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에 고속도로를 건설해 주자

by 김영길 posted Apr 19, 2012
김영길입니다. 오늘 조선일보에 글을 실었습니다.
도움을 주신 정우상 논설위원과 김석규 이사께 감사 드립니다.

아웅산수치 여사를 필두로 사반세기 앞의 우리처럼
다시 부강한 나라로 발돋음하려는 미얀마는, 대한민국과
두 가지 점에서 운명처럼 함께 밝은 미래를 도모할 이웃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1987년 6월10일을 기점으로 산업화에 이은 민주화로 접어들었지만,
미얀마는 1988년 8월8일의 비극 이래 대한민국과 반대의 길을 걸었습니다.
이제 그들이 아웅산수치 여사의 입을 통해 우리에게 손을 내밀고 있습니다.
그들이 또다른 인도차이나가 되게 할지 아니면 함께 다극의 아시아를
대한민국과 만들어나갈 동맹이 되게 할지는 오늘의 선택에 달렸습니다.

신문에 실은 글은 짧습니다.
원문을 칼럼 다음에 덧붙이니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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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언대] 미얀마에 고속도로를 건설해 주자

                                                          김영길 ㈔코리아글로브 연구위원



최근 미얀마 군부는 세인테인 대통령을 내세워 개혁·개방에 나서고 있다. 미국 힐러리 국무장관의 방문은 중국 일변도의 외교 노선에서 미얀마가 균형을 잡아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치러진 이번 미얀마 보궐선거에서 아웅산 수치가 거둔 압승의 상징적 의미는 아주 크다.

동남아의 대국인 미얀마는 국토 면적이 한반도의 3배나 되고, 풍부한 천연자원과 인적자원을 가진 나라다. 지정학적으로 볼 때도 인도·중국·동남아를 잇는 전략적 요충지다. 지정학적 이점과 풍부한 자원에 눈독을 들인 열강들이 미얀마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서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그런 가운데 수치 여사가 한국을 지목해 러브 콜을 하고 있다.

미국·중국·일본을 마다하고 왜 한국인가? 그 진의를 잘 파악하고, 큰 그림을 그려야 할 때다. 자원 빈국인 한국은 선진국으로 진입하기 위하여, 통일 조국의 강력한 우방을 얻기 위해서,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기 위해서 미얀마가 꼭 필요하다. 미얀마 역시 전쟁의 잿더미에서 변변한 자원도 없는 상태에서 농업국에서 산업화에 성공해서 G20 의장국이 된 한국의 자본·기술·경험이 꼭 필요한 상황이다. 한국과 미얀마는 서로 윈·윈(win·win)할 수 있는 조건이 잘 갖추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이 미얀마 자원을 독식하다시피 하는 데서 오는 미얀마인들의 반중(反中) 정서는 심각하다. 일본은 미얀마의 식민지 독립운동 시기 아웅산 장군을 돕다가 약속과는 달리 미얀마를 식민지화하려는 야욕을 드러냈다. 또한 미얀마인들은 영국의 식민 통치 경험을 통해서 서구 열강들의 속성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있다. 따라서 한국은 다른 열강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이런 좋은 기회는 다시 찾아오기 어렵다.

미얀마인들의 숙원 사업이 있다. 바로 양곤~만덜레 고속도로 건설이다. 그 시발점과 양곤 반경 30km 이내에 있는 인근 도시까지 6차선을 한국인의 마음을 담아 무상으로 건설, 아웅산 수치의 러브 콜에 화답하는 것이 좋은 답이 될 수 있다. 산업화 과정에서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이 한국인의 뇌리에 얼마나 선명하게 새겨졌는가를 돌이켜보면 그 의미를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양국의 우호관계가 훨씬 더 공고해질 것이다. 상대가 기다려 줄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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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의 역사적 배경과 수지 여사의 등장과,
그리고 앞으로 한­-미얀마 관계의 재정립


                 국제청소년교류센터 전문위원/ 코리아글로브 연구위원 김 영 길


영국의 오랜 식민지 시대와 짧은 일제 강점기를 거쳐 독립국가로서 막 일어서려는 시기에 미얀마의 독립 영웅 아웅 산 장군이 비열하고 야비한 반대파 우소의 사주를 받은 저격수의 총탄을 맞고 서거함으로써, 신생 독립국인 미얀마의 장래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당시 제헌의회 의장을 맡고 있었던 우누가 영국의 천거로 내각의 수반이 되어 영국 수상 클레멘트 애틀리와 함께 독립문서에 서명함으로써 1948년 1월 4일 마침내 미얀마는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게 된다. 신생 독립국 미얀마는 소수 종족들의 자치주의 실현 요구와 무력항쟁을 통한 독립운동 등으로 커다란 정치적 혼란을 겪게 된다. 이런 현실 타개책으로 내놓은 우누의 불교사회주의는 경제발전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쳐 결국 사태수습을 못하고, 우누는 군사령관 네윈에게 내각을 맡기고 물러나게 된다.

