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와 북방사

by 박원길 posted May 01, 2012
                                       한국사와 북방사

                    
                                               박원길(한국몽골학회장 / 코리아글로브 이사)


머리말


   역사적으로 우리 민족의 주류가 북방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은 오늘날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역사학계에서 흉노로부터 몽골에 이르는 북방유목민족사에 대한 연구는 매우 빈약한 실정이다. 특히 한국사와 북방유목민족사를 연결해 동양사나 세계사의 윤곽을 파악해 보고자 하는 시도는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이다. 도대체 한국역사학계에서 알타이어라는 언어학적 공통성에다 자연법적 인식체계(샤마니즘)라는 원초적 사유체계까지 공유하는 북방민족의 역사에 대해 눈 감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러한 연구 부재의 원인은 무엇보다도 해방 후 본격적으로 전개된 한국 역사학의 좌표정립과정에서 한국사와 북방유목민족사에 대한 개념정립이 시도되지 않았고, 그에 따라 연구도 이루어지지 못하는 인위적인 환경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시대에 중국사 일변도의 시각에서 벗어나 동양사나 만몽사(滿蒙史)라는 명칭의 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백조고길(白鳥庫吉)을 중심으로 북방유목민족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감안할 때, 이 분야에 대한 당시 역사학자들의 무관심은 의아스럽기조차 하다.

   이러한 무관심과 함께 또 하나 지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역사학계 내부에서의 연구 분야별 고립화 현상이다. 해방 이후 한국 사학계는 사학과(史學科)라는 단일학과를 중심으로 역사연구체계가 성립되어 있었다. 그러나 대학생들의 숫자가 양적인 팽창을 시작하는 1980년대부터 대학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사학과가 동양사, 서양사, 국사학과로 세분되어 분립하는 경향이 나타났으며, 이에 따라 연구영역도 소속에 따라 엄격히 제한되는 이상한 현상이 나타났다. 그리고 이러한 분리에 따라 북방유목민족사는 동양사의 한 분야로 귀속되었다.

   한국의 모든 역사연구자는 역사가 근본적으로 종합학문이라는 점을 인식한다. 그러나 현재 역사연구는 학과와 전공의 세분화에 따라 시대와 나라, 지역의 분리와 고립이라는 칸막이 현상에 갇혀 있고 또 안주하고 있다. 이로 인해 한국사의 큰 흐름을 좌우하는 동양사는 우리 역사와 동떨어진 별개의 세계로 취급되기 시작했다. 또 동양사 연구도 연구자들의 절대다수를 점하는 소위 중국사라 불리는 중원역사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으며 북방민족사는 중원역사에 종속된 변방사(邊方史) 즉 연구가치가 높지 않은 이질(異質)의 문화권으로 간주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나 오늘날 주변국에서의 북방 유목민족 역사에 대한 인식은 한국학계의 인식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중화인민공화국 역사학계에서는 몽골을 민족통합이론의 핵심으로 삼은 “통일적다민족국가론”을 통해 유라시아 대륙 전체의 역사에 접근하고 있다. 일본 역사학계에서는 “중앙 유라시아 역사(History of Central Eurasia)”라는 명칭을 중심으로 아예 인류역사를 유라시아의 역사를 중심으로 재조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보다 북방민족의 후예임이 분명한 우리는 북방민족사를 제 3 자적 입장에서 접근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과 일본, 한국의 북방에 대한 역사인식은 그대로 현실 정치에 반영되어 나타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성을 지닌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추진하고 있는 상해협력기구(SCO: Shanghai Cooperation Organization)나 일본이 추진하고 있는 동아시아공동체, 한국이 추진했거나 추진하고 있는 노무현 정부의 “동북아시아 중심국가론”이나 이명박 정부의 “신아시아 외교(New Asia Initiative)”는 모두 북방의 역사에 대한 제각기 다른 해석과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 뒤에서도 언급하겠지만 중화인민공화국과 일본은 “유라시아 대륙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세계질서의 건설”이나 “알타이문명권 연합국가론”이란 매우 정교하게 다듬어진 역사이론을 정책추진 논리의 배경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추진논리는 역사적 논리가 결핍되어 있어 실제 추진 시 한국인을 포함한 그 누구도 설득할 수 없는 모순을 지니고 있다.

   현재 한국의 주변 정세는 그야말로 신흥 강대국의 등장과 기존 강대국의 쇠퇴라는 권력전이(power-transition)의 소용돌이 속에 있다. 또 한국의 문제도 6자회담이란 용어가 상징하듯이 주변 강대국이 모두 모여 이해관계에 따라 결정되고 있다. 따라서 민족생존을 위해서라도, 북방이나 주변에 대한 나름대로의 역사적 관점을 분명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우리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간에 현재 우리에게 강요된 상황이라고 해도 좋다. 만약 역사학계가 이에 답변하지 못한다면 이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본 논문에서는 북방사에 대한 역사적 관점정립이 그대로 현실정치에도 반영되고 그것이 우리민족의 생존에 직결된다는 점을 염두에 둔 분석과 기술을 시도하고자 한다. 특히 중화인민공화국, 일본 학계의 북방유목민족사에 대한 인식과 그 역사관이 어떻게 정책으로 전변되어 현실에서 집행되는 가를 주의 깊게 소개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한국의 북방사연구방향이 어느 쪽으로 가야하는 가를 제언하고자 한다.


                1. 연구의 현황과 문제점

                          (1) 연구의 현황

   한국사에서 북방사와 관계를 가지는 시기는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고려, 조선, 일제강점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이어져 있다. 그러나 한국 역사학계에서 한국사와 북방 유목 민족사를 잇는 논저를 낸 경우는 매우 희귀하다. 우리 역사를 중원과 북방의 전체적인 관점에서 조망하고 집필한 논저가 매우 드물다는 사실은 무엇 때문일까. 그 원인은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한국사 이외의 역사세계를 별개의 역사세계로 간주하여 분리 기술하였기 때문이다.

   동일 시대 각 지역의 역사를 분리ㆍ고립적 시각으로 기술한 결과, 우리는 큰 눈으로 세상을 살피는 역사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어느 지역이나 시대에 대한 세밀한 연구는 주변에 대한 넓고도 전문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할 경우에만 가능한 것이다. 사실 우리 학계에서는 1945년 이래 2011년 4월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의 존립이유를 설명해 주는 역사철학이나 비전을 만드는데 실패했다. 필자는 실제 해방 이후 우리 역사학계에서 격한 비난을 받았던 식민사관 조차 현재 논리적으로 말끔히 극복되었다는 말을 아직 들어본 적이 없다.

   원론적인 말이지만 철학과 비전이 없는 학문이나 국가는 정말 허망한 것이다. 세계 각지에 정체성(identity)이 서로 다른 문명권이 존재하는 이상 우리민족을 지탱하는 철학과 비전은 우리가 속한 문화의 원류를 인식하고 그것을 토대로 만들어져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주변과 건강한 교류를 할 때 우리민족은 진정 인류사에 기억되는 가치를 남길 수 있다. 바로 북방민족사는 우리민족의 뿌리와 문화의 원류라는 점에서 한국사의 출발점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북방민족사에 대한 인식이 없이는 오늘날 역사학계의 최대 쟁점으로 부상하고 있는 홍산문화(紅山文化)1)의 주인공 논쟁이나 고조선(古朝鮮)의 실체에 대하여 명료한 관점을 정립하기가 어렵다. 현재 한국의 학계에서는 1990년 12월에 성립된 한국몽골학회의 학자들을 중심으로 한국사와 북방사를 중원을 거치지 않고 직접 연결하고자 하는 시도가 일부나마 선보이고 있다. 이는 종래 중원을 중심으로 한국사의 주변관계를 설정한 단계를 벗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사와 북방사에 대한 연구현황을 언급하기 전에 먼저 우리 역사학계에서 한국사를 관계사적인 입장에서 파악하고자 시도했던 대표적인 학자 전해종(全海宗) 선생의 사관을 먼저 소개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그의 사관은 현재도 계승되면서 김한규의 “요동지역 독립역사관”과 같은 새로운 견해의 뿌리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전해종 선생의 사관은 고대 동아시아 세계가 외부적으로 중원왕조를 중심으로 주변에 포진한 세력들이 중심과 주변을 이루고 있으며 내부적으로 조공(朝貢)이란 형식을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2)

   1970년대 동양사가 중원사(중국사)로 인식되고 한국과 중원의 관계가 아직 속국관계 이상으로 정립이 안 된 상황에서 제출된 이러한 견해는 당시 매우 신선하고 주목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후 중국적 천하관념과 조공관계를 바탕으로 국제질서를 설명하려는 시도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선생이 이 학설을 발표할 당시 북방유목민족사는 아직 한국학계에 낯선 분야이며 발해(渤海)조차 한국사나 동양사 모두 주목하지 못하고 있었던 시대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즉 선생의 사관은 당시 한국 동양사학계의 연구 성과를 그대로 반영한 것에 불과하며 언제든지 역사연구의 외연확대에 따라 수정될 수 있다는 점이다.3)

