정치, 선경정치로
북한의 정권진화는 선군(先軍)정치가 ‘선민(先民)정치’, ‘선경(先經)정치’로 바뀌는 상황을 의미한다.
선군정치는 군을 국가통치의 제일원리로 내세웠을 뿐만 아니라, 군의 위상과 역할을 이데올로기적 수준으로 치켜세운 ‘선군사상’으로까지 고양시켰다. 김일성 시대에는 김일성 개인의 카리스마로 군을 앞세울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김정일 통치시대에는 당의 무능과 부패, 인민 대중의 충성심 약화 등으로 통치기반으로 믿을 수 있는 집단은 군밖에는 없다는 판단 하에 군부를 한층 우대하고 군부를 통치의 최후 보루로 삼았다. 여기서 군의 위상과 역할을 특별히 우대하는 선군정치 논리가 제기되었던 것이다.
수령체제를 무력으로 뒷받침하는 군부가 국가의 골간이 된 체제에서 경제회복을 위한 개혁․개방 정책이나 주민의 삶의 문제 해결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총칼로 수령을 보위한다”는 수령옹호주의는 대외관계에서 평화보다는 호전적이고 비타협적인 맹동주의를 충성의 잣대로 삼아 합리적이고 타협적인 대외관계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대내적으로는 주민통제의 최후보루로서 군이 동원가능한 모든 자원에 대한 독점적 특권을 보유한 채 국가의 정상적인 자원 활용과 배분을 가로막았다. 이러한 선군정치는 인민의 삶을 중시하는 ‘선민정치’로, 경제회생과 경제발전 논리를 강조하는 ‘선경정치’로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수령독재체제에서 개발독재체제로
‘포스트-김정일’체제는 수령독재체제에서 개발독재체제로 나아가야 한다. 수령독재체제에서는 본격적인 개혁․개방이 어렵다. 선군정치 하에서는 정권안보 논리가 최우선이 되며, 경제 논리는 군사안보 논리에 밀리면서 주민 생활과 인권 문제 등은 도외시될 수밖에 없다. 그와 달리 개발독재체제는 개혁․개방정책을 추진할 수 있다. 안보와 경제발전 논리의 병행이 가능하며, 점차적으로 안보 논리보다 경제 논리가 주도하는 사회로 변화하게 된다.
개발독재는 개발도상국에서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독재를 말한다. 중남미와 아프리카, 최근의 중앙아시아 국가들에서는 ‘개발 없는’ 독재와 부패가 일반화된 사례도 적지 않다. 개발독재는 경제발전과 국가번영을 앞세워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고 유보하면서 산업화와 근대화 목표를 추진해 나가는 독재체제로 한국, 대만,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 아시아 국가들에서 긍정적인 선례를 남겼다. 현재 이러한 나라들이 중국과 더불어 세계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맡고 있는 현실에 비춰보면 개도국의 개발독재는 어느 면에서 ‘필요악’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체제는 궁극적으로 인류의 문명사적 규범에 부응하는 체제로 전환되어야 하지만, 경제 문제 해결과 인민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시킬 수 있는 ‘개발을 위한 독재’는 잠정적으로 용인되어야 한다. ‘개발 없는 독재’와 ‘인민의 삶에 무책임한 독재’는 더욱 더 위험하고 존재 가치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북한이 체제를 유지하면서 한걸음 앞으로 나가갈 수 있는 방향은 개발독재 방식이며, 이는 북한 수령독재체제와 근친성을 지니기에 비록 모험적이나마 북한의 선택을 기대해 볼 수 있다. 개발독재는 경제성장과 국가번영의 기치아래 독재를 정당화하는 사상과 이론체계를 갖추어야 하며, 그와 함께 강력한 리더십을 기반으로 유능하고 의욕적인 관료 등의 추진세력이 필요하다. 북한은 사상, 리더십, 추진세력 등의 측면에서 개발독재 추진을 가능케 할 당․관료기구가 정비되어 있고 경제개발을 위한 효율적인 동원체제가 구비되어 있다.
역사에는 비약이 없다. 다만 북한이 짧은 시간 내에 남한과의 경제수준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서는 남한의 경제성장 유형인 압축 성장의 과정이 필요하다. 북한이 당장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논리는 그야말로 북한의 현실을 외면한 비약적인 발상으로, 흡수통일론의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한국의 역할, 안보협력 및 개발협력
북한이 개발독재체제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한국의 협력이 필요하다. 즉, 한국의 안보협력과 개발협력이 중요하다. 북한체제의 변화는 정권안보 자체가 크게 문제되지 않는 단계에서 기대할 수 있다. 따라서 북한의 정권진화를 위한 대북 안보협력은 불가피하다. 이를 위해 북핵 현실을 과감히 인정하면서 기존의 평화체제 논의보다 훨씬 담대하고 포괄적인 접근, 즉 새로운 ‘평화체제 이니셔티브’(Peace Regime Initiative)를 확립해야 한다.
한국은 이제 주변 강대국에 마냥 휘둘리는 약소국이 아니며, 더 이상 세계사의 피동적(被動的) 존재가 아니다. 분단과 전쟁은 강대국 패권정치의 소산이었다면, 이제 평화와 통일은 우리의 의지와 역량으로 이루어내야 한다. 북핵 문제 해결 방향과 한반도 평화체제의 단초를 마련한 국제적 합의문인「9․19 공동성명」의 취지를 되살려 우리가 보다 적극적으로 ‘한반도 평화 이니셔티브’를 제시해야 할 때다.
다른 한편 대북 개발협력이 절실하다. 개발협력은 한국의 ‘전략적 실용주의’가 빛을 발할 수 있는 부문이다. 개발협력과 관련하여 2007년 10월의 남북정상선언의 합의 내용을 되돌아볼 수 있다.
비록 당시 남북 양측은 이 합의에 대해 상이한 전략적 목표를 가졌었지만, 합의 사안의 실행이야말로 남북이 함께 가야할 길이라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대북 개발협력으로 공동프로젝트가 가동된다면 남북관계는 ‘윈-윈’ 모드로 전환되는 계기가 된다. 개인 사이에서나 나라 사이에서나 강자는 약자의 자존심을 살려줄 줄 알아야 한다. 민족 미래의 목표를 확신한다면, 북한의 탈규범적이고 간혹 상도(常度)를 벗어난 행위를 포용하고 인내할 필요가 있다.
북한의 정권진화를 위한 전략적 목표 위에서 대북 안보․개발협력을 추진한다면 이념적인 안보 논쟁이나 소모적인 ‘퍼주기’ 논쟁이 야기될 까닭이 없고, 국민적 동의와 지지 위에서 ‘통 큰’ 대북․통일정책의 추진이 가능해진다. 북한 또한 국제사회의 개발지원 방식의 대북협력을 바라고 있으며, 개발협력은 반드시 북한의 대외개방을 촉진시킨다. 한국의 안보․개발협력은 북한의 정권진화를 이끌 수 있으며, 북한이 개발독재체제로 나아간다면 남북한 공생의 미래를 기약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