위기관리 내각을 맡았던 네윈은 정쟁을 안정시키고, 선거를 통해 집권한 우누에게 내각을 위임하고 원대 복귀한다. 우누는 무리하게 불교를 국교화하려는 과정에서 비불교도와 소수 종족들로부터 거센 반발을 사게 되자 제4차 헌법 개정안에 모든 종교를 자유화하겠다고 선언했는데, 이는 불교 국교화를 무색케 하는 동시에 국토의 분할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주장을 편 네윈을 비롯한 군부의 거센 반발을 사 마침내 군부 쿠데다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네윈은 버마식사회주의를 주장하며 쇄국정치의 막을 열었다. 그는 이전의 헌법은 그대로 둔 채 실질적으로는 혁명위원회를 통해 국가의 모든 입법, 행정, 사법권을 행사했다. 또한 그는 1974년 3월 2일 ‘인민대회’를 개최해, 혁명위원회의 권한을 미얀마식사회주의계획당에 위임하는 동시에 혁명위원회를 해체한다고 발표했다. 이어 국가평의회를 구성하고 의장 겸 대통령이 되었다.

  1988년 3월 13일 한 음악 찻집에서 사소한 시비로 한 양곤공대생이 시위진압 경찰의 구타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강력히 항의하는 대학생들을 경찰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자, 네윈은 다당제 도입과 국민총선 실시와 아울러 의장직에서 사임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국민들은 즉각적인 총선실시와 민주화를 요구하며 1988년 8월 8일 대규모 시위를 감행한다. 전국적으로 20만 명 이상이 참여한 8888날 시위는 당의장 세인르윈의 지시로 무자비하게 진압된다. 그는 여론에 떠밀려 권좌에 오른 지 18일 만에 마웅 마웅에게 권력을 이양했다. 마웅 마웅도 계엄령 해제와 국민들이 원하는 바를 국민투표로 결정하겠다는 것을 즉각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 해 9월 10일 마웅 마웅은 국민투표 대신 다당제 총선을 실시하겠다고 발표를 했는데, 바로 이 때 혜성처럼 등장한 사람이 미얀마 독립 영웅 아웅산 장군의 딸 아웅 산 수찌였다. 모친의 병간호 차 미얀마에 와 있었던 그녀는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정치무대에 데뷔한다. 정치에 입문한 그 순간부터 아웅 산 수찌는 군부의 질시와 모함, 가택연금을 당하며 고난의 가시밭길을 걷게 됨과 동시에 국민들의 가슴 속에 들어가 활불로 똬리를 틀게 된다. 암울한 시대를 견뎌내야 하는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아웅 산 수찌가 유일한 희망이 된 것이다. 아웅 산 수찌라는 키워드를 이해하는 것은 곧 미얀마를 이해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미얀마는 원래 주변의 여러 종족들이 흘러들어와 형성된 다민족 국가다. 주가 바뀌면 종족, 언어, 종교가 다를 정도로 다종다양하고 복잡 미묘한 나라다. 원주민은 인도네시아에서 말레이 반도를 거쳐, 미얀마 남부지역으로 흘러들어와 정착한 문족이고, 또 다른 초기 종족은 쀼족으로 티벳 산맥의 남동쪽을 따라 미얀마의 내륙으로 이주해 들어와 미얀마 중·북부에 도시국가를 건설해 살다가 9C 경 중국의 운남성 대리시에 있었던 Nanchao(남쪽의 왕자 ;타이족+라오스+묘족이 세운 나라)왕국의 공격을 받고 무너졌다. 또 다른 티벳-버마족이 대략 8∼9C 경 히말라야 산맥으로부터 대규모로 이동해서 정착했다. 그들은 난차오의 공격으로 흩어진 쀼족을 흡수하는 동시에 북쪽으로는 난차오 왕국과 남쪽으로는 문족과 대결하면서 강력한 왕국을 건설했다.