   선생의 설을 이은 견해 중 가장 주목되는 것이 동북공정(東北工程)에 대한 반발이 한창일 때 발표된 김한규의“요동지역 독립역사관”이었다. 그는 『요동사(遼東史)』(서울, 문학과지성사, 2004)를 통해 “고구려인은 중국인이나 한국인과 생활공간이 달랐고, 역사의식이나 문화양식, 언어, 역사적 경험들이 달랐다. 고구려ㆍ요ㆍ금ㆍ원ㆍ청 등 요동의 역사는 중국이나 한국과는 구별되는 독자적인 역사 공동체였다”라는 요지의 학설을 발표했다. 종전의 중국적 세계질서와도 다른 이 견해는 고구려를 한국사에서 분리해 “요동사”라는 제3의 역사세계로 편입시켰다는 점에서 수많은 논쟁을 일으켰지만 한편으로 북방민족사를 새롭게 바라보게 만드는 부수적인 효과도 거두었다. 결과적으로 그의 학설의 타당성은 북방민족사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 따라 좌우될 수밖에 없는데, 고구려 이후 북방민족사에서 요동은 영역적으로 제국을 구성하는 동쪽의 한 지역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매우 독특한 학설이 출현하게 된 근본 원인은 먼저 우리문화의 원류가 무엇인지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이고 그 다음으로는 중원지역에 성립된 정권들에 대한 실체파악이 이루어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경우 오늘날 우리 역사학계에서 한국의 대외관계를 조공이라는 개념을 통해 파악하고 설정하고 있는 경향도 올바른 역사인식이라고 볼 수 없다. 대다수의 역사학자들이 조공이라는 개념을 통해 국제관계나 질서를 설명하려는 시도는, 일부 역사학자나 정치ㆍ종교ㆍ사회학 분야의 대다수 학자들이 19세기 이래 등장한 다양한 시대이념의 이론을 적용해 한국사의 과거와 현재를 해석하려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

  만약 우리문화의 원류를 중심으로 우리역사와 문화의 흐름을 바라본다면 과연 무엇이 보일까. 이럴 경우 같은 뿌리를 가진 북방민족들의 역사와 문화 흐름도 보일 것이고 그들과의 관계가 이전과는 다르게 보일지도 모른다. 이것이 바로 본 논문의 주제이자 전체를 바라보는 눈이기도 하다.

   한국 역사학계에서 북방사에 본격적으로 주목하게 된 때는 1990년 한국과 몽골의 수교 이후이다. 한ㆍ몽 수교는 그동안 냉전시대 및 분단시대의 역사에 갇혀 있었던 한국인들에게 현지 여행이나 학술교류 등을 통해 세계를 보는 시각의 확대 즉 역사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사유의 틀을 제공해 주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한ㆍ몽 수교 이후 한ㆍ러, 한ㆍ중 수교를 통해 돌궐ㆍ몽골 등 북방유목민족사의 역사적 무대가 개방되자 북방민족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고 또 많은 분야의 학자나 전문가들이 직접 몽골이나 바이칼 등을 방문하여 역사의 현장을 확인하였다. 이후 한국과 몽골(내몽골, 부리야트 포함) 학자들의 상호교류를 통해 양국민족 본원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이 제기되었다. 당시 학술교류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전반적으로 북방문화와 관련이 깊은 알타이어학 및 민속학 분야, 음악이나 춤, 의복, 문양디자인 등의 예술분야가 주류를 이루었고 역사 자체의 연관시도는 이들의 활성화를 통해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즉 문화적 유사성이 역사 분야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한국과 몽골의 문화적 유사성은 한국인들에게 북방사의 가치에 대한 관심을 갖게 만들었는데, 그 관심을 증폭시킨 것이 각 방송국이나 신문에서 한민족의 기원이나 문화의 뿌리에 대한 특집 다큐멘터리 방영이나 기획특집기사였다. 당시의 대표적인 특집 다큐멘터리가 SBS 취재팀의 몽골리안 루트(1997), KBS 취재팀의 몽골리안 루트(2001), YTN 취재팀의 대몽골 시간 여행(2001)이며 신문이나 잡지의 특집은 일일이 소개할 수 없을 정도이다.4)  

   이러한 교류를 통해 한국사와 북방민족사를 종래처럼 별개의 역사로 간주하지 않고 동일민족계열의 역사로 간주하여 바라보려는 시각이 나타났는데 그 대표적인 학자가 주채혁(周采赫)과 김운회(金雲會)이다.5) 역사학계와 비역사학계를 대변하고 있는 듯한 두 학자의 주장은 아직 긍정보다는 반발이 많은 상황이지만,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를 불러일으켰다는 점에서 나름대로의 의미가 크다고 볼 수 있다.

   사실 한ㆍ몽 수교 이후 한국사학계에서 많은 논점의 변화가 일어나리라 예상된 분야는 민족기원 및 민족이동문제와 연관된 고대사(고조선, 고구려와 부여, 발해, 백제, 신라, 가야)와 함께 몽골(대몽골제국 및 대원제국)과 연관된 고려시대였다. 고려시대와 짝을 이루는 몽골(원)제국의 경우 김호동(金浩東)이나 박원길(朴元吉)의 논저에서는 “제국을 공유하는 개념(포용력과 다원주의로 대표되는 몽골의 제국 운영주의 원리)”이나 “북방문화원형에서 발원한 사상에 근거한 다양성과 조화를 통한 혼혈잡종문화(팍스 몽골리카의 시대이념)”라는 관점을 지닌 지금과는 다른 열린 시각이 선보이고 있으며, 이에 따라 고려사를 바라보는 입장도 기존의 학자들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6) 그러나 고려사를 연구하는 대다수의 학자들은 “몽골 간섭기”라는 역사용어가 대변하듯 아직 그러한 입장을 수용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근래 한국사와 북방사는 한ㆍ몽 학술교류의 활성화에 따라 문헌 및 민족학 분야에 대한 공동연구의 심화, 고고학의 발굴성과 등을 기반으로 새로운 단계의 진입을 앞두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을 주도하는 분야는 역사학계가 아닌 종교사회학이나 예술분야이다. 이들의 특징은 한국사를 북방사와 연계시키는 큰 흐름을 통해 파악해 보려고 하는 시도이다. 이러한 시도에 속하는 대표적인 연구물로는 서정록의 『백제금동대향로 - 고대 동북아의 정신세계를 찾아서』(서울, 학고재, 2001)이다.7)

   이러한 연구흐름은 한국사와 북방민족사를 종래의 제 3 자적 관계에서 직접적인 연결고리를 가진 관계로 전변시켰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즉 우리의 역사를 현재의 한반도에 국한시키지 않고, 만주와 몽골 등 유라시아대륙과 지리적인 연속성에서 전개되고 발전되어 왔다는 측면으로 해석하면서, 역사의 근본을 이루는 민족의 근원사상도 중원과는 다른 북방고유의 사유체계를 가지고 전개되어왔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을 지닌 학자들은 아직 소수에 불과하며, 연구자체도 초기에 해당하는 시론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 성과가 역사학계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2) 문제점

   역사의 비전은 그 나라의 미래를 좌우한다. 역사란 그 민족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축적된 문화 설득력과도 같다. 그러나 현재 한국의 역사학계는 도대체 우리민족이 누구이며 우리가 꿈꾸는 나라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을 해 줄 수 있는 민족정체성이나 비전에 대한 제시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이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는 것일까. 이것은 아무래도 기존의 역사인식방면에 가장 큰 문제가 있고 또 그러한 것을 가능케 하는 연구방식이 지속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우리나라 역사학계의 현실과 문제점을 잘 나타내 주는 것이 서양사학자 출신으로 핀란드와 러시아에서 대사를 지낸 바 있는 이인호(李仁浩)의 아래와 같은 지적이다.

동아시아 뿐 아니라 다른 어떤 지역과 협력을 논하는 경우에도 지역 전문가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지역전문가란 협소한 의미로 파악해서는 안 되고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조예가 깊은 인문학자, 사회과학자, 문화예술인들을 포괄하는 것이다. 그런데 불행한 것은 우리나라에서 어떤 지역에 접근할 때 인문학자, 사회과학자, 정책결정자들의 소통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같은 중국을 연구하는 국제정치학자와 동양사학자들 사이에 교류가 없고 사실은 사용하는 용어에도 큰 차이가 있다. 물론 최근에는 조금씩 활성화되고 있지만 적어도 우리가 동아시아공동체를 이야기 하려면 동아시아의 음악, 미술, 문학, 역사, 철학, 경제 분야의 전문가들이 함께 모여서 구상과 대책을 세워도 부족한데 아직까지는 갈 길이 멀다고 할 것이다. 이 점을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한다.8)

   이인호의 지적에서도 나타나듯이 한국 역사학계는 내부적으로는 물론 주변 학문과도 칸막이를 쌓은 채 고립화하고 있다. 문화 정체성 확보나 대외정책을 세우는데 가장 근본적인 참조가 되어야 할 역사 연구가 실종된 채 존재의미를 상실해 가고 있다는 점은 정말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현실은 주변국인 중화인민공화국이나 일본의 대외정책이 역사학계에서 논의되고 정립된 역사인식이나 비전에 근거하여 수립되고 집행된다는 사실과 비교할 때 우리들에게 참담한 심정을 안겨준다.

