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우파와 애국좌파가 나와야 할 때

by 김명섭 posted Feb 23, 2012
                      진보우파와 애국좌파가 나와야 할 때

                                                            김명섭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右, 기존의 가치 존중하며 불공정과 치열하게 싸워야
左, 약자 편에 서면서도 안보를 남에게 미뤄선 안 돼
… '보수 대 진보' 구도 넘어서서 국가 위한 합리적 경쟁 필요




한때 '2008년 체제'라는 말이 유행했었다. 당시 필자는 "'2008년 체제'는 없다"고 공언한 바 있었다(2008년 5월 20일자 아침논단). '체제'의 모퉁이 돌이 될 만한 이념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념이란 가치의 우선순위를 매기는 표준이고, 수많은 개인이 눈앞의 이익 너머의 먼 미래를 위해 자발적으로 묶이는 생각의 동아리 줄과도 같은 것이다.

이회창 후보에게로 간 350만표를 제외하고도 530만표 이상의 큰 차이로 출범했던 이명박 정부에 대한 지지도가 폭락한 주된 원인은 '이념을 보수(保守)'하는 정부가 아니라 '이익을 보수'하는 정부로 비쳤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가 탈(脫)이념적인 중도실용을 내세웠지만, 정치에서는 탈이념을 표방하는 것도 이념이다. 대통령을 백주의 공공장소에서 무릎 꿇렸던 종교도 반대진영의 일각에서는 이념의 하나로 본다.

과거의 '2008년 체제'론에 맞서 '2013년 체제'론이 나오고 있는 현재의 한국 정치는 보수 대 진보의 이념지형을 넘어서 점차 서구형 좌우 구도로 이행하고 있다고 보인다. 그렇다면 차제에 한국형 진보우파와 애국좌파가 나올 필요가 있다.

첫째, 진보우파는 좌파는 물론 보수우파와도 다르다. 혹자는 한국에는 왜 영국의 보수당처럼 오래 지속되는 보수당이 없느냐고 한탄한다. 수백년 동안 제국주의를 했던 영국의 사례를 제국열강들에 할퀴이면서 진보해온 한국에 대입하기는 어렵다. 영국 보수당의 장수 비결은 19세기 거문도 무단점거 사건 당시 남겨둔 영국 해군의 유해를 21세기에도 찾아와서 참배하는 공동체에 대한 기억에서 나온다. 6·25전쟁 전사자 유족에게 불과 5000원을 지급하던 한국의 보수우파가 영국 보수당과 같은 국민적 헌신을 바라는 것은 무리다.

우파는 원래 기존의 가치와 제도를 중시하는 이념이기 때문에 보수우파라는 말은 동어반복에 가깝다. 보수우파와 달리 진보우파는 기존의 가치와 제도에 대한 존중과 더불어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위한 역사적 낙관주의를 공유한다. 경쟁을 통한 진보를 믿는 만큼 경쟁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불공정성과도 치열하게 싸운다.

여권이 진보우파가 되고자 한다면 이명박 정부와의 단절이나 당명의 변경만으로는 부족하다. 무엇보다 박정희 시대로부터 계승할 것과 단절할 것을 국민 앞에 명확히 밝혀야 한다. 야권이 계승하겠다는 노무현 정부 후기의 주요 정책들도 진보우파에 가까웠다. 그런데 정작 노무현 정부가 추진했던 한·미 FTA나 제주해군기지에 관한 정책을 뒤집으면서 만들어 내겠다고 하는 '2013년 체제'의 이념적 정체성은 과연 무엇인가.

둘째, 좌파가 되더라도 애국좌파가 되어야 한다. 원래 우파는 인간의 불완전성을 전제로 대충 덮고 가자는 것이고, 좌파는 진실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자는 것이다. 북한·티베트·시리아 등에서 오늘도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관심은 표명해야 좌파라고 할 수 있다. 개성공단을 지속하더라도 그곳의 노동조건도 따질 수 있어야 좌파다운 것이다. 좌파로서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지만 애국을 우파에 미루지 않는 것이 애국좌파다. 서구에서는 왕(王)의 용병들이 전쟁을 담당하는 것이라고 믿었던 우파와 달리 좌파는 스스로 공화국을 지키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다. 점증하는 주변국들의 안보위협 속에서 전시작전권 환수를 목전에 둔 대한민국에 필요한 것도 병역을 기피하고 미국만 바라보는 웰빙우파보다는 애국좌파이다.

애국좌파는 이명박 정부의 실정(失政)을 비판하더라도 이를 북한 폭정(暴政)의 면죄부로 사용하지 않는다. 아웅산 테러와 KAL기 테러를 당했던 전두환 정부와 노태우 정부도 북한과의 관계개선에 나섰다고 주장하면서 이제 그만 천안함·연평도의 기억을 덮자는 주장이 있다. 언제부터 전·노 정부를 판단 준거로 삼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당시에는 아웅산 테러나 KAL기 테러가 북한의 소행이 아니라고 혹세무민하던 지도층은 없었다. 먼저 북한의 천안함·연평도 도발을 한 번이라도 규탄한 후에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을 비판하는 것이 애국좌파다.

국가가 급식·교육·취직, 그리고 인권에 개입해야 한다는 주장은 서구좌파와 닮았다. 그렇다면 안보를 우파에 미루지 않는 서구좌파의 애국심도 본받아야 한다. 태극기와 애국가를 백안시하면서 국가가 주는 보조금은 챙기겠다는 일부 좌파의 모순된 노선은 애국좌파가 먼저 비판해야 한다. 대한제국 이래 중국으로부터의 독립, 일제로부터의 독립을 상징했던 태극기와 애국가에 대한 간절한 사랑은 좌우의 독립운동가들이 공유했던 것이다.

좌파에도 보수가 있고, 우파에도 진보가 있다. 좌파가 곧 반(反)대한민국인 것도 아니고, 우파가 반드시 친(親)대한민국인 것도 아니다. 보수 대 진보의 구도를 넘어 좌우의 대립과 경쟁이 불가피하다면 반국(反國)좌파가 아닌 애국좌파, 전통과 함께 창조를 생각하는 진보우파가 나와서 대한민국의 새로운 비상(飛上)을 위해 보다 합리적인 경쟁을 벌여야 한다.


* 오늘 조선일보 아침논단에 실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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