11C 중엽 버간(적을 모두 물리친 도시) 왕국의 아노야타 왕이 등극하면서 버마족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그는 문족 왕국 타톤으로부터 상좌부불교를 받아들여 불법에 의한 통치시대를 열었다. 이 과정에서 타톤은 몰락하고 문족 문화가 비로소 미얀마 중심으로 들어왔다. 게다가 무수하게 난립해 있던 낫신앙을 37낫으로 정리했다. 희대의 영웅의 서거 뒤에 등장한 짠시따(남겨진 자)는 국가 체계를 더욱 공고히 하고 불교문화도 발전시켰다. 미얀마 역사에서 3대 영웅의 막내인 알라웅시뚜는 무게와 도량형을 통일시키고 미얀마 관습법을 왕국 전역에 적용시켰다. 그는 외교에 힘을 쏟는 한편 당시 크메르의 수리야바르만(태양에 의해 보호를 받는 자:태양왕) 2세의 팽창정책을 차단하기 위해 메남 계곡에 있던 문족으로 하여금 선제공격을 하게 해서 버간이 안전할 수 있었다. 미얀마 사람들은 버간 왕조와 이 들 3대 영웅에 대한 향수와 자부심이 강하다. 그들은 다문화와 다인종이 늘 어울어져 살아왔기 때문에 정서적으로 미얀마 사람이라는 일체감만 있으면 종족, 언어, 문화가 달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연결 고리 정점에 아웅 산 수찌가 있는 것이다.

미국의 공격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수도를 양곤에서 320km나 떨어진 네피도로 옮긴 군부는 세인테인 대통령을 내세워 개혁 개방에 나서고 있다. 미국의 국무장관 힐러리의 방문은 중국 일변도의 외교노선에서 미얀마가 균형을 잡아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치러진 이번 보궐선거에서 아웅 산 수찌가 거둔 압승은 비록 의회에서 소수파에 불과하지만, 그 상징적 의미는 아주 크다. 군부에 원한이 없냐는 외신 기자들 질문에 정치는 원래 그런 것이니까 원한 같은 건 없다는 답변과 각료 제의를 단호하게 거절하며, 3년 뒤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의회 활동에 전념하겠다는 발언에서 아웅 산 수찌의 노련한 정치 감각을 엿볼 수 있다.

인도네시아와 더불어 동남아의 대국인 미얀마는 국토 면적이 한반도의 3배나 되고, 풍부한 천연자원과 인적자원을 가진 나라다. 지정학적으로 볼 때도 인도, 중국, 동남아를 잇는 전략적인 요충지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도에서 양곤→만덜레→라쇼→콰이강의 다리→운남성 쿤밍(중국의 후문), 인도 북부 아셈 지방에서→차우칸 고개→밋찌나→피모→중국, 인도에서 양곤→타톤→몰랴마인→드웨→동남아 제 도시로 연결되는 결절점이 미얀마다. 지정학적 이점과 풍부한 자원에 눈독을 들인 열강들이 미얀마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서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그런 가운데, 아웅 산 수찌가 한국을 지목해 러브 콜을 하고 있다.

  예전만큼 못해도 여전히 세계 최강국인 미국과 자본력, 지리적 이점, G2라는 국제적 위상을 갖고 있는 중국, 후쿠시마원전 폭발 사고를 수습하느라고 허우적거리고는 있지만, 그래도 막강한 자본력과 유럽 전체와 맞먹는 기술력을 갖고 있는 일본을 마다하고 한국에 왜 러브 콜을 하고 있는가? 그 진의를 잘 파악하고, 큰 그림을 그려야 할 때이다. 자원 빈국인 한국은 선진국으로 진입하기 위하여, 통일조국의 강력한 우방을 얻기 위해서,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기 위해서 미얀마가 꼭 필요하다. 미얀마도 전쟁의 잿더미에서 변변한 자원도 없는 상태에서 농업국에서 산업화에 성공해서 G20 의장국이 된 한국의 자본, 기술, 경험이 꼭 필요한 상황이다. 한국과 미얀마는 서로 윈-윈 할 수 있는 조건이 잘 갖추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이 막강한 자본과 힘을 앞세워 미얀마 자원을 독식하다시피 하는 데서 오는 미얀마인들의 반중 정서는 우리의 생각보다 심각하다. 일본은 미얀마의 식민지 독립 운동 시기 아웅 산 장군과 그의 군대를 돕다가 막상 독립을 할 단계가 되니까, 약속과는 달리 미얀마를 식민지화하려는 야욕을 드러냈다. 또한 여성을 존중하는 문화가 아주 발달해 있는 미얀마에서 여성들에게 악행을 많이 저질러서 미얀마인들 마음 속 깊은 곳에 상처가 깊다. 또한 미얀마인들은 영국의 식민통치 경험을 통해서 서구 열강들의 자본주의 속성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한국에 대해 러브 콜을 하는 데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다. 따라서 한국은 다른 열강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이런 좋은 기회는 다시 찾아오기 어렵다. 미얀마 사람들의 가슴속으로 들어가 한국이라는 불도장을 찍어 영원히 지워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대한민국이 대결단을 내려야 할 시기가 왔다.