   사실 우리의 주변정세는 역사학자들에게 국가의 생존을 위한 민족의 정체성과 그에 바탕을 둔 비전제시를 강요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역사학은 이것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으며 오히려 정치학이나 사회학 분야에서 각론들이 제시되고 있다. 역사는 정확한 역사사실을 바탕으로 성립하는 종합성의 학문이며 정치학이나 사회학은 그 바탕위에서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 역사연구가 부실하면 정치학이나 사회학도 부실한 결론을 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것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동북아시아 중심국가론(Northeast Asian Cooperation Initiative)”이나 “신아시아 외교(New Asia Initiative)”이다. 이 정책들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필자가 이미 지적한 바 있기 때문에9) 여기서는 북방사의 중심 무대인 몽골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 가를 보여주는 역사지리개념만을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노무현 정부의 동북아시대 구상에 담긴 지리적인 개념을 분석해 보면 그것이 일반인이 알고 있는 지리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즉 특정한 목적과 의지를 가지고 인위적으로 지역을 나눈다는 이상한 지리학적 개념이 동원되고 있다. 먼저 동북아시대위원회에서 2005년에 발행한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시대 구상』에서는 동북아의 범위가 기능적인 차원까지 감안하여 아세안국가까지 확대되고 있다. 또 참여위원 중의 하나인 정정숙은 “지역 정의에는 보편적 기준이 존재하지 않고 주체들의 필요와 공동의 이해를 중심으로 얼마든지 상상하고 만들어진다. 이러한 지역 개념의 유연성을 적용한 ‘동북아’라는 지역범위는 다음과 같다”고 지적하면서10) 우리나라가 설정하는 동북아지역 범위를 다음과 같이 만들어냈다.


<도표 1> 동북아지역 범위

        구  분                          해  당  국  가

< 물리 >

  지리적 동북아   한국, 북한, 중국, 일본, 러시아, 몽골

< 기능 > (목적․의지,개입)

역사적 동북아    한국, 북한, 중국, 일본

관계적 동북아    한국, 북한, 중국, 일본, 러시아, 미국

문화적 동북아    문화동질성, 교류활성화 초점: 한국, 중국, 일본

                         미래전략 감안: 한국, 북한, 중국, 일본, 몽골, 러시아, 아세안


  이러한 야릇한 개념에 따라 동북아 문화공동체의 개념은 “남북한, 중ㆍ일ㆍ미ㆍ러 6개국이 동북아 범주에 당연히 포함되고 지리적인 기준으로 볼 때 몽골도 포함되어야 한다고 본다”처럼 정의되었다.11) 이에 따라 참여정부의 몽골전략은 처음부터 몽골자체를 인식하고 시작한 것이 아니라 동북아라는 개념설정에 따른 지리적 인접국가로서의 몽골로 시작되었다.12) 이는 몽골이 애초부터 우리의 이해대상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해 참여정부에게는 지리적 인접국으로서의 몽골만이 보였지 역사나 경제협력의 대상국으로서 몽골이 보인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따라서 이후 외교통상부나 한국국제협력단(KOICA)을 비롯한 각종 정부기관을 통해 시행되는 몽골전략도 매우 모호하고 일관성 없게 진행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13)  

   역사와 문화를 모르면 정책이 보일리가 없으며 설령 그것이 정책으로 화한다 해도 실효성을 가질 수 없는 것은 만고의 진리이다. 실제 이 동북아 문화공동체개념은 상상 속 관점에서만 가능한 것이지 역사지리학적인 조건을 첨부할 경우 주변국가의 정세를 너무 모르는 순박한 사람들이 만든 것이라는 민족적 자조감이 들 정도이다. 현실과 이론의 괴리는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진행되었던 동북공정 등 각종 영토관련 공정(project)과 동북아시대 구상에서 제시하고 있는 공동체개념을 비교해 보면 그 차이점이 금방 눈에 보일 것이다.


<그림 1> 참여정부가 제시한 동북아의 범주



<그림2>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진행되었던 영토 관련 공정(project)




다음은 서울 시장 시절 한ㆍ몽 국가연합의 가능성을 언급한 바 있는 이명박 대통령의 대외정책인 신아시아외교에 담긴 지리적인 개념을 살펴보기로 하자. 현 정부의 신아시아외교는 2008년 10월 7일에 발표한 「20대 국정전략, 100대 국정과제」의 다섯 번째 항목인 “성숙한 세계국가”에서 제시되었다. 그리고 신아시아외교를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아시아 지역을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서남아시아로 구분하고 있다. 그리고 호주와 뉴질랜드(남태평양지역)까지도 범 아시아권으로 포괄시키고 있다.

   이 지역적 구분에서 우려되는 것은 이전의 노무현정부와 마찬가지로 북방사의 핵심지역인 몽골의 지리적 개념이 모호하다는 것이다. 즉 대통령의 소신과는 달리 신아시아외교에서 나눈 지역개념에는 몽골이 그다지 부각되어 있지도 않고 문화적 중요성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단순히 중앙아시아권의 한 국가로 처리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몽골은 역사나 성격 상 소비에트에서 분리된 중앙아시아 5개국에 포함시켜 다룰 수는 없다. 필자는 이러한 점에서 한국의 정책입안자들이 아직도 몽골에 대한 역사적 가치를 주목하고 않고 이전과 마찬가지로 권역별 접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몽골의 역사ㆍ문화적 특수성에 대한 최고 통치자의 관심에도 불구하고, 종전의 인식대로 구역을 나누어 접근하려는 방식 때문에 우리와 가장 밀접한 역사ㆍ문화적 공유도가 높은 몽골이 실종되었다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는 외교정책의 담당자들이 아직도 이전 정권에서 정립한 지역개념의 틀에 얽매어 있으며 몽골에 대한 가치정립이 서있지 않다는 것과 같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 외교통상부의 조직체계에서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도표 2> 외교통상부 조직체계

                        외교대상지역 분류와 국ㆍ조직(6국 18과)

   국                    소속과(담당국)

동북        동북아1과(일본)  
아시아국  동북아2과(중국)
               동북아3과(중국, 몽골)

남아시아  동남아과
태평양국  서남아시아태평양과 (호주, 뉴질랜드, 파푸아뉴기니, 피지,
                                           태평양도서국가, 인도,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몰디브, 네팔, 부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아세안협력과

북미국     북미1과(미국)
               북미2과(미국, 캐나다)
               한미안보협력과

중남미국  남미과
               중미카브리과
               중남미협력과

유럽국     서유럽과 (EU,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아일랜드, 스페인(안도라),
                            덴마크(리투아니아), 포르투갈,  노르웨이(아이슬란드),
                            이탈리아(몰타, 산마리노), 스웨덴(라트비아), 교황청,
                            벨기에(룩셈부르크), 핀란드(에스토니아) )
               중유럽과 (독일, 폴란드, 불가리아, 마케도니아, 헝가리, 세르비아,
                            슬로바키아, 사이프러스, 체코, 크로아티아, 오스트리아,
                            스위스, 코소보, 슬로베니아, 알바니아, 그리스, 보스니아,
                            루마니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아르메니아, 몬테네그로,
                            몰도바, 그루지아, 터키, 아제르바이잔)
               유라시아과 (러시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즈스탄, 타지키스탄)

아프리카  중동1과 (이집트, 이라크, 이란,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중동국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수단 )
               중동2과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UAE, 예멘, 알제리, 쿠웨이트,
                            모로코(모리타니), 리비아, 튀니지, 오만, 바레인)
               아프리카과


   위의 조직표에서 분류된 나라들은 실제 역사와 문화는 물론 지리개념과도 맞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현재의 역사(북방민족사)에 대한 정부의 인식이며 정치 엘리트들의 역사관이기도 하다. 북방민족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유럽국에 소속되어 있는 유라시아과가 아주 이상한 조직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사실 어학이나 문화, 역사지리적 개념을 적용할 경우 이 전체 조직도에서 유라시아과가 유라시아국으로 승격되고 그 휘하에 러시아[제1그룹], 몽골, 핀란드, 헝가리[제2그룹], 터키, 아제르바이잔,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즈스탄, 타지키스탄, 아프가니스탄[제3그룹]14)이 소속되어야 한다. 그리고 한국이 이들을 대상으로 유라시아-알타이어 국가라는 개념을 내세우며 북방외교를 전개할 경우 아주 효율적일 것이다.