  선거 때마다 단골 메뉴로 등장하나 늘 공약(空約)으로 끝나는 미얀마인들의 숙원 사업이 있다. 바로 양곤-만덜레 고속도로 건설이다. 그 시발점과 양곤 반경 30km 이내에 있는 인근 도시까지 6차선을 한국인의 마음을 담아 무상으로 건설해 아웅 산 수찌의 러브 콜에 화답하는 것이 좋은 답이 될 수 있다. 산업화 과정에서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이 한국인의 뇌리에 얼마나 선명하게 새겨졌는가를 돌이켜보면 그 의미를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양국의 우호 관계가 훨씬 더 공고해 질 것이다. 또한 이를 바탕으로 아시아 평화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상대가 기다려 줄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한국과 미얀마가 서로 Win-Win해서 미래의 강력한 우방이 되기를 기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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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얀마어는 어떤 언어인가?

               국제청소년교류센터 전문위원/ 코리아글로브 연구위원 김 영 길

  언어는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정서와 사고를 담는 그릇이다. 어느 언어든 시간을 어떻게 인식하는 가를 알면 그 나라 사람의 정서와 이데올로기를 가늠할 수 있다. 미얀마어는 과거와 현재를 동일시하고 미래는 따로 구별한다. 시간을 나타내는 부사가 앞에 나오지 않는 한 동사만 가지고는 과거인지 현재인지를 구별할 수 없다. 그래서 미얀마 사람들은 과거와 현재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또한 미얀마어는 3가지 성조가 있는데, 하강조가 되면 그 앞에 나온 내용에 대한 인식이 끝나고, 새로운 사실이 언급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미얀마 사람들은 국면전환에 능하다.

  우리말로는 주로 주격조사로 번역되는 [명사+ka.]는 무슨 뜻이 아니고, 자신이 찾고자 하는 사실이나 내용을 클릭 클릭하다가 찾아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ka.가 없으면 클릭 중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미얀마어의 동사는 [동사1+동사2]구조로 쓰이는 경우가 많은 데, [동사1]은 우리말처럼 하다이고, 뒤에 나오는 [동사2]는 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다를 의미한다. [동사+ba+byi]에서 [byi]는 새로운 상태가 발생했다는 것(국면전환)을 의미한다. 미얀마어의 조동사는 1어 동사 뒤에 와서 동사의 상황(불가피하게 왔는지/적절한 타임에 왔는지)을 부연 설명하는 역할을 한다.

또한 순간성을 표현하는데 있어, 미얀마어는 어느 언어보다도 뛰어나다. 미얀마어의 형용사는 [형용사1+형용사2]구조로 되어 있는데, [형용사1]은 화자의 눈에 들어온 전체적인 상을 묘사하는 것이고, [형용사2]는 그 전체상 가운데 화자가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은 부분을 돋보기로 확대해서 보듯이 상세히 들여다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얀마어의 부사는 형용사를 2번 반복함으로써 상태에서 정도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국면을 전환하게 된다. 전체적인 묘사는 정적으로, 시각적으로 세분화해서 묘사한다. 존귀한 존재나 물건 뒤에는 반드시 do를 붙이고, 공손함을 나타내는 ba는 명사문의 뒤에, 동사/형용사 뒤에 붙는다. 또한 미얀마어는 명사를 늘어놓는 것만으로도 일본어처럼 문장이 성립된다. 발음도 f와 v발음을 빼고는 영어에 있는 발음은 다 있다. 그래서 미얀마 사람들이 그 열악한 교육 환경 속에서도 영어를 능숙하게 잘 하는 사람들이 많은 거다.

  각 언어가 지닌 강세나 성조는 그 나라의 지형구조와 강물의 흐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래서 서북부와 동부가 높은 산지로 둘러싸여 있고, 설산에서 녹아내린 물이 에라워디(큰 여자)강을 통해 미얀마 국토를 관통해 흐르는 미얀마의 지형 구조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자, 이런 다양한 매력을 지닌 미얀마어의 세계로 저와 함께 여행을 떠나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