   이상의 예에서도 나타나듯이 한국의 북방정책은 북방민족사 연구의 성과 위에 정립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연속되지 못하고 폐기되는 운명을 맞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악순환은 역사학자들이 북방민족사에 대한 명확한 개념과 비전을 제시하지 않은 것과도 직결된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한국사와 북방사에 놓인 최대의 문제점이다.


                2. 연구의 방향과 제언

                        (1) 연구의 방향

   역사적으로 주변을 움직이는 강대국이 되기 위해서는 ① 국제사회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경제력 ② 절대적인 군사력 ③ 축적된 문화를 배경으로 한 설득력이라는 3대 조건이 필수적이다. 역사에서 약자가 강자를 좌지우지하는 경우가 없듯이, 위의 조건을 구비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생존을 위해 세계를 보는 눈이 매우 필요한 민족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세계를 보는 눈을 키우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누구이며, 우리가 꿈꾸는 나라에 대한 방향설정이 필요하다. 최근 양승태나 박세일 등 한국 정치학계의 일부에서는 국가정체성이나 국혼(國魂)의 정립을 주장하고 있는데15) 그 방향의 모색은 우리 역사 및 사상의 원형을 이루는 북방사를 중심으로 해야 논리가 맞는다. 역사를 중심으로 국가정체성을 만들고 그를 토대로 대외정책을 세우는 것은 우리 주변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 일본에서 아주 극명하게 나타난다.

   그러면 우리와 역사행로를 같이 한 중화인민공화국, 일본 학계의 북방민족사에 대한 인식과 그 역사관이 어떻게 정책으로 전변되어 현실에서 집행되는 가를 간략히 살펴보고, 이를 통해 한국의 북방사연구방향이 어느 쪽으로 가야하는 가를 제언하고자 한다.


                가.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관과 대외정책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정체성은 “[대원제국에서 시작된]통일적 다민족국가론(統一的多民族國家論)”을 바탕으로 성립된“중화민족”으로 대표된다. 이에 따라 중화민족의 역사관도 역대 중원왕조를 대표하는 한족정권의 화이역사관(華夷歷史觀)이 아니라 대몽골(원)제국 때의 팍스-몽골리카(Pax Mongolica)와도 같은 조화와 융합의 역사관을 내세우고 있다. 또 이러한 국가정체성이나 역사관의 정당성을 상징하는 것이 황제(黃帝) 시원(始源)의 문명인 요하문명론(遼河文明論)이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대외정책이 만들어진다.  

   위에서 언급된 용어들은 역사전문가가 아니면 이해하기 쉽지 않을 정도로 난해하다. 그러나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들의 대외정책도 이해할 수 없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관이 전문적인 해설이 뒤따르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평범하지 않다는 것은 그만큼 사연이 많다는 뜻과 같다. 바로 그 사연의 출발점이 몽골이다. 그리고 마지막 종착점도 요하문명을 통한 북방민족과 역사에 대한 역사적 기원과 계보의 정립이다.  

   필자는 청조의 붕괴 후 중화민국(이후의 중화인민공화국)의 한족통치계층에서 청조의 영토를 보존하기 위해 전개한 몽골의 역사와 영토 대상의 북방공정(北方工程)이 이후 전개되는 모든 공정의 논리적 핵심에 위치해 있으며,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의 민족이론인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중화민족)을 이루는 바탕이 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한 바 있다.16) 중화인민공화국 역사학자들의 북방민족 역사관을 보여주는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중화민족)의 성립과정과 핵심이론을 요약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공산당의 지도하에 역사학자들은 영토와 민족에 대한 제1차(1950∼1960년대), 제2차(1970년대 말∼1980년대 말) 토론을 거쳐 담기양(譚其驤)이 제시한 “중국 역사상의 전통적 국경이 지금의 국경을 대신한다”는 주장을 채택했다.17) 그리고 역사상의 전통적 국경과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의 완성모델을 대몽골(원)제국으로 간주한 뒤 다음과 같은 3대 논리를 제출했다.


①조 : 몽골 및 대원제국은 중국 최초의“통일적 다민족 국가”의 시작이다.

②조 : 남북조이론(북원과 명) :
북원과 명나라는 별개의 민족국가가 아닌 원나라의 영토에서 일어난 남북정권이다. 따라서 오늘날 몽골국의 영토는 중화민족의 영토다.

③조 : 몽골제국 및 대원제국의 영토는“통일적 다민족 국가”의 역사적 영토다.



  위의 논리는 북방공정(1985)을 통해 역사적으로 입증되었다. 북방공정에서 제시된 영토 및 민족이론은 서남공정(티베트, 1986), 남방공정(베트남, 1997), 서북공정(신강, 2002), 동북공정(만주 및 한반도, 2002) 등으로 확대되어 정비되었고,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 1996~2000), 중국고대문명탐원공정(中國古代文明探源工程,  2001~2010)을 통해 초원과 중원의 민족 및 역사는 모두 황제(黃帝) 시원(始源)의 동일 기원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관에 따라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은 모든 역사를 새로 집필하는 국사수정공정(國史修正工程, 2005~2015)을 진행 중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이러한 연구들을 체계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정부의 핵심브레인 기관이자 정책입안 기능도 지닌 중국사회과학원(中國社會科學院)에 1983년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中國邊疆史地硏究中心)을 설립했다. 그리고 중국변강사지연구총서(中國邊疆史地硏究叢書) 나 『중국변강사지연구(中國邊疆史地研究)』등을 통해 정부가 중국이 추구하고 있는 정책의 타당성을 역사적으로 입증하고 또 논리적으로 보강토록 하고 있다.18)

   중화인민공화국의 한족 통치 집단이 대한족주의(大漢族主義) 역사관(歷史觀)을 포기하고 몽골 중심의 새로운 역사관을 제시하는 전략적 사고와 판단을 채택한 것은 역사논쟁이 바로 민족의 생존과 직결된다는 1911년 이래의 경험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한족 지도부의 결단으로 인해 한족출신의 중화민족이 55개 소수민족지구나 자치구의 통치자로 자연스럽게 임명되는 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여유를 가지게 된 2000년대 초반부터 위의 역사논리들은 정책으로 현실화되어 집행되기 시작했다. 그 상징이 바로 ‘유라시아 대륙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세계질서의 건설’을 기치로 내건 상해협력기구(SCO)이다.

   2001년 6월에 성립된 SCO는 유럽이나 미국의 예상처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대항하는 중국 중심의 ‘제2의 바르샤바 조약기구’가 아니라, 2010년 현재 나토나 미국ㆍ일본ㆍ호주ㆍ인도를 잇는 미국의 ‘태평양 연대’와 같은 군사 동맹을 넘어서는‘전면적인 지역공동체’의 개념으로 발전중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은 2010년 6월 타슈켄트 회의에서 몽골국의 정회원 가입자격을 만들어 놓았다. 상해협력기구는 영역 면에서 청조(淸朝)를 넘어 대몽골제국의 부활을 보는듯한 느낌을 받는다.19)  


<그림 3 > 청조의 영토를 기준으로 본 중화인민공화국의 본래 영토 및 실지(失地)도



<그림 4> 상해협력기구 회원국 및 입회국




  나. 일본(일본제국)의 역사관과 대외정책

   일본이 세계를 바라보게 된 때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파고가 높은 19세기 무렵이다. 탈아입구(脫亞入歐)라는 기치 하에 근대국가로 탈바꿈하는데 성공한 일본제국의 국가정체성과 대외정책을 상징하는 말이 황국사관(皇國史觀)과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이다. 황국사관(皇國史觀)과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의 핵심논리는 중국의 통일적다민족국가론과 같이 몽골을 중심으로 하는 알타이국가연합이다.

   대동아공영권의 논리는 1945년 패전과 함께 잠복해 있다가 소비에트의 붕괴를 기점으로 중앙아시아 알타이국가들이 독립하자 ‘유라시아 외교(1997)’와 그 실천방침인 ‘대(大) 실크로드 프로그램(Great Silk Road Program, 1998)’으로 이름을 바꾸어 등장했다. 그리고 중국이 미국과 함께 G2라는 명칭을 얻으며 급부상하면서 새로운 세계질서의 형성 움직임이 나타나자 2010년 동아시아공동체(東アジア共同體) 구상을 발표했다. 이 동아시아공동체 구상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지적처럼 대동아공영권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일본의 역사관과 대외정책은 명치(明治) 이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유지되고 있으며, 그 밑바탕에 나가통세(那珂通世, 1851∼1908), 백조고길(白鳥庫吉, 1865~1942) 등 일본의 동양사학을 만든 학자들의 역사관이 자리 잡고 있다. 나가통세는 동양사라는 말을 처음으로 만든 주인공이며 동아시아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한 인물로 『칭기스칸실록(成吉思汗實錄)』(東京, 大日本圖書株式會社, 1907)을 통해 칭기스칸의 몽골을 주목한 역사학자이다. 그의 논지를 이어 일본의 대륙침략이론(일본의 대륙진출에 대한 역사주권의 정당성)을 완성한 인물이 백조고길이다.20)

   일본은 명치유신(明治維新) 이래 세계열강과 접촉하면서 대륙침략의 타당성을 부여하는 역사이론의 중요성을 실감하고 있었다. 일본역사학계는 임나일본부의 확장연구를 통해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 및 만선사관(滿鮮史觀)을 만들었다. 그리고 고구려와 몽골, 타브가치(Tabgachi, 北魏)의 역사연구를 통해 일본은 알타이 민족의 정통 후예가 되었는데 당시 중세시대의 일본인인 원의경(源義經)이 몽골로 건너가 칭기스칸이 되었다는 믿음까지도 대유행했다.

   하여튼 이 결과 일본은 민족의 기원지를 동몽골까지 확대하고 백조고길의 주도 하에 동양사를 남북대립론(유목민족과 정착민족)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이 논리에 따라 알타이민족이나 그들의 역사가 미친 조선, 만주, 몽골, 중앙아시아, 티베트 등을 종래의 중국사에서 분리시켰고, 또 몽골이 역사적으로 지배한 지역은 일본의 연고권이 있게 되었다. 즉 이 논리로 인해 일본의 대륙진출은 동족의 자주권회복을 위한 역사적 사명으로 대두되었다. 1918년 8월부터 1922년 10월까지의 일본의 시베리아출병은 이 논리에 입각한 것인데 당시 최대 3개 사단(7만 명)이 파견되었고 4600명이 전사했다.

   일본의 북방연구사는 바로 일본의 대륙진출의 역사와 일치한다. 일본의 대륙 진출과정은 러일전쟁을 기점으로 크게 2기로 구분되는데, 이 구분은 그대로 북방사 연구 성과의 현실적용과도 일치한다.

   제 1기는 명치부터 1905년의 러일전쟁까지의 시기로 민간차원과 정부차원의 두 가지로 구분되어 실시되었다. 민간차원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개국진취(開國進取)로 대표되는 명치정신(明治情神)의 화신으로 간주되는 대곡광서(大谷光瑞, 1876~1948)이다. 그는 “불교문화권”이란 아시아적 가치를 부르짖으며 1902년부터 1911년까지 몽골 및 중앙아시아, 티베트 등에 탐험대를 파견시켜 유적 연구조사 및 유물의 수집에 주력했다.21)

   그가 파견한 탐험대 가운데 2차 탐험대는 1908년 6월 북경을 출발하여 울란바아타르를 거쳐 카라코롬, 오르홍하의 돌궐비문 등 유적을 방문한 뒤 그곳에서 서남으로 나가 알타이산맥을 넘어 신강에 들어갔다. 탐험대원은 당시 20세를 갓 넘은 야촌영삼랑(野村榮三郞)과 18세인 귤서초(橘瑞超)이다.


<그림 5> 제 2 차 大谷탐험대 루트




  정부차원의 접근은 러일전쟁의 불가피성을 감지한 일본 육군성을 중심으로 정보 수집 위주로 이루어졌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카라친(Kharachin)-우익기의 14대 자사크(Jasag)인 공상-노르보(Gungsang-Norbu, 貢桑諾爾布)와 함께 육정여자학당(毓正女子學堂)을 설립하여 일본어 교육과 체육을 담당한 하원조자(河原操子) 및 그의 후임인 고고학자 조거용장(鳥居龍藏)이다.22)

   제 2기는 1905년부터 1945년까지이다. 이 시기의 특징은 정부 주도하에 기관, 학술단체, 협회를 통해 체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1905년부터 1930년까지는 주로 만철(滿鐵)을 중심으로 내몽골 위주의 북방사연구가 이루어졌는데, 일본은 이 연구를 내몽골뿐만 아니라 서아시아와 내몽골을 연계시키는 고리로 활용했다. 조사연구의 대상은 토지습속, 일반법제, 조역, 정치ㆍ외교, 문화, 산업일반, 농림, 목축, 수산, 공업, 광업, 노동, 상업, 무역, 세관 및 관세, 화폐ㆍ금융, 제정ㆍ조세, 철도, 러시아 관계, 식민과 이민, 도시와 주택, 지도 등이다.

   1930년부터 1945년까지는 각종 기관이나 연구소, 협회를 내세워 본격적인 현지조사를 시행했는데, 조사 활동은 정치적으로 1932년 3월 1일 만주국(滿洲國)의 성립, 1937년 9월 1일 내몽골 몽골연합자치정부(蒙古聯合自治政府: 首都는 張家口)의 성립과 관계가 깊다. 또 연구 성과는 시베리아, 외몽골, 신강, 소비에트령 중앙아시아의 진출과 연계되어 활용되었다. 연구단체는 기관(北滿經濟調査所, 張家口經濟調査所), 대학(京都帝國大, 京城帝國大), 학회(東亞考古學會), 몽골선린협회(蒙古善隣協會)의 부속연구소인 몽골연구소(蒙古硏究所)와 서북연구소(西北硏究所) 등이다.23) 이들의 연구 성과는 종전 후 소비에트와 미국이 다량으로 몰수하였다.

   명치 시대의 역사학자들과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시대이념으로 아시아적인 가치에 바탕을 둔 알타이국가연합을 토대로 한 ‘대동아공영권’을 만들어 낸 것은 근본적으로 중국과 러시아의 일본압박 정책에 대한 방어 및 생존전략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역사에서 배웠다. 일본의 학계는 명치시대부터 알타이연합의 실패가 역사적으로 중국의 침공과 지배로 이어지며, 또 러시아나 영국 등의 진출이나 대립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직시하고 있었다.24) 일례로 1885년 4월 15일 영국 해군함대의 거문도 점령사건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졌던 영국과 러시아의 싸움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당시의 일본은 알고 있었고 우리는 알지 못했다.

   알타이문명권 국가를 중심으로 통일을 이루어 서구 및 러시아의 세력을 방비하고 중국 등 주변 국가를 다스리자는 대동아공영권은 오늘날 한국의 일부에서 주장하는 ‘알타이경제문화연합’과 일맥상통한 이론이다. 현재 일본이 제기한 ‘동아시아 공동체’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상해협력기구(SCO)’나 러시아의 ‘유라시아 경제공동체(EurAsEC)25)’에 대항하는 조직임이 분명하며, 상대 조직들이 더 이상 성장하여 대항불능에 빠지기 전에 내놓은 생존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알타이국가연대를 통한 상해협력기구의 무력화라는 일본의 속내를 들여다보고 있는 중화인민공화국은 이에 대해 일제가 제창했던 대동아공영권을 떠올리게 한다며 강한 거부감을 표시했다. 미국 역시 뉴욕타임스(2009.8.26)의 사설을 통해 세계의 패권을 미국과 중국이 나누어 갖는 G2 시대에 일본이 정치ㆍ경제적 자립을 유지하고 국익을 지키기 위해서 우애라는 새로운 가치에 바탕을 둔 ‘동아시아공동체’의 필요성을 제기했다는 것을 소개하면서, 이 미래의 동맹체에 미국이 제외되는 경우가 발생한다는 것은 어떤 논리로도 성립할 수 없으며, 또 상상할 수도 없다고 논평하고 있다.

   일본은 중화인민공화국과 마찬가지로 주변을 진출할 때 정치(역사) 및 경제적 관점을 모두 가진 전략적 접근을 행하고 있다. 실제 일본은 ‘실크로드학’이란 용어를 만들어 낼 만큼 자신들의 생존에 필요한 분야에 대해서는 전력을 기울인다. 이러한 인문학적 축적으로 인해 일본은 세계인들에게 로마나 이스탄불에서 시작된 실크로드의 종착점이 일본의 경도(京都)로 각인시키는데 성공했고, 이 논리는 일본과 중앙아시아의 정치ㆍ경제적 교류 확대로 이어졌다. 아마 21세기 일본의 미래는‘동아시아 공동체’의 실현 여하에 따라 정해질지 모른다.


                                (2) 제언

   국제관계나 교류에는 변하지 않는 가치와 변하는 가치가 있다. 변하지 않는 가치란 역사ㆍ문화적인 관계이며 변하는 가치란 정치ㆍ경제적 관계이다. 일본이나 중화인민공화국의 정계ㆍ경제계는 역사 및 정치학계에서 북방민족사를 자국사의 중심에 끌어들여 만든 역사관에 따라 대외정책을 만들고 또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신아시아외교’에서도 나타나듯이 우리가 중심이 된 역사ㆍ철학적 논리에 따라 움직이지 못하고 경제논리 하나로 움직이고 있다. 자원 확보의 경제적 논리로만 움직이는 우리의 외교는 몽골이나 중앙아시아 등 북방민족의 후예들로부터도 역사를 모르는 자들이란 노골적인 반발을 초래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추구하는 대외정책의 가치를 만들어 제시하지 못하면 우리는 머지않아 국가적인 위기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다.

   오늘날 세계는 미국 주도하에 성립된 세계질서인 시장근본주의(Market Fundamentalism)가 현대 민주주의의 이념을 대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대안 이론의 제시가 세계적인 과제로 대두되고 있다. 이러한 시대이념 변화의 징조는 “공공의 이익”을 강조하는 조지 소로스(George Soros)나 시장경제(Market Economy)에서 유래된 시장사회(Market Society)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의 사상에서도 감지되고 있다.26)  

   일본이‘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을 제기하면서 “일본은 미국이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주도하는 시장 원리주의(American-style free-market economics) 때문에 잃어버린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시킬 의무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우애(友愛, fraternity)다”라고27) 주장한 것도 바로 미국의 시대이념인 시장근본주의에 대한 문제점의 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입장은 중화인민공화국이나 러시아에서도 확고하게 나타난다.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를 만들기 위해서는 앞서도 지적했지만 민족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모두가 공감하는 역사의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도 일본이나 중화인민공화국처럼 우리의 역사에서 해답을 찾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출발은 우리의 문화 및 사상의 원형을 이루는 북방문화정체성(Northern Cultural Identity) 탐구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북방문화정체성은 북방문화원형이라는 말과도 같다. 이 문화원형의 본 형태를 간직하고 있는 분야가 바로 한국고대사이다. 한국고대사가 북방문화원형을 접근하는 열쇠가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면에서 인식의 확대를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바로 한국 고대사의 영역에 대한 인식과 사상에 대한 해석방법이다.

   먼저 영역적인 면에서 지금까지 한국고대사의 영역은 몽골 등 북방민족사의 영역으로 넘어간 적이 없다. 즉 북방민족의 주 무대인 유라시아 지역이 우리 역사에 중요한 요소로 인식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편견을 벗어버려야 할 때다. 한반도가 지리적으로 만주와 몽골을 거쳐 대륙으로 연결되어 있듯 우리의 역사도 유라시아와의 심층적이고 광범위한 연관성 속에서 전개되고 발전되어왔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다음 사상적인 방면에서 지금까지 한국고대사의 사상은 북방적 사고방식이 아닌 중원의 사상을 중심으로 해석되어 왔다는 점이다. 따라서 고조선, 고구려나 백제, 신라 등 고대 사상이 북방민족의 사상에서 기원한 것이 아니라 중원 사상의 영향을 받아 탄생하고 발전한 것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높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영역적 방면의 축소와 사상적 방면의 왜곡은 그간 한국사와 북방사의 연관을 단절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북방적 사고방식이 아닌 중원의 사상을 중심으로 우리 고대사의 해석에 이루어져 왔다는 점은 그 자체가 역사왜곡이다. 따라서 이 두 가지 문제점을 해결하는 것이 바로 한국사와 북방사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방안이 될 것이다.


  <사진 1> 보이르호수 주변의 람촐로 석인상: 코리족의 왕이라는 설화를 지니고 있다



   한국은 역사적으로 일본이나 중화인민공화국보다도 북방민족의 정통을 잇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 동몽골 할힌골솜(Халхын гол сум)에 코리(Khori, 貊)족의 고대 이동설화가 구전되고 있다는 것에서도 입증되고 있다.28) 실제 동몽골29)에서 700년의 역사를 지닌 고구려와 이후의 몽골족이 어떠한 형태로던지 관계를 지닌다는 사실은 문헌이나 고고학적으로 의심할 바 없다.

   최근 내몽골의 오윤-달라이(Оюун-Далай, 烏云達賚)는 에벤키족의 기원이 옥저(沃沮)이며 옥저는 발해(渤海)와 같은 계열의 민족이고 또 몽골부족의 형성기에 옹기라트(Onggirad)계열의 씨족이나 메르키트(Merkid) 부족의 원류가 되었다는 주장을 전개하고 있다.30) 『몽골비사』의 전문가이기도 한 오윤-달라이의 견해는 북방아시아의 부족관계들의 연계성이나 변천을 고찰하는데 적지 않은 시사점을 준다고 할 수 있다.31)


  <사진 2> 발해성일 가능성이 높은 어글럭친-헤렘 유적(하늘에서 본 전경)




   실제 2004년부터 2007년까지 고대 메르키트 부족의 중심지였던 셀렝게하 주변에 위치한 칭톨고이(Чин-Толгой) 성터를 발굴한 결과 이 성터가 거란 시대 발해이주민들의 거주지라고 간주될 수 있는 유물들이 다수 출토된 바 있다.32) 또 오늘날 몽골국 동부지역의 돌 성벽인 어글럭친-헤렘(θглөгчийн хэрэм)도 그 축성방법으로 미루어 고구려의 후예인 발해인들이 쌓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상의 사례들은 한국고대사의 영역이 북방민족들의 무대까지 확장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 한국과 북방민족의 접촉은 고대와 고려시대에 한하지 않고 조선시대는 물론 근현대까지 밀접히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 근래 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통해 구체적으로 입증되고 있다.33)

   한국고대사가 영역적으로 동몽골과 관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사상적으로도 그들과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과 같다. 사실 한국사와 북방사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이 분야라 할 수 있다. 필자는 북방민족사를 연구하면서 우리를 포함한 역대의 북방민족들이 역사적으로 매우 독특한 이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고 있다. 즉 사상적으로 만물은 모두 존중해야 한다는 자연법적 인식체계(샤마니즘), 정치적으로 직접참여주의를 통한 권력분립(제천행사), 경제적으로 교역중시의 철학이 그것이다.34)

    이러한 북방문화원형을 이루는 북방 DNA의 원천은 우리민족에게 계승된‘홍익인간의 꿈’일 것이다. 이러한 사상적 토대 위에서 역사를 바라볼 경우 고조선 및 흉노 이래 역대 북방제국들의 길도 북방 DNA에 대한 검증과 실현과 좌절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각에서 우리의 역사를 시대적으로 바라볼 경우 우리가 문화원형에서 무엇을 잃었고 또 무엇이 변질되었는가를 명료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고대사에 깃든 이 북방문화원형은 역사 및 철학사상계의 연구여하에 따라 21세기 인류의 공존이념으로 제시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 이념은 역사적으로 칭기스칸의 몽골을 통해 팍스-몽골리카라는 세계통합이념을 만들어낸 검증된 과거가 있기 때문이다. 또 최근에는 이 사상에 바탕을 둔 백남준(白南準, 1932~2006)의‘샤만의 거울(비디오아트)’이 현대 예술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기 때문이다.35)


   <사진 3> 북방문화원형을 상징하는 백남준의 예술작품 몽골게르(1994)




   한국사에 있어 북방사의 가치는 연구영역과 시각의 확대이다. 또 그에 따라 국가정체성 확립 및 그것을 바탕으로 한 비전정립을 세울 수 있다. 만약 북방문화원형에 바탕을 둔 역사관이 정립되고 그것을 바탕으로 한 대외정책이 추진될 경우 한국과 몽골, 중앙아시아, 헝가리, 핀란드 등 유라시아-알타이문화권 국가들의 관계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공동가치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차원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맺는 말

   이상 한국사와 북방사에 대한 연구의 현황과 문제점, 그리고 주변국의 북방사 인식 및 현실적용(대외정책) 등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제언을 통해 한국사와 북방사는 고대나 중세 분야에서 서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종전의 분리연구가 아닌 통합연구가 필요하며 이에 따른 연구영역 및 시각의 확대가 요구된다는 연구방향도 제시했다. 제언에서 언급된 것을 보다 큰 시각에서 바라보며 결론을 지으면 다음과 같다.

   먼저 우리는 주변정세 상 북방이나 주변에 대한 나름대로의 역사적 관점을 분명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역사의 비전은 그 나라의 미래를 좌우한다.

  우리의 현실을 냉철히 바라보면, 영토가 작고 자원도 적으며 인구가 많아 세계를 상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음이 나타난다. 또 그 위에 남북한이 분단 상태이다. 이는 결국 해외진출과 교역의 확보만이 우리의 생명선으로서, 세계를 보는 눈이 매우 필요한 민족임을 뜻한다. 이념이나 영토적으로 고립된 나라는 멸망하는 법이다. 지금까지의 한국사 연구는 영역이나 사상에서 북방사와 고립되어 전개되었다. 따라서 한국사를 통해 세계를 볼 수 없었고, 북방민족들이 제시했던 이념도 공유할 수 없었다. 이러한 결과 우리민족의 정체성이나 역사교육, 대외정책도 뿌리 없이 흔들렸다. 이러한 현상이 지속된다면 우리나라는 머지않아 국가적인 위기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다.

   다음 우리의 역사관은 우리의 역사에서 정립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북방민족사를 보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문명과 세력이 교차하는 지정학적 위치에 있는 한국은 과거에 집착하고 이웃과 반목할수록 국가의 기반이 허물어진다. 이는 100년 전에도 그랬고, 100년 후에도 그럴 것이다. 한국은 역사해석에서 과거보다 미래를 바라보고, 단점보다 장점을 챙기는 방식을 취할 필요가 있다. 또 연구자체도 제 3자적인 입장의 단순한 지식습득이 아니라 21세기 시대이념의 큰 틀을 제시한다는 이해 당사자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진행해야 한다.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의 『서애집(西厓集)』에 “옛말에 ‘남에게 핍박을 받는 사람은 그 지혜가 깊다’고 한 것은 참으로 꾀가 깊어서가 아니라 형세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36) 이 말은 외국의 학문이론과 사상과 종속된 한국 역사학계에서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학문이론이나 시대이념의 식민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리 민족의 이념적 본원을 이루고 또 홍익인간이나 팍스-몽골리카 등의 시대이념을 만들어낸 한국 고대사 및 그 연속선인 북방민족의 역사와 이념을 철저히 연구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바로 한국사에 있어서의 북방사의 가치이다.


******************************************************************************

<국문요약>

세계 각지에 정체성(identity)이 서로 다른 문명권이 존재하는 이상 우리민족을 지탱하는 철학과 비전은 우리가 속한 문화의 원류를 인식하고 그것을 토대로 만들어져야 한다. 그리고 그 출발은 우리의 문화 및 사상의 원형을 이루는 북방문화정체성(Northern Cultural Identity) 탐구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북방문화정체성은 국가정체성 확립 및 역사적 비전정립의 기초이다. 이 문화원형의 본 형태를 간직하고 있는 분야가 바로 한국고대사이다. 한국고대사가 북방문화원형에 접근하는 열쇠가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면 즉 영역과 사상에 대한 인식의 확대를 할 필요가 있다. 한국사에 있어 북방사의 가치는 연구영역과 시각의 확대이다.


A Korean History and Northern History

     Park, Won-Kil(President, the Korean Association for Mongolian Studies)


There is various types of civilization that identity of culture different from each other in human history. we duly recognize the fact that the origin of our civilization originated in Northern Asia. Therefore we make to build historical vision and national identity of Korea based upon Northern Cultural Identity. And It is must be started investigation of Northern Cultural Identity which keeping cultural and thought heritage in the original form. Northern Cultural Identity is the foundation of establishing historical vision and national identity of Korea. The field of the ancient history of Korea retains original form of Korean philosophy and Culture. The ancient history of Korea hold the key to the approach and solution of the Northern Cultural Identity, it is necessary to enlarge the korea's historical territory and thought. The value of the Northern History for Korean History make to enlarge research area and viewpoint.



---------------------------------------------------------------------

1)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내몽골자치구 올랑하드(한자명: 赤峰) 일대에서는 흉노(Hun-na)나 고조선의 모태문화로 간주되는 초원의 문화 즉 올랑하드(Ulagan Khada>улаан хад:붉은 바위)문화 유적이 대량으로 발굴되고 있다. 이로 인해 중국고고학계에서는 이 문화유적을 홍산문화(紅山文化)라 부르고 이들이 이룩한 문명을 요하문명이라 지칭하면서 자국의 역사에 편입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문명의 주인공이 초원의 사람이 분명한 이상 요하문명도 북방언어(알타이어)를 사용해 시라무렌(Shira Müren:누런 강)문명이라 부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시라무렌 문명은 근래 발굴되고 있는 문명으로 옥기(玉器, Khas>хас)의 대량출토가 특징 중의 하나이다. 옥기는 몽골고원 차강아고이(Chagan Agui) 구석기 유적 등 북방문화권의 유적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고 있다. 이로 인해 중화인민공화국 학계에서는 고대 중원 사람이 최초로 접한 옥기는 서역이 아니라 시라무렌 일대의 옥기라는 학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웅녀의 초상도 발견된 이 일대의 문화를 체계적으로 소개한 학자가 우실하이다. 참고로 이 일대에서 발굴되는 유적의 연대나 유물의 현황에 대해 그의 저서(『동북공정 너머 요하문명론』 서울, 2007)에 소개된 것을 요약해 도표로 나타내 보면 다음과 같다.  


               문화별 시대구분                문화 특징

소하서문화(小河西文化) ㆍ동북아 최고(最古)의 신석기문화 유적으로 입증
B.C. 7000 - B.C. 6500     ㆍ동북아 최고(最古)의 흙으로 만든
                                             얼굴상(陶塑人面像)의 발견

흥륭와문화(興隆洼文化)  ㆍ세계 최고(最古)의 옥 발견
B.C. 6200 - B.C. 5200      ㆍ중화원고제일촌(中華遠古第一村),
                                             화하제일촌(華夏第一村)의 발굴
                                     ㆍ최초의 용 형상물 저수룡(猪首龍)의 발견(2003년)
                                     ㆍ동북아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빗살무늬 토기 발견

사해문화(查海文化)         ㆍ세계제일옥(世界第一玉)의 발굴(1982)
B.C. 5600 - B.C. 5000      ㆍ중화제일용(中華第一龍)의 발굴(1994)
                                     ㆍ요하제일촌(遼河第一村)의 발굴(1982)

부하문화(富河文化)         ㆍ가장 오래된 복골(卜骨)의 발견
B.C.5200 - B.C. 5000

조보구문화(趙寶溝文化)   ㆍ중화제일봉(中華第一鳳)의 발굴
B.C. 5000 - B.C. 4400       ㆍ요서지역 최초의 채도(彩陶) 발굴

소하연문화(小河沿文化)    ㆍ갑골문의 전신 도부문자(陶符文字)의  발견
B.C. 3000 - B.C. 2000

홍산문화(紅山文化)       ㆍ우하량(牛河梁)유적(B.C. 3500 - B.C. 3000)의 발견
B.C. 4500 - B.C. 3000     ㆍ우하량 제2지점 제단(祭壇) 유적지
                                    ㆍ우하량 제2지점 여신묘(女神廟) 유적지
                                    ㆍ지금도 새롭게 발견되고 있는 거대 적석총 유적지


2) 선생의 논저 중 이러한 사관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淸代韓中朝貢關係綜考」『震檀學報』29ㆍ30, 1966; 『韓中關係史硏究』서울, 일조각, 1970; 「東亞古代文化의 中心과 周邊에 對한 試論」『東洋史學硏究』8ㆍ9, 1975 등이다.


3) 필자는 대학원 시절 전해종 선생님에게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는데 당시 몽골 등 북방에 대한 관심이 매우 컸던 것이 인상적이었으며, 또 한국사학계에서 북방민족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누누이 강조한 점이 지금도 기억에 새롭다.


4) 신문이나 잡지의 특집은 근래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학문적으로 주목할 만한 것을 소개하면 윤명철의 『바이칼 기행 -시베리아 샤머니즘의 원류를 찾아서』(신동아, 2001) ; 김병모의 『고고학 여행 - 민족의 뿌리를 찾아서』(신동아, 2003-2004) ; 서길수의 『아시아의 진주 알타이를 찾아서』(프레시안, 2005) ; 주채혁, 이형구 등의 『코리안 루트를 찾아서』(경향신문, 2007-2008) ; 김호동의 『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주간조선, 2007) ; 강인욱의 『북방 역사 기행』(2008, 국제신문) 등이 있다.


5) 몽골사 전공학자인 주채혁 교수의 논지는『순록치기가 본 조선ㆍ고구려ㆍ몽골』(서울, 혜안. 2007) 및 『순록유목제국론- 고조선ㆍ고구려ㆍ몽골제국기원론』(서울, 백산자료원, 2008)에 집약되어 있는데, 그는 “몽(蒙)고올리와 맥(貊)고올리”, “조선(朝鮮)ㆍ선비(鮮卑)의 선(鮮)과 순록유목민”이라는 문화코드를 통해 한민족의 기원에 대해 나름대로의 논리를 정립하고 있다. 경제학자 출신으로 역사를 다룬 김운회 교수의 논지는 『대쥬신을 찾아서(1.2)』(서울, 해냄, 2006) 및 『새로 쓰는 한일 고대사 - 부여사의 비밀을 찾아서』(서울, 동아일보사, 2010)에 집약되어 있다.


6) 이들의 논지는 김호동, 『몽골제국과 고려』(서울대출판부, 2007); 박원길, ������유라시아 대륙에 피어났던 야망의 바람 ―칭기스칸의 꿈과 길������(서울, 민속원, 2003) 및 ������배반의 땅, 서약의 호수 ―21세기 한국에 몽골은 무엇인가������(서울, 민속원, 2008)에 잘 나타난다. 참고로 주채혁 교수도 「몽골ㆍ고려사 연구의 재검토―몽골ㆍ고려사의 성격문제」(『國史館論叢』8, 1989)등의 논문을 통해 몽골과 고려에 대한 종래의 사관을 바꿀 필요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데, 그의 이러한 사관을 반영한 것이 보르지기다이 에르데니 바타르, 『팍스 몽골리카와 고려』(서울, 혜안, 2009)와 윤은숙, 『몽골제국의 만주 지배사 ― 옷치긴 왕가의 만주 경영과 이성계의 조선 건국 』(서울, 소나무, 2010)이다.


7) 서정록은 금동대향로의 사상적 배경이 기존의 도교나 불교적 세계관이 아닌 북방 샤마니즘에 기원하고 있다는 것을 각종 논거로 입증하고 있다. 그의 주장은 종래 불교국가로 알려진 거란(契丹, Kitay, A.D.907∼1125)에 대해 도전정랑(島田正郞)이 제도와 문물을 정밀히 분석한 뒤 거란의 국교는 불교가 아닌 샤마니즘이라고 결론짓고 있는 것(島田正郞, 「敵烈麻都司と禮部 ― 巫の技能と地位」 ������遼朝官制の硏究������ 東京, 1979, p.321)과도 연결된다는 점에서 주목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유사한 시도로는 북방 샤마니즘 사유체계의 특징인 “3수 분화의 세계관”으로 홍산문화의 실체에 접근하려는 우실하의 「동북아시아 모태문화와 ‘3수 분화의 세계관’」(『문화와 사람』1, 2000) 및 「몽골문화와 '3수 분화의 세계관(II)’」(『몽골학』27, 2009)이 있다. 그와 유사한 논지가 철학분야에 속하는 김상일의 『뇌의 충돌과 문명의 충돌』(서울, 지식산업사, 2007)이나 김성환의 「圖像으로 보는 한국 고대 仙敎의 이미지 ― “빛”의 象徵을 중심으로」(『第1次 仙&道 國際學術大會 발표집(II)』서울, 2009)에도 보인다. 이외 정형진의 연구 즉 『고깔모자를 쓴 단군』(서울, 백산자료원, 2003), 『실크로드를 달려온 신라왕족』(서울, 일빛, 2005), 『천년왕국 수시아나에서 온 환웅』(서울, 일빛, 2007) 등도 새로운 시각을 담고 있다. 예술방면으로는 김병모의 『금관의 비밀』(서울, 푸른 역사, 1998)과 백승정ㆍ박원길의 「한국과 몽골의 전통문양디자인 비교 - 몽골의 연속문양(Алхан хээ)과 길상문양(θлзий хээ)을 중심으로」(『몽골학』28, 2010) 등이 있다.


8) 이인호,「동아시아공동체와 역사의식」『미래전략연구원 미래전략포럼 주제발표문(2010. 9. 5)』. 전문은 미래전략연구원 홈페이지(www.kifs.org) 참조.


9) 박원길,「동몽골 프로젝트의 의의와 전망(The Significance and Prospect of Eastern Mongolia Project)」『한ㆍ몽 역사문화공동체는 가능한가』한국몽골학회 주최 한ㆍ몽 수교 20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 2010, 3.26∼27. 아울러 이 정책들의 출발점이 되는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 및 그 내용, 성과,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는 하용출(편), 『북방정책: 기원, 전개, 영향』서울대학교출판부, 2003을 참조.


10) 정정숙,「동북아문화공동체의 의의와 전망 - 문화공동체 시각에서 본 동북아시대 구상」 2006.8.16. 동북아시대위원회 발표문, p.1


11) 동북아시대위원회,『참여정부의 동북아시대 구상』서울, 2006, p.18. 이 구절에는 각주가“동북아시대위원회가 기왕에 발간한 설명서에는 기능적 차원을 감안하여‘ASEAN국가들도 포함한다’(동북아시대위원회,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시대 구상』2005)고 나와 있는데, 차제에 이 점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념적으로 엄격히 말하자면 동남아국가들은 동북아 관념에 포함되지 않는다”처럼 붙어 있는데 이는 무언가의 이유로 아세안이 몽골로 교체되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12) 이는 제1회 정책기획위원회 회의자료(2003.6.19) 중 “동북아시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필요”항목에서“동북아의 범위에 한ㆍ중ㆍ일, 북한, 러시아, 몽골을 포함”라고 한데에서 잘 입증된다. 실제 몽골이라는 표현은 회의자료에서 이 대목이 유일하다.


13) 기존 외교통상부나 한국국제협력단(KOICA)을 비롯한 각종 정부기관의 대몽골지원책은 기관별로 나름대로의 원칙을 가지고 시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일례로 KOICA의 대몽골지원책은 한국어교육관련 단원 파견, 시설 설치 지원, 의료지원, 황사방지 사업 및 단원 파견, 고비지역 관정사업(우물파기), IT분야 단원 파견, 자동차 정비 분야 단원 파견 등등이다. 그러나 큰 틀에서 보면 정부의 장기비전에 기반을 두고 각 부처가 협력하여 시행되는 경우가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14) 제3그룹 중 현재 유라시아과에 소속된 중앙아시아 5개국은 지리적으로 서 투르키스탄에 속하는 국가들이다. 원래‘돌궐인의 땅’이라는 투르키스탄(Turkestan, Türkistan)은 중앙아시아 5개국(서 투르키스탄), 신강 위구르 자치구(동 투르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북부(아프간 투르키스탄)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의 군대가 평화유지군으로 파견되어 있는 아프가니스탄의 북부지역 즉 카불-헤라트를 잇는 지역은 민족적으로 차가타이 몽골(티무르제국)의 후예 및 몽골 하자라 부족의 거주 지역이다. 참고로 이 지역의 역사에 대해서는 小松久男(編),『中央ユーラシア史』東京, 山川出版社, 2000[이평래 옮김,『중앙유라시아의 역사』서울, 소나무, 2005]를 참조.


15) 양승태 교수는 『대한민국이란 무엇인가』(서울,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10)란 저서를 통해 “공동의 가치 상실ㆍ지성인 침묵이 국가정체성 위기 불렀다”고 주장하면서 한국이 지향할 공동체적 삶은 역사ㆍ정치철학을 통해 모색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즉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한 민족은 서양문명의 정신적 충복(忠僕) 지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이러한 시각은 「이 나라에 국가전략이 있나」(조선일보, 2010.4.2, 박세일 칼럼)라는 박세일 교수의 지적과도 일치한다. 그는 지금 삼성과 현대 등 국가공동체 개별 구성원들의 개별전략은 있는데 도대체 국가의 종합전략은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하면서, “국가전략이 성공하지 못하는 나라에, 아무리 각자도생한다고 해도 개별전략이 결코 성공할 수 없으며, 국가전략을 만들기 위해서는 국혼(國魂)부터 정립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16) 이에 대해서는 박원길, 「북방공정의 논리와 전개과정 연구」『고구려연구』29, 2007 ; 「북방공정의 논리와 전개과정 연구 - 원나라는 몽골의 지배사인가, 중국사인가」『동북공정과 한국학계의 대응논리』서울, 여유당, 2008 ; 「중국의 몽골역사 해석과 인식」『10∼18세기 북방민족과 정복왕조 연구』서울, 동북아역사재단, 2009을 참조.


17) 영토와 민족문제를 둘러싼 학자들의 이론 정립논쟁과정에 대해서는 우실하, 「통일적다민족국가론의 등장과 적용」『동북공정과 한국학계의 대응논리』서울, 여유당, 2008을 참조.


18) 변강사지총서(邊疆史地叢書)를 보완해 주는 총서류에는 유라시아총서(歐亞叢書), 중주고적출판사(中州古籍出版社) 주관의 중국변강통사총서(中國邊疆通史叢書), 흑룡강교육출판사(黑龍江敎育出版社) 주관의  변강사지총서(邊疆史地叢書), 길림교육출판사(吉林敎育出版社) 주관의 소수민족문고(少數民族文库), 난주대학출판사(蘭州大學出版社) 주관의 유라시아역사문화문고(歐亞歷史文化文庫) 등이 있다. 중국변강사지연구를 보완해 주는 학술지로는 1991년에 창간된 『서역연구(西域硏究)』, 1999년에 창간된 『유라시아학간(歐亞學刊, Eurasian Studies)』, 2001년에 창간된 『북방논총(北方論叢)』이 있다. 몽골에 관련된 전문학술지는 내몽골대학 및 내몽골사회과학원에서 발간하는 『내몽골사회과학(內蒙古社會科學)』, 『내몽골대학학보(內蒙古大學學報)』, 『몽골사연구(蒙古史硏究)』, 남경대학(南